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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텔라반들에 의해 피납되고 피살된 사건이 터진후 두번째로 우리 교회에서 설교한 말씀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는 선교”(Rethinking Mission) 사도행전 26:24-29 08/05/07
저는 1주일 내내 마음이 편하지를 못했습니다. 배형규 목사에 이어 심성민씨가 또 피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21명의 청년들이 공포에 굶주림에 질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마음이 무거운 것은 누리꾼들이라고도 하고 악풀들이라고도 하고 기독교에 대한 안티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비난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가슴 아프고 마음이 무거운 것은 기독교가 이렇게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를 다 수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불신 받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명하고 훌륭하고 위대하신 큰 교회 목사님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마음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이런 일들은 한국 교회 전체가 하나의 시련을 맞게 되고 큰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전체 교회와 박은조 목사님에게 비난을 퍼붓고 이번에 인질로 잡힌 봉사단원들이 마치 광신자들인 것처럼, 혹은 분당 샘물교회와 박은조 담임 목사가 분별력 없는 선교 지상 주의자인 것처럼 매도하고 있어서, 가슴이 더 아픕니다.
이 사건을 두고, 평소에 기독교의 선교 방식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거 보라고! 그럴 줄 알았지. 왜 그러냐구! 그냥, 자기들이 믿는 신을 믿고 살도록 내버려 두지, 왜 꼭 예수만 믿어야 되냐구!
그 사람들이야 믿든지 말든지, 영생을 얻든지 말든지, 먹든지 굶든지, 제발 그냥 좀 두라구! 제발 니네들이나 잘 하라구! 헛된 열심으로 고집부리고 가더니, 이게 뭐냐구!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냐구! 이번 기회에 제발 교회들이 정신을 차리라구. 선교일랑 이제 접어 두고, 제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하라구!”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도 이 불만에 공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가 행하는 선교 활동 중에는 비판 받아 마땅한 것들이 있습니다.
1) 선교에 열중한다는 사람들 중에 발견되는 잘못된 공통적인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가 하는 선교만 제일 중요하다고 믿고 행동하며 강요합니다.
둘째, 선교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장담을 합니다.
셋째,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선교를 도울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자신의 선교를 돕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비난합니다.
다섯째, 선교를 하고 있는 한, 자신은 가장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정을 살피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오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가장 배려가 깊고 조심성이 많고 겸손해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매우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선교가 자주 교회 분란의 원인이 됩니다. 선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분별 없고 극단적인 행동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선교’라는 단어만 들어도 인상이 찌그러지고 소름이 돋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같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렇게 보인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이상하게 보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선교를 위해 산다”고 혹은 “선교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고 말합니다만, 실은 선교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아예 선교를 빙자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장애인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순진한 교회로부터 16억이나 되는 돈을 챙긴 악덕 사기꾼이 구속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니 선교라는 이름아래 얼마나 부정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년 말 연시에 홍수를 이루던 장애인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도움을 호소하던 일들이 지금은 시도 때도 없이 공갈과 협박을 담은 공문이 날라 옵니다.
3) 너무 선교라는 이름을 남발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도원도 세계선교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사건이 북한선교 조 아무개 목사 아닙니까?
가짜 선교회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은 거의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목사인 저도 분별을 못할 뿐 아니라 혼란스러움을 정리를 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 문제의 핵심이 된 분당 샘물교회와 담임목사인 박은조 목사님은 아주 모범적인 교회로 주목 받아왔고, 목사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존경받아온, 미래의 한국 교회 지도자감으로 촉망받아온 분입니다.
박 목사님은 서울 논현동에 있는 영동교회에서 17년 동안 목회하면서, 교회가 지나치게 커지지 않게 하려고 2년 혹은 3년 간격으로 교회를 분가시켰고, 부목사를 따라 나가는 교인들이 많지 않자, 1998년에는 모체 교회인 영동교회를 다른 목회자에게 맡기고, 자신이 분당으로 나와 개척했습니다. 이 교회는 또한 장애인 사역으로 유명하며, 기독교 대안 학교(alternative schools)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한 일들이 많은 교회이며, 또한 그런 목사님입니다.
며칠 전,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차성민이라는 분이 인질로 잡혀있는 누나에 대해 쓴 편지를 읽고 마음이 아렸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나는 스무살 때부터 10여년간 국내외에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세계 곳곳의 오지만을 찾아다녔습니다. 누나를 아프간으로 이끈 것은 힘든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지금도 누군가가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한결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아프간으로 떠나기 전 누나는 환하게 웃어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픈 아이들에게 파스 하나, 먹을 음식 하나라도 더 건넬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즐거워요’라고요. 저는 잘 다녀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자면, 현재 32세인 차혜진씨는 선교지상주의적인 열심으로 이슬람들을 개종시키러 간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돕기 위해 갔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 ‘왜 오지만을 찾아 다녔느냐?’고 힐책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답답함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비난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의 헌신적인 행동 앞에서 자신의 이기심이 고발 당하는 것을 피할 양으로 핏대를 올려 비난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모두 다 “내 앞 가름이나 잘 하자”고 생각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만일, 다른 나라에 가서 봉사하려는 사람들이 안전한 곳만 찾아간다면, 위험한 곳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미신과 잘못된 신앙으로 인해 신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의 종교가 그들을 구원할거야’라고 말하면서 외면하고 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자신의 안전만을 꾀하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본다면, 과연 잘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영등포에서 목회 할 때 IMF가 터지고 노숙자가 100만 명이 넘게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우리 교회에서 노숙자 쉼터와 숙식을 제공하려고 준비를 다하고 서울 특별시로부터 특별 예산 까지 구청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파트 주민들이 난리가 났습니다.부녀회원들이 몰려들어 데모하고 구청을 좋아가고 시청과 복지부에 진정서를 보내고 제가 몇차례 면담을 했습니다. 제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제는 교회가 이웃을 모르고 자기들 뱃속만 채운다고 비난하다가 이제 교회가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니까 데모라니 이게 웬 말이냐? 그래서 쫒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은 이래도 비난하고 저래도 비난하고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교회가 선교를 중단 해야 겠습니까?
한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던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님과 언더우드 목사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분들의 희생과 봉사에 큰 덕을 입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한국의 개화와 개명이 그분들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운동에 큰 덕을 입었습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두 분의 선교사께서 1885년 4월5일 한국에 왔을 때, 상황이 어땠습니까? 지금의 아프가니스탄보다 덜 위험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언더우드 목사님이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드린 기도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청정하고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아 있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모르고 묶여 있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를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장옷을 쓰고 다니거나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하게 될 일이 어떤 것인지, 그 일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는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에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을 날이 있을 것을 믿을 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저의 믿음이 앞날의 조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의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은 예배를 드릴 예배당도 없고 가르칠 장소,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박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이번 사건을 두고, “그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청하지 않는데 왜 굳이 찾아가 돕겠다고 했느냐?”고 책망하시는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님에게도 그렇게 묻고 따지시겠습니까? 이번 사건을 두고, “자신들의 종교를 믿고 살아가도록 그냥 두지, 왜 굳이 기독교 복음을 전해야 했느냐?”고 책망하시려는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서구 기독교회가 120년 전에 우리 나라를 외면했더라면,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이번 사건을 두고, “왜 굳이 그렇게 위험한 곳을 찾아 갔느냐?”고 책망하시는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감수했던 위험은 쓸 데 없는 일이었습니까?
1893년, 당시 에모리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윤치호 선생은 어려운 중에서도 장학금과 강연료를 모아 200달러를 만들어 미국 감리교회 본부에 전하면서 한국에 선교해 달라고 청했는데, 과연 윤치호 선생은 분별 없는 선교지상주의자입니까, 선각자였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앞길을 찾아 취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가상한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저는 20년 넘게 대학에서 교수들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쳐 보아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급속하게 개인주의, 이기주의, 현세주의, 실용주의, 쾌락주의에 빠져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자유’, ‘정의’, ‘희생’ 같은 것들이 전혀 관심사가 아닙니다. 적어도 저의 세대는 개인적인 관심사에 몰두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습니다. ‘자유’나 ‘정의’ 같은 말을 들으면 가슴이 달아 올랐습니다. 때가 되면 내 인생을 큰 가치를 위해 던지겠다는 결의를 품고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과거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큰 가치를 위해 분투하는 젊은이들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런 실정을 알기에, 저는 아직도 이런 귀한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방학이 되어 시골 고향집에 내려갔는데 아버지께서 이웃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부흥강사가 미국 선교사이신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교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검정카드. 빨강카드. 하양카드 세카드를 가지고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이 색깔은 무슨 색이지요? 검정예요. 이것은요 빨강색요, 이것은요 하양색 잘 했어요. 그다음 이 검정색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우리들의 마음에요. 그리고 이 빨강색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밖히시고 이마에 가시로 만든 관에 찔리시어 흘리시는 피예요. 그리고 이 하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보혈로 깨끗해진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렇게 깨끗하게 되어 집니다.
그리고 그분이 울면서 간증을 하시는데 그분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 이였습니다.
전투 중에 폭탄이 떨어져 완전히 죽었습니다. 헬리콥터로 후송을 하고 한국에서 고칠 수가 없어 일본으로 후송하는데 그때 잠깐 정신이 들었답니다. 간호사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지금 당신은 일본으로 비행기로 가는 중인데 지금 한국을 막 벗어나고 있다고 말하니까 이 병사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한번만 살려 주세요 그러면 저는 한국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전쟁으로 가난과 질병에 찌들고 고아와 과부들의 울부짖음과 우상으로 가득한 이곳에 복음들고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는 다시 기절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신학교를 가고 선교사 훈련을 받아 다시 한국에 와서 충청도지역을 맡은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선교사님의 절규입니다. 담임목사님에게 뭐라고 하니까 다리가 쭉 빠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의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족이 쭉 빠지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놀라고 있는데 웃통을 벗어제치는데 왼 팔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와이셔스를 벗어서 이곳저곳 살점이 움푹 움푹패인 것을 보여주면서 울먹이면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병신이 나의 고향, 가족 친척 다 버리고 이곳에 와서 복음을 왜 전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만이 이 민족이 살길입니다. 그리고 이 병신이 이렇게 복음을 외치는 데 여러분은 왜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그때 저는 어린나이지만 나도 모르게 나도 목사가 되겠습니다. 하면서 얼마나 울며 기도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선교를 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이 전해준 에피소드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문에 아무개 하고 크게 문패를 답니다. 어느 집에 가니까 크게 개 조심 하고 써 있더 랍니다. 그래서 가서 개 조심 씨 계십니까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설사가 나서 화장실을 잘 못 찾아 김칫독에다가 실례도 하기도 했답니다. 여러분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가슴아프지 않습니까?
여러분! 저는, 제가 오늘날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 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라고 믿습니다. 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이 저에게는 가장 큰 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그 모든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 제가 지금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부족한 부분은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더라면, 저의 생애는 심하게 오도되었을 것이고, 허망하게 허비되었을 것이며, 악하게 오용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 자녀들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은 전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 조건 없이 그분들과 함께 지내면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섬기는 것밖에 없음을 압니다.
우리가 하려는 선교는 이런 것입니다. 왜 선교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셔서 이웃을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웃을 향해 나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선물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손을 뻗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아갈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이렇게 이끌어 갑니다. 우리는 단지 그 이끄심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선교 즉 영어로 mission이라는 말은 ‘보내다’를 뜻하는 라틴말에서 왔습니다. ‘나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나가는 것’ 혹은 ‘다른 사람에게로 가도록 보내는 것’이 선교입니다. 왜 나갑니까? 왜 보냅니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갇혀있지 않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고 다른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행동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도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움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에게 약을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의 머리를 깎아 주는 것은 분명히 좋은 도움입니다. 하지만 선교단이 떠나고 나면 그들은 다시 배고파질 것이고, 또 다른 병으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주는 도움은 단 며칠 혹은 몇 주일, 길어야 몇 달 동안 효과가 있을 뿐입니다.
많은 돈을 쓰면서 봉사 활동을 나가는 이유는 그렇게 잠시 후면 잊혀질 도움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물질적인 도움을 매개로 하여 한 영혼과 한 영혼이 만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갑니다. 눈빛과 눈빛의 만남을 통해,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실한 관심을 받고, 그것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간직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갑니다. 그 작은 도움을 매개로 하여 마음과 마음, 정신과 정신, 영혼과 영혼이 마주치는 사건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아가면서 텅 비어버린 한 어린아이의 동공에 생명을 넣어줄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 그들이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가 얼마나 커지느냐가 관심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지느냐가 관심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느냐에 우리의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빛을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고 있는데, 그것이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돕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본문에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죄수가 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행 26:29)라고 증언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헬렌 켈러같은 사람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신체적인 장애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살더라도, 정신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려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스스로를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 받은 심리적인 상처 때문이든, 성장하는 과정에서 방치되어 그렇게 되었든, 정신적인 혹은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자신의 삶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손을 뻗치는 것이 선교입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자기만 아는 사람들 혹은 자기의 가족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사람들보다는 낫습니다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다움’을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아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가족에 대해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자기 자신 안에만 혹은 자신의 가족 안에만 갇혀 버린다면, 문제가 됩니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죄입니다. ‘이기심’은 죄 중에서도 가장 뿌리 깊은 죄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극진히 아끼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냉정하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가족을 잘 돌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이렇게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손을 뻗쳐 사랑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것이 모두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며, 모두에게 가장 행복한 삶의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자기 집착적인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자기’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의 오염된 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순도 100%의 사랑에 의해 정화됩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우리는 새로 지어집니다. 비로소 참된 사랑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사랑을 받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고, 우리 가족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집착도, 아집도 아닌, 참다운 사랑으로 자신과 가족을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의 눈을 이웃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손을 뻗쳐 도움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관심이요 목적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선교입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선교는 옵션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수긍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 고백이 진실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생애 동안 가장 잘 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도운 분들을 가장 큰 은인으로 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과 사귀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삶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분 안에서 참된 사랑을 알아,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가족을 사랑하고, 나아가 이웃에게 그 사랑을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이 이웃을 향해 손을 뻗칠 수 있을만큼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나에게 가장 복된 선물을 이웃에게 소개할 수 있는 데까지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강요하지도 않고, 협박하지도 않고, 매수하려고 하지도 않고, 설복시키려 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히 그분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단지 힘 닿는 데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행하는 모든 선교 활동이 그렇게 진실하고 겸손한 사랑의 실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억류된 모든 자매, 형제들의 무사한 귀환을 기도합니다.
당사자들의 가족들과 분당 샘물 교회 그리고 박은조 목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일을 위해 수고하는 정부의 모든 관계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악한 선택을 모의한 탈레반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당한 희생이 고귀한 희생이 되어 평화와 화해의 씨앗으로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비극은 우리 사람들이 빚어내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여전히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비극을 바꾸어 주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소중한 설교말씀 잘 읽고 갑니다....어젯밤 꿈에 제가 어딜갔는데 신발을 잘 찾아 신었는데도 또 한켤레의 신발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간혹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만 꾸었는데 요번엔 신발이 두켤레나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준비한 저도 너무 많은 양의 설교인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로써 성경적인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서 --다인님과 함께 고민을 한다면 더 힘이 되겠습니다.살롬
그 한켤레의 신발은 뉘것인지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