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 탄생 (2008.4.8. 발행)
2008 - 이소연 씨, 한국 청소년들과 무선 교신 성공
이소연 “한국어로 이야기하니 반갑다” 무선교신 성공
지난 11일 부터 국제 우주정거장에 머물고 있는 이소연씨가 오늘 한국 청소년들과의 무선 교신에 성공했습니다.
이소연씨와 청소년들의 교신은 이 씨가 머물고있는 우주정거장이 한반도 상공을 통과하는 오후 7시50분쯤 부터 10분 정도 이뤄졌습니다.
우주인 이소연씨와의 교신은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한광고등학교에서 진행됐으며 전국에서 모인 15명의 초중고생들은 이 씨와 우주에서의 생활과 과학 실험 등에 관한 궁금한 점을 묻고 답했습니다.
이소연씨는 우주에 머무는 동안 러시아어와 영어로 말하다가 한국어로 의사소통해서 너무 반갑다며 청소년들이 지금 배워야할 것들을 배워 우주를 향한 꿈을 키우라고 당부했습니다.
이소연씨는 오늘 청소년들과 무선교신을 한 뒤 오는 18일 대전 국립중앙 과학관에서 또 다른 15명의 청소년들과 2차 무선 교신을 할 계획입니다.
[사회] 박경호 기자 /KBS 뉴스 2008.04.13 (20:33)
1997 - 타이거 우즈,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 (세계 메이저골프대회에서 첫 승)
미국의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가 1997년 4월 14일 마스터스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 세계 메이저 골프대회에서의 첫 승이었다. 우승이 확정되자 "타이거! 타이거!"를 연호하는 거대한 함성이 조지아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진동했다. 수만 관중이 도열한 가운데 타이거 우즈는 마치 정복자처럼 18번홀 그린으로 걸어왔다.
세계 메이저 골프대회 사상 첫 검은 피부의 우승. 골프역사에 새 장이 열리는 순간은 이렇게 찾아왔다. 우즈는 18언더파로 12타차의 압도적 우승을 확정지은 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얼과 뜨겁게 부둥켜 안았다. 콧대높은 마스터스는 이날 역사를 새로 써야했다. 사상최초의 흑인챔피언, 사상 최고스코어(18언더파 270타), 사상 최연소 챔피언(21세), 사상 최다점수차 우승(12타), 후반 54홀 사상 최고스코어, 중간 36홀 사상 최고스코어, 사상 최장타....
흑인인 아버지와 동양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우즈는 아버지의 엄격한 조력덕에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골프 신동` `골프 천재`라 불렸다. 우즈는 3살때 미국 TV의 깜짝쇼에 출연, 정규코스 9홀에서 48타를 쳐 시청자들을 기절초풍하게 했다. 우즈는 12세때 US주니어선수권 3연패, 18세때 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흑인으로 US아마오픈 우승, 최단기간 상금 1백만달러 돌파 등 일찌기 그 누구도 걷지 못한 길을 걸었다. /조선
1995 - 한국-이집트 국교 수립
이집트는 1963년 8월에 북한과 수교하였고, 한국과는 1995년 4월에 수교하였다. 1967년, 1975년 중동전쟁 때 북한의 군사지원으로 친북한 외교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1970년 중반 이후 이집트의 문호개방정책으로 외교관계로 발전, 1980년대 이후 실질 협력 관계를 수립하였다. 1999년 2월 총리 김종필의 이집트 방문 후 4월에는 대통령 무바라크의 방한으로 양국관계가 더욱 진전되었다.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항공협정, 1989년 문화·과학·기술협력협정, 1997년 투자보장협정, 1998년 무역협정, 1998년 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에는 과학기술양해각서, 외교연구원간 협력의정서에 서명하고 원자력협력의정서에 가서명하였다. /naver
1987 - 전두환 대통령, 4.13 호헌조치 특별담화
1987년 오늘, 전두환 대통령이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전 대통령은 특별 성명을 통해 '여야가 헌법안에 합의하면 개헌할 용의가 있었지만, 야당의 억지로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현행 헌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5공화국 정부는 호헌조치와 함께 폭력을 동원해 갓 설립된 통일민주당 지구당 대회를 방해했다.
국민들은 정부의 이 같은 일련의 행태를 민주화를 억압해 장기집권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곧바로 전국에서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성명과 농성이 잇따랐다.
한 달 뒤인 5월 18일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서울대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국민의 분노가 분출한다.
결국 6월 10일 재야와 통일민주당이 연대해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해 '6월 항쟁'의 기폭제를 만든다. /YTN
1977 - 한국-수단 국교수립
수단은 남북한 동시 수교의 외교정책을 쓰고 있으며, 한국과는 1977년 4월 13일부터, 북한과는 1969년 6월 21일부터 수교하였다. 이에 따라 수단에는 남북한의 상주공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한국과는 이중과세 방지협정(2001), 의료협력 협정(1993), 항공협정 가서명(1991), 무역 및 경제기술협정(1976), 문화협정(1977), 경제기술협력협정(1978) 등이 체결되었다. 1983년에는 대통령 누메이리, 1996년 외무장관 모하메드 타하가 방한하였다. /naver
- Abdul Salam Arif
1966 - 이라크의 대통령 아리프(Arif, Abdul Salam)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
아리프 [Arif, Abdul Salam, 1921~1966.4.13]
1966년 4월 아레프 대통령이 헬기 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압둘 알만 아레프 장군이 대통령 겸 총리로 취임했다.
http://clickmyfamily.com/happyboard/view.php?id=click6&no=233&page=2&fn=&fs=&fc=&f_word=&f_idx=&part=
1960년대와 70년대 북부 이라크에선 쿠르드족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1963년 압 알 살람 아레프(Aref) 대령의 쿠테타로 카쎔 정권이 무너지고 아랍연합을 목표로하는 사회주의 단체인 바트당이 집권하게 되였다. 1963년 11월 아레프 대통령은 군사쿠테타를 획책하여 바트당 통치위원들을 축출하였다. 그가 1966년 각료 2명과 함께 헬기추락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형(兄)인 모함마드 아레프(Mohammad Aref)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그 역시 1968년 핫산 소장의 군사쿠테타로 축출되었다. /Google
1963 - 소련의 체스 대가 카스파로프(Kasparov, Garry) 출생
카스파로프 [Kasparov, Garry][Weinstein, Garry Kimovich, 1963.4.13~ ]
1985년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유대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카스파로프는 6세 때 체스를 시작해 13세 때 소련 청소년 체스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6세 때인 1979년 처음으로 국제 체스 경기대회에서 우승했다. 1980년에는 국제적인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 1973~78년에 전(前) 세계 체스 선수권 보유자인 미하일 보트비니크에게 사사했고 그 이후에는 알렉산드르 니키틴의 지도를 받았다. 국제 체스 경기대회에서 연속적으로 우승을 거두게 되자 그는 세계 체스 선수권 보유자인 아나톨리 카르포프에게 도전해 1984~85년에 계속된 대전을 펼쳤다. ... /브리태니커
1931 - 스페인 공화혁명
1931년 오늘,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난다. 특히 수도원과 교회들이 많은 습격을 받았다. 주로 노동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폭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교육의 교회로부터의 분리, 토지개혁, 군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를 인정한 국왕 알폰소 13세(Alfonso XIII, 1886~1941)는 소요 와중에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스페인의 입헌군주제 통치가 종식되고 공화혁명이 성공한다. /YTN
- '노점' - '이른 아침' (공중전화 카드)
1920 - 한국의 동양화가 박래현(朴崍賢) 출생
박래현 [朴崍賢, 1920.4.13~1976.1.2]
호 우향(雨鄕). 평남 진남포(鎭南浦) 출생. 1944년 일본 도쿄[東京]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1940년부터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였다.
8·15광복 후는 남편 김기창(金基昶)과 12차례 부부전(夫婦展)을 가졌고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기창과 같이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조형실험(造形實驗)을 전개하였다.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과 제5회 국전(國展: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받고 1961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 문화위원을 역임한 뒤, 서울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또 1969년 뉴욕 플래트 그래픽 센터와 봅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판화를 연구하여 동양화의 실험적 의욕을 판화란 매체로 실현시켰으며, 1974년 귀국 판화전을 계기로 새로운 시도를 전개할 무렵, 1976년 정초에 타계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다분히 일본화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광복 후 여성 특유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설채(設彩)와 면 분할에 의한 화면구성으로 동양화의 새로운 실험을 전개하였다.
1950년대에는 극히 일상적인 시정풍경에서 모티프를 찾았으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대상을 극복한 순수추상의 세계로 나감으로써 명쾌한 정신성을 추구하였다. 채색의 장식적 톤은 종합적으로 현대 서양의 입체파가 도달한 조형방법론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작품으로 《노점(露店)》 《이른 아침》 《화장(化粧)》 등이 있다. /naver
-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 기념 (1999.4.13 발행)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되었다. 임시정부 수립은 3·1운동을 통해 나타난 민주적 정부형성의 의지와 해외 각지에서 성숙된 민주공화적 자립의욕이 복합된 결과였다. 지역적인 이점을 고려해 상하이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는 신규식이 닦아 놓은 터전 위에 이동녕·이시영의 다양한 민주공화적 전력을 승화·연결시켜 삼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를 탄생시켰다. 먼저 이동녕의 주도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와 6부의 행정부,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어 1919년 4월 13일 의정원과 사법부의 삼권분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각종 광복정책을 펴나갔다. /브리태니커
[새로운 자료 발굴] 국사편찬위 “臨政 창립일 4월 13일 아닌 11일”
일제에 빼앗기고, 6·25전쟁 중에 유실되고, 화재로 소실되고, 국내외 각지로 흩어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기록을 집대성한 1차분 자료집이 출간됐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는 3·1절을 기념해 임시정부의 헌법, 임시의정원 문서, 한일관계 사료집을 수집해 정리한 7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과 독립신문 별책자료집 등 8권을 동시에 펴냈다.
2009년까지 총 50권으로 완간될 이 자료집의 1차분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국한문판과 중문판의 원본을 실은 별책자료집이다.
독립신문은 한국인 독자를 위한 국한문판(상해판 198호)과 중국 독자를 겨냥한 중문판(발행추정치 상해판 40호+중경판 7호)으로 각각 발간됐다. 1987년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독립신문자료집에는 국한문판의 경우 177개호만 실렸으나 이번 자료집에는 189개호로 늘어났다. 그동안 한글 번역문으로만 소개된 중문판의 경우 상해판 원문 5개호와 중경판 6개호의 원문을 수록했다. 또 이번에 온전한 형태의 독립신문 창간호를 찾아내 함께 실었다.
한편 임정의 창립기념일이 지금까지 알려진 4월 13일이 아니라 4월 11일임을 보여주는 자료도 발굴됐다. 1945년 4월 의정원 회의 속기록에 보면 4월 11일 의정원과 국무위원회 합동으로 제26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자료집 편찬위원장을 맡은 김희곤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4월 13일이란 날짜는 일제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상하이 임정 사무실을 급습해 임정 자료집을 약탈해간 뒤 그 목록만 정리돼 있는 ‘조선민족운동연감’에 나온 한 줄의 기록에 의존한 것에 불과하다”며 “임정이 자체적으로 기념일로 삼았던 4월 11일로 창립기념일을 변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군사와 외교, 임정 관련 국내외 언론보도 등을 정리해 5차에 걸쳐 50권을 발간한 뒤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동아뉴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2006-02-24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602230056
1919 - 인도 암리차르 학살 사건 발생, 4천여 명 사망
1919년 4월13일 식민지 인도를 통치하는 영국의 야만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암리차르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인도 시크교 성지인 암리차르시(Amritsar) 황금사원 인근의 잘리안왈라 바그 광장에서였다. 광장에는 1919년 3월에 제정된 영국의 인도 탄압법인 롤라트법(Rowlatt Act)의 철폐를 요구하는 정치집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수천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으나 참석자 대부분은 호기심으로 참석한 인근 사원의 순례객들이었다.
1차 대전 때는 식민지 인도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화정책을 펼쳤던 영국이 전쟁 종료와 함께 태도를 돌변, 인도 독립운동에 탄압을 강화하고 나서자 실낱같은 독립의 희망을 품었던 인도인들은 배신감에 분노했다. 전쟁중에는 영국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간디도 영국정부의 태도가 여기까지 이르자 영국 지배에 반기를 들고 비협력운동을 전개하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했다.
영국군이 이날 비무장 인도인들에게 가한 무차별 사격은 400여명을 숨지게 했고 1200여명을 다치게 했다. 더구나 광장에는 출구가 하나 뿐이어서 피해가 컸다. 학살 사건 이후에도 영국은 인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만적인 형벌을 도입해 인도인들을 더욱 모욕했다. /조선
1914 - 주시경, <말의 소리> 간행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기 전에 국어문법을 확립하여 보급해야 함을 절감하고 국어국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연구결과를 저서로 발간하였다. 1906년에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고,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발간하였다. 1907년 1월에 지석영(池錫永)이 의학교 안에 국어연구회를 설립할 때 이준(李儁)의 추천으로 그 연구위원이 되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또한 주시경이 정부에 제출한 상소가 채택되어 1907년 7월 8일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그 연구위원이 되어 가장 뛰어난 연구보고서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을 제출하였다. 1909년에는 전국민에게 국문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로 『국문초학』을 간행하였고, 1910년 4월에는 『국어문법(國語文法)』을 간행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해 10월 우리나라 고전을 간행 보급하기 위하여 광문회(光文會)에 가입해서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고전을 교정하여 『훈몽자회재간례(訓蒙字會再刊例)』를 간행하고, 이와 함께 『국어사전(國語辭典:말모이)』의 편찬작업에 최초로 착수하였다. 1914년에는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각적 국어국문 연구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언어와 한글이 재발견되어 애국계몽운동기에 과학적 국어문법이 처음으로 확립되게 되었다. /Google
1906 - 아일랜드 출생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베케트(Beckett, Samuel) 출생
베케트 [Beckett, Samuel, 1906.4.13~1989.12.22]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하였다.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하고,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다가 귀국하여 모교의 프랑스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8년 이후 프랑스에 정주하여 영문·불문의 전위적 소설·희곡을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영어로 시집 《호로스코프 Whoroscope》(1930), 에세이 《프루스트론》(1931), 소설 《머피 Murphy》(1938) 등을 발표하였으며, 1945년 이후는 프랑스어로 집필하였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1952)의 성공으로 일약 그 이름이 알려졌으며, 앙티 테아트르(Anti-Theatre:反演劇)의 선구자가 되었다. 3부작의 소설 《몰로이 Molloy》(1951) 《말론은 죽다 Malone meurt》(1951)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L’Innommable》(1953)은 누보 로망(nouveau roman)의 선구적 작품이며, 그 외에 희곡 《승부의 끝 Fin de partie》(1957) 《오, 아름다운 나날 Oh! Les beaux jours》(1963) 《연극》(1964), 모노드라마에 《최후의 테이프》(1960), 소설에 《일에 따라 Comment C’est》(1961) 등이 있다.
그는 스승이면서 친구였던 조이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을 독특하게 발전시켰고, 특히 소설에서는 내면세계의 허무적 심연(深淵)이 추구되었으며, 희곡에서는 인물의 움직임이 적고 대화가 없는 드라마로 형식화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전작품을 통하여 세계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인간의 조건을 일상적인 언어로 허무하게 묘사하였다.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naver
1895 -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 패든(Fadden, Arthur) 출생
패든 [Fadden, Arthur, 1895.4.13~1973.4.21]
젊은시절에 지방정부와 주정부에서 활동한 그는 1936~58년 의원으로 활동했고, 1941~58년 지방당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내각에서 1940년 대기 및 민간항공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40~41, 1949~58년 재무부장관을 지냈고, 로버트 고든 멘지스(후에 로버트 멘지스 경이 됨)의 사임 후 5주간 총리를 지냈다. 1951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1958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 /브리태니커
1892 - 레이더를 개발한 영국의 물리공학자 왓슨 와트(Watson-Watt, Robert) 출생
왓슨와트 [Watson-Watt, Robert (Alexander), 1892.4.13~1973.12.5]
영국의 물리공학자. 스코틀랜드 퍼파셔주 브리킨 출생. 레이더의 개발로 유명하다. 던디에서 교육을 받고 세인트 앤드루스대학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1912~1921). 그 후 국립 물리학연구소의 무선연구실장이 되었다. 1919년 레이더에 관한 연구로 특허를 받고 그로부터 레이더의 정도(精度)·감도(感度)의 개선에 전념하여 1935년 마침내 이 장치에 의한 항공기 탐지의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영국 정부가 이에 대한 연구 개발을 결정하자 연구팀의 리더로서 개발을 추진, 같은해 최초의 실용적인 항공기 탐지장치를 만들어냈다. 그 후 고출력 수신기·단(短)펄스변조·펄스수신기·송수신안테나 등의 개발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레이더 기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942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naver
1885 -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문학사가 루카치(Lukács, Gyorgy) 출생
루카치 [Lukács, Gyorgy, 1885.4.13~1971.6.4]
루카치는 헤겔과 마르크스를 깊이 연구한 헝가리의 철학자·미학자·문예이론가이다. 1920년대에 그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심화했다. 1923년에 발표된 <역사와 계급의식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Studien uber marxistische Dialektik>은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저서가 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문학이론을 다채롭게 전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헝가리로 돌아가 철학 교수직과 교육부 장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때 취한 태도 때문에 루마니아에 억류되었다. 1957년 귀국 후에는 미학·존재론·윤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문학은 '인간의 의식을 통한 현실의 반영'이라는 기초 위에서 사실주의론과 변증법론을 제창해 당대와 후대의 문학이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브리태니커
"사실주의자는 예술적으로, 세계관적으로 이중의 커다란 과제를 떠맡게 된다.
첫째는 현실의 연관관계를 사상적으로 발견하고 예술적으로 형상화해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둘째는 (중략) 추상작업을 통해 가공된 연관관계들을 예술적으로 걸러내는 일, 즉 추상을 지양하는 일이다."
- 게오르크 루카치
1871 - 멕시코의 시인, 의사, 외교관 곤살레스 마르티네스(Gonzalez Martinez, Enrique) 출생
곤살레스 마르티네스 [Gonzalez Martinez, Enrique, 1871.4.13~1952.2.19]
20세기 멕시코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시골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멕시코 혁명(1911)이 일어나자 공직에서 일하기 시작해 교육부에서 일했으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외교관을 지냈다. 소네트 〈가짜 깃을 가진 백조의 목 비틀기 Tuercele el cuello al cisne de enganoso plumaje〉로 유명해졌는데, 시적 모더니즘의 지나친 경향을 공격한 이 작품은 시집 〈숨은 길 Los senderos ocultos〉에 실려 있다. 그밖에 〈바람이 전하는 말 La palabra del viento〉(1921)·〈짧은 시들 Poemas truncos〉(1935)·〈죽음의 흔적 아래서 Bajo el signo mortal〉(1942) 등의 시가 있다. ... /브리태니커
- 'The Rower'
- 'Self-portrait' - 'Les Masquez, Singuliers'
- 'My Favorite Room' - 'Woman Eating Oysters'
- 'Triumph Over Death' - 'Old Lady with Masks'
1860 - 벨기에의 화가 앙소르(Ensor, James) 출생
앙소르 [Ensor, James, 1860.4.13~1949.11.19]
오스텐드 출생. 근대회화의 귀재로서 뭉크, 호들러와 함께 표현주의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브뤼셀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후에 아카데미즘을 반대하여 자퇴하고 인상파적 그룹인 'XX'를 부흥시킨 기수가 되었다. 초기에는 드가, 고흐, 터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1883년경부터는 선배인 보슈, 브뢰겔을 연상케 하는 환상·괴기·풍자의 방향으로 바뀌면서 가면·해골·망령 등을 주요 테마로 삼았다.
대표작으로는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入城)》이 꼽히며, 이 밖에 비구상에 가까운 《성 앙투안의 고난》이라든가 해안풍경을 다룬 와토풍(風)의 작품에서도 눈부신 색채기법을 보였다. /naver
1832 - 에콰도르의 작가, 평론가 몬탈보(Montalvo, Juan) 출생
몬탈보 [Montalvo, Juan, 1832.4.13~1889.1.17]
에콰도르의 작가, 평론가. 20대부터 탁월한 필치로 알려졌다. 외교관으로서 파리에 건너갔다가 1860년에 귀국하였다. 당시의 가르시아 모레노의 독재정치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1875년 독재자가 죽은 후에도 집요하게 국내정치의 쇄신을 부르짖었기 때문에 거의 영구추방이라는 형식으로 망명, 만년을 파리에서 보냈다.
강렬한 개성을 숨긴 낭만적인 개인주의자로서 그 문장은 고전적이라 할 만큼 단정하고 절도를 갖추고 있다. 그는 자유를 절규한 남미 에세이의 선구적 작가이다. 주요저서로는 《7개의 논책(論策) Los siete tratados》(1883), 《세르반테스가 쓰기를 잊어버린 장(章) Capitulos que se le olvidaron a Cervantes》(1895) 등이 있다. /naver
1825 - 아일랜드계 캐나다의 언론인, 정치가 맥기(McGee, Thomas D'Arcy) 출생
맥기 [McGee, Thomas D'Arcy, 1825.4.13~1868.4.7]
아일랜드계 캐나다의 언론인, 정치가. 캐나다의 연방제 수립운동 당시 정치 연설가로 활동한 아일랜드계 캐나다의 작가.
아일랜드의 애국지사인 맥기는 청년 아일랜드 당의 기관지 〈네이션 The Nation〉(1846~48)지에 관계했다. 1848년 아일랜드인의 봉기에 가담했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 도피해 뉴욕판 〈네이션〉지와 〈아메리칸 켈트 American Celt〉지를 발간했다. 그는 점차 극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혁명보다는 평화적 개혁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1857년 그는 캐나다로 건너가자 곧 활발하게 공직생활을 시작해 1858년 캐나다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이래 평생을 의원으로 지냈으며, 1860년대에는 여러 행정부에서 장관직을 역임했다. 한편 그는 1870년 영국령 캐나다 식민지 연방 구성을 지휘해 캐나다인들의 운동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 /브리태니커
Thomas D'Arcy McGee, PC, (April 13, 1825 – April 7, 1868) was an Irish Nationalist, Irish-Canadian journalist, Father of Confederation, and, to date, the only Canadian victim of political assassination at the federal level.
http://en.wikipedia.org/wiki/D'Arcy_McGee
1808 - 이탈리아/미국의 전화기 발명가 메우치(Meucci, Antonio) 출생
메우치 [Meucci, Antonio, 1808.4.13~1889.10.18]
이탈리아, 세계 최초의 전화 발명자 안토니오 메우치 우표 발행 (2003.5.28)
이탈리아 “진짜 전화발명자 메우치 알리자”
이탈리아 정부는 최근 자국 출신의 안토니오 메우치를 세계 최초의 전화 발명자로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하는 등 본격적인 복권작업에 나섰다고 2일 영국 <비비시방송>이 보도했다.
흔히 전화를 처음으로 발명한 이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메우치가 벨보다 훨씬 앞선다.
180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메우치는 42살 때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직장에서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와 통화하기 위해 전화를 발명해 1871년 특허 출원까지 했으나, 투자자를 만나지 못해 실패했다. 5년 뒤 벨이 다시 특허 출원을 해서 상용화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모든 이의 기억 속에 ‘전화 발명자’로 남게 됐다.
반면에 메우치는 가난에 시달리다 1889년 81살의 나이로 쓸쓸하게 숨졌다. 오랫 동안 잊혀졌던 그의 이름은 지난해 6월 미 하원이 그를 공식 복권시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다시 부활했다. 미 하원은 “만약 메우치가 10달러만 갖고 있었다면 특허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벨에게 특허권이 넘어갔다”며 메우치를 ‘전화 발명자’로 공식 인정했다.
메우치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최근 이탈리아를 방문한 메사추세츠공과대학 과학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티는 그러나 “새로운 걸 발명하고도 돈을 벌지 못한 이가 메우치만은 아니다”라며 “벨 역시 빈곤 속에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박찬수 기자 /한겨레 2003-06-03
전화기의 발명자로 안토니오 메우치를 복권시키는 결의안이 미국 하원 통과 (2002.6.16)
전화기의 발명가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Bell, Alexander Graham, 1847~1922)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Meucci, Antonio, 1808~1889)라는 사실을 미국 하원이 표결을 통해 마침내 인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7일 '전화기와 관련된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며 이같이 보도하고, 이번 표결 결과에 이탈리아인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지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하원은 16일 메우치가 발명해 1860년 뉴욕에서 시연됐고 당시 현지 언론에도 보도된 '텔레트로포노(Teletrofono)'가 최초의 전화기이며, 벨은 메우치의 자료를 입수해 16년 뒤에 특허를 받아낸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메우치 사후 113년 만에 인정했다.
그동안 벨의 자서전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메우치의 사연을 아는 여러 세대의 이탈리아인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메우치는 전기충격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소리가 구리선을 통해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본격적인 기술개발을 위해 1850년 뉴욕으로 향한다.
그는 특히 몸이 마비된 아내를 위해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 1860년에 공개 시연회를 열었다. 이 기계를 보다 정교하게 고친 그는 영구 특허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어 1871년 1년짜리 임시 특허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는 제품 상용화를 위한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으며, 3년 뒤에는 임시 특허조차 갱신하지 못했다.
그러자 메우치와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던 벨은 1876년 특허를 내고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을 맺어 큰 돈을 벌며 유명인사가 됐다. 메우치는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 재판은 승리를 눈앞에 둔 메우치가 1889년 숨지면서 중단됐다.
(부산일보 2002) /Google
1771 - 영국의 기계기술자, 발명가 트레비식(Trevithick, Richard) 출생
트레비식 [Trevithick, Richard, 1771.4.13~1833.4.22]
1771년 4월 13일 콘월주 일로건에서 출생하였다. 광산가 집안에서 태어나 볼턴-와트 상회에서 증기기관의 운전·조립을 담당한 후 독립하여 기계공장을 설립하였다. 1800년에 빔 연접봉형(連接棒型)의 고압복동기관(高壓複動機關)을 처음으로 제작하여 권양기(winch)가 필요한 콘월의 광산에 설치하였다. 1801년 도로용의 증기차를 설계하여 시운전에 성공하였고, 1802년 다시 빔형의 실험양수기관(揚水機關)을 만들었으며, 1804년 주철레일을 달리는 증기기관차의 시운전에 성공하였다.
1812년 콘월식의 이름으로 알려진 양수용 고압기관은 효율이 높아 19세기 말까지 상수도용으로 보급되었다. 그 밖에 1815년의 플랜저 폴기관(특허)이나 탈곡·제분 등의 농업용기관도 제작하였으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naver
- 'Master Lambton - 'The Calmady Children'
- 'Pinkie, Miss Sarah Moulton Barrett'
- 'Master Lambton' - 'Mrs. Edward Foster'
1769 - 영국의 초상화가 로렌스(Lawrence, Thomas) 출생
로렌스 [Lawrence, Thomas, 1769.4.13~1830.1.7]
브리스틀 출생. 어려서부터 소묘(素描)에 뛰어난 자질을 지녀, 10세부터 크레용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J.레이놀즈를 존경하였고 잠시 아카데미에서도 공부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레이놀즈 사망 후 23세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당시 섭정(攝政)이었던 조지 4세의 명령으로, 대(對)나폴레옹 전쟁에 관여하였던 유럽의 여러 군주 ·외교관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주목을 끌었다. 일생 동안 우미(優美)함과 귀족취미로 인기를 지켰다. 주요작품으로 《웰링턴 장군》(1815) 《교황 비오 7세》(1819) 《글로스터 공주(公主)》(1826) 등이 있다. /naver
- USA, 2 Dollars (Banknote)
1743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제퍼슨(Jefferson, Thomas) 출생
제퍼슨 [Jefferson, Thomas, 1743.4.13~1826.7.4]
버지니아주(州)에서 태어났다. 윌리엄앤드메리대학교를 졸업하고 1767년 변호사가 되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아 정계로 진출하여 1769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1775년 버지니아 대표로서 제1·2차 대륙회의에 참가하였고, 1776년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유와 평등을 외쳐 미국 건국의 이상이 되었던 그해 7월 4일의 독립선언문은 주로 그가 기초한 것이다. 그후 버지니아로 돌아와 주의회 의원·주지사 등을 지냈고, 봉건적인 장자상속제의 폐지와 정교(政敎)분리를 위한 신교(信敎)자유법의 제정에 노력하였다.
1783년 연방의회 의원이 되자 달러를 단위로 하는 통화제도와 오하이오강 북서부지역에 관한 정부안을 입안하여 신생공화국의 기초를 닦는 데 이바지했다. 1785년 프랑스 주재공사에 임명되고, 1790년 G.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정부제를 주장하는 재무장관 A.해밀턴과의 정책대립으로 1793년 사임하였다. 해밀턴이 주도하는 연방파(聯邦派)에 대하여 민주공화당을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민주당의 기원이다.
1796년 부통령, 1800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새 수도 워싱턴에서 취임식을 거행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중 문관의 무관에 대한 우월, 소수의견의 존중, 종교·언론·출판 자유의 확립 등에 주력하고, 1803년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만(灣)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지금의 루이지애나)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영토를 거의 배가(倍加)하는 한편, 나폴레옹전쟁에 의하여 국제긴장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유지하면서 중립을 지켰다.
1804년 재선되고, 1809년 4월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후 버지니아의 몬티첼로에 돌아가 1819년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학장에 취임하여 민주적 교육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한 철학·자연과학·건축학·농학·언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몬티첼로의 성인(聖人)'으로 불리었다.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에 사망하였다.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정해 놓았다는 묘비명 "미국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교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가 유명하다. /naver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 토머스 제퍼슨
1742 -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The Messiah> 초연
메사이아 또는 구세주라고도 한다. 헨델(Händel, Georg Friedrich, 1685~1759)의 대표작이자 동서고금을 통틀어 종교음악의 백미로 꼽힌다. 영국의 시인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가 성서와 기도문를 인용하여 영어로 쓴 대본을 바탕으로 헨델이 56세 때인 1740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예언과 탄생> <수난과 속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3부로 구성되며, 테너의 독창 <그대들 나의 백성을 위하라>로 시작하여 아리아와 합창곡 등 53곡이 연주된다. 연주시간은 약 2시간 20분이다. 초고가 완성된 뒤 헨델이 연주회를 거듭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악보를 수정하였기 때문에 정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서사적 묘사라기보다도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강력히 호소한다. 알기 쉬운 웅장한 표현 속에 생생한 종교적 감동이 잘 나타나 있다.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열린 자선행사에서 초연된 이래 지금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세계 각처의 자선연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1743년 3월 23일 런던의 왕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국왕 조지 2세는 제2부의 마지막 곡 <할렐루야 코러스>가 합창되자 감동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오늘날의 연주회에서도 이 곡이 합창되면 청중이 기립하여 감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naver
1721 - 미국 독립전쟁 지도자, 연합헌정하의 대통령 핸슨(Hanson, John) 출생
핸슨 [Hanson, John, 1721.4.13(4.14)~1783.11.22]
메릴랜드 의원(1757~79)으로서 메릴랜드를 대표해 대륙회의(1780~82)에 참석했다. 1781년 11월 5일 대륙회의에서 의장에 선출되어 1년 동안 직무를 수행했다. 때때로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회의 일정을 주재하는 공직자에 불과했으며 헌법하의 대통령이 갖는 권능은 전혀 없었다. ... /브리태니커
1695 - 프랑스의 우화작가 라퐁텐(La Fontaine, Jean de) 사망
라퐁텐 [La Fontaine, Jean de, 1621.7.8~1695.4.13]
샹파뉴 지방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1641년 오라토리오회(會)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법률을 공부하면서 F.모크루아, 퓌르티에르 등의 문인과 교유하였다. 1658년 재무장관 푸케에게 장시(長詩) 《아도니스 Adonis》를 바치기 시작하여 1661년 그가 실각할 때까지 어용시인으로서 수많은 소시편(小詩篇)을 바쳤다. 푸케 실각 후에는 오를레앙 대공(大公) 부인, 드 라 사블리에르 부인, 델바르 부인 등의 집에 기식하면서 몽상가적인 성격과 천진난만성으로 재미있는 여러 일화를 남기고 생애를 마쳤다.
우화시인(寓話詩人)으로서 불후의 명성을 남긴 그의 작품 종류는 다양하다. 그외에도 서정소시(敍情小詩), 서간시(書簡詩), 보카치오와 아리오스토 등으로부터 취재한 풍류담(風流譚) 《콩트와 누벨 Les Contes et Nouvelles en vers》(1665∼1685), 아풀레이우스에게서 주제를 얻은 소설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이야기 Les Amours de Psyché et de Cupidon》(1669), 성인전(聖人傳)에서 취재한 《성(聖)말크의 수인(囚人)의 시 Poème de la Captivité de Saint Malc》(1673), 키니네의 효용을 노래한 《키니네송(頌) Poème de Quinquina》(1682)을 비롯하여 테렌티우스의 번안 《환관(宦官) L’Eunuque》(1654)과 시정사건(市井事件)에서 취재한 소극(笑劇) 《보리샤르의 익살꾼》(1659 상연?) 등 극작에도 손을 대어 《다프네》(1682) 등 오페라 대본도 썼다.
그의 대표작은 12권으로 이루어진 《우화시집 Fables》(1668∼1694)으로, 약 240편의 우화시가 엮어져 있다. 예지와 교묘한 화술로 폭력을 제압한 고대의 노예 이솝에 대한 공감과 우화의 장르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흥미에서 출발하여 이솝 ·동양 우화를 비롯한 다양한 소재를 독창적 수법으로 다루어 서정 ·풍자 ·경묘(輕妙)한 대화 ·콩트풍(風) 등 모든 패턴을 구사(驅使), 일종의 자유시형으로 노래하였다. 시구(詩句)의 거의 완벽한 음악성 및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희극을 부각시키는 절묘성 등은 후세의 모방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에게까지 친숙한 프랑스 유일의 우화작가로 알려져 있다. /naver
1598 - 앙리 4세, 낭트칙령(Edit de Nantes) 공포
1598년 4월 13일 앙리4세(Henri IV, 1553~1610)가 낭트에서 프랑스의 신교도에게 조건부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 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1598)을 종식시킨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앙리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이분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했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때부터 신교도도 비로소 공직을 가질 권리가 생기고, 예배와 관혼 상제의 집행, 유언의 등기 등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신교도의 최고회의·목사회·서임권 등도 공인됐다. 또한 칙령은 비밀조항으로 백 수십 곳의 도시에 신교도의 자치특권을 인정했다. 그로 인해 그 도시들이 신교도의 무장지역이 되어 반란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톨릭 측은 계속 불만을 드러냈고, 결국 절대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17일 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의 권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서 프랑스에 많이 살던 약100만 명의 신교도 중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근면한 상인·기사·공예인·군인이었으므로 프랑스로서는 적지 않은 손실을 보아야 했다. /조선
1397 - 흥인지문(동대문) 창건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 도성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대문이라 한다.
1397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함께 건축, 이듬해 낙성되었다. 지금의 동대문은 1896년(고종 6) 개축한 것이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모룻돌[臺石(대석)]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 2층 누각을 세웠다.
문 바깥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어를 견고히 하였다. 누각은 상하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다포계 형식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기부의 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어 공포(拱包)를 짰는데, 공포의 하층은 내3출목·외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모두 3출목이다. 그 형식은 살미[山彌(산미)]가 외부로 뻗어나와 수서[垂舌(수설)]와 앙서[仰舌(앙설)]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 끝이 운공(雲工)으로 되었으며,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두고 있어 조선 말기 양식의 특징을 나타낸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 연결되었고 내측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를 이룬다. 같은 도성 내의 숭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 성문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1996년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 작업에 의해 <서울동대문>에서 <서울흥인지문>으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보물 제1호. /yahoo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