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영원히 한국의 우방국이 될 수 없다고 한다.(guide 생각) 그러나 한국인은 일본과 떨어질 수 없는 영원한 이웃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내생각)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기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적의 동태를 제대로 살피지않고 무조건 거부하고 기피하고 살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겉과 속을 잘 조절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지닌 국민들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경제대국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6.25의 특수를 최대한 활용하여 19년만에 전국토를 연결하는 신간센의 철로를 만든 나라이다. 무엇을 만들고자하면 어떻게 하던지 만들고야 마는 그 정신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9년전 우리 기업인들이 이태리에 갔을 적에 이태리 근로자들이 공장에서 기계를 열심히 닦고 있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궁금한 기업인이 뭘 그리 열심히 닦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내일부터 파업을 하면 한달간 공장이 쉬어야 하는데, 그동안 기계가 망가지거나 못쓰게되면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 미리 정비를 해두는 거란다.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현대중공업에서 데모를 할 때의 당시를 비교해보니 너무나 놀라웠고 우리도 데모를 하고 파업을 하더라도 국가의 재산을 잘 보호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이와마찬가지로 일본인들도 자국의 보호를 위해서 갈고 닦고 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우릴 안내하던 기사 도10년이된 차의 바퀴 휠을 닦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점심먹고 쉬는 시간에 말이다) 자기나라의 망신살이가 되는 행동은 보여주지도 않지만 보여줄려고 연출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기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무언가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발칵뒤집어지던 말던, 나라가 망신을 당하던 말던 까발려서 인격을 모독하고 나라의 추태를 보여주는데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도 있지만 어쩌면 자기나라의 못난 모습을 너무 리얼하게 보여 주어서 외국인들이 한국에 투자를 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요인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들의 사무라이 정신은 본 받을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사들이 지배하던 16~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당시의 오다노부나카, 토요토미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전국통일 과정에서도 큰 혼란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통합과 일체화의 논리가 일본의 지배적인 환경으로 유지되어 왔던 것이리라.
오다 노무나카의 수하에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오다 노무나카는 칼보다 무서운 혀를 지닌 놈이라고 할정도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며 성장의 길을 걸어 왔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무나카의 마당쇠로 있을적에 오다노무나카의 신발을 따뜻하게 하려고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오다 노무나카가 외출을 하려고 신발을 찾으니 신발이 없어서 찾았더니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오지 않는가, 이에 대해 오다 노무나카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더니 토요토미는 자기가 모시는 분이 발이 시릴까봐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했노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말지기를 할 적에는 오다노무나카의 말을 명마로 만들어 놓아서 오다 노무나카가 사냥 가서 죽을 뻔 한 것을 명마들이 구해서 살아돌아오게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오다노무나카의 명을 받들어 전쟁에 출정할적에도 군사의 절반만 데리고 나가겠다고 하면서 군사요원을 수맥을 볼줄 아는 사람, 화살을 잘 쏘는 사람들만 데리고 나가서 "수맥으로 우물을 말리게 하고, 밤마다 화살을 쏘아 노이로제에 걸리게해서 항복을 받아서 끝내 성을 함락시키고 돌아왔는데, 많은 군사를 거느리지않고도 적을 제압하는 지혜로운 장군이었던 것이다."
오다 노무나카는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전쟁승리를 빌미로 소원을 말하라고 했더니 토요토미는 자기는 앞으로 왕이 되어야 하므로 오다노무나카의 가족이 되게 해달라고 해서 오다노무나카의 조카와 결혼을 하게되고 로얄패밀리가 된다.
그 다음 전쟁 때 오다노무나카는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아닌 다른 장군(토요토미 히데요시와 경쟁관계에 있는 인물로 늘 밀리는 것에 열등감에 젖어 있던 장군)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섰는데, 이 장군은 평소에 오다노무나카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만 편애하는 것을 눈여겨본터라, 배신을 하게되고 오다 노무나카에게 칼을 들이대자 오다노무나카는 비겁하게 죽기는 싫다면서 할복자살을 하게 된다. 오다노무나카를 죽이고 돌아오면 왕이 될 줄 알았던 이 장군은 영주들의 원성과 국민들의 추앙을 받지못하고 하차하게 되고, 어부지리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손하나 까딱 안하고 왕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왕으로서는 누릴 것은 다 누렸지만 자식을 갖지 못하다가 62세에 6살의 아들을 두고 운명하게된다.
이어서 등장 한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시대가 200년을 유지하여 평화로운 시대를 가졌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사무라이 시대 때는 책임을 질 줄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죄를 짓거나 사면초가에 몰리면 할복자살을 함으로써 면죄부를 받을려고 하였기에 오늘날 와서도 일본인들중 자신의 비리나 잘못이 발견되면 할복자살을 하는 사람을 가끔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일본인중 일부는 책임을 지는 자세, 할복함으로써 면죄부를 받는다지만, 우리나라는 과연 할복을 할만큼 정신적인 자세가 되어 있는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해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하게 된다)
환언해서 일본에는 여자들이 선호하는 3대 직업이 있는데
1순위가 스모선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스모의 평균수명이 45세인데, 스모의 우승자는 돈을 많이 벌어놓고 빨리 죽기 때문에 일본의 텔런트나 가수들이 서로 스모와 결혼하려고 한다고 한다.(스모선수가 좋은게 아니라 돈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스모의 우승자란 최소한 1년에 다섯번을 우승해야 우승자로 인정한다고 한다. 스모선수들의 몸무게는 140~220Kg까지 나간다고 한다.
2순위가 공무원
3순위가 초밥집
대충 이정도로 일본의 요모조모를 알려드리고,
우리의 동국대 행정대학원의 일정별 다닌 곳을 알려드리면 7월9일 12시55분 일본 치토세공항에 안착하여 도야호수 관광및 유람선 탑승하여 북해도의 거대한 호수와 대화를 나누고 약간의 비가 뿌린 관계로 쇼와신산은 내일로 미루고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도야 썬 팔레스 호텔"에 투숙하여 일본 북해도 특유의 노천욕을 즐기고 석식을 하고 첫날 야밤미팅해서 거나하게 술에 의지하여 하루를 보냈다.
7월10일 어제 못본 쇼와신산 1943년 이후부터 계속 화산활동을 하며 성장중인 기생활화산으로 가까와 질 수록 유황냄새비슷한 냄새를 풍기며 화산가까이 온 느낌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이어서 간 곳이 니시분화구와 사이로 전망대를 관광하고-> 이어서 황회색바위에서 화산가스가 분출하여 주변일대가 강한 유황냄새로 뒤덮고있어 마치 지옥을 연상하게 한다하여 붙여진 곳으로 1분에 3000리터의온천수가 솟아오르는 곳을 보았는데 너무 물이 맑고 실제로 뜨거운 온천수를 손을 만져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온천수를 손에 묻혀 눈을 비비면 눈이 맑아 진다하여 실제로 그렇게 해보기도 했다. 잦은 비 탓으로 오늘의 예정에 있던 곰목장은 내일로 미루고 노보리벳츠 그랜드 호텔에 투숙하고 온천욕후, 오늘은 일본식 가라오케에 22명이 함께가서 즐겼다. 일본 가라오케는 1인당 3000엔만 내면 1시간동안 술과 안주가 제한없이 나오는데 그날은 일본 야쿠자들이 가라오케에 와서 함께 노는 바람에 1시간30분동안 함께 이웃나라사람들과 즐겁게 지냈다. 김항술수석의 허리띠로 색스폰을 부는 모습은 모두를 즐겁게 했고, 김희동수석은 씨보레(물수건)2장으로 춤을 추며 분위기를 돋구었고, 끝난후 김항술수석방에서 한잔 을 더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7월11일 김항술수석은 업무관계로 오전9시30분차로 공항으로 가고(먼저 귀국하고), 우리 일행은 로프웨어를 5분정도 타고가서 200여마리의 곰을 사육하는 곰목장과 곰박물관을 관람하고 -> 이어서 무로란으로 이동후 백조대교를 경유하여 일본의 10대 절경중의 하나인 지큐미사키를 관광하고 북해도의 멋진 바다와 자연을 날씨가 흐린관계로 제대로 못 본것이 너무나 억울 했지만, 그런대로 절경을 봤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하였다. 이어서 시라오이로 이동후 아이누 민속촌을 관광라고 삿뽀로로 이동-> 오후 3시경에 도착한 삿뽀로에 있는 북해도 대학교 북해도 대학교 교육학부에서 마련한 팜플렛을 받아들고 강당에서 "사회에 의한 빈곤.불평등의 현상과 개혁의 방향"을 집필한 오와키 오사무교수의 강의를 듣고 단체촬영및 각자 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오늘도 마무리 . 오늘은 온천이 없는 호텔이지만 호텔이 깨끗해서 기분이 좋았다.
저녁을 먹은후 9시쯤에 간 곳은 일본의 빠찡코, 이곳에서 제가 대박을 터뜨려서 36600엔을 따서 일본식스타일의 맥주집 漁民에서 한잔을 쐈다.
7월12일 오늘은 삿뽀로 시립자생관 소학교에 가는 날이라. 오전 9시30분에 나섰다. 시립소학교이지만, 1층에는 사립어린이집에 함께 있어서 어린이집에 들려서 가이드의 통역에 의존하여 어린이집을 둘러보고, 5층에 올라가서 소학교의 특징에 대해서 듣기도 했는데 한 가지만 말한다면 소학교의 교실과 교실 사이에는 문과 벽이 없었다. 그 이유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어릴적부터 키우기위해서 일부러 교실문과 벽이 없다는 것이며, 확트인 교실사이의 공간을 애용하여 아이들이 모여서 큰작업(만들기, 그림그리기 등)을 한다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어릴적부터 키운다는 점. 교실의 문과 벽이 없는 점을 이용하여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집중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나라 초등학생들도 이런 공동생활의 좋은 점을 주입시켜서 키웠으면 싶었다)
점심을 오랜만에 자유스러운 고기뷔페로 채우고 간곳은 아사히북해도 공장이었는데,일일이 견학할 필요없이 영상으로 소개한 아사히 공장의 생산과정을 가히 일품이었고 아사히맥주공장에서 제공한 시음은 목이 시원할 정도로 마음껏 마시게해서 속이 다 시원 했다. 아사히에서 선물한 미니 맥주캔을 들고 나오면서 아사히 맥주공장에서 파는 초콜렛도 사서 먹기도 하면서... 우리는 삿뽀로시내 오오도리 공원을 중심으로 스스키노 시내를 관광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쇼핑을 하기도 했다.
또한 승용차는 작지만 야무지게 꾸며서 다니고 있었고, 승용차 차고도 작은 차는 작은 차에 맞게 컨테이너를 만들어서 각자의 집주변에 설치한 것이 특이했다. 우리나라같이 내땅이냐 니땅이냐 싸우면서 주차공간의 어려움을 남탓이라고 싸우는 사람들을 전혀 볼 수 없었고, 교통질서는 너무나 잘 지켜서 교통경찰관이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길거리에 공사를 대낮에 하면서도 상대방이나 보행자, 운전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배려하는 모습은 본받을만 하였다. 좋은 것은 배워야 한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약250만개의 벽돌을 사용하여 미국풍 네오바로크양식으로 1888년 건설된 삿뽀로 구도청사와 1881년에 지어져 120년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맑은 종소리가 변함없이 울리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삿뽀로의 상징인 시계탑을 관광하기도 했다.
호텔로 오는 길에 현지식을 했는데 영덕 게 같은 뷔페였는에 이곳에서 태어나서 원없이 게를 먹어본 것 같다. 오늘도 온천욕이 되는 호텔인데 아마도 이 호텔이 제일 좋은 곳인 것 같았다. 아마 무궁화를 달아준다면 10개정도 달아 주고싶을 정도로 큰곳이었다.
이곳에서 온천욕후 원장님을 모시고 16층에 있는 가라오케에서 여흥을 즐겼는데 이곳에서는 74기 조원선회장께서 쐈다. 너무나 즐거운 마지막 밤을 아쉽지만 12시(자정)에 마감하고 일본 북해도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7월13일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날. 하루하루가 즐겁고 스릴이 있으면서 아슬아슬하게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정을 무사히 끝마치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고마웠다. 공항으로 가기전 마지막 관광지인 오타루 운하, 이어서 간곳은 오르골전시장 관람 그리고 은종커피점에서 커피마시면 마신 컵을 선물로 주는 집에 들려서 커피마시고 ....공항으로 이동. 공항에서 그동안 수고한 기사: 바바상에게 신세많이 졌다고 인사하고 우리 동국대 행정대학원 일행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오후5시에 도착하여 4박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무사히 귀가 했다.
여러분! 즐거운 기억만 하세요. 여러분과 함께 한 이번 해외학술세미나 북해도에서의 일정은 영원히 제가슴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