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의 인문지리> 급격히 변모하는 산업화와 공업화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전통적인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우리의 것보다는 외래의 문물을 선호하고 동경하여 전통문화가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십여 년 전에 안성을 다녀오고 다시 안성에 가지 않았다가 최근에 안성을 찾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변한 안성의 모습에 깜짝 놀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안성 인터체인지로 빠져 나와 공도면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넓게 뚫린 도로와 높이 솟아올라 있는 일군의 고층 아파트 단지, 그리고 대단위 공업단지. 읍내로 들어서게 되면 더욱 놀라게 될 것이다. 시골로만 기억되던 곳이 서울 명동의 거리를 옮겨 놓은 듯한 까페와 옷가게들. 안성은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안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안도감과 또 다른 기쁨을 느낄 것이다.
안성시는 경기도 최남단에 위치하며, 동쪽은 이천군과 충청북도 음성군, 서쪽은 평택시와 송탄시, 남쪽은 충청남도 천안군과 충청북도 진천군, 북쪽은 용인군과 접하고 있다. 시의 동쪽은 차령산맥이 뻗어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그 중에 비봉산(飛鳳山, 373m)․마이산(馬耳山, 472m)․덕성산(德城山, 521m)․칠현산(七賢山, 516m)․서운산(瑞雲山, 547m) 등이 높이 솟아 있다. 또 이 산맥에서 갈라져 시내의 곳곳에 덕암산(德岩山,165m)․고성산(高城山,298m)․천덕산(天德山,336m)․비봉산(飛鳳山, 278m) 등의 산과 구릉이 분포한다. 산맥의 북부 산록지대를 서쪽으로 흐르는 안성천이 도중에 한천(漢川)과 합치고, 다시 황구지천(黃口只川)․청룡천(靑龍川) 등과 합류하여 하천유역에 죽산분지(竹山盆地)가 발달되었다. 저수지로는 금광저수지(金光貯水池)․고삼저수지(古三貯水池)․마둔저수지(馬屯貯水池)․칠곡저수지(七谷貯水池)등이 있어서 농업관계용수로 이용된다. 연평균 기온은 11.5℃, 1월 평균기온 -4.9℃, 8월 평균기온 26.6℃, 연 강수량 1,100~1,200mm 내외이다. 안성에서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유물이 발견된 것은 거의 없고, 대덕면 대농리와 양성면 동항리에서 마제돌화살, 구리거울 등이 출토 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에는 진국(辰國)에 속하였으며, 백제 비류왕 초기에는 안성천을 경계로 마한과 국경을 이루어, 백제의 마한지역 병탄정책을 수행한 귀중한 병참기지였고, 그 뒤 369년(근초고왕24) 백제가 마한 전역을 수용할 때까지도 백제의 영토였다. 그 뒤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영토를 점령한 후, 양원왕 때까지 내혜홀(奈兮忽)로 불렸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16)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 백성군(白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인 1236년(고종23)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죽주성(竹州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冑)가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수주일 동안 선전하여 적을 격퇴시켜 적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1361년(공민왕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송도가 유린되고 왕이 안동으로 몽진하는 국난을 당하였을 때도, 양광도(楊廣道, 지금의 경기도)의 수원을 비롯한 다른 고을은 모두 항복하였으나 이곳 사람들은 계책으로 적에게 거짓 항복하여 주연을 베풀어 적을 안심시킨 후 기습공격을 하여 적장 6명을 참수하는 개가를 올려 적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송도를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된 극적루지(克敵樓址)가 현재 안성시내에 있으며, 이 공로로 1362년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안성군은 고려 현종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해 있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1413년(태종13)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죽주는 이때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되어 현감이 배치되었고 세종 때에 다시 경기도로 귀속되었다. 1914년 안성군․양성군과 죽산군 일부를 병합하여 안성군이 되었고,1937년에는 안성면이 안성읍으로 승격 되었고, 지금은 안성시가 되었다. 안성의 유교문화재로는 덕봉서원․안성향교․양성향교․죽산향교와 도기서원터․남파서원터․동안강당터 등이 있으며, 불교문화재로는 칠장사의 혜소국사비․대웅전․소조사천왕상․죽산리 5층석탑․봉업사 석불입상․석남사 대웅전․석남사 마애여래입상․청룡사 대웅전․청룡사 사적비․기솔리 미륵불․태평미륵불상․죽산리 석불입상․ 대농리 미륵불상․청원사 7층석탑 등이 있다. 그리고 청룡사․칠장사․청원사․운수암․용화사․석남사․약천암․서운암 등 현존하는 전통사찰 외에 다수의 절터가 남아있다. 안성의 중요 민속놀이로는 남사당(南寺黨)놀이와 거북놀이를 들 수 있다. 또 동제(洞祭)로서 마욱산의 산신제와 방초리의 천제는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산신제는 아직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이 매년 음력 10월 초순에 행해진다. 원래 남사당놀이는 전국적으로 펼쳐 있지만 그 원조는 역시 안성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 명종 때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1860년대 서운면 청룡리에는 남사당 집이 여덟 채가 있다고 하여 <팔 사당 마을>이라고 불렀고, 바우덕이(박우덕, 또는 김엄덕)라는 이가 남사당의 꼭두쇠로서 재질이 총명하고 소고와 춤에도 뛰어나 다음과 같은 속요(俗謠)까지도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놀러가세 놀러가세 바우덕이 집으로 놀러가세 돈나온다돈나온다 바우덕이는 소고만 잡아도 돈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쏟아진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안성 남사당패는 그 뒤 안성 복만이패-원육덕패-이원보패로 이어지는데,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을 서며 쇠가락을 전수받은 김기복(金基福)은 오늘날 안성 남사당 풍물 놀이에서 상쇠로 전통 웃다리의 쇠가락을 치고 있다.
설화는 오뉘 힘내기 전설, 달래지 고개 전설 및 사찰 유래담과 많은 인물의 전설, 효자전설 등이 전하고 있고, 조선 충신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명나라를 일으켰다는 주원장(朱元璋)에 관한 설화, 명의 이제마(李濟馬)의 출생담, 정약용의 명재판, 황희(黃喜)정승 이야기, 개와 고양이의 구슬다툼, 다시 찾은 옥새 등 많은 설화가 전한다. 또한 구비 전승되는 노동요로는 논매기소리․모내기소리․나뭇꾼소리 등이 있고, 의식요로는 상여소리․달구소리, 그리고 정월이나 팔월 추석에 거북놀이를 할 때 부르는 <고사반>이 있다. 안성민요의 특징으로는 '밭노래' 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고장이 논농사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안성은 안성평야를 중심으로 논농사가 활발하여 1989년 총 경지면적은 189.95㎢로 경지율이 34.36%이며, 그 가운데 논은 128.01㎢로서 67.45%이고 밭이 61.64㎢로 32.65%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의 주곡과 배추․무․고추 등의 채소류, 배․포도 등의 과실류와 잎담배, 인삼 등인데, 그 가운데 특히 안성포도는 유명하다. 그 중 채소류는 공도면․일죽면에서, 인삼은 보개면․양성면에서, 잎담배는 일죽면․이죽면에서 많이 산출된다. 부업으로 누에치기를 하며, 소․젖소․돼지․사슴․닭 등의 사육도 활발하여 약 40여 개 소의 낙농장이 공도면․미양면․원곡면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임산물로는 밤․ 은행․대추․표고 등이 산출된다. 특히 유기는 '안성유기'로 옛부터 유명하며, 또한 제2의 개성(開城)이라고 할만큼 상업으로 유명하다. 상업활동은 3개의 5일장과 2개의 일반시장이 있다. 안성지방은 옛날부터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잇는 삼남(三南)도로의 요지였고, 또 안성평야의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하는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따라서, 안성장은 전국을 상대로 하는 농산물 및 유기제품, 가죽이나 수공업품의 거래가 활발하였다. 현재도 2일․7일에 열리는 안성장에는 안성 쌀과 안성 포도를 비롯한 청과물류의 거래가 활발하고, 우시장에서는 진천군․천안군․평택군 등지에서 출하되는 소와 젖소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미륵신앙> 미륵불 또는 미륵보살에 대한 불교신앙으로 지난날 석가모니불이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하여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한 것을 근거로 삼고, 이를 부연하여 편찬한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이 삼부경은 각각 상생(上生)과 하생(下生)과 성불(成佛)의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閻浮提)로 내려와서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미륵신앙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다. 원래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된 마이트레야는 자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한자문화권에서는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불러왔다. 관세음보살을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되고 있다. 미래불 미륵은 석가보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 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에 근거하여 출현하였고, 자씨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미륵하생경』과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고, 지금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하여 56억7천만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츰 늘어 8만세가 될 때에 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며, 3회의 설법으로 272억인을 교화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심을 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자세가 곧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미륵보살을 믿고 받드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때에는 현재 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上生), 또는 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下生) 염원하며 수행하는 신행법이 인도․중국․티벳․한국․일본 등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현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이념으로서, 지나치게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불교가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형태가 곧 미륵신앙이다. 미래사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불교사 속에서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미륵신앙은 면면히 이어오면서 많은 영향을 끼쳐오고 있다. 우리 나라 지명이나 산 이름, 절 이름 등에 미륵․용화․도솔 등이 자주 쓰였던 것도, 각 절에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彌勒殿)이 흔히 있는 것도, 상당수의 미륵불상이 전하여지고 있는 것도, 미륵신앙에 얽힌 설화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도 모두 미륵신앙의 영향이었다. 신라시대의 화랑(花郞)과 미륵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은 분명 미륵신앙의 신라적 수용의 한 특징이었다. 미륵신앙의 이상세계를 신라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 시키고자 하였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미륵이 출현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미륵신앙은 주로 하층민의 희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안성유기(安城鍮器)
우리 나라에는 세계적으로 특이한 <놋쇠>라는 금속이 있다. 이 놋쇠로 식기를 비롯하여 촛대, 향로, 대야, 악기, 불구(佛具) 등 다양한 일상 생활 용품이나 기구를 만들어 썼다. 놋쇠로 만든 이러한 제품들을 통틀어 '유기 제품' 이라고 한다. 한국인에게 누구나 친숙했던 은은한 광택을 내는 노르스름한 색의 놋 제품들은 현대의 합금 제품이나 화학 제품에 밀려 더 이상 생활 용품으로서 자리를 잃고 말았지만 조선조 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폭넓게 쓰였던 극히 일반적인 생활 필수품으로서 전국 각 지역에 고루 분포되었던 전통적인 생활 용구였다. 영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 「기집조(器什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통속적으로 놋그릇을 중요시하여 사람들은 반드시 밥, 국, 나물, 고기까지 일체의 식탁 용기로 놋그릇을 사용한다. 심지어는 세수대야까지도 놋쇠로 만든다." .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서 양반가를 비롯하여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실생활 용구로서 놋제품이 얼마나 널리 대중화되었는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북쪽의 산간 지방에서는 놋동이․놋양푼․놋요강․놋버치․놋상 등 비교적 큰 것들을 만들어 썼으며, 중부지방에서는 안성지방을 중심으로 반상기(飯床器)와 제기(祭器)등의 작은 식기류를 주로 만들어 썼다. 질이 좋은 놋쇠는 전통적인 유기 제작 방법인 '방짜(方字)'기법으로 제작하였다. 방짜기법이란 구리와 주석(朱錫)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 제품 제작 기법이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그 수요가 늘어나자 손으로 일일이 두드려서 만들던 방짜기법 대신 손쉬운 주물(鑄物)기법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이 주물 유기는 방짜 유기의 합금비율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서 대량 생산하던 합금쇠를 <퉁쇠>라고 해서 전통적인 놋쇠와 엄밀히 구분했다. 안성지방의 주물 유기장인 김근수(金根洙)씨는,
"해방이전의 장인들은 경험에 의해 유기 성분을 상쇠․중쇠․하쇠로 나누고 상질의 쇠인 놋쇠는 유철(동 70~72%+주석28~30%), 중간질은 청철(동 80~85%+주석 15~10%)로 불렀다."
라고 말한다. 유기의 재료는 성분과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구리를 기본으로 하는 비철금속과의 합금을 말한다. 따라서 그 시원(始原)은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청동기시대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 주요한 이기(利器)의 재료에 따라 구분하는 고고학상의 시대 분류법에 따른 중간 시기를 말한다. 이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3천 년경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거쳐 한반도에 전파되었다. 이 시기는 인류역사에 있어 최초로 합금이 발명된 때였으며 이 기술로 청동의 야금술(冶金術)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생활의 이기들이 제작, 사용되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꺽창․투겁창․동검 등의 무기류와 청동세문경(靑銅細紋鏡), 방울 그리고 의기류(儀器類), 장신구(裝身具)등은 매우 정교하다. 각종 기하학적 추상무늬의 특이한 조형이 매우 정교한 주조기법(鑄造技法)으로 만들어졌다. 평양지방의 낙랑에서 비롯된 금속공예는 한반도의 문화와 기술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낙랑을 몰아내고 그들 한족(漢族)이 지녔던 금속 가공기술을 익히게 된 삼국시대인들 새로이 금 . 은의 채광법(採鑛法)과 야금술(冶金術)을 발전시켜 나갔다. 『삼국사기』 권3의 기록에 보면 경덕왕(景德王;742~765)이전인 8세기경 신라는 철유전(鐵鍮典)이란 기구를 두고 철과 유석을 관장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는 금속의 재료면으로나 기술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유석은 유기의 재료가 되었으며 이 합금을 특별히 '신라동(新羅銅)' 이라고 불렀고 이는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또한 동합금으로 종과 불상 등 불교 미술품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유명한 황룡사 대종과 봉덕사 대종의 독특한 양식과 기능미는 신라인의 금속 공예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신라의 유물들이 고려시대의 금동미륵보살상, 반가사유상, 범종 등 불교 조각품들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매우 우수한 명품들이라는 것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이는 금속 공예가 중국에서 전달되었지만 한반도에 전래된 뒤에 독자적인 금속 가공 문화를 확립해 왔을 뿐만 아니라 멀리 청동기시대부터 닦아온 기예의 결과였다고 하겠다. 12세기에 들어와 고려에서는 각종 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궁중과 반가(班家)에서 놋그릇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이는 고려시대의 문헌과 출토된 유물로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식기로 추측되는 현존 놋그릇들은 동체가 아주 얇고 질기며 거의 대부분이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서 방짜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문헌에도 "식기로 쓰이는 유기의 재료는 동과 주석만의 합금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물 식기보다는 방짜식기가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유기의 진가가 매우 높았을 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는 주석이 채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어떠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숭유배불 정책의 영향으로 불교적 색채를 띠는 금속 공예품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대신 담배함․화로․향로․반상기 등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용품과 민예품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 고유의 합금인 놋쇠로 만든 유기가 언제부터 밥그릇 등의 식기로 대중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각종 관청에 각 분야별로 일정수의 장인을 예속시켰다. 『경국대전』의 경공장(京工匠)․외공장(外工匠) 조항에 규정된 장인의 수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경공장은 본조(本曹)에는 놋쇠의 장인인 유장(鍮匠)을 여덟 명 두었고, 외공장은 경기도에 세 명, 충청도에 네 명, 경상도에 일곱 명, 전라도에 여섯 명, 강원도에 두 명, 황해도에 두 명, 영안도(함경도의 옛 지명)에 네 명, 평안도에 여덟 명 등 전국에 마흔 네 명의 유장을 두었음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밖에 민간에도 유기장들이 산재해 있어서 대중적으로 상당량의 유기가 제작되었으리라 추정되는데, 이는 『명종실록(明宗實錄)』 의 "관하(官下)의 장인이 모자랄 때는 사장(私匠)을 불러다 썼다" 라는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각 지방에는 유기점이 따로 있어서 각종 유기를 다루었다. 이러한 유기점을 '놋점'이라고 했으며 일반 백성들은 이곳에서 사서 썼고 각 지방의 양반가나 부호들은 맞춤 그릇을 썼다. 특히 안성의 맞춤 유기는 유명하여서 '안성맞춤'이란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명물이었다.
그러면 안성에서 재현되고 있는 전통 주물 유기법의 공정을 알아 보자. 현재 중요 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 기능 보유자 김근수씨가 제작하고 있는 주물유기의 공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부질(주물)작업 ; 부질이란 녹인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과정을 말하며 부질하는 곳을 부질간, 부질하는 장인을 부질대장이라고 부른다.
갯토 만들기 ; 갯토란 주물사를 말한다. 일명 '해토'라고도 하는데 밀물과 썰물이 교차될 때 가라앉는 모래도 흙도 아닌 앙금이다. 이것을 건조시킨 후 체로 곱게 쳐서 간수 처리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처리한 갯토는 각종 기물의 본을 넣는 틀에 다져 넣어 쇳물을 붓는 원형 거푸집을 만드는데 쓰인다. 주물할 수 있는 기물의 본을 번기(番器)라고 한다.
쇳물 끓이기(용해과정) ; 주물할 금속을 합금 비율로 도가니에 담고 이 도가니를 화덕 속에 넣는다. 계속 풀무질을 해가며 용융 상태를 살핀다. 금속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보통 유철인 경우 섭씨 900도 이상에서 쇳물을 끓이게 된다.
번기(番器)형태 만들기 ; 쇳물을 준비하는 동안 부질대장은 쇳물이 들어갈 번기의 형태를 만든다. 즉 개토판 위에 틀을 놓고 그 위에 송탄가루를 뿌린 후 갯토를 넣어 다진다. 표면을 잘 다듬고 모지래로 본틀 주변에 물칠을 한 후 엎어서 번기를 살짝 들어올리면 거푸집의 암틀이 된다. 암틀 한쪽에 무집이라 하여 쇳물이 들어가는 길을 만든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수틀을 만든다.
그을음질하기 ; 그을음질을 하면 쇳물이 잘 스며들고 그것을 단단히 말리기 위해 암틀과 숫틀 윗면을 엎어놓고 그을음질하게 된다.
쇳물붓기 ; 암틀을 등가래(쇳물을 부을때 가스가 생기면 튈 우려가 있으므로 벽에 밀착시켜놓는 판자를 말한다)에 밀착시키고 수틀을 밀어 넣는다. 끓인 쇳물을 붓기 전에 도가니 위의 불순물을 제거한 후 유석을 첨가함으로써 온도를 맞춘다. 이후 완성된 번기틀의 유구(쇳물 주입구)에 붓는다.
가질작업 ; 가질이란 부질하여 만들어진 기물의 형태를 깍고 다듬는 것을 말하며 가질하는 곳을 가질간, 가질하는 장인을 가질대장 이라고 부른다. 가질틀과 가질칼은 가질간에서 가장 중요한 공구이다. 가질틀이란 양발을 교대로 눌러서 부착된 기물이 돌아가며 깎일 수 있도록 만든 돌림틀이다. 현대의 모터에 의한 회전틀과는 달리 감각적으로 모양을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 발틀의 장점이다. 가질틀의 윗부분에 장부(기물을 끼운 머리목을 박아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가 있어 기물에 알맞는 머리목을 고정시킨 후 다시 주물된 기물을 끼워넣고 질나무에 가지칼을 대고 속도를 발로 조정하며 수 차례 반복하여 깎게 된다. 이 때 모칼과 평칼을 사용하여 세밀히 깎아 다듬는다.
마무리작업 ; 가질 작업이 끝난 후 쇠기름에 곱게 빻은 기왓가루를 혼합하여 걸레에 묻혀 가질틀에 대고 돌리면 소박하고 은은한 유기의 광을 얻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광내는 작업으로 마무리짓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굽과 기물이 따로 만들어져 부착이 필요하게 되면 조임질을 하여 기물을 완성 식기, 화로,신선로 등 조임질이 필요한 경우 장식하여 마무리짓게 된다.
오물과 거름치는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있어야 할 곳에 있음과 없음의 차이일 것이다. 마치 인간의 배설물이 논과 밭에 쓰여지면 거름이 되고 수세식 변기에 쏟아지면 오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고수해 나가는 안성 유기공장의 사람들을 보노라면 사람의 쓰임 또한 같은 게 아닐까 여겨진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일이 딱 들어맞을 때 '안성맞춤'이란 말을 써왔다. 이 말은 안성지방에서 생산되는 유기를 주문하여 맞추면 그 '놋그릇'의 조형미와 품질이 뛰어나 모든 이들이 만족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현재 그 유명한 안성유기는 기계가 찍어내는 각종 그릇에 밀려 무형문화재 김근수 할아버지에 의해 겨우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어린 시절 유기 주문을 받아 날품팔이 생활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운 김 할아버지는 올해로 만 45년째 이 일을 해오고 있다. 일제하에서는 집안에 있는 쇳덩어리란 쇳덩어리는 모두 군수물자로 빼앗겨 유기공장이 문을 닫은 적도 있었으나 해방후 한때 안성에는 스무 곳이 넘는 유기공장이 있었다고. 그러나 급속히 밀어닥친 자본주의의 물결은 놋그릇의 자리에 스테인레스와 알루미늄 등을 채워놓았다. 이제는 추석이나 설날 제기로 쓰였던 놋그릇조차 스테인레스로 바뀌고 말았다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그늘이 스친다. 안성에서의 놋그릇 제작방법은 주문제작법이다. 이는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을 7대 4의 비율로 섞어 쇳물에 녹여 그릇 틀에 부은 다음 다듬고 광을 내는 과정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몇 줄의 글로 요약될 수 있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섭씨 천이백도에서 쇠를 녹이고 형태를 만들어 망치고 다듬고 광을 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잔손질이 필요한 것이다. 놋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푸른 녹청이 생겨 옛 아낙네들은 이것을 깨끗이 닦는 것이 적지 않은 일과의 하나였다. 우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곱게 빻은 기와가루를 수세미에 묻혀 윤이 반질반질 나도록 닦고 또 닦아 그 정성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생활이 풍요로워 지고 옛 것을 다시 찾으려는 풍조가 생겨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어요. 추석 같은 명절이 큰 대목이죠.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기술을 배우려 들지 않아 걱정입니다." 맥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며 속 깊은 한숨을 내쉬는 김 할아버지는 그러나 말씀 도중에도 놋그릇의 마지막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안성 유기를 진열한 전시관을 벗어나 어두운 곳으로 접어드니 작업장이 나왔다. 굉장한 굉음이 들렸다. 각 작업대에 백열전구를 하나씩 걸어놓고 시커먼 흙으로 작업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막장의 광부들처럼 탄재가 가득 묻어 있었다. 쇠가는 기계소리, 어둠침침한 불빛, 고물 라디오의 직직거리는 소리…. 그 사이에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일에 열중한 사람들은 불과 여섯 명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 대여섯 명이었다는데. 작업장 구석에서는 한 사람이 타원형 쇠판을 바닥에 놓고 무게중심을 계산한 다음 신중하게 면부랄을 하고 있었다. 젓가락을 만든다고 했다. 세상에, 젓가락을! 대형 자동화 공장이었다면 일 분도 걸리지 않고 뚝딱 찍어냈을 젓가락 한 짝을 만들기 위하여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보다 기계화 자동화가 되었다지만 여전히 수공업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작업장. 각각의 작업대마다 설치된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바람에 검은 분진들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문득 이 열악한 작업환경이야말로 우리 전통문화의 현주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 바로 전통 문화유산을 지켜가는 이들이었다. 유기제품만 안성맞춤이 아니라 이것을 생산하는 사람들 역시 안성맞춤인 현장이었다.
●안성유기장사 노래 경기 안성 큰아기는 유기장사로 나간다 한닢 팔고 두닢 팔어 파는 것이 재미다 경기 안성 큰아기는 숟가락 장사로 나간다 은동걸이 반수저에 깩기숟갈이 격이라 안성유기 반복자연엽주발은 시집가는 새아씨의 선물감이라 안성가신 반저럼은 시집가는 새아씨의 마침이다 안성유기는 시집가는 새아씨의 빗집감에 마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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