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여행 ④
백월산의 얼굴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때 승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성불 설화가 있는 산으로 유명하다. 설화의 깊이로 보면 단연 그럴법한 사찰 하나쯤 있어 고풍스런 위용을 떨칠 법한데 불행하게도 문헌에 기록된 남사지(南寺址)조차 발굴되지 않은 채 산의 이름은 낮달처럼 세인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뜻이 있는 사람들 몇이 모여 백월산을 찾기로 한 것은 겨울 바람이 몹시 부는 지난 12월 중순이었다. 창원시 북면 월백리에 닿자 ‘백운사(白雲寺)’라는 흰 안내판이 마을 어귀에 초라히 서서 낯선 길손들을 반긴다. 마을 가운데로 난 수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노라니 단감나무 밭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이 허옇게 누워 있었다. 포장길이 끝나자 저만치 한 무리의 대나무 숲이 길을 지키고 있다.
적막 산중에 대숲이라니.
어느 옛날에는 이 부근에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 싶다.
비포장의 산길이지만 승용차가 다닐 만큼 넓게 닦여 있다. 굵은 돌이 울퉁불퉁 솟은 길을 100 보쯤 걸어가면 길 우측에 사람 키 높이의 돌축대가 10여 미터 길이로 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길을 닦다가 드러난 축대인 듯하다.
풍수에 밝은 일행 중 한 사람이 지형으로 보아 옛 남사가 있었다면 이 곳이었으리라 한다. 정말 남사가 이 부근에 있었다면 전하는 기록대로 금당과 강당까지 갖춘 규모가 큰 남향의 건물이었으리란다. 신라 때의 사찰은 굳이 속인들의 눈을 피해 산 속 깊이까지 숨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월이 가도 대숲이 아직 남아 있으니 절터로 봄 직하단다.
닦은 길이 끝나는 곳에 인가 한 채가 불쑥 나타난다. 사람이 살고 있다. 워낙 후미진 곳이라 밖에서는 집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은둔처사가 능히 도를 이룰 만한 곳이다. 마침 한 아낙이 개울에서 배추를 씻고 있기에 백운사가 어디냐고 물으니 손가락을 위쪽으로 가리킨다. 가파른 비탈 밭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나무가 층층이 서 있었다.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자 슬레이트 지붕의 오두막이 엎드려있다. 이 보잘것없는 오두막이 백운사. 흰 구름 낀 벼랑 위에 날아갈 듯 날렵한 팔작지붕의 사찰로 생각한 일행들은 절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름에 비해 너무 어이없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남암(南庵)의 위치를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이라 하였으니 백운사가 앉아 있는 터가 예사롭지 않다. 절 뒤 동편 비탈은 너덜, 절 양옆은 수량이 넉넉한 계곡이다. 돌구유처럼 생긴 들머리 바위에는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이 곳의 물은 마르지 않는단다. 노힐부득이 난향 그윽한 아름다운 낭자를 만나 목욕을 시킬 수 있는 곳이라면 물이 넉넉하여야 할 터이었다. 그가 물을 차지하고 거처를 마련했다면 이 부근밖에 달리 더 있으랴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워낙 터가 좁아 절 마당을 가로질러 등산로(?)가 나 있었다. 땔나무에 그을어 서까래가 온통 시커먼, 금방이라도 찌그러질 것 같은 삼간집 한 채. 마당귀에는 석등의 연화문 받침대, 8각 돌기둥, 네 개의 화창(火窓)을 낸 8각의 화사석(火舍石)이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었다. 상대석과 옥개석은 간 곳이 없지만 남은 것만으로도 신라 석등임이 분명하다. 마주 보고 서 있었을 다른 등 하나는 필시 부근 어디에 묻혀 있을 터이다. 식수를 받는 우물 위쪽에 양각된 작은 미륵상 한 점이 돌과 함께 석축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절을 지키고 있는 70 노구의 허관음심(속명은 君子) 보살은 석등과 미륵상이 아래쪽 계곡에 버려져 있기에 모셔왔다고 자랑한다. 40여 년 전 이 곳으로 흘러들어와 보니 맑은 물과 좋은 볕이 있어 지금껏 불사를 이루고 살아온다는 보살 할머니에게 도움될 만한 증언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추측으로 남암의 위치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산 길에 다시 들르기로 하고 백월산 정상으로 걸음을 재촉하다.
돌너덜을 지나자 소나무와 신갈나무 숲이 길을 막는다. 경사가 퍽 가파르다. 능선은 온통 고사리 밭이다. 마른 고사리 잎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해발 453M’라 쓴 푯돌이 선 정상에 닿자 사방이 탁 트인다. 동에는 주남 저수지와 아득한 들판이, 북에는 마금산과 길게 누운 낙동강이, 서쪽으로는 무릉산이, 남으로는 봉림산, 천주산이 마주보고 있다. 이 곳이 이른바 사자봉, 가마득한 벼랑 끝이다. 표석 아래, 이동통신사에서 세운 중개탑이 흉물스레 서 있다. 중개탑이 선 자리는 능히 판자집 한 간을 세울 만큼 넓다. 백운사에서 보면 바로 북쪽 위치이다.
<삼국유사>에 ‘박박사(朴朴師)는 북쪽 고개의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여기쯤에 달달박박은 북암(北庵)을 세우고 미륵불을 염송하며 도에 정진하였으리라. 날이 저물어서 자고 가기를 청하는 아리따운 낭자를 보고도 청정 도량을 이유로 문전 박대할 수밖에 없었던 달달박박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낭자를 맞이한다 하여도 물길이 머니 어찌 낭자의 해산과 목욕 시중을 정성껏 들어 줄 것인가.
설화의 옷을 벗기면 밤길 가는 여인이 있다
가슴에 다라니를 품고 솔바람에 볼 씻으며
물소리 그윽한 골짜기로 헤매다가 닿은 뇌방(磊房).
마음 문을 열어야 하리 보리를 이루려면
산후 수발 다함이 중생 위한 보시라오
그대여 연대(蓮臺)에 앉으옵소 현신 성불하시었소.
슬레이트 지붕 위로 낮달 뜨는 작은 암자
마른 가슴 산행으로 목이 마른 길손에게
한 모금 물을 권하는 보살할미가 살고 있다.
마음 문을 열어 놓고 청정심을 닦으면서
사람 집에 사람이 오자 웃음으로 맞는다
평생을 보시하여도 다함없는 관음심.(졸시 ‘백월산’ 초고)
하산 길에 백운사에 다시 들르자 보살 할머니는 밥을 지어 놓고 일행을 반긴다.
찬이라고 해야 무김치뿐이었지만 보살의 마음씀씀이 하도 고마워 꿀맛이었다.
이따금 산을 찾는 길손들에게 물 공양에 밥 공양까지 하며 정담을 나누는 게 보리(菩提)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하는 할머니였다. 부처님 모시고 살지만 아무래도 반가운 것은 사람 만나는 게라며 깊게 패인 주름살을 온 얼굴에 펴며 아이마냥 웃는다.
멀지 않은 날 어느 독지가가 나타나 다시 남사(南寺)와 같은 절 하나를 이 곳에 세워 현신 성불 설화를 기려 줄 것을 기대하며 회색 승복을 입은 보살 할머니에게 몇 번이나 합장을 한 후 자리를 일어섰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반갑습니다, 운향님. 아름다운 시심 늘 단련하세요. 생각에도 녹이 습니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지만 말과 생각을 반짝이도록 다듬어야겠지요? 초롱꽃이 낮에도 그윽한 불을 켜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군요.
"초롱꽃이 낮에도,,,,,," 아름다운 시심이네요....고맙습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읽고도 아직 백월산을 못 가봤습니다. 저도 그 곳에 한번 가봐야 겠습니다. 좋은 글들 잘 읽었습니다.
글에는 세월이 묻어 있습니다. 지금은 단감나무밭이 끝나면 <성불사>라는 절이 흉물스레 서서 백운사의 기를 뺐고 있지요. 한 번 가 보세요, 백월산! 설화의 현장으로.
"백월산의 얼굴"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