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 삶과 문화]제주도무형문화재 제14호 "허벅장" 신창현 도공
[행정] 1. 제주 전통 도기는
◀ 전통옹기 허벅장 신창현 도공이 허벅을 만들고 있다.<강정효 기자>
“큰 항아리인 춘두미는 곡식을 저장할 때 쓰고, 샛제비는 세면기로 사용했어요. 망대기는 장물(간장) 담고 젓갈 담는데 이용했고, 허벅은 물을 져 나를 때 이용했지요. 항아리에 곡식을 담아두면 습기가 차지 않지요”
지난 8월 제주도무형문화재 제14호 ‘허벅장’으로 지정된 신창현 도공(62·남제주군 대정읍 구억리)은 제주의 전통 기물을 전통방식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열 다섯 살에 도공 일을 시작한 신씨는 이 마을 도공 신봉염에게 혹독한 훈련 속에 200여종의 옹기를 전수했다. 열 아홉에 옹기 가운데서도 가장 만들기 까다로운 허벅 기능을 익혀 독립했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형이 모두 도공 일을 했다. 1960년대 플라스틱 그릇이 보급되면서 전통 질그릇의 쓰임새가 적어지자 그는 도공일을 그만뒀다. 그때가 그의 나이 서른 살인 1969년. 잘 나갈 때는 한경면 월광동과 신평리 등지에서도 그릇 만드는 일을 했다는 그였다. 그런 그가 30년의 공백기를 딛고 1994년 제주도예원(원장 강창언)의 전통도예재현에 참가해 지금은 제주도예원에서 전통옹기 작업 및 전수에 앞장서고 있다.
신씨의 고향 구억리는 예로부터 제주의 전통그릇을 구워내는 곳이었다. 이 마을에는 ‘검은굴’과 ‘노랑굴’이 있었다. 당시 구억리에는 80호 정도의 가구가 있었는데 80% 이상이 부업으로 질그릇을 구웠다. 이 마을에선 옹기 굽는 곳을 ‘전밧’이라 부르는데 전밧 일은 대부분 남자들 몫이었다.
“내가 굴(가마)일을 할 때 구억리에는 굴이 두 개 있었어요. 굴은 계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그 책임자를 ‘황시’라 해요. 마을 사람들이 굴을 이용할 때는 순번을 엮어서 이용료를 내고 굴을 구웠어요. 잘 하면 한 집에서 1년에 두 굴 정도 구워 냈지요. 날씨가 나쁜 날이 걸리면 그릇을 망쳐요. 때문에 그릇을 만들 때는 서로 심벡(경쟁하듯)하며 일을 했지. 동네 사람끼리 수눌어서 일을 하기도 했어요”
제주의 질그릇의 재료는 질헉(질흙)이다. 질흙은 황토(붉은 색을 띠는 노랑색) 3분의 1과 고냉이흙(회색) 3분의 2가 잘 섞여 있는 점토층의 흙이다. 구억리는 제주 질그릇 생산지로 유명했지만, 질흙은 생산되지 않았다. 흙은 인근 신평리에서 사다 썼다. 흙을 파낸 자리는 논으로도 사용돼 밭주인들은 ‘흙도 팔고 논도 만들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는 게 신씨의 설명이다.
제주의 질그릇은 100% 수공작업으로 이뤄진다. 그만큼 힘이 든다는 얘기다. 흙 파오는 작업부터 파온 흙을 물 맞추면서 반죽하는 작업, 그릇 만드는 작업, 도기를 구워낼 땔감 작업까지 다 사람이 해야 했다. 때문에 흙 파오는 일과 땔감만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그릇이 잘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흙이 좋아야 해요. 흙이 좋지 않으면 그릇이 주저앉아 버리지. 그릇을 불에 구우면 어린 아기 손 마냥 물렁물렁 해요. 한 굴치의 그릇을 구우려면 장작만 열두 묶음(한 아름씩 열 두 묶음)이 필요하고, 소낭과 가시낭은 엄청 필요해요. 전밧 일 가운데 그릇 만드는 사람과 그릇을 굽는 사람을 최고로 쳐요”
도공들이 만드는 그릇도 질서가 있다. 한 굴치의 그릇을 굽기 위해서는 보통 열 두 줄의 그릇을 차례로 엎어놔서 굽는다. 큰항-알통개-허벅-망데기-큰장태-셋제비-개장태-아기망데기-대배기-조막단지-독사발-설단지 등 12종을 한 줄이라 하는데 그릇을 구울 때는 차례를 잘 지켜 겹쳐서 굽는다. 잘되면 50∼60줄을 건질 수 있다.
“감귤 값이 좋았을 때 구억리에서는 ‘옹기 안 해도 돈 벌어지는 걸’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옹기 일은 사름(사람)은 사름대로 얼 먹고(힘이 들고) 돈은 돈대로 안되니까 나온 얘기일 거예요”
질그릇은 보통 상인들이 와서 사간다. 굴을 구워낼 때처럼 12종의 그릇은 귀를 맞춰 팔았다. 직접 구루마(달구지)에 싣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보리와 좁쌀·절간 고구마·모밀 등과 바꿨다. 농삿일과 질그릇 만드는 일을 ‘죽도록’ 해도 생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춘궁기 때 이 마을 사람들은 감저주시(전분 만들 때 나오는 찌꺼기)도 먹고 물릇(무릇)을 삶아서 먹기도 했다. 밀채 깎을 때 나온 가루로 조배기(수제비)를 해서 먹는 등 힘겨운 살이였다고 회고했다.
“굴에 불을 땔 때는 땀이 비 오듯 해요. 그 때 흘린 땀이 장태로 하나쯤은 될겁니다. 여름에는 ‘굴 옆에 얼러 다니지(어지러 다니다)’도 못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불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인가. 지금 구억리에는 4·3 피해도 피해지만, 80살 이상의 남자 노인이 한 명밖에 없다. 그릇 만드는 작업은 팔을 이용해 메를 치고 수레차와 조막으로 때리면서 해야하는 중노동인데다 비스듬히 앉아서 해야하기 때문에 도공들은 척추가 비뚤어져 디스크(추간판 탈출증)로 이만저만한 고생을 하지 않는단다. 신씨가 지금도 병원신세를 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옛 방식대로 제주도기 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제주도예원 식구들을 보면 놀랍습니다. 도기 만드는 것도 힘에 부친 데 질흙과 땔감 구하는 힘든 작업을 젊은 사람들이 다 합니다. 제주전통옹기의 맥을 잇기 위해선 당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신 도공의 걱정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