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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신다(마 1:23).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신다(행 4:12).
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성육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는 나온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다(요 1:14). 또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사실에 대해서도 섰다(요일 4:2, 요이 1:7). 요한은 이러한 표현으로 삼위일체의 영원하신 두 번째의 위격이 스스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냈다.
성육신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신인(神人)의 교리이다. 신인이란 오리겐(Origen)이 최초로 사용한 신학적 술어이나 그리스도론에 있어 기본어가 되었다. 성자는 성육신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
1) 성육신에 대한 예언
이사야 9장 6절에 나오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서 이사야는 메시아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한 아기(인성을 의미)가 날 것이라고 예언했고, 메시야의 성격을 말할 때는 그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신성을 의미)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도 주님에 대한 동일한 진리를 계시한다(사 7:14). 이 이름에는 하나님이 그 분의 섭리적 역사로 그 분의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구절에서 그 이름은 동정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는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의 수단으로 예언했고 그 예언은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무죄한 인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는 전혀 죄가 없으시고 아담의 원죄도 없으시며 나아가 첫 번째 아담에 의해서 유발된 죄와 죽음의 저주를 뒤엎어 생명과 의의 지배를 확립시켰다.
2) 성육신의 목적
하나님은 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아들을 보내셨을까? 성경은 이 질문에 몇 가지 대답을 하고 있다.
첫째,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의 광대함을 통해서 여러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오직 성육신만이 하나님의 본체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요 1:18, 14:7-11)
인간이 성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에 나오는 성자의 삶에 대한 기록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 분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가 인격화되었고,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계시는 완벽한 진리가 되었다.
둘째, 우리 삶에 본보기를 주기 위해서이다. 우리 주님의 지상 생애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 본보기가 된다(벧전 2:21; 요일 2:6). 성육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본보기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사람으로서 삶의 흥망성쇠를 경험하셨고 그 삶을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인 본보기를 제공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그 분의 본을 따를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
셋째, 죄를 사하는 효과적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이다. 성육신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구세주는 없었을 것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구세주는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보통 인간의 죽음은 죄에 대한 대가를 영원히 지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구세주는 또한 하나님이어야 한다. 우리는 신인이신 구세주(God-Man Savior)를 가져야 하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그 분을 가지게 되었다.
넷째, 다윗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의 아들이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눅 1:31-33).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일을 통치하시기는 하지만 다윗의 보좌에 대한 약속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서는 성취되지 않는다.
다윗의 보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의 보좌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 보좌가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그 보좌에 적합한 분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다윗 언약을 성취할 사람은 신인(a God-Man), 즉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어야 했다.
다섯째,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이 사역이 이루어졌다. 사탄을 패배시키는데 왜 성육신이 필요했던 것인가? 사탄은 그의 영역인 이 세상에서 패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요일 3:8).
여섯째, 체휼하시는 대제세장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시험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체휼하시는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시험받으실 수 있는 입장에 처하기 위해 인간이 되셔야 했다.
일곱째, 합당한 심판관이 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모든 만물을 심판하실 분이 성부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예수님이 심판관 역할을 하실 것이다(요 5:22, 27). 모든 심판은 ‘주님의 인자(Son of Man) 됨을 인하여’ 우리 주님이 수행하실 것이다. 이 인자라는 명칭은 주님을 이 땅 및 이 땅의 사역과 연결한다. 왜 심판관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서 살아야 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모든 핑계가 합당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왜 심판관은 하나님이기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 분의 심판이 진실하고 공정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3)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는 영원성, 편재성, 전지성, 전능성 등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소유하고 계셨다. 그 분은 창세전부터 존재한다고 주장하셨다(요 8:58, 17:5). 그 분은 어디든지 현존한다고 주장하셨다(마 18:20, 28:20). 그 분은 전지한 존재만이 알 수 있는 사실들에 대하여 알고 있음을 보여주셨다(마 16:21; 눅 6:8, 11:17; 요 4:29). 그 분은 전능한 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것을 주장하셨다(마 28:18; 막 5:11-15; 요 11:38-44).
또한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역을 하셨다. 그 분은 죄를 영원히 사하신다. 사람도 일시적으로 용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용서를 주신다(막 2:1-12). 그 분은 그 분이 원하신 사람은 누구에게나 영적 생명을 주신다(요 5:21). 그 분은 죽은 사람들을 일으키실 것이다(요 11:43). 그 분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다(요 5:22, 27).
그 분에게는 신성의 이름과 명칭이 주어졌다. 주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셨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요 1:1, 20:28; 히 1:8), 주(마 22:43-45),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계 19:16)라고 불렸다.
4)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셨다. 잉태는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졌을지라도 그 분은 성장하고 발육하는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다(눅 2:52). 그 분은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셨다(요 8:40).
또한 그리스도는 인간의 혼과 영을 가지고 계셨다(마 26:38; 눅 23:46). 그리고 그리스도는 인간의 특성을 나타내셨다. 굶주리셨고(마 4:2), 목마르셨고(요 19:28), 피곤하셨고(요 4:6), 사람과 민망함을 경험하셨고(마 9:36), 우셨고(요 11:35), 시험을 받으셨다(히 4:15). 이것은 인간성의 참된 특징들이다.
그 분이 가장 선호했던 자신의 명칭은 인자(Son of Man)였다. 이 이름은 그 분의 낮아지심(마 8:20), 고난과 죽음(눅 19:10), 왕으로서의 장래 통치(마 24:27)에 맞춘 이름이었다. 또한 그 분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가지셨는데, 그 명칭은 그 분을 그 분의 조상과 연결시키고 메시야에 의해 궁극적으로 성취될 변함없는 약속과 연관시켰다.
5) 성육신 교리의 확정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개의 본성이 혼합이 없고, 변화가 없고, 구분이 없고, 분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는 완전한 신적인 속성과 완전한 인적인 속성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복합성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래로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케톤 회의에서 정통주의 교리가 확립되기까지 수많은 이단들이 출현했다. 1세기에 인성을 부인한 영지주의, 2세기에 신성을 부인한 에비온파 등을 비롯하여 4-5세기에 아리우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 유티케스파 등이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다. 그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현설
1세기 말, 마르키온과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인간이었던 적이 없으며 단지 인간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가르쳤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3절에서 이 그릇된 가르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이단 사상은 성육신의 실상 뿐 아니라 구속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뢰성가지 훼손시킨다.
(2) 에비온파
2세기 경, 이 이단 사상은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육신적인 아들이며, 그 분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3) 아리우스파
이 이단 사상은 말씀(the Logos)이신 예수님의 영원성을 부인한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독생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작을 가지고 있었던 분이 틀림없다고 추론했다. 이리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이 하나님과 유사하지만 하나님과 똑같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고 확인함으로 이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4) 아폴리나리우스파
아폴리나리우스(Apolinarius)는 그리스도의 속성에 대한 비합리적인 분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과 인간의 혼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의 영 대신 신적 로고스(the divine Logos)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 로고스가 수동적인 인간의 몸과 혼을 통제했다고 가르쳤다. 이는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사상이었으며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5) 네스토리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는 그리스도를 두 개의 위격들로 나누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에수 그리스도가 두 개의 속성이 연합된 프로소폰(prosopon, 형태 또는 외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인성 위에 주어진 신격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신성에는 종의 형태가 덧입혀짐으로 그 결과 나사렛 예수의 모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된 상태며, 그 결과 그리스도는 두 개의 위격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정죄되었다.
(6) 유타케스파
유타케스(Eutyches)는 네스토리우스파와 반대 입장으로 그리스도 안에 오직 하나의 본성만 있다고 가르쳤다. 이 사상은 단성론(monophysit- ism)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신적 본성은 온전히 신적인 것이 아니었고, 인간적인 본성도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다만 혼합된 제3의 단일 본성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칼케톤 회의 이후 유티케스파와 비슷한 사상으로, 문자적으로 그리스도는 두 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분에게는 오직 하나의 의지만 있었다고 가르쳤던 잘못된 사상이 발생했다. 바로 단일신성론(monothelitism)이다. 이 사상은 680년 콘스탄티노플 제3차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사상에 대한 연구는 진리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고, 이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우리를 더욱 조심스럽게 만든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추상적으로 막연하게 알지 않고 구체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의 실재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이 이름을 가지고 역사 세계에서 우리와 함께 거주하셨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단지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그의 본질과 특수한 사역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붙여진 영원한 이름이다.
1) 예수
신약의 예수(Jesus)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여호수아’(Yehosua)라는 이름의 헬라어 발음이다. 로빈슨(Robinson)은 여호수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포로 이후 여호수아는 Jeshua(느 8:17)로 불리운다. 그것은 헬라어로는 Iesous다”
구약에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는데 한 사람은 눈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사람이고(민 13:8), 다른 한 사람은 여호사닥의 아들로서 대제사장인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다(슥 6:11-13).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예수를 예표하는 구약의 인물들이다. 신약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기에게 성령에 의해서 붙여졌는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는 뜻임을 성령이 마리아에게 해석해 주었다. 예수는 구원자이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이시며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로 나아오심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증거 하였다. 예수는 우리 죄 뿐 아니라 온 세상 죄를 위하여(요일 2:2) 화목 제물이 되셨다. 따라서 세상의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이다(행 4:12).
2) 그리스도
신약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구약의 메시야(Messiah)라는 이름의 헬라어 발음이다. 메시야라는 말은 기름을 붙는다는 동사인 ‘마쏵’에서 온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 시대의 왕(삼상 9:16, 10:1; 삼하 19:10), 제사장(출 29:7; 레 4:3), 선지자(왕상 19:16; 시 105:15; 사 61:1)를 임명할 때 기름을 그 머리에 부었다. 기름은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사 61:1; 슥 4:1-6)하기 때문에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특정한 직위에 임명을 받는 것과 임직된 자와 하나님 사이에 봉헌된 신성한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과 임직된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삼상 16:13)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아버지로부터 메시야의 사명을 받은 것이다(히 1:8-9). 혹자는 주장하기를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 비로소 메시야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하나 이것은 성경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성령과 더불어 시작되고 성령과 더불어 완결되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으셨으며(눅 1:35)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가시적으로 그에게 임했으며 수난과 부활 승천의 모든 사건에 성령이 그와 함께 하셨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과 그 방법을 정확하게 가르치심으로써 참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셨으며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상에서 희생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으며, 사망의 권세를 벙복하고 부활하심으로써 믿는 자의 왕이자 만왕의 왕이 되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이야말로 예수가 영원부터 선택받은 메시야,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구별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승인하고 신앙하는 고백인 것이다.
3) 인자
인자(人子, The Son of Man)라는 이름은 시편 8편 4절, 다니엘 7장 13절과 특히 에스겔서에 많이 나타난다. 인자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인자라는 이름은 특히 예수님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특수한 명칭으로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사용되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이름으로서 특히 자신의 고난당하실 것과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마 17:22, 20:18-19, 28, 12:40) 사용하셨다.
둘째, 종말론적 의미에서 장차 영광 가운데 가시적 형체로 재림하실 초인간적 인격을 시사하실 때(마 16:27-28; 막 8:38) 사용하셨다.
셋째,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고(요 3:14), 하늘에 계시고(요 1;51), 영원부터 계셨고(요 6:27), 생명이 그 안에 있고(요 6:53), 전에 있었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는(요 6:62) 것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실 때 인자라는 이름을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특별히 인자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4) 하나님의 아들
이 탁월한 칭호는 나다나엘이 예수를 칭한 것으로, 요한복음의 서장(序章)의 초월적 사상을 전해주며 초인간적 위엄과 특별한 관계의 사상을 나타낸다. 구약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고(출 4:22; 삼하 7:14), 천사들(욥 1:6, 2:1, 38:7)과 일반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창 6:2; 시 73:15; 잠 14:26)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렀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의 신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시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도 직접적인 활동, 즉 성령의 활동에 기인한다는 것을 나타낸다(눅 1:35).
둘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직접 사람들에게 알리실 때 이 이름을 사용하셨다(마 3:17, 17:5).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가장 깊은 의미는 그가 삼위일체의 제2위가 되심으로써 제1위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자신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 이름을 사용하셨다(마 11:27, 14:28-33, 16:16, 21:33-46, 22:41-46, 26:63).
5) 주
70인역에 구약의 여호와가 주(퀴리오스)로 번역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뜻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몇 가지 다른 뜻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첫째, 존경과 신뢰를 표시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마 8:2). 둘째, 단순히 정중한 존경의 표시로서 주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마 20:33).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함과 신적 권위를 표현할 때 주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 때 사실상 주는 주약의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다(막 12:36-37; 눅 2:11, 3:4; 행 2:36; 고전 12:3; 빌 2:11).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은 의미로서 주가 되신다는 사실이 한층 명백하게 된 것은 부활, 승천하신 후부터였고 그 전에는 제자들을 위시한 소수의 무리들만 신앙 고백의 형식으로 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가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메시야가 되시며 생명의 주가 되시며 믿는 자의 주가 되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선포된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가 하나님이시며 그 권위가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스스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가지 복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 이름이 주이다. 하늘에 있는 자, 땅에 있는 자, 땅 아래 있는 자가 다 이 이름 앞에 무릎을 굻게 되며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빌 2;6-11).
3. 그리스도의 직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유일한 목적은 잃어버린 양(마 18:11)과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딤전 1:5).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역도 이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데 총 집중되었다. 성경은 이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 직무를 감당하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 세 가지 직무란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의 직무이다. 이 세 가지 직무는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기에 그리스도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와 구속자로서의 사역의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 선지자의 직무
선지자로서의 직무는 죄에 대한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무지를 알리고 일깨우는 것이 선지자이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다른 여러 선지자들 가운데 한 선지자가 아니고(신 8:15) 모세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히 3:1-6)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가르치고 있다(요 1:18).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라고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무를 언급했다. 주님은 어두에 빛을 비추고 무지를 깨우치는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딤후 3:15) 그 말씀과 성령으로(고전 2:13)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요 1:18).
2) 제사장의 직무
제사장로서의 직무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죄책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를 대신 하여 하나님 면전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시는 것은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하게 하며(히 8:1), 우리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고(히 2;17), 또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시는 것이다(히 7:25).
3) 왕의 직무
그리스도는 능력과 권세를 가진 왕의 역할을 담당하셨다. 선지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신다. 그리고 왕이신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인류를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 왕의 직분을 행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시 110:3), 우리를 다스리시며 보호하시고(사 33:22, 32:1-2). 자기와 우리의 모든 원수를 막아 이기시는 것이다(고전 15:25).
4) 삼중직의 목적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왜 동시에 세 가지의 직무를 감당하셔야만 하셨을까?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의 직무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사장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셨으며, 선지자의 직무를 완수하심으로써 구속의 도리를 깨닫고 믿어 값없이 주시는 구속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며,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믿는 자의 주가 되셔서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시며 거룩한 법도로 다스리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서 부분적으로 실현시키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오셔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이 세상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이며(고전 6:19),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전 6:20).
4. 그리스도의 죽음
나폴레옹의 일생에 대해 전문가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그에 대한 주목할 만한 일대기를 썼던 매카트리(Clarence E. Macartney) 박사는 나폴레옹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사람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그의 저서『예수께서 진실로 가르치신 것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이들보다 더 많이 언급되어온 역사상의 두 인물은 바로 나폴레옹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두 인물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야심을 펴는 과정에서 피의 강물이 흐르게 했으나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바로 자신의 피를 십자가에 쏟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이나 본받아야 할 자기희생의 본보기로 보는 것은 당연하며 성경적으로 바른 것이다(요 15:13; 롬 5:8). 그러나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 표현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대신한 것이었고, 죄와 관련해서는 구속의 사역이었고, 사람과 관련해서는 화해의 사역이었으며,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속죄 제물이었다.
1) 대속적 죽음
성경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를 대신한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제사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에게 안수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안수는 죄를 이양하고 위탁하고 대표하는 것을 나타냈다. 동물의 죽음은 그 동물을 드리는 사람이 받아야 할 죽음을 대신 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 할 존재이고 스스로 죄를 속죄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영원까지 만족할만한 죄에 대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는 대리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당에 보내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요 11:50-51; 롬 5:6-8; 고후 5:21; 갈 3:13; 딛 2:14; 벧전 3:18).
2) 구속의 사역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값을 치르셨다(벧후 2:1). 그 값은 그리스도의 피였다(계 5:9-10). 구속은 대가가 치러졌으므로 자유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들에게 그 개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 대가는 주님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구속은 다음 네 가지 기본 사상을 토대로 요약할 수 있다.
(1) 사람들은 어떤 것으로부터(from), 즉 죄의 노예로부터 구속된다.
(2) 사람들은 어떤 것에 의해(by), 즉 그리스도의 피와 같은 값을 치름에 의해 구속된다.
(3) 사람들은 어떤 것으로(to), 즉 영원한 사망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 상태로 구속된다(갈 3:13, 4:5).
(4) 구속 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구속한 주님에게 매인 종이 되기 위해 그들에게 부여된 자유를 포기하도록 요청받는다(고전 6:19-20, 7:22-23).
3) 화해의 사역
하나님과 인간은 죄 때문에 적대 관계가 되었다. 고린도후서 5장에는 나오지 않지만 로마서 5장에는 이 관계가 분명히 언급되었다. 우리의 분리 상태는 더 할 수 없이 심각했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했다. 화해 사역이 매우 시급했던 것이다.
신약 성경은 화해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니라”(롬 5:10).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인간의 상태를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한 조화를 가질 수 있는 상태로 변화시켰다.
4) 속죄 제물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다. 특히 우상숭배는 더 큰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다(신 6:14; 수 23:16; 시 78:21; 사 66:15-17). 하나님의 진노는 일반적 재난(대하 28:9), 온역(겔 14:19), 살육(겔 9:8), 파괴(겔 5:15), 적의 수중에 넘겨짐(대하 28:9), 가뭄(신 11:17), 전염병(삼하 24:1), 문둥병(민 12:10), 포로 됨(왕하 23:26; 겔 19:12)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방법에는 죄의 전화(신 13:15-17), 회개(요 3:7, 10), 중보 사역(시 106:23; 렘 18:20), 하나님 스스로 진노를 거두심(시 78:38; 사 48:9) 등이 있다.
속죄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거나 거두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5절에서 속죄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분명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요한 역시 요한일서 2장 2절, 4장 10절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5.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분은 거짓말쟁이다. 왜냐하면 부활 할 것을 친히 예언하셨기 때문이다(마 20:19).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그 분이 하신 모든 말씀은 진실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분의 사역은 죽음으로 끝났을 것이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살아계신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롬 6:1-10; 갈 2:20). 그리고 우리의 증언은 거짓이며, 우리의 믿음은 알맹이가 없게 되고 우리의 미래는 절망스러울 것이다(고전 15:13-19). 그러나 그리스도는 분명히 부활하셨다.
1) 부활의 부인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부활 사실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기독교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 부활에 대한 오해는 인간의 이성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주장들이다.
(1) 기절설(氣絶設): 파울루스(Paulus)와 스트라우스(Straus)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설명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무덤의 냉기와 향기를 맡고 깨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예수의 사형이 당시의 큰 관심사였으므로 죽지 않은 상태에서 무덤 속에 둘 수가 없었다.
설사 기절에서 깨어났다 할지라도 돌로 된 무거운 무덤 문을 탈골되어 버린 팔로 열 수 없었을 것이고, 문을 열었다 해도 창으로 허리를 찔리고 대못이 박혀서 구멍이 뚫린 발로 보초를 서고 있는 로마 군인들을 피해 도망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슬람의 한 종파인 아마디야(Ahmadiya)는 예수의 기절설을 주장하는 19세기 자유주의 저술가들의 생각을 빌어 왔으며, 후에 예수는 인도에 가서 가르치다가 거기서 죽었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카쉬미르(Kashmir)에 있는 예수의 무덤의 수호자라고 주장한다.
(2) 도적설(盜賊設): 초대 교회 때부터 유포(流布)되어 있었던 주장으로(마 28:11-15),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사체를 훔쳐간 후 부활을 날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극한 공포에 사로잡혀 피신 상태에 있었고 무덤에는 파수꾼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3) 착각설(錯覺設):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자들이 다른 사람의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한 것으로 믿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예수의 빈 무덤은 장사 지냄을 목격한 여자들에 의해(마 27:61) 확인 되었고(마 28:1-6) 그 이후 제자들이 다시 찾았을 뿐 아니라(요 20:1-8) 당시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과 이들을 고용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증언 등을 보아 착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마 28:11-15).
(4) 환상설(幻像設): 예수님의 부활을 갈망하던 제자들이나 여인들이 환상을 보고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환상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 본질상 한 번에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집단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절대로 황상이 아니다. 심리학 박사인 허바마스는 이 점이 환상설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 사람에 의해 목격되었다(고전 15:6). 따라서 이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5) 강령설(降靈設): 예수님을 강령술사로 보고 죽은 예수님의 영혼이 본래의 형상을 지닌 채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본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만져질 수 있는 육체를 지녔으며 밤낮 구별 없이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강령술의 현상과 모순을 일으킨다.
(6) 신화설(神話設): 당시 인접 여러 나라에 유포된 부활 신화가 예수의 죽음에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 지역에 예수의 부활에 비견될 수 있는 신화가 존재하였는지 의문일 뿐 아니라 성경 기록의 현장성(現場性) 등은 이를 부인한다.
(7) 사기설(詐欺設): 이 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온갖 것을 지어냈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을 읽었었고 그것들이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각색하였던 영리한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기꾼이 자신의 태어날 곳까지 적절하게 뜯어 맞추기라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며, 로마의 군병들이 십자가에서 그의 뼈를 꺾지 않도록 협조한다는 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2) 부활의 증거들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것이다. 하지만 지적인 사람들은 비과학적이니, 비논리적이니, 비합리적이니 따지려고만 든다.
그런데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자이자 법의학자인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
역사적인 고증과 철저한 증거를 중요시하는 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서양의 학자들은 분명한 증거와 논리적 근거가 없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들은 무엇인가? 그 증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역사의 증거: 인류사는 A. D와 B. C, 즉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연호를 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역사의 분수령이고 원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2) 성경의 증거 : 책 중의 책이고 영원한 생명의 책인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이 그 중심이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전 15:3).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막 9:31). 절기 때 운집한 수백만 유대인들에게, 유대 천지에 그것을 공언 했다. 예수님의 사역 중 죽은 자를 살리신 증거가 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를 살려주셨다. 이는 부활의 능력을 실증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 자체가 부활의 결과다.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신약 성경이 기록될 수 있었을까? 이반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그대로 장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의 이야기도 그와 더불어 영원히 매장되고 말았을 것이다. 신약은 부활에 관한 책이다.”
(3) 사도들과 제자들의 증거: 사도행전의 사도 자격 요건은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이어야 했고(행 1:22)사도행전의 기독교인은 부활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로 통했다(행 4:2). 이들은 거짓말을 못해 순교한 사람들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기독교 박멸운동을 하던 사람인데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교회의 가장 간단한 기도이자 가장 초기의 신조 중 하나는 마라나타(Maranatha), 즉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고전 16:22)였다.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없었다. 그 고백은 주님이 살아 계시고 다시 오실 분이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히 인정한다.
(4) 원수들의 증거: 예수님의 처형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국인 로마의 공권력이 개입되어 있었다. 로마 당국이 골치 아팠던 것은 산 예수보다 부활한 예수 운동이었다. 그것을 초전 박살내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시체를 찾아 공개하는 일인데 그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5) 군중들의 증거: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처형 사건은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가 나귀 타고 입성할 때 예루살렘 군중들은 열광적으로 호산나를 연호했다. 그랬던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사형수로 처형되는 것을 보고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같은 군중이 불과 50일 이후 같은 도시에서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메시지에 3천 명, 5천 명씩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바로 심증이 갔기 때문이다.
(6) 심리학적 증거: 부활한 예수를 5백 명씩이나 만나 본 증인들이 불덩어리처럼 열광적인 부활 예수를 증거 하다가 대부분이 순교를 당했다. 꾸며낸 이야기나 불확실한 것을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렸겠는가? 죽은 예수로 부활신앙을 만들기란 부활한 예수가 부활 종교를 만들기보다 더 힘든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7) 사회학적 증거: 유대인의 상징은 할례, 안식일, 회당이라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인데 할례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것을 상징하는 세례, 성찬으로 변하고 안식일은 부활의 날인 주일로 바뀌고 회당은 교회로 변했다. 부활의 사실 없이 이런 엄청난 사회학적인 변화가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8) 도덕적 증거: 부활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인격적, 도덕적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고 세상을 변화 시켰다. 만일 죽은 예수를 산 예수를 위장시켜 부활 신앙을 만들어 냈다면 이는 그야말로 사기 사건이고 미친 사건이다. 미친 것과 사기가 어찌 어찌 최대의 도덕적 선을 낳을 수 있겠는가?
(9) 성령의 증거: 부활의 증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행 1:8). 믿는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성령의 증거가 있었다. 성령의 증거로 인해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죽음보다 강한 신앙고백이 있었던 것이다. 4세기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어거스틴(Augustine)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끝까지 그치지 않고 증거하였다.
현대의 가장 유식한 과학자로 인정받는 아이작 뉴턴(Isaac Newton)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다. 미국의 유명한 대학의 총장이나 학장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하게 확신하였다. 예를 들면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었던 Increase Mather, 예일 대학의 총장이었던 Timothy Dwight, Dartmouth의 총장이었던 Nathan Lord, Amherst의 총장이었던 Edward Hitchcock, 윌리엄 대학의 학장이었던 Mark Hopkins,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었던 John Witherspoon 등이다.
6. 그리스도의 승천
하늘의 보좌(寶座)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셨다(막 16:19; 눅 24:50, 51; 행 1:9-11).
1) 승천의 정의
승천(昇天)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심(from earth to heaven),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심(going back to heaven)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장 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40일을 지나서(행 1:3) 천국으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사도신경에는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라고 되어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 바빙크(Herman Bavink) 박사는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부활과 같이 처음부터 교회 신앙고백의 한 부분으로 되어 왔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더 이상 고통이나 눈물이 없고 십자가의 피 흘림이 없는 천국 본향으로 귀향하셨다. 승천은 그리스도의 비하가 끝났으며 그리스도는 높음(exaltation) 상태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2) 승천의 증거
승천이 부활 사건만큼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음은 사실이나 그리스도 스스로에 의해 여러 차례 예언되었고(요 6:62, 14:2, 12, 16:5, 28), 의사인 누가에 의해 복음서와(눅 24:50, 51), 사도행전에(행 1:9-11) 이중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고 이를 전파하는 자를 박해하던 바울에 의해서조차 여러 차례 언급됨으로써(엡 1:20, 4:10, 딤전 3:16) 이 사실이 기독교 성립의 중추적 교리임을 반영한다.
3) 승천의 성질
부활 40일 후 그리스도는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승천하셨다. 즉 이는 혹자가 주장하듯이 환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엄연한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승천 사건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내보인다.
(1) 전위(全位)의 승천: 신성(神性)만이 하늘에 오른 것이 아니라 인성(人性)조차 승천에 포함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도 인성을 지닌 채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준다(행 1:11).
(2) 문자적 승천: 그리스도는 성경이 묘사하는 그대로 하늘로(행 1:11), 즉 위로 올라가셨다(엡 4:8). 이처럼 승천은 영적인 의미나 상징적 의미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분명한 문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3) 유형적(有形的) 승천: 승천은 영적 식별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목격할 수 있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유형적 형태로, 즉 역사적인 사실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 준다(행 1:11; 계 1:7).
(4) 장소적 승천: 루터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단순히 상태의 변화로만 본다. 즉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공간적 제한을 받아오셨으나 승천하심으로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영원히 편재(遍在)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천은 성경의 묘사와 같이 세상을 떠나(요 16:28), 하늘로 올리우신(행 1:11) 것이며, 이때 구름이 제자들의 시야를 막았다(행 1:9). 즉 그리스도는 세상을 떠나 처소를 예비하려고(요 14:2-3 ) 하늘에 오르신 공간적 의미에서 승천하신 것이다.
4) 승천과 관련한 의문
어떤 사람은 승천은 자연법칙에 상반된 것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육신이 꼭 자연 법칙의 원리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요한복음 20장 17절이 사도행전 1장에 상세히 묘사된 승천 이전에 한 번 혹은 그 이상의 승천이 더 있었음을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구절에 나오는 ‘내가 올라간다’라는 말에 나오는 동사는 앞으로 있을 사도행전 1장의 공개적 승천을 확실하게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 미래 현재형 동사이다.
그것은 마치 주님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나에게 달라붙지 말라.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아직 영원한 승천의 시점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아직 나를 볼 기회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나는 분명 나의 아버지에게로 승천하게 될 것이다.”
5) 승천 후 사역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그 분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기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스런 자리로 올리워 가셨다(엡 1:20-23). 이 사실은 그 분의 몸과 관련하여 수많은 특별한 사역을 가능하게 한다.
(1) 교회의 머리로서
첫째, 그리스도는 몸을 만드셨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몸에 편입시키기 위해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몸을 만드셨다(행 1:5, 2;33; 고전 12:13). 성령의 사역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는 즉각적인 수단일지라도 승천하신 그리스도야말로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인 중계자였다. 왜냐하면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수많은 방법으로 자신의 몸인 교회를 돌보신다. 에베소서 5장 26절은 회심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늘에 있는 그 분의 존전 앞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설 때까지 지속되는 성화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
셋째, 승천하신 주님은 몸에 은사를 주신다(엡 4:7-13).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죄와 사망을 정복하셨고, 지금은 하늘에서 그 분의 사역을 하시면서 그 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신다. 고린도전서 12장 5절을 보면 은사를 주시는 것도 주님과 관련이 있다.
넷째, 승천하신 주님은 몸을 능력 있게 하신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우리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 준다. 그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관계성에 의해 좌우되는 부활의 능력이다(요 14:7). 그러한 관계성은 주님이 성부에게 가시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2) 백성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승천하신 주님은 신실한 제사장으로서 인간의 고통을 체휼하시고, 도우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신다(히 2:18, 4:14-16). 히브리서 4장 14-16절에서 기자는 이 사역에 앞서 승천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주님은 신실한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히 7:25). 이 사역은 우리의 사역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는 적극적인 측면(눅 22:32)과 일어난 악한 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해 달라는 소극적인 측면(요일 2:1-2)에 모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이 이미 하늘에 들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하늘로 들어가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앞서 가신자 역할을 하신다(히 6:19-20). ‘앞서 가신 자’라는 단어는 정찰하는 척후병 혹은 왕의 오심을 알리는 사자를 말할 때 사용된다. 다시 말하면 그 단어는 다른 사람들이 뒤 따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사장으로 지금 하늘에 계신다. 이 사실은 우리도 언젠가 그 분의 뒤를 따라 그곳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3) 처소를 예비하는 분으로서
주님은 죽기 바로 직전, 제자들에게 그들을 위한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곧 가서 그들을 그곳으로 이끌기 위해 다시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요 14:1-3). 그 말씀에서 아버지의 집이라는 구절은 천국을 말하는데, 주님은 천국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거할 곳은 영원한 처소를 나타낸다. 오늘날 주님이 하고 있는 사역의 일부분은 친히 이 처소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길(요 14:6)을 통해서 성부에게로 가셔야 했다.
그리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장래 사역으로 죽은 사람들을 일으키실 것이다(요 5:28). 주님의 음성은 모든 사람의 부활의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교회의 휴거 시에 부활하게 될 것이다(살전 4;13-18). 또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부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심판자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모든 심판이 자신에게 위임되었다고 말씀하셨다(요 5:22, 27).
신자는 교회의 휴거 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 분에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전 3:11-15; 고후 5:10). 이 심판의 결과로 모든 신자가 천국을 소유하게 되겠지만 받는 상급은 다양할 것이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4:5).
그러나 불신자들은 천년왕국이 끝나는 시점의 백보좌 심판 때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계 20:11-15). 모든 불신자는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불못으로 던져질 것이다. 불신자는 아무도 천국을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는 철장을 쥐시고 자애로운 통치자로서 세상 만국을 다스리실 것이다(계 19:15). 세상은 오직 그 때만 의, 정의, 사회복지, 경제적 번영, 영적 지식이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 일어난 바로 그 장소에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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