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7일, 필자는 대만 타이베이 101호텔 - 101층이라서 이런 이름이??? - 에서 벌어진 제3회 중환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의 결승전을 TV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결승전 단판 승부의 두 영웅은 이창호 9단과 박정상 9단!
이창호 9단은 요즈음 조금 퇴조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나 말이 필요없는 세계 바둑의 황제이고, 박정상 9단도 `신4인방` -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 박영훈 9단, 최철한 9단 - 의 뒤를 바짝 쫒고 있는 한국 랭킹 6위의 젊은 신예 강자다.
해설을 맡은 김영삼 7단의 말솜씨도 구수하고, 아마추어 여성 보조 진행자의 미모를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렇게 생방송으로 현지의 숨결을 느껴가면서 영웅들의 바둑을 감상하는 것은, 가끔씩 있는 벗들과의 막걸리 모임을 제외하고는 필자의 가장 큰 기쁨의 하나이다.
`자, 오늘은 어떤 슬픈 인생의 드라마가 펼쳐질까?` 잔뜩 기대하며...
"바둑이란 슬픈 인생의 드라마다!" 이 말은 '면도날' 일본의 사카다 9단이 전성기 때 남긴, 필자가 보기에는 바둑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고 멋지게 갈파한 만고의 명언이다! 정말 바둑이란, 우리네 슬픈 인생처럼, 너무나도 허무하고 덧없는 것이 아닐까!
화려하고 꽃같은 전성기가 지나가고, 늙고 병들어 초라하게 인생의 최후를 맞아야 하는 우리 모든 인간들의 숙명... 바둑도 이처럼, 도저히 질래야 질 수 없는 바둑이, 하늘과 땅이 무너져도 질 수 없을 것 같던 바둑이, 너무도 허망하고 어이없이 패배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았던가! 그것도 수없이...
두 기사의 역대 전적은 7승 1패로 이창호 9단의 절대 우세, 그러나 축구공이 둥글듯 바둑돌도 둥글어 알수없는 것이 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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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9단 / 이세돌 팬카페 | 바로 며칠전인 지난 12일, 이 대회 16강전 즉 1회전에서였다. 이세돌 9단은 일본의 고노린 9단을 맞아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달랑 왕위전 타이틀 하나만 가지고 있는 이창호 9단을 랭킹 2위로 밀어내고, 이세돌 9단은 현 한국 랭킹 1위이자 6관왕 - 국제 기전으로는 토요타덴소배와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 국내 기전으로는 GS칼텍스배, 물가정보배, KBS 바둑왕, 맥심커피배 - 에 빛나는 타이틀 보유자였다. 두면 거의 이기는, 90%에 가까운 승률로 승률도 1위였다!
단병접전의 귀재,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고 정확한 수읽기, 전신(戰神)이라는 조훈현 9단마저 이세돌 9단을 만나면 전투를 꺼린다는 최고의 싸움꾼 이세돌에 비하면, 일본의 고노린 9단은 중량감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세돌은 이창호를 젖히고 우승 후보 0순위였다!
과연 초반 탐색전이 지나고 중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고노린의 허술한 연결을 추궁한 이세돌의 강수가 터졌다! 바로 고노린의 두 대마를 양곤마로 몰기 시작한, 필승의 바둑이 짜여진 것이다!
바둑에서 양곤마로 몰리면 거의 이기기 어렵다. 이쪽 저쪽 살리기에 급급하다 보면 집 차이가 확 벌어진다. 두 대마 중 하나가 죽기도 한다. 상대방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슬슬 쫓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좀더 욕심을 부려 고노린을 '쓰리곤마(3곤마)'로 만들려는 과욕의 한수가 반면에 떨어지자, 끙끙 앓던 고노린의 묘수가 한방 터졌다! 바로 '빈삼각'의 묘수였다!
'빈삼각'은 우형(愚形)의 표본으로 바둑의 행마에서 금기시되는 수이다. 그러나, 빈삼각을 잘 둘 수 있어야만 비로소 고수가 된다고 했다!
이세돌의 의표를 찌른 이 빈삼각의 묘수로 쓰리곤마는 양곤마로 벗어나면서, 오히려 이세돌의 중앙 요석 2점을 위협한다. 이 시점에서 이세돌이 냉정히 형세 판단을 하여 그 2점을 포기하고 단곤마로라도 몰 수 있는 상태에서 만족했다면, 이 바둑은 그래도 무난히 이세돌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2점을 아까워하여 살린 이세돌의 패착(!)이 떨어지자, 또 한번 고노린의 묘수, 역시 빈삼각의 묘수가 작렬했다!
극도로 좁은 공간에서도 연속 두번 보여준 고노린의 이 묘수로 판은 급전직하, 갑자기 뜻밖에 이세돌의 대마가 죽었다! A와 B 맞보기로 살아있던, 멀쩡하던 대마가 그만 비명횡사해버린 것이다! 고노린의 대마들은 다 살아가고 이세돌의 대마만 죽어버린,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고노린이 터뜨린 이 두번의 묘수는, 참으로 바둑의 오묘함과 허망함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세돌은 아쉬움에 몇수 더 두어봤지만 바로 돌을 던져 단명국으로 끝났다. 참으로 슬픈 인생의 드라마가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고노린 9단의 행운(?)도 여기까지, 박영훈 9단을 만나 불계패 당한다. 박영훈은 박정상 9단에게 아쉬운 반집패, 그리하여 이창호와 박정상이 결승에서 만나게 되었다.
자, 오늘은 어떤 슬픈 인생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인가! 승리의 여신은 누구 편에 설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