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굿판에서 살다간 불멸의 사진작가
4주기 맞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수남의 작품세계
옥관문화훈장 추서...70년대부터 전국 민속현장 사진에 담아
2010년 2월 4일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수남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지 4년 되는 날이다. 그는 태국 치앙라이에서 사진기와 함께 홀연히 떠났다. 지난 2006년 2월 4일도 언제나처럼 굿판, 태국 리수족의 신년맞이 축제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생전에 입버릇처럼“사진작가는 현장에서 사진을 찍다가 최후를 맞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라는 평소 그의 소신대로 우리 다큐멘터리 사진계의 큰 별은 그렇게 사진기와 함께 졌다.
정부는 2006년 12월 8일 생전의 공을 기려 고인에게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옥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독일의 함부르크, 베를린 초대전 등 11회의 전시를 통해 국내, 외에 한국의 민속문화를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무속문화의 위상을 재정립하는데 선구자 역할을 해온 공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강릉단오제’가 국가지정 문화재에 이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전승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추서 이유를 밝혔다.
“사진가는 현장에서 최후...가장 행복....”
김인회 전 연세대 교수(한국 굿학회 회장)는 추도사에서 “예술가적 감수성, 영혼의 순수함, 그리고 길들여질 수 없는 야수성이 김수남의 가장 큰 남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주 출신의 작가 김수남은 연세대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세대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로 10여 년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굿 사진에 매료되어 사진기 하나 달랑 매고 전국을 유랑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무녀들로부터 ‘사진박수(남자무당)’라 불리며 전국의 굿판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굿판의 술이란 술은 다 받아 마시고 신들린 듯 셔터를 눌러 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달픔 때문”이라고 늘 말해왔다.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고, 근대화의 거센 바람에 우리 고유의 것들이 밀려나기 시작하던 무렵, 그는 주말마다 우리의 옛집, 옛 풍속들을 사진에 담아갔다. 그러던 중 유형의 것을 담는 것도 의미 있지만 무형의 것을 기록에 담아두면 후일 이 ‘무식한’ 근대화의 바람이 지났을 때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 그 한 분야로 ‘굿’을 택했다.
굿은 미신이라는 단세포적인 발상으로 마을 굿들이 일시에 철퇴를 맞고 무당들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풍속사범으로 구속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첫발을 내딛은 후 30여 년 이 흘렀고 생의 끝까지 이어졌다.
70년대와 80년대 말까지 한국의 굿만 찍다가 1988년 그의 시선은 아시아로 돌려진다. 그 첫 스타트가 오키나와의 굿이다. 일본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6개월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오키나와의 굿을 찍었다. 그 후 일 년의 절반을 외국에 나가 지내면서 동남아시아의 민속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타이완, 필리핀, 중국의 남부,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와 인도의 북부 등등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오로지 사진을 찍기 위해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현지 언어를 배우고 한국에서 무당들과 어우러지던 그대로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그는 기획과 답사 등에도 전문가 수준이었다. 스스로 해외 답사 계획을 세우고 그 일정을 실천했다. 문화인류학의 업적이 많이 쌓여있는 선진국 사진작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알려지지 않은 문화의 현장을 찾아다닐 필요를 느끼고 어느 외국 잡지에서 본 사진 단서 하나를 갖고 베트남으로 가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사진작가이기 이전에 그는 개척자요, 문화인류학자이다. 우리나라 학자 중에서 김수남 만큼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조사하고 기록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학자들이 그가 찍은 사진을 보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에 아시아를 보여 준 사람이고 지난 20여 년 동안 아시아의 사람, 축제 그리고 신화를 생생하게 기록하여 보여줬다.
죽을 때까지 사진을 찍다 죽겠다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 그는 온 생애가 사진 하나로만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사진기와 사진에 담을 현장과 그의 사진의 피사체가 되었던 한국의 수많은 무당과 서민들, 아시아의 무당들과 평범한 아시아인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을 나누며 마시던 술만이 그의 전 생애였다.
(중략)....신들의 고향/ 제주도에 태어나서/ 한평생/ 우리의 굿들을 찾아다니고/ 아시아의 뿌리를 쫓아/ 문명이 닿지 않은/ 오지만을 누비고 다녔지/ 그 곳이 그렇게 그립더냐/ 아시아의 신들이 부르더냐/ 이번에는/ 태국의 치앙라이로 가더니/ 너는 결국/ 그 곳에서 잠들었구나/ 원초의 믿음을/ 사진에 담아/ 예술의 혼으로 승화시킨/ 너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였다./ 아니/ 너 자신이 예술이었다. (이하 생략) - 임윤식 시인의 추도시에서
김수남의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
김수남 하면 ‘굿’, ‘굿사진’이다. 굿을 하는 무당보다도 더 많은 굿을 체험했을 그는 한국과 아시아 전역을 넘나들며 무려 30여년, 자신의 인생의 반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굿을 담아내느라 안 가본 곳 빼고는 다 가봤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전 20권에 걸쳐 펴낸 방대한 사진집 ‘한국의 굿’은 김수남 굿 사진을 집대성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2005년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로 압축돼 출간됐다.
그의 사진 속에서는 내림굿을 받고 무아지경에서 고개를 젖힌 채 춤을 추는 무속인, 망자의 한을 풀기위해 매듭을 풀고 있는 씻김굿, 시퍼런 물결이 일렁이는 제주 바다에서 수호신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배를 띄운 어민 등 서글프면서도 매혹적인 순간들을 포착한 작가의 땀방울이 묻어나는 기록물들이다.
처음에는 피사체가 되어달라고 무당들을 설득하는 일 자체가 일이었을 만큼 힘들었다. 무당 아들, 딸 결혼할 때 꼬박꼬박 부조금 보내고, 무당 손주 돌땐 금반지 보내고, 돼지고기와 술 을 사가기도 하고....가족들에게 보다 더 잘 하면서 서서히 그들의 마음을 열어갔다.
굿을 하는 당사자들과 어우러지면서 자신도 마치 신들린 듯 작업을 해나간 그는 매듭인 ‘고’를 푸는 전라도 씻김굿을 찍을 때는 이런 저런 사람들의 사연에 촬영하는 것도 잊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작품을 위한 사진 찍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심으로 인간적인 교감을 하며 담아낸 사진이라서 일까? 그의 사진에서 무당들은 그저 그런 모델이 아니라 인간세상의 희노애락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카메라 앞에서라면 주눅 들지 않고 꾸밈없이 자신들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전국을 돌면서 굿 사진을 찍었지만 굿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굿에 대한 책과 논문을 구해 읽으면서 굿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어떤 신화는 어떤 무당이 잘 아는지, 더 많은 능력을 가진 무당이 누군지 알게 되었고 그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그가 황해도 내림굿, 옹진 배연신굿, 제주도 영등굿, 무혼굿, 신굿, 경북 강사리 범굿, 경북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충남 은산 별신굿, 황해도 지노귀굿, 경기도 양주 소놀이굿, 경기도 도당굿, 동해안 별신굿 등을 찾아 전국의 굿판을 떠돈 이유이다.
그리고 88년부터는 아시아로 시선을 옮겼다. 미얀마에서는 술을 좋아한다하여 고지조(미얀마의 무속신앙)로 불리고 여전히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그대로 어울리며 사진은 사진대로 담아냈다.
천대받으며 힘들게 살아온 무당들이나 예인들, 산골이나 어촌의 민초들의 삶의 상황과 정서 속으로, 아시아 오지에서 또 그들 나름의 뿌리 깊은 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속으로 자기가 먼저 빠져들고 정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작가 김수남의 사진 인생이었다.
57세.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지금도 여전히 아시아 오지 어디에선가 뭇사람들과 술을 거나하게 걸치며 사진기를 둘러매고 굿판을 펼치고 있으리라.
‘사라져 가는 한국의 무형의 것들의 기록’에서 ‘사라져가는 아시아 문화현장의 정직한 기록’으로 옮겨 간 그의 작품은 이제 김수남이라는 작가 개인의 기록을 넘어서 아시아 문화인류학의 중요한 학술자료로서의 가치가 큰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삶은 사진을 하는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06년 6월에는 그와 그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 김인회 전 연세대교수,채희완 부산대 교수 등 40여명이 주축이 되어 ‘김수남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사업회는 앞으로 김씨가 남긴 작품 16만 여점을 보존, 관리, 전시하는 일을 맡는다.
*故김수남은... 일본 호카이도 히가시카와 마치에서 제정한 일본 최고의 국제사진상인 히가시카와(東川)상을 수상했으며, 독일 베를린시 주최 Shamanism now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또한 2005년 프랑크 푸르트 도서전에 특별전시된 「한국의 책 100권」에 한국문화사에 길이 남을 그의 역작 「한국의 굿」이 선정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김수남은 기록(다큐멘터리) 사진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30년을 매달린 한국의 굿 기록은 20권짜리 기념비적인 사진집 「한국의 굿」(열화당)에 담겨 지금도 이 분야의 전설적인 작업으로 남아있다.
고인과 함께 아시아의 민속 조사를 해온 고운기 연세대 교수는 “대낮에 벌어지는 행사를 쫓아 뛰던 그는 가끔 땀에 전 셔츠를 짜내야 했는데 셔츠를 비틀면 한 바가지쯤 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 뒤로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사진이 아니라, 땀이 한 바가지쯤 쏟아져 내릴 셔츠로 보인다”고 그의 사진 사랑을 회고했다. (글/임윤식)
*여기에 올린 사진들은 작품 도록 및 인테넷에 올려진 사진 등을 재촬영 또는 스캔한 것이 대부분이므로 원본에 비해 화질이 많이 떨어지거나 부분적으로 크롭된 것도 있음을 밝혀둠.
*월간 시사종합지 '오늘의 한국' 2007년 2월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