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혀 크리스천답지 않은
장로 사장님 때문에 힘듭니다
일터 고민
의류제조 공장에 다니고 있는데 저도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지만 우리 사장님을 생각하면 너무 속상합니다. 저도 크리스천 직장인으로서 흠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장로이기도 한 분이 직원들을 대하고 사업을 하는 과정을 보면 화가 날 지경입니다. 거래처 사람들도 욕을 많이 하고 본인은 교회에 빠지지 않지만 일이 많을 때는 언제나 일요일에도 일을 시킵니다. 교회에 행사가 있을 때는 믿지 않는 직원들도 억지로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가야 합니다. 뭔가 제가 이야기를 해주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싶은데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직장을 당장 그만 둘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닐 테지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세요.
극복을 위하여!
이재철 목사님의 책,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의 첫 장을 보면 ‘구두 속의 돌멩이’라는 이범선의 소설 <피해자>의 한 대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인공 최요한은 아버지인 최 장로가 평양에서 고아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분인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들인 자신도 고아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자란 것도 아버지를 존경할 만한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고아원 출신인 명숙이를 사랑해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아버지 최 장로는 극구 반대했습니다. 고아를 며느리로 삼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상상치 못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요한은 아버지 최 장로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의 소유자로 고아들을 긍휼히 여겨서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고아원을 운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실을 눈치 챈 명숙은 고아원을 나가 도망가고 25년이 지난 후 술집 마담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작가 이범선은 그 껍데기만의 기독교를 가리켜 ‘구두 속의 돌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돌멩이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꺼낼 수 없기에 일평생 다리를 절고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신앙 따로, 삶 따로인 전형적 이원론의 모습이지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전설을 그럴 듯하게 할리우드 식으로 각색한 영화 <킹 아더>(안톤 후쿠아 감독)에서도 구두 속의 돌멩이 같은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용맹한 사마티아 종족 등 용맹한 젊은이들을 모아 15년간 군인으로 복역시키는 로마의 용병대장 아토리우스(아더)는 일곱 명의 용맹한 부하들과 함께 누빈 전장을 뒤로 하고 명예로운 전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주교는 색슨족이 위협하는 최전선에 있는 로마인 지도자와 그 가족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결국 아토리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최후의 작전을 떠납니다.
아더는 로마와 브리튼의 피가 섞인 로마 군인으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영국 출신 수도사로 5세기 초에 로마에서 인기있는 설교가였던 펠라기우스를 신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원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가 들어설 수 없는 합리적 도덕주의로, 은혜보다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단으로 판정받았습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를 추종하는 아더는 이 영화에서 다른 어떤 크리스천들보다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 작전에 앞서서 그가 하는 기도에는 자기가 희생함으로서 부하들을 살리겠다는 숭고한 리더십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기 부하들만이 아니라 전쟁터를 누비는 사람답지 않게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생각하며 아꼈습니다. 색슨족이 추격해올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나가 그들을 보호하느라고 위험을 자초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이른바 ‘정통’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들은 탐욕적이고 사악하기조차 합니다. 주교는 교활하고 권위적이며 비열한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아더와 원탁의 기사들이 구하러 간 전방 마을의 지도자는 온 마을 사람들을 쥐어짜 축재하고 이교도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여 죽이던 사람입니다. 그도 아마 주교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비열한 짓으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고 하다가 브리튼 족 추장의 딸 기네비어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는 그의 아들조차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일상생활에서 보여준 신앙은 그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너무나 달랐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의 그 고백이 바로 이원론 신앙에 빠진 기독교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주교와 같은 로마의 주류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던 신앙은 전혀 삶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생활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모습이야말로 ‘구두 속의 돌멩이’ 같은 존재가 분명합니다.
현실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여러 장면으로 볼 수 있는 이원론은 참 고질적입니다. ‘구두 속의 돌멩이’를 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삶을 통한 예배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로님이 그런 깨달음을 스스로 얻기가 힘들 테니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래도 직원들이 겪는 어려움과 불만 사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도해보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가내수공업 형태의 작은 공장이어서 회사의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장님에게 일과 관련된 부분에서 신뢰를 얻으신다면 훨씬 그 문제를 접근하여 지적하는 일이 수월할 것 같습니다. 동료 중에 크리스천이 있다면 함께 기도하면서 직장 안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들을 고민하고 모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우리 시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반감이 매우 크기에 더욱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교성’이 아닌 진정한 ‘영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삶으로 크리스천다움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들의 반감을 해소할 방법이 없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형제님은 사장님과는 다른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삶으로 보여주는 것도 바람직한 대응입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사장님과 대화하면서 기분 나쁘지 않게 적절한 대안들을 차근차근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용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