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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스카성서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마티아15
엘마노 신부님께서 30주년 전야 미사때 하신 강론 내용을 올려 드립니다.
참으로 감동 깊고, 가슴 찡하면서도 많이 웃기도 했던 강론이었는데,
우리가 파견 받고 봉사던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간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좀 길지만 꼭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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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스카청년성서모임 30돌을 회고하며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광진신부(10대)
나는 1979년 1월에 빠스카성서모임을 만났다. 빠스카는 내 운명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되었기에 만남의 순간은 지금도 꽤나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있다.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법대 2년 생이었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왜관 피정의 집에서 있었던 창세기 연수에 가게 되었다.
지금도 왜관 베네딕도수도원 앞에 있는 옛모습 그대로인 피정의 집... 3박4일 동안 창세기연수는 나에게 말 그대로 천상의 감동 그 자체였다. 타계하신 서인석 신부님께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멋진 연수 강론을 해주셨는데,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피정이라는 것이 난생 처음이었던 나는 연수 내내 가슴 터질 듯한 감격으로 보냈다. 요새말로 필이 팍 꼽힌 것이다.
감성이 풍부했던 나는 연수 전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감격했던 연수 마지막날 밤 성체 앞에 나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저는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소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경북 점촌에서 20리 떨어진 산골이 고향인 나는 3남5녀의 둘째로 동생이 6명이었다. 5살 때 우리식구는 할머니의 결심으로 모두 한꺼번에 세례를 받았다.
나는 어릴 때 동생이 많은 것이 참 싫었다.
중3때였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니 바로 밑에 여동생이 나를 가로막았다. “오빠야, 안방에 들어가지 마라”. “와?” “엄마 아놨다.” 순간 나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또 놨나 이씨...” 그러고 보니 부엌에서 할머니가 열심히 불을 때면서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마루에다 가방을 던져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풀밭에 앉아서 한 숨을 쉬었다. ‘나는 동생이 와이리 많겠노?’ 그 막내녀석이 지금 33살,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내던 초등학교 5학년 어느 교리시간에 수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성당에서 아직 신부님이 한 사람도 안나셨는데... 혹시 이 중에 신부님이 되고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보니까 옆의 친구녀석 둘이 손을 번쩍 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우이 씨...’하면서 엉겁결에 따라 들고 말았다. 아마도 수녀님께 잘 보일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때는 수녀님이 화장실도 안가시는 분인 줄로 알던 때였다.
이후로 잊혀졌던 성소의 씨앗이 빠스카 창세기연수에서 다시 싹트게 되었나보다. 그 후로 토마스 머턴의 자서전, ‘칠층산’을 읽고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5번을 읽었다.
가톨릭 신앙을 실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기본이 주일미사에 참여해서 성체를 모시는 것이다. 그리고 생활 안에서 주님말씀을 잘 실천하는 것이다.
1920년 이후로 유럽에서 신앙을 좀더 집중적으로 실천하려는 단체들이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레지오마리애, 포콜라레, 꾸르실료와 같은 단체들이 바로 그것인데 성서모임도 그 중의 하나였다. 모든 신앙단체들은 저마다 강조점을 가지면서 신앙을 실천하고자 한다. 성서모임의 중심은 성서다.
우리나라 성서모임의 요람은 아마도 서울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일 것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은 1970년대에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성서모임의 불을 놓은 대표적인 수도회다.
마침내 1976년 성령강림대축일에 대구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원 소스텔라 수녀님의 지도로 대구에도 빠스카성서모임이 시작되었다. 빠스카성서모임은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가톨릭 대학생과 직장인들에게 강한 결속력을 가진 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몇몇 신부님들의 물심양면의 지원, 지도 수녀님의 헌신적인 봉사와 초창기멤버들의 열정은 강력했다.
초창기멤버들은 성서의 강렬한 힘에 휩싸여 날밤새는지 모를 정도였다. 성서는 이후로 두고두고 성서가족들 삶에 흔들림 없는 중심이 되었다. 더러는 수도원이나 신학교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초창기 모임의 요람은 당시 베네딕도수녀원 본원이 있던 파티마병원 뒤쪽에 자리했던 수녀원 소속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요셉의 집’이라 불리던 작은 한옥집이었다가 나중에 교육관으로 쓰던 건물이었는데, 당시에 분도수녀원은 빠스카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수녀님들은 수녀원을 안방처럼 드나들던 우리 젊은 대학생과 직장인들을 아주 이뻐해 주셨다. 더러 일요일에 수녀원저녁기도에 참석하여 성체강복을 받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하늘로 올라가는 분향연기에 우리의 소망도 함께 바치곤 했었다. 또 팀마다 청지원기 수녀님들이 한 분씩 배치되어 함께 나누기를 하기까지 하였으니... 알게모르게 젊은 가족들의 가슴에 성소의 씨앗이 넓게 뿌려졌을 것이다. 그 결과 1980년 초까지 많은 성소자들이 분도수녀원으로 대거 입회하게 되었다.
1980년이 되면서 빠스카성서모임은 대명동에 있는 가톨릭문화관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지도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님으로 바뀌게 되었다. 분도수녀원은 빠스카의 경험을 살려 어버이성서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후로 중장년층 성서모임을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분도수녀원은 주요한 성소의 요람을 잃게되었다. 이후로 10년 이상 샬트르 성바오로수녀님들의 영향으로 빠스카 출신 성소자들은 바오로수녀원으로 대거 몰려가게 된다.
한참 후에 빠스카성서모임은 교구직할로 운영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교재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에서 나온 창세기, 출애급기, 마르코복음서, 요한복음서였고 6개월마다 한 파트씩 공부하였다. 출애급기를 마치면 봉사자심사를 받았고, 통과된 사람들은 봉사자파견을 받고 한 팀을 맡아 봉사하였다. 봉사자파견은 자부심을 주었다. 팀봉사자는 팀원들에게 엄마나 아빠처럼 불렸고 그런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 팀원들에게 헌신적이었다.
공부는 팀별로 촛불을 켜놓고 하였다. 촛불은 말씀이 세상의 빛임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 성가를 부르고 자유기도로 시작하고,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진도에 따라 나누기를 하고, 마지막에 봉사자가 정리를 해주었다. 그리고 성가를 부르고 자유기도로 마쳤는데, 자유기도는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가 돌아가면서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성령께서 사람들 각자의 마음에 임하시고 마음을 움직이셨던 그런 모임이었다. 참으로 성령의 기운이 휘감던 은혜로운 시간들이었다.
방학 때마다 계속되던 연수회는 월드컵처럼 흥분의 도가니였다. 한순간도 눈물과 감동 없이는 보낼 수 없었던, 영적으로 영양만점의 연수회였다. 봉사자파견식은 연수회의 꽃이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파견식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표지를 각인시켜주었다. 왜관 피정의 집, 부산 오륜대 피정의 집, 가천성당 교육관, 안강성당 교육관, 경북 함창의 퇴강공소, 청천 수련원... 등등이 우리시대의 연수무대였다. 더러 이불하나에 발을 넣고 둘러앉아 밤을 새워가며 나누기를 하던 장면은 뼈 속 깊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새겨져있다. 그때 우리는 아예 수도원처럼 초막 같은 것을 지어 죽기까지 고마 같이 살자고 했고, 이담에 꼭 경치 좋은 곳에 성서모임전용 피정의 집을 짓자고 굳게 약속했었는데... 에휴, 언제나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다들 성서를 안고 살았으니 돈버는 재주는 못 배울 수밖에... 그래도 누가 제발 좀 성공해서 피정집을 하나 턱 지어 봉헌해주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3돌잔치부터 참석하였는데... 돌잔치의 백미는 성서주제를 택해서 팀별로 발표하는 소인극이었다. 재능 있는 가족들의 재치와 기지가 번뜩였던 소인극은 참가자들에게 기막힌 감동과 두 배의 기쁨을 주었다. 당시에 내가 장학퀴즈를 벤치마킹해서 성서퀴즈를 만들었는데 4돌잔치부터 시작되어 가족들의 사랑을 받았던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밤을 새워가며 성서퀴즈 문제와 점수판을 만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연수회나 돌잔치때 식사 때는 꼭 소화제를 파는 사람들이 있어서 즐거움을 주곤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 꼭 보면 몇 명씩 최불암시리즈 같은 이야기를 해서 모두들 배꼽을 잡았다. 걸죽한 입심이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절은 그런 낭만이 살아 있을 때였다.
샬트르 바오로 수녀원과 베네딕도 수녀원을 비롯해서 많은 성소자들이 그 길을 선택했다. 전국 곳곳 진출하지 않은 수녀원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성소자를 배출해서, 성서모임이 아니라 성소모임이라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프랑스 니스 깔멜수녀원에까지 진출했으니 가히 글로벌한 성서모임이었다. 우리시대에는 박덕수, 이종하, 그리고 내가 교구신부가 되었다. 그 후로도 속속 성소의 길을 택하는 후배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결혼성소를 택한 가족들도 꿀 같은 성서의 맛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특히 성서모임에서 눈이 맞아 가정을 이룬 커플들도 속출하였는데, 아마도 1호는 박승환, 안영미 부부이지 싶다. 김헌호, 박예순 부부가 그 뒤를 이었고, 계속해서 착한 선인들이 성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 가정들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고 한편으로는 여복이 부럽기도 하다.
1981년 6월에 나는 군에 입대하였고, 휴가를 나왔을 때도 연수회에 참석하곤 하였다. 봉사자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선후배로 연결되어 모임을 지속하였다.
1985년에 나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4학년을 마치고 유학을 갔다가 1995년에 돌아와 정신 없이 살면서 성서모임을 염두에 둘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성서모임은 나경일신부님의 지도로 교구직할로 운영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선배봉사자들과의 만남이 단절되게 되었다.
모임을 계속하던 옛 봉사자들은 몇 년 전부터 성령강림대축일에 따로 1박2일 동안 옛 추억을 기념하는 모임을 하고 있다. 옛 봉사자들은 언제 만나도 가족처럼 반갑다. 뼈 속 깊이 새겨진 진한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때 우리 모두가 그토록 가슴 벅차게 받았던 말씀의 은사 때문이리라.
빠스카청년성서모임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대표적인 가톨릭신앙단체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성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은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내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부디 빠스카청년성서모임이 가톨릭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신앙단체로 거듭 성장하기를 소망한다. 주님께서 30돌 빠스카청년성서모임을 축복하시기를...
빠스카30돌 기념미사(2006년 6월 3일, 청통수련원)
누구나 빠스카에 대한 생생한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경북 점촌에서 20리 떨어진 산골이 고향인 나는 3남5녀의 둘째로 동생이 6명이었다.
나는 어릴 때 동생이 많은 것이 참 싫었다.
중3때였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니 바로 밑에 여동생이 나를 가로막았다. “오빠야, 안방에 들어가지 마라”. “와?” “엄마 아놨다.” 순간 나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또 놨나 이씨...” 그러고 보니 부엌에서 할머니가 열심히 불을 때면서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마루에다 가방을 던져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풀밭에 앉아서 한 숨을 쉬었다. ‘나는 동생이 와이리 많겠노?’ 그 막내녀석이 지금 33살,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내던 초등학교 5학년 어느 교리시간에 수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성당에서 아직 신부님이 한 사람도 안나셨는데... 혹시 이 중에 신부님이 되고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보니까 옆의 친구녀석 둘이 손을 번쩍 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우이 씨...’하면서 엉겁결에 따라 들고 말았다. 아마도 수녀님께 잘 보일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때는 수녀님이 화장실도 안가시는 분인 줄로 알던 때였다.
나는 1979년 1월에 빠스카성서모임을 만났다.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법대 2년 생이었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왜관 피정의 집에서 있었던 창세기 연수에 가게 되었다.
3박4일 동안 창세기연수는 나에게 말 그대로 천상의 감동 그 자체였다. 타계하신 서인석 신부님께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멋진 연수 강론을 해주셨는데,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피정이라는 것이 난생 처음이었던 나는 연수 내내 가슴 터질 듯한 감격으로 보냈다. 요새말로 필이 팍 꼽힌 것이다.
감성이 풍부했던 나는 연수 전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감격했던 연수 마지막날 밤 성체 앞에 나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저는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가톨릭 신앙을 실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기본이 주일미사에 참여해서 성체를 모시는 것이다. 그리고 생활 안에서 주님말씀을 잘 실천하는 것이다.
1920년 이후로 유럽에서 신앙을 좀더 집중적으로 실천하려는 단체들이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레지오마리애, 포콜라레, 꾸르실료와 같은 단체들이 바로 그것인데 성서모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신앙단체들은 저마다 강조점을 가지면서 신앙을 실천하고자 한다. 성서모임의 중심은 성서다.
우리나라 성서모임의 요람은 아마도 서울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일 것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은 1972년에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성서모임의 불을 놓은 대표적인 수도회다.
마침내 1976년 6월 5일, 성령강림대축일에 대구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원 소스텔라 수녀님의 지도로 대구에도 빠스카성서모임이 시작되었다. 작은 규모였지만 초기멤버들의 열정, 신부님들의 물심양면의 지원, 지도 수녀님의 헌신적인 봉사로 빠스카는 강한 결속력을 지닌 단체로 성장하였고, 성서는 이후로 두고두고 성서가족들 삶에 흔들림 없는 중심이 되었다. 더러는 수도원이나 신학교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최홍길, 이재수, 이용길신부님... 소스텔라수녀님, 손로사리아수녀님, 김라파엘라수녀님, 오유스티나수녀님..., 홍데레사수녀님, 이안젤라 수녀님...
초창기 모임의 요람은 당시 파티마병원 뒤쪽에 있던 베네딕도수녀원이었고, 베네딕도 수녀원은 빠스카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수녀님들은 수녀원을 안방처럼 드나들던 우리 젊은 대학생과 직장인들을 아주 이뻐해 주셨다. 더러 일요일에 수녀원저녁기도에 참석하여 성체강복을 받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하늘로 올라가는 분향연기에 우리의 소망도 함께 바치곤 했었다. 또 팀마다 청지원기 수녀님들이 한 분씩 배치되어 함께 나누기를 하기까지 하였으니... 알게모르게 젊은 가족들의 가슴에 성소의 씨앗이 넓게 뿌려졌을 것이다. 그 결과 1980년 초까지 많은 성소자들이 분도수녀원으로 대거 입회하게 되었다.
1980년이 되면서 빠스카성서모임은 교구직할로 바뀌면서 대명동에 있는 가톨릭문화관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지도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님으로 바뀌게 되었다. 분도수녀원은 빠스카의 경험을 살려 어버이성서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후로 중장년층 성서모임을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분도수녀원은 주요한 성소의 요람을 잃게되었다. 이후로 10년 이상 샬트르 성바오로수녀님들의 영향으로 빠스카 출신 성소자들은 바오로수녀원으로 대거 몰려가게 된다.
그 후 1996년부터 소수 그룹으로 머물고 있던 빠스카를 나경일지도신부가 지도신부로 부임하면서 교구내 전 본당으로 확산시켜 청년들의 대표적인 신앙프로그램으로 정착시켰고, 지금은 1500명 이상의 가족을 거느린 큰 단체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때 지도신부와의 의견차이로 선배단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시절이 생생하다.
공부는 팀별로 촛불을 켜놓고 하였다. 촛불은 말씀이 세상의 빛임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 성가를 부르고 자유기도를 바치고 나누기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성령께서 사람들 각자의 마음에 임하시고 마음을 움직이셨던 그런 모임이었다. 참으로 성령의 기운이 휘감던 은혜로운 시간들이었다.
방학 때마다 계속되던 연수회는 월드컵처럼 흥분의 도가니였다. 한순간도 눈물과 감동 없이는 보낼 수 없었던, 영적으로 영양만점의 연수회였다. 봉사자파견식은 연수회의 꽃이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파견식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표지를 각인시켜주었다. 왜관 피정의 집, 부산 오륜대 피정의 집, 가천성당 교육관, 안강성당 교육관, 경북 함창의 퇴강공소, 청천 수련원... 등등이 우리시대의 연수무대였다. 더러 이불하나에 발을 넣고 둘러앉아 밤을 새워가며 나누기를 하던 장면은 뼈 속 깊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새겨져있다. 그때 우리는 아예 수도원처럼 초막 같은 것을 지어 죽기까지 고마 같이 살자고 했고, 이담에 꼭 경치 좋은 곳에 성서모임전용 피정의 집을 짓자고 굳게 약속했었는데... 에휴, 언제나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다들 성서를 안고 살았으니 돈버는 재주는 못 배울 수밖에... 그래도 누가 제발 좀 성공해서 피정집을 하나 턱 지어 봉헌해주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3돌잔치부터 참석하였는데... 돌잔치의 백미는 성서주제를 택해서 팀별로 발표하는 소인극이었다. 재능 있는 가족들의 재치와 기지가 번뜩였던 소인극은 참가자들에게 기막힌 감동과 두 배의 기쁨을 주었다. 그때 밤을 새워가며 성서퀴즈 문제와 점수판을 만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연수회나 돌잔치때 식사 때는 꼭 소화제를 파는 사람들이 있어서 즐거움을 주곤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 꼭 보면 몇 명씩 최불암시리즈 같은 이야기를 해서 모두들 배꼽을 잡았다. 걸죽한 입심이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절은 그런 낭만이 살아 있을 때였다.
샬트르 바오로 수녀원과 베네딕도 수녀원을 비롯해서 많은 성소자들이 그 길을 선택했다. 전국 곳곳 진출하지 않은 수녀원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성소자를 배출해서, 성서모임이 아니라 성소모임이라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프랑스 니스 깔멜수녀원에까지 진출했으니 가히 글로벌한 성서모임이었다. 우리시대에는 박덕수, 이종하, 그리고 내가 교구신부가 되었다. 그 후로도 속속 성소의 길을 택하는 후배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결혼성소를 택한 가족들도 꿀 같은 성서의 맛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특히 성서모임에서 눈이 맞아 가정을 이룬 커플들도 속출하였는데, 아마도 1호는 박승환, 안영미 부부이지 싶다. 김헌호, 박예순 부부가 그 뒤를 이었고, 계속해서 착한 선인들이 성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 가정들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고 한편으로는 여복이 부럽기도 하다.
그동안 선배들은 계모임처럼 친목모임을 해왔는데 4년 전부터 성령강림대축일에 따로 1박2일 동안 옛 추억을 기념하는 모임을 하고 있다. 옛 봉사자들은 언제 만나도 가족처럼 반갑다. 뼈 속 깊이 새겨진 진한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때 우리 모두가 그토록 가슴 벅차게 받았던 말씀의 은사 때문이리라.
사람은 살다보면 이런저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성서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벌써 유명을 달리한 가족들도 있다. 세상 마치는 날까지 성서의 말씀은 우리 삶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벌써 30년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인생도 잠깐인 것 같다. 참 순수했고 새파랗던 처녀총각들이었는데... 이제는 머리도 희끗해지고 더러는 빠지고... 고왔던 얼굴에도 주름이 생겼다.
가톨릭교회가 시작되던 초창기신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보잘 것 없던 사람들이었다. 강력한 로마제국의 한 조그만 식민지였던 유대에서... 많이 배우지도, 가지지도 못했던 사람들... 로마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가소로울 뿐이었지만...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로마제국을 뒤흔들어 놓았고 마침내 그들을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그 힘이 바로 성령을 입은 힘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하고 가슴에 뜨거운 무엇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벅찬 감동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면서 살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 위하고 살았던 것이고, 마침내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령을 체험한 힘이었다. 성령을 체험하고 가슴깊이 성령의 선물,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행, 진실과 온유, 그리고 절제를 품고 실천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 초창기 신자들의 삶을 보고 로마사람들은 하나 둘씩 개종하였던 것이고, 마침내는 황제까지 세례를 받고 가톨릭신자가 되었으니... 참으로 성령의 힘 앞에 놀라울뿐이다.
오늘도 우리는 성령의 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을 생각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바쳐져온 성령기도는 지금도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저희 마음을 충만케 하시고, 저희 마음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저희 허물을 씻어주시고, 병든 마음을 고쳐주소서. 저희 굳은 마음을 풀어주시고,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