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의 능원묘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동래정씨 시조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 동래정씨 2세조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봉분 전방 좌우로 위치한 수령 880년의 천연기념물 배롱나무 한 쌍이 위치... |
화지공원은 부산진구 양정동 469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면적은 391,299㎡(118,363평)에 달한다. 1985년 9월 28일에 근린공원으로 지정(건설부 고시 제42호)된 곳으로 공원 전체를 동래 정씨 종약소에서 관리한다. |
|
|
▲ 동래정씨 시조 묘는 화지공원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
|
▲ 도로 입구에는 배롱나무 안내판이 있습니다. |
▲ 화지공원 입구를 들어서며 바라 본 모습 |
동래 정씨 2세조인 정문도 공의 묘를 비롯해 문중 재실인 추원사와 화지사, 화산재, 묘하 연못 2곳, 천연기념물 168호인 배롱나무, 화지문화회관, 그 주변에 하마비가 자리 잡고 있어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공원이다. |
|
|
▲ 화지공원 입구인 현경문(顯景門)을 들어서면 좌우로 나무들이 울창합니다. |
공원 안으로 들어서서 큰 대문인 현경문을 통과하면 오솔길 양 옆으로 잘 가꿔진 향나무와 은행나무, 벚나무, 개잎갈나무 등이 도열해 있다. |
|
|
▲ 현경문을 지나서 조금 올라가면 좌측에 부사정공치화청덕거사비(府使鄭公致和淸德去思碑)라는 비석이 한 기 서 있습니다. |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에 오르는 등산길의 왼쪽편 길가에 부사정공치화청덕거사비가 있다. 정치화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숙종 대 좌의정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이 비석은 그의 9대손인 行府使寅學이 공덕을 기리며, 乙未年에 세웠고 비석의 왼쪽에 씌여 있다. 이수는 첨부석으로 위쪽 중앙에서 여러 갈레가 나뉘고 양쪽 끝은 그 갈레가 말려 올라가며 보주형 꼭지가 꼭대기에 얹혀 있다. 대석 또는 첨부석으로 가장 위쪽은 양각으로 심엽형이 거꾸로 반만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4개의 잎을 가진 꽃모양으로 양각되어 있다. - 부산진 문화원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
▲ 동래정씨 시조 묘 사당 입구 전경 |
|
|
▲ 현경문을 지나 쭉 올라가면 전방에 사당이 보입니다. |
▲ 동래정씨 시조 사당의 정문인 경모문(敬慕門) |
|
|
▲ 담장 너머로 바라 본 동래정씨 시조 사당인 추원사(追遠祠) |
▲ 사당 우측에 2세조 묘와 배롱나무가 보입니다. |
오른쪽으로 돌면 거목 ‘양정동 배롱나무’가있는데, 양정동 배롱나무는 화지공원 내에서 동래 정씨 시조인 안일호장 정문도 공의 묘소 양쪽을 지키고 서 있는 수령 약 800년 정도의 노거수로 정문도 공의 묘를 조성할 당시에 심은 것으로 전해오며, 동래 정씨의 선조 묘 옆에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자손들의 부귀영화를 기원하여 오랜 세월을 버텨왔기 때문에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경이로운 생명력으로 인한 생물학적 보존 가치도 매우 높다. |
|
▲ 동래정씨 2세조 묘역 전방 좌우로 배롱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
좀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작은 연못을 앞에 둔 자그마한 암자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화지사이다. 규모는 작지만 고려 초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창건 당시의 이름은 만세암이었다. 연못 왼쪽의 대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면 화지산으로 향한다. - 부산진구청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
|
▲ 동래정씨 2세조 묘역으로 들어서며 바라 본 모습 |
|
|
▲ 묘역 하단 우측에 위치한 비석군 모습 ▼ | |
|
|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천연기념물 168호) |
|
▲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 전경. 꽃이 피는 시기에 다시 한 번 방문해야 할 듯 합니다. |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나무로 중국이 원산지이다. 꽃은 7∼9월에 붉은색 또는 흰색으로 피며,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꽃이 피어있는 기간이 길어서 백일홍이라고도 하나 국화과의 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해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부귀영화를 주는 나무라고 믿기도 했다. |
|
|
▲ 전방 좌측에서 바라 본 배롱나무 모습 |
|
▲ 양정동 배롱나무 꽃 핀 모습(문화재청 사진) |
부산진의 배롱나무는 부산진구 양정 전철역에서 1.5㎞ 떨어진 화지공원에서 2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8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가장 큰 나무의 높이는 8.3m이다. 이 나무는 약 800년 전 고려 중기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동래 정씨 시조의 묘소 양 옆에 1그루씩 심은 것이 오래되어 원줄기는 죽고, 주변의 가지들이 별개의 나무처럼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
|
|
▲ 좌측 배롱나무 모습 ▼ | |
|
|
|
▲ 양정동 배롱나무 꽃 핀 모습(문화재청 사진) |
부산진구의 배롱나무는 동래 정씨 시조의 묘 옆에 심어 조상을 기리고 자손들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나무로서 그 문화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배롱나무로서는 매우 오래된 나무이므로 생물학적 보존가치도 커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
|
▲ 우측 배롱나무 모습 ▼ | |
|
|
|
▲ 양정동 배롱나무 꽃 핀 모습(문화재청 사진) |
동래정씨 2세조 묘 |
|
▲ 동래정씨 2세조 정문도선생 묘역 전경 |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38> 동래정씨
조선시대 정승 17명·문과급제자 198명 배출한 명문가
동래정씨(東來鄭氏)의 시조는 신라 말기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이다. 정회문은 경애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완(玩)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경애왕 말년에 일어난 견훤의 난으로 피신하였다가 동래지역에 돌아와 거주하였다. 그 후 안일호장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
|
|
▲ 동래정씨 2세조 묘역 전경 |
하지만, 동래정씨에서는 정회문 이후 세계(世系) 일부가 실전되었기에, 고려 초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조로 한다. 정지원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을 지냈고, 정문도의 아들 정목(鄭穆)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냈으며, 정목의 아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은 동지공거·한림학사를 지냈다. 또한 그의 아들 정서(鄭敍)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동래정씨의 분파는 정지원의 6세손인 정보(鄭輔)를 파조로 하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와 정필(鄭弼)을 파조로 하는 첨사공파(詹事公派)로 대별된다. 이들 2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분화하였다.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대호군공파는 조선 중기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
|
|
▲ 동래정씨 2세조 묘역 전방과 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
직제학공파의 파조 정사(鄭賜)는 조선 세종 때 예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아들 5명과 손자 10명을 두었다. 그 가운데 셋째 아들 정난종(鄭蘭宗)은 동래정씨가 조선에서 명문가 반열에 오르도록 한 중흥조라 할 수 있다. 그는 세조에서 성종 대에 걸쳐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냈다.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정광필(鄭光弼)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동래정씨는 정씨 집안 중에서 가장 큰 문벌을 형성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손인 전주이씨(22명), 세도정치를 펼친 안동김씨(19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정승(17명)을 배출하였다. 그 외에도 대제학 12명, 호당 10명, 공신 6명, 판서 20명에 문과급제자만 198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꼽힌다. |
|
|
▲ 옛 석물은 망주석 한 쌍이 있으나 당시 것은 아니고 후대에 세운 듯 합니다. |
주요 인물로는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좌익·익대·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鄭昌孫)이 있으며, 영의정을 지내고 기묘사화 때 신진사류를 구하는 데 힘쓴 정광필, 선조 때 만민평등의 대동세상을 추구한 혁명가 정여립,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존겸(鄭存謙), 일제강점기 때 국학자였던 정인보(鄭寅普) 등이 있다. 동래정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13만7524가구에 44만23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전체 정씨 인구의 22%를 차지하는 것이다. |
부산 화지산에 있는 동래정씨 2세조 정문도의 묘역에서 동래정씨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문도 묘는 풍수지리가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
|
|
▲ 측면 전후방에서 바라 본 모습 |
동래정씨의 연혁과 인물
그가 죽어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묘를 파헤쳐 버려,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모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묻고 파헤치는 실랑이가 계속되자 아들이 마을 노인을 찾아가 사실을 얘기하자, 노인은 “그 자리는 임금이나 정승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금으로 관을 만들어 묻으면 되나 그럴 수 없으니 관을 보릿짚으로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그의 아들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도깨비들이 나타나 “주인이 들어왔구나”라고 하며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긴 동래정씨가 조선시대 400여 년 동안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영을 누리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
▲ 동래정씨 2세조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정지원의 아들 정목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고, 정목의 아들 4형제 중 셋째인 정택(鄭澤)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또 막내 아들인 정항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주사(知奏事)를 역임한 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정항의 아들 정서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작자로 유명한데, 그는 인종의 동서이다. |
동래정씨 재실 |
|
|
▲ 사당 좌측으로 올라가면 사당 뒷편에도 묘역이 있는데 동래정씨 시조인 정회문선생 단소라고 합니다. |
그는 글씨를 잘 썼다. 그가 쓴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제액(題額)’이 남아있다. 정양생의 셋째 아들이 정부(鄭符)이다. 그의 집안은 아들 정흠지(鄭欽之)와 손자 정갑손(鄭甲孫)·정창손의 의해 크게 이름을 날렸다. 정흠지는 태종 11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참판·대사헌·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정갑손은 세종 때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에 이르렀다. |
|
|
▲ 화지사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재실이 보입니다. |
조선 전기 동래정씨의 가세는 정난종과 그의 아들 정광필에 의해 더욱 굳어졌다. 정난종은 세조 2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때는 좌리공신 4등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다. 호조판서와 우참찬을 역임했으며, ‘원각사비(圓覺寺碑)’와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 등을 썼다. 정광필은 성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과 이조참의를 역임했으나, 갑자사화로 인해 아산으로 귀양갔다.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복직되고, 그 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또다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을 두둔하며 희생을 막으려 했으나 다시 파면되었다. 그 후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풀려나와 영의정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죽은 뒤 중종묘정에 배향되고 문익공(文翼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
|
|
▲ 동래정씨 재실 입구 모습 |
|
8대손에서는 정존겸(鄭存謙)이 영의정을 지냈고, 정존중(鄭存中)은 공조판서를 지냈다. 9대손에서는 정원용(鄭元容)이 영의정을, 정시용(鄭始容)이 형조판서를, 정헌용(鄭憲容)이 공조판서를, 정대용(鄭大容)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0대손에서는 정기회(鄭基會)가 이조판서를, 정기세(鄭基世)는 이조판서를, 정기선(鄭基善)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11대손에서는 정범조(鄭範朝)가 좌의정을, 정건조(鄭健朝)는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정유길의 집안은 12대에 걸쳐 정승과 판서를 고루 지냈다.
◀ ①②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정난정의 고택과 묘. 정난정은 동래정씨 중흥조로 일컬어진다. 최근엔 후손들이 시가 80억원에 달하는 고택 등을 사회에 기증해 화제를 낳았다. ③ 정여립이 아들 정옥남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 전북 진안군 죽도. ④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의 전말이 수록된 기축록. 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민족혼을 일깨우려 애썼다. |
화지사 |
|
|
▲ 동래정씨 재실 입구를 돌아나와서 우측으로 돌아서면 화지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
정여립 사건과 동래정씨의 수난 |
|
|
▲ 화지사는 영호암, 만세암으로도 불리었다고... |
▲ 화지사 대웅전 내부 모습 |
하지만,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은 서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설도 없지 않다. 서인들이 동인을 모함하기 위해 모반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며, 그가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따라 들어와 살해한 뒤 ‘자살’로 꾸몄다는 것이다. 서인의 영수였던 송강 정철이 옥사처리를 담당했고, 그의 참모로 송익필(宋翼弼)이라는 노비 출신이 활약했다. 송익필은 자신과 가족을 면천(70명)시키고, 이발·백유양(白惟讓)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
|
|
▲ 화지사 대웅전 좌측에 위치한 산신각 내외부 모습 |
어쨌든 정여립은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이야기했다. 즉, 천하는 공물로 주인이 따로 없다는 것이며, 누구든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왕조시대에 상상할 수도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전라도는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
|
|
▲ 화지사 요사채 |
▲ 화지사에서 넘겨다 본 동래정씨 재실 모습 |
동래정씨 근현대 인물로는 위당 정인보를 들 수 있다. 정인보는 망한 나라의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주로 연희전문학교를 비롯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국학과 동양학을 강의하는 한편, ‘시대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중에게 국혼을 환기시켰다. |
동래정씨 동지공 파조 묘소 |
|
|
▲ 사당 좌측에 동래정씨 동지공 파조 묘소 안내 입석이... |
▲ 동지공 파조 묘로 가면서 바라 본 추원사 |
광복 후 국학대학장에 취임했으며, 1951년에는 초대 감찰위원장에 취임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담원문존(?園文存)’ ‘월남이상재선생전(月南李商在先生傳)’ ‘조선문학원류고(朝鮮文學源流考)’ ‘담원시조집’ ‘담원국학산고(?園國學散藁)’ 등이 있다. 그 외 현대 인물로는 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자 통일부 장관으로 17대 대통령 후보를 지낸 정동영(鄭東泳)씨가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세계일보 2013-01-04 |
|
|
▲ 동래정씨 동지공 파조 묘소 주변은 사방이 철책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
동래정씨 시조 묘 위치도 |
|
동래정씨 시조 사당부터 빨간 화살표를 따라서 화지사까지 표기하였습니다. 소재지 :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산73-28 |
|
하단 시작의 화지공원 입구에서부터 빨간선을 따라가면 동래정씨 2세조 묘와 양정동 배롱나무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
|
지도 좌측의 A 지점이 화지공원. 지도 하단 양정역 5번 출구에서 도보나 마을버스로 이동. 부산시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