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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기도, 신령한 지혜와 총명(골 1:9)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성도를 온전함으로 이끄는 영적 설계도와 전투 명령서와 같습니다. 그의 기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기도에는 분명한 방향과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 특별히 그의 옥중서신을 읽으면, 그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 독특한 데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선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의 간구는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타인을, 땅의 결핍보다는 하늘의 풍성함을 먼저 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인간의 필요에서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서 출발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문제 해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서 시작됩니다. 이 말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하늘의 것을 먼저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루의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물질적인 것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필요가 육신적인 필요보다 더 중요하고, 따라서 영적인 간구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다시 말하면 육신적인 것까지도,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이 없이는 못삽니다. 그러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몸 안에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보다 우선에 두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필요를 무시하지 않았으나, 영적인 강건함이 전제될 때, 육신의 삶도 비로소 질서를 찾는다는 “영적 선후관계”를 명확히 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더 부유해지기를 기도하지 않고, 더 깊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필요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비극은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먼저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이 병든 상태에서 삶이 잘되는 것은 진정한 번영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의 질병을 위해서는 즉시 비명을 지르며 기도하면서도, 영혼의 질병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디 기도할 때가 많습니까?
바울은 육체적 필요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영적인 강건함이 전제될 때, 육신의 삶도 질서를 찾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더 많이 가지게 해달라”가 아니라, “더 깊이 알게 해달라”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멈추지 않는 강물과 같습니다. 그의 기도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를 생각해 보면, 그의 기도는 그가 갇힌 감옥의 창살보다 훨씬 넓은 지평을 향합니다. 그의 기도는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며, 그 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심장을 보게 됩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라, 그의 제자인 에바브라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그 골로새 교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성도들을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었습니다. 에바브라에 의해서 그 교회 사정을 듣고 아는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애정어린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바울의 사도다운 마음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 당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위협을 주고 있던 거짓 가르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문제를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9절 말씀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9절은 “이로써”란 말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6절에서 쓴 내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라는 말은, 바울이 에바브로에게서 보고를 받았을 때,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거듭난 것을 확신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말은 “당신들은 영적으로 새롭게 체험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이미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자라가면 될 뿐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그는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주제입니다. 바울은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골 2:10)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경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새로운 것을 찾지 말고, 처음에 받은 것, 그 안에서 계속 자라가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에바브라에 의해서 복음을 받게 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믿음으로 주 안에서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다른 원리를 가르치니까, 듣지 못하던 말을 하니까, 새로운 것이 더 좋은 것으로 생각되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과거에 믿었던 것이 흔들리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이단들이 전에 들어보지 못하던 말을 하면, 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 “듣던 날부터......그치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은 에바브라의 보고를 받은 즉시 바울의 심령에 거룩한 부담감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목회적 돌봄의 본질은 무릎에서 시작되어 삶으로 완성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 안에 채우는 통로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내 가족까지만인가? 내 교회까지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 전체인가?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확장된 기도였습니다.
사랑은 거리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골로새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눈물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유기적 연합 안에서만 설명 가능합니다.
참된 성도의 마음은 보지 못한 영혼까지도 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창고가 물질로 채워지기보다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기를 먼저 구했습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는 “지식”과 “지혜”를 강조하는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성도들에게 만일 새 교훈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적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높은 지식이 있다”, “특별한 깨달음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외에 더 깊은 비밀이 있다”라고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이건 특별한 계시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던 비밀입니다”라는 말들로 반복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영지주의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이미 모든 충만이 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지식”이나 “지혜” 그리고, “영적인 깨달음” 같은 말들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사단이 얼마나 속이기를 잘하는지 아십니까?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낱말을 흉내내어 쓰기를 좋아하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의미로 사용하지 아니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이런 말들을 쓰기 오래 전에, 그 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사용했던 말이었습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의 단어를 훔쳐서 그 의미를 변질시키는 명수였습니다. 그들은 지혜와 지식을 말했지만, 정작 “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는 제거했습니다. 거짓은 언제나 진리의 언어를 빌려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그럴싸한 꼬임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만이 고차원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사단은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진리를 비틀어 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지식은 아무리 높아 보여도 결국 허망한 공허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인데, “충만하고 체험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지식”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지식”은 단순한 “그노시스”가 아니라,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인지적 이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깊어지는 인격적 앎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충만하고, 체험적인, 철저한 지식”을 강조합니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이미 감추어져 있는 보화이며, 새로운 이단 사설이 줄 수 없는 충만한 진리입니다. 이 지식은 머리에서 시작되지만 삶에서 완성됩니다. 참된 지식은 반드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도는 아주 단순합니다. “더 많이 알게 해달라”가 아니라, “더 깊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About God)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Knowing God) 지식이 영혼을 살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하나님을 기뻐하는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앎은 반드시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참된 지식은 반드시 사랑과 순종을 낳습니다.
이단은 항상 “새로운 것”으로 유혹하지만, 진리는 “영원한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십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바울이 지키고자 했던 지식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그의 기도에서 “지혜”, “총명”, “지식”이라는 말들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지혜”와 “총명”이라는 두 날개를 필요로 합니다. 지혜는 진리의 원리를 깨닫는 수직적 통찰이고, 총명은 그 원리를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수평적 분별력입니다. 지혜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하는 능력입니다. 총명은 그 지혜를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는 능력이고, 총명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고, 총명은 우리의 발걸음을 만들어갑니다. 지혜는 주님과 24시간 동행할 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영적 감각”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영혼의 눈에 낀 비늘이 벗겨져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능력입니다.
여기서 “신령한”은 인간의 이성적 추론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신령한”이라는 말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성령의 호흡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조명해 주지 않는 지식은 독단적인 철학이 될 뿐이지만, 성령이 함께 하는 지식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신령한 지혜”는 인간의 통찰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주어지는 이해입니다. 사건을 내 경험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되지만, 신령한 지혜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섭리”가 됩니다.
바울이 간구한 최종 목적은 단순히 지적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채움”이란 “가득 넘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빈틈없이 가득 차서,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계획이 빠져나간 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압도적으로 들어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천국으로 가는 지도를 가진 것과 같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은 천국을 향해 걷는 것과 같습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에베브라에 의하여 이미 복음을 받았습니다. 이미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지주의자들의 유혹을 받아, “더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오류 자체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새로운 체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더 깊은 깨달음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들은 복음을 다시 배우는 종교입니다. 성숙은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잠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체험, 새로운 방식, 이것들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깊이가 아니라,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자극입니다. 사람들은 깊이를 원하지 않고, 단지 새로움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처음 복음, 처음 은혜, 처음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더 깊어져야 합니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깊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합치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꺾기 싫어서 방황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도는 가졌으나 그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 지도는 우리를 정죄하는 근거가 될 뿐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완전히 잠기기를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환경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 상황이 아니라 영혼의 방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는 항상 더 깊이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다 알았다. 더 깊이 알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는 것이 있다면, 바닷가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는 어린아이가 바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의 정보입니까? 사람의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입니까? 텅빈 빈 잔은 반드시 채워집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유행으로 채워지면 흔들릴 것이고, 지식으로만 채워지면 교만해질 것이며, 경험으로 채워지면 중독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주님, 더 많이 갖게 해 주옵소서”가 아니라 “주님, 더 깊이 알게 해 주옵소서”, “주님, 내 삶의 모든 현장에서 나의 계획이 아닌 주님의 뜻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기보다, “하나님, 당신의 뜻을 알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그 문제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문제 해결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한 지혜와 총명입니다. 그 기도를 드리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이미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하나님입니다.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더 참된 지식입니다. 더 많은 경험이 아니라 더 깊은 깨달음입니다.
오늘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는 복된 날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땅의 떡을 구하기 전에 하늘의 신령한 복을 먼저 갈망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성령의 조명을 허락하사,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옵소서.
세상의 유혹과 이단의 그럴싸한 속삭임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지식을 붙잡게 하옵소서.
내 생각과 내 경험이라는 낡은 안경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영광스러운 안경으로 우리의 삶을 해석하게 하옵소서.
우리 심령의 빈 공간을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서 있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그 뜻에 기쁘게 순종하는 행복한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실 지혜의 근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