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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 01. 11(일)
도원수 권율장군 신도비명(都元帥權慄 將軍神道碑銘)
◈ 시대 : 조선
◈ 연대 : 1861년(철종12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 - 경기도 기념물 제2호
◈ 크기 : 높이 186Cm, 너비 82cm, 두께 40cm
◈ 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석현리 산 168-1번지(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23)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신흠(申欽) / 이유원(李裕元)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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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원수 권율장군 신도비명 병서(都元帥權慄 神道碑 并序)
조선국 팔도도원수 증 영의정(朝鮮國 八道都元帥 贈 領義政)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시(謚) 충장(忠莊) 권공(權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并序)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원임 규장각 직제학(禮曹判書兼知經筳春秋館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原任奎章閣直提學) 이유원(李裕元)이 쓰고 아울러 전서하다.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팔도도원수 권공(權公)의 묘도에 비석이 갖추어지자 우의정 신흠은 말을 다듬어 다음과 같이 새긴다.
공이 적을 쳐부순 공적은 간이(簡易) 최공 입(崔公岦)이 행주(幸州)의 비석에다 기록하였고 공의 아름다운 사적은 공의 사위 오성 상국(鰲城相國)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묘지(墓誌)에다 기록하였으므로 더 이상 추가할 것은 없겠으나, 옛날의 제도를 상고해 볼 때 공과 같이 위대한 분에 대해서는 신도비명을 짓는 것이 합당하니 마땅히 대로변에 세워 후세 사람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공의 휘는 율(慄), 자는 언신(彦愼)이다. 시조는 행(幸)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인데 견훤(甄萱)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고려 태조가 권씨 성을 하사하고 안동(安東)에다 봉해주어 그대로 본관이 되었다. 13대를 내려와 부(溥)는 정승을 지내고 수복(壽福)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한 가문에서 군(君)에 봉해진 자가 아홉 사람이나 되었다.
3대를 지나 근(近)은 벼슬이 찬성인데 곧 공의 6대조이다. 증조 교(僑)는 양근군수(楊根郡守)이고 조부 적(勣)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이고 선조 철(轍)은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는데 네 조정을 내리섬겨 태평 시대의 재상이 되었다. 선비 조씨(曹氏)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승현(承睍)의 따님으로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손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 32)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어릴 적에 소꿉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장성해서도 부귀 자제의 호사를 즐기는 버릇이 없자 의정공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인재가 나왔다.” 하였다. 경학(經學)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어릴 적에 불운하여 과거에 급제를 못하다가 만력 임오년(1582, 선조 1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46세로서 식자들 중에는 혹 장상(將相)의 그릇임을 아는 자도 있었다.
승문원의 정자ㆍ저작ㆍ박사로부터 성균관 전적으로 오른 뒤에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호조 정랑, 전라도사(全羅道事),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옮겼다. 신묘년에 다시 호조 정랑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임진년 봄에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해 여름에 일본 괴수 수길(秀吉)이 우리나라를 정복할 심산으로 수가(秀嘉)와 행장(行長)등을 위시한 60만 대군을 보내 침략을 감행하여 온 나라가 안절부절 혼란에 빠졌다.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율의 재주는 시험해 볼 만하다 하였다.” 하고,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하니, 공은 그날로 임금을 하직하였다.
적이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忠州)를 함몰시키고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전사하였다. 적이 승승장구하여 경성에 바싹 다가오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와 함께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장수들에게 계책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주공(主公)께서 온 지방의 군사들을 다 쓸어 거느리고 왔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렸습니다.
이제 마땅히 대군을 거느리고 곧장 수원(水原)으로 가 통진(通津)을 거쳐서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차단하고 행재소에서 왕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 세력을 얻어 큰 공을 꾀할 수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광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아 적의 꼴을 보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공은 광주(光州)로 돌아가 의기에 넘쳐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주상께서 파천한 마당에 신하된 자로서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주변의 고을에 격문을 돌려 군사 1천 5백 명을 모아 이치(梨峙)로 나아가 진을 치고 양남(兩南)의 목을 쥐었다.
영남의 적이 금산(錦山)의 적과 힘을 합쳐 공격해오자 공은 장검을 빼들고 뛰쳐나가 앞장서서 적의 칼날과 대항하니, 제장(諸將)이 서로 말하기를 “유자(儒者)도 이럴 수있단 말인가.” 하고, 사기가 백배하여 그들을 산기슭에서 무찔렀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거진(巨鎭)을 맡겨볼 생각으로 가을에 벼슬을 옮겨 나주(羅州)를 지키게 하였다가 임소에 부임하기 전에 승진시켜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를 제수하니, 공은 명을 받고 통곡하였다.
전주(全州)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아 1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갈 계책을 세우고서 수원(水原) 독성(禿城)을 점거, 근거지로 삼아 경성의 적을 위협하고 곧장 서로(西路)를 노리자 수가(秀嘉)는 빈틈을 찔릴까 두려워하고 행장(行長)은 후방을 공격받을까 염려하였으니, 마치 제방이 물을 막는 것처럼 앉아서 관서의 인심을 결집시켰다.
선묘께서는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보내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가운데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고, 또 여러 진영의 의병을 전부 공의 통솔을 받도록 하였다. 경성의 적은 공의 위세에 눌려 예봉이 꺾였으며 수만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세 진영으로 짜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응전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기병(奇兵)을 내보내 무찔렀다.
계사년에 독성으로부터 양천(陽川)으로 진영을 옮기고 군사를 나누어 각 지방을 지원하였으며, 곧장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성 서쪽 안현(鞍峴)으로 나아가 진을 치려고 하였으나 제장들이 극력 반대하여 고양(高陽) 행주산(幸州山)에 진을 쳤다.
경성의 적은 이때 세력이 한창 불어났는데 공이 적은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2월 12일에 그들의 정병을 전부 동원하여 두 길로 나누어서 밤중에 행주성을 공격해왔다. 공이 일어나 내려다 보니, 적의 총칼이 온 들판을 뒤덮고 성을 몇 겹으로 포의한 상황이었다.
공은 즉시 사졸들에게 주먹밥을 돌려 먹게 한 뒤에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 성가퀴에 배치시켜 화살을 빗발처럼 쏟아붓고 또 힘센 사람을 뽑아 돌을 던져 내리치며 뒤이어 차자화(車子火)를 쏘았다.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적은 아홉 번 진격해 들어왔다가 아홉 번 퇴각하였다.
급기야는 적이 풀단[束草] 가지고 불을 지르며 크게 소리치면서 성을 올라오자, 공은 상방검을 뽑아들고 서서 장수들을 독려하니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접전하여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적의 장졸은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군수 물자를 버려두고 도망갔으며 적의 머리 1백 30여 급을 거두어 베었다.
조정에 승전보가 들어가자 특지로 자헌대부에 가자하고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황조의 유격대장 사대수(査大受)가 찾아와 공을 보고 감탄하기를 “외국에도 진짜 장수가 있구나.” 하였으며,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이자(移咨)하여 칭찬하기를 “권 포정(權佈政)은 국난 속의 충신이요 중흥을 이룩한 명장이라 이를 만하다.” 하고, 채단과 백금 등 물품을 상으로 주었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아뢰기를 “배신(陪臣) 권율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막강한 적과 대항하였다.” 하였고, 천자도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전라도에서 적을 참획한 수효가 많아 그 나라의 인민이 그런대로 진작될 수 있었다.” 하였다.
공은 행주의 적을 무찌른 뒤에 진영을 파주(坡州)로 옮겼다. 파주는 곧 서쪽으로 뻗은 큰길이 있어 적이 꺼려하였다. 다시 행주에서의 패배를 갚기 위해 피를 뽑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공을 공격하려 계획하였다가 끝내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물러갔다.
4월에 경성의 적이 도망갈 때 공은 경무장한 군사로 그 뒤를 추격하려 했는데 때마침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계책을 써 적의 퇴각을 추진하는 중이라서 공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다. 6월에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로 제배되어 영남에 머물러 있다가 겨울에 형조 판서가 되고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임되었다.
갑오년 봄에 신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선묘께서 염려한 나머지 의원을 잇달아 내보냈다. 무사 하나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피해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므로 공이 그를 참수하였는데 체찰사가 그 가족의 하소연을 곧이듣고 공을 문책할 것을 청하여 파직되자, 웃으며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장수로 있던 내가 군법으로 병졸 하나를 참수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서, 모든 일을 사절하고 고향 강화(江華)로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한성 판윤(漢城判尹), 호조 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관을 겸임하였다. 어전에 입시하였을 때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경이 아니었더라면 국가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병신년에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선묘께서 다시 특명으로 도원수를 삼고 이르기를 “경은 충성과 공로가 크게 드러나고 용맹과 지략이 세상에 뛰어나 이름이 천하에 자자하고 위세가 적국을 떨게 하였으니, 경을 놓아두고 원수의 직책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였다. 조정을 하직할 때 임금은 공을 불러 접견하고 술을 내려 마음을 달래줬으며 또다시 내구마를 하사하였다.
7월에 호서(湖西)의 사인(士人) 이몽학(李夢鶴)이 모반하여 다섯 고을을 잇달아 함몰시키자 조정에서 공에게 그들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달려가 보니 적은 이미 홍주(洪州)에서 잡혀 죽은 뒤였는데, 그 도당의 죄를 다스리고 억울한 자는 재심하는 일을 매우 분명히 하여 호서 지방이 안정을 되찾았다.
겨울에 일본에서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이, 청정(淸正)이 재차 침략하려 한다고 말을 전하여 조야가 술렁거리자 공은 말하기를 “설사 청정이 다시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그에 대처할 방도가 있게 마련인데 머리를 맞대고서 걱정만 하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진영을 나누어 배치하여 적을 제압할 계책을 상주하였다.
정유년 가을에 과연 다시 침입하여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을 함몰시키고 곧장 경기로 향해 올라오자 공은 일변 싸우고 일변 행군을 하면서 적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공의 힘에 의해 한강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으로 돌아온 그 이튿날 중국의 장관(將官) 팽우덕(彭友德)과 한강을 도로 건너가 직산(稷山)에서 접전하여 크게 무찔렀다.
겨울에 중국이 대군을 출동하여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보내 울산(蔚山)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공은 본국의 토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맨 앞에 돌진하며 뒤처진 자를 참수하여 조리돌리자, 모든 군사가 사기 충천하여 적의 성벽을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올라가 그 외성(外城)을 함락하니, 제독과 경리가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무술년 봄에 신병으로 면직을 청하자 선묘께서 위로하는 말로 달래주고 애써 만류하였다. 중국이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보내 세 제독을 독려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을 칠 때 공은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유정은 심중에 싸울 뜻이 없어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으므로 공이 여러 번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적들은 수군도독(水軍都督) 진인(陳璘)에게 대패하고 또 그들의 괴수 수길이 죽었기 때문에 각도의 적이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다.
기해년(1599, 선조32) 여름에 공은 병세가 위독해져 사직하니 선묘께서 윤허하여 체직되었으며 7월 6일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62세였다. 선묘는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일시 중지하고 부의를 많이 내렸으며 관원을 보내 치제하고 찬성을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9월에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술좌(戌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이듬해 을사년에 논공(論功)할 때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과 부원군에 추증되었다.
공의 전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曹氏)로 첨정(僉正) 휘원(輝遠)의 따님인데 따뜻하고 정중하며 부드럽고 후덕하여 내간의 규범이 있었다. 향년 24세에 별세하고 정경부인에 추증되었으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곧 오성공(鰲城公)의 부인이다.
2남 1녀를 낳아 장남은 성남(星男)이고 차남은 정남(井男)인데 다 음직으로 벼슬하여 군수가 되었으며, 딸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성남은 처음에 판서 권징(權徵)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뒤에 주부 김계남(金繼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으며, 정남은 승지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윤인옥은 1남 1녀를 낳았다.
후부인 박씨(朴氏)는 죽산(竹山) 거족으로 현령 세형(世炯)의 따님인데 총명하고 자애로워 법도를 지켰으며 시어머니와 공을 잘 받들어 일체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공이 별세한 뒤에는 미망인으로 자처하고 명절과 세시(歲時)의 제사를 예법대로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이따금 의복을 지어 제물을 차리고서 태워드렸다. 공보다 10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무신년 2월이었으며 향년은 62세였고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4월에 공의 묘역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이 없어 공은 중씨(仲氏)의 아들 익경(益慶)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는데 익경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현감이 되었다. 처음에 이광륜(李光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아 집(㠎)은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고, 다음은 입(岦)과 업(嶪)이며, 뒤에 이정(李淨)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아 아들은 헌(巘)이고 딸은 이도기(李道基)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집은 2남 1녀를 두고, 업은 1남을 두고, 도기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팔척 장신으로 용모가 준수하였으며 풍채가 엄중하고 행실이 충직하였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유쾌하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고 너그러웠는가 하면 초상 때 슬퍼하고 제사 때 정성을 드리는 것이 한결같이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왔으며, 종족을 잘 대우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천성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귀한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주밀하고 신중히 처리하여 하는 일마다 반드시 만전을 기하였다. 적진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언행이 여유만만하였으며, 원수의 깃발을 세우고 원수부를 열고서는 재차 진영을 총괄할 때는 사졸의 선봉이 되어 위험을 무릅썼고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장사(將士)가 잘 따라주어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뒤따랐다.
큰 적을 섬멸하여 적은 군사로 수많은 적을 대적한 것은 옛날의 명장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황조의 상서 석성(石星)은 우리나라의 사자를 만나 공의 안부를 물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 권공과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으며, 왜인도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반드시 권 원수는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으니, 중국과 오랑캐가 다같이 이처럼 탄복하였다.
군중에 있을때 손수 성지(聖旨) 및 천조의 자문과 게첩을 베끼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의정(李議政 이항복을 말함)이 반드시 내 묘지명을 지을 것인데 그 자료는 이것이면 충분하다.” 하였다. 큰 짐을 벗은 뒤에는 고향 강화도에 집 한 칸을 짓고 만취헌(晩翠軒)이라 자호하였으니, 은연중 자신의 뜻을 가탁한 것이다.
아, 흠은 공이 원수로 계실 때 막좌(幕佐)로 있었는데 우경(虞卿)의 백벽(白璧) 같은 사랑을 받았으나 중랑(中郞)의 황견(黃絹) 같은 문장이 없다. 삼가 공에 대해 일찍이 평하기를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龍虎)가 변화무쌍하다는 말이 공에게 적격이다.
분양(汾陽)의 공을 이루고서도 중서(中書)의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진공(晉公)의 덕을 지니고서도 녹야(綠野)의 낙을 누리지 못했으니 이 점이 한탄스럽다. 충절을 지키며 심신을 다 바쳐 한 몸에 나라의 안위를 짊어지고 단서(丹書) 철권(鐵券)에 이름이 올라 그 명성이 영원히 전해지는 점에 있어서는 충분히 저 두 공과 짝을 이룰 만하다.”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지난 과거 임진년에 / 若昔壬辰
미련한 저 생물들이 / 蠢彼介鱗
흉한 마음 지니고서 / 鞠頑裒兇
침략하여 미쳐 뛰니 / 奔突跳躑
무찌를 자 누구인가 / 孰獮孰剔
널린 것이 적들일레 / 遍我箕封
우리 임금 하문하길 / 惟上曰咨
아군을 뉘 지휘할꼬 / 疇董我師
적임자 곧 그대로다 / 繄爾其才
공은 중책 받고나서 / 公膺其重
조선 팔도 총괄하니 / 八路是總
꺼진 재에 불붙었네 / 再燃于灰
행주에서 적을 이겨 / 熸之于幸
큰 세력을 깨부수며 / 大鋤其梗
직산 울산 누비었고 / 于稷于蔚
좌우 수륙 거침없이 / 左水右陸
목을 잡고 등때리니 / 扼項批脊
우릴 감히 넘볼쏘냐 / 莫我敢越
북두 다시 높아지고 / 斗極更恢
황도 또한 트였으니 / 黃道褰開
이는 공의 업적이요 / 伊公之烈
사람 모두 동조하고 / 人謀畢凝
신도 재능 인정하니 / 鬼神與能
이는 공의 계책이요 / 伊公之籌
밝디 밝은 위광에다 / 赫赫厥靈
높디 높은 명성이란 / 巍巍其名
바로 공의 경사이고 / 伊公之休
까마득히 솟은 산과 / 有山嶻峛
헌거롭게 놓인 비석 / 有碑嵽嵲
바로 공의 무덤일세 / 伊公之藏
나는 공의 막좌로서 / 公有幕佐
공의 사적 선양하여 / 載揚載播
무덤 앞에 새긴다오 / 銘于墓陽
<끝>
[註解]
[주01] 우경(虞卿)의 …… 없다 : 상촌 자신이 권율 생전에 권율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았으나 권율이 작고하여 그 비문을 짓는 지
금 평생의 사적을 훌륭하게 묘사할 문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임. 전국 시대 변설가 우경이 미천한 신분으로 조 효성왕(趙孝成王)
을 유세하자, 왕은 한번 만나보고 황금 백 근과 백벽 한 쌍을 하사하였다고 함.
황견은 색사(色絲)로 절(絶)자의 은어임. 한 나라 채옹(蔡邕)이 효녀 조아(曹娥)의 비문을 잘 지어 어떤 사람이 그 비문을 읽고 비
석 뒷면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고 기록해 두었는데 재사(才士)인 조조(曹操)의 주부(主簿) 양수(楊修)에 의
해 그곳이 ‘절묘호사(絶妙好辭)’의 은어임이 밝혀졌음.《史記 卷76 虞卿傳》《世說新語 捷悟》
[주02] 높은 산 …… 말 : 《五百家注昌黎文集 卷33 唐故殿中少監 馬君 墓誌》에 “그 당시에 장무왕(莊武王 성명은 마수(馬燧))을 북정
(北亭)에서 만났는데 마치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가 변화무쌍한 듯하였으니, 걸출한 인물이었다.” 하였음.
[주03] 분양(汾陽)의 …… 못하고 : 분양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삭방절도사(蒴方節度使)로 안록산(安祿
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토번(吐蕃)과 회흘(回紇)의 잦은 침입을 막아 20여 년간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으며,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권율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보전한 공이 곽자의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임.
《新唐書 卷137 郭子儀傳》
[주04] 진공(晉公) …… 못했으니 : 진공은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배도(裵度)의 봉호. 회주(淮州)ㆍ채주(蔡州)가 조정에 반기를 들
었을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각군을 지휘해 진군하여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아 그 공으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지고 재상이 되었으나 항상 겸손하였다.
문종(文宗) 때 동도 유수(東都留守)가 되어 녹야당(綠野堂)이란 별장을 세우고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 명사들과 즐
겁게 나날을 보냈음.《新唐書 卷173 裵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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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追記)
임진왜란 때에 공께서 여러 번 뛰어난 공을 세우니, 명의 황제가 조서를 내리며,『지금 전라도 관찰사가 적을 많이 죽여 그 나라 백성들이 이를 존경하니 사기가 진작할 만 하도다』하시며 홍려시(鴻臚寺 : 중국의 관명, 외국에 관한 사무와 조공의 일을 담당함.) 관원을 보내 선유하였다.
명나라에서 출병한 장군과 사병들이 서로『권(權)가의 군사는 다른 군영과는 구별된다』말하였다.
총독군문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본국에 자문(咨文)을 보내 따로 포상하였다. 대략에,『조선 삼도(三道)의 모든 군현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싸우지 않은 채 달아나 궤멸되었다.
일찍이 영웅 걸사로서 의병을 일으켜 큰 변란을 막아 강토를 지키고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조선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권(權)아무개가 홀로 고립된 고을을 지키고 뭇 사람을 모아서 여러 번 기묘한 계책으로 많은 적들에 대항하였다.
근래에는 다시 모래주머니를 식량으로 꾸며 왜적을 유인하여 격파하였으니 이는 바로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은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하였다.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상주하기를,『배신(陪臣) 권(權)모가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 강적에 대항하였다.』하였다.
선조대왕께서 그 무렵에 유지를 내려 장려하기를,『충성된 노고와 빼어난 용략은 당대에 뛰어나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으니 적국도 경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도다』하셨으며, 또『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었으리요』하셨다.
이 몇 가지는 모두 백사(白沙 : 이항복)가 지은 행장, 묘지 및 전첩비의 뒷면에 실려 있으며, 마지막으로 상촌(象邨) 신(申)공이 이 비석의 뒷면에 다시 밝혔다. 몇 년 후에 나도 특별히 그 뒷면에 덧붙이니, 이 몇 가지는 마땅히 거듭 써야 하는데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누가 중복된(疊床架屋) 것이라 말하겠는가? 자손 중에서 원 비석에 싣지 않은 사람은 평시령(平市令 : 권율)의 두 번째, 세 번째 사위인 참판 조수익(趙壽益)과 강원지(姜元祉)이다. 현감은 1남을 두었으니 혁으로 판관을 지냈고, 업(嶫)은 2남을 두었으니 숙(俶)과 휴(休)이며, 헌(巘)은 2남을 두었으니 임(任)과 인(仁)이다.
판관은 2남을 두었으니 상형(尙珩)과 상규(尙珪)이고, 장재랑 숙(俶)은 4남을 두었으니, 상중(尙中). 상정(尙正). 상경(尙經). 상칭(尙稱)이며, 임(任)은 3남을 두었으니 상충(尙忠). 상문(尙文). 상질(尙質)이다.
식(寔)은 상형(尙珩)과 상규(尙珪)의 직계자손이라고 한다. 외손들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오호라! 예부터 중흥의 군주는 인재를 얻어서 맡기지 않음이 없었다. 주(周)나라의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두 분이 그러하며, 한(漢)나라의 운대(雲臺 : 후한의 명제가 공신들을 추념하여 등우(鄧禹) 등 28명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은 대)의 여러 장수나, 당(唐)나라의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 같은 인재들이 모두 충의와 정성으로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공을 세운 것 마치 물동이의 물을 쏟는 것 같이 쉬웠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이약곡(李若谷)과 장관(張觀) 같은 사람은, 군신 사이를 이간질하는 말에 현혹된 군주로 인해,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의 지혜와 용기가 옛날 인물들보다 뛰어났다고 해도 선조의 인재를 알아보는 명철함과 전권을 위임할 정도의 신임이 없었다면 어찌 성취함이 있었으리요.
그러나 당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같은 분은, 오히려 관리들의 적대함을 면하지 못하여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므로 공의 충성과 선도(善道)가 절로 왕과 결합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성군과 훌륭한 신하의 만남은 천재일우라고 이를 만한 것이다.
숭정(崇禎) 계해년(숙종 9, 1683년) 중춘(仲春 : 음력 2월) 일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이 쓰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조대왕이 우리나라를 중흥할 때 원수(元帥) 권공(權公)은 여러 번 왜적을 평정함으로써 큰 공훈을 세웠다.
후에 상촌(象邨) 신문정공(申文貞公)이 신도비를 짓고, 우암(尤菴) 송문정공(宋文正公)이 추기를 썼다.
수백 년이 지나 비문이 오래되어 글자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공의 9대 손 용이 비로소 정민(貞珉 :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유원(裕元)에게 글을 써주기를 부탁하였고, 또 뒤이어 새겨 기록하였다. 유원(裕元)은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공의 뛰어난 공적과 아름다운 덕행은 이미 두 분 선생의 문장이 있으니 지금 보충할 만 한 것은 오히려 한두 가지에 불과하다.
공의 처음 시호는 장렬(莊烈)이었으나 나라에서 시호를 충장(忠莊)으로 고치고, 행주(幸州)에 사당을 세우고 ‘기공(紀功)’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었다.
공의 아들 익경(益慶)은 현감으로 강도(江都 : 강화도)에서 순국하니 관직을 추증하고 정려(旌閭 : 충신, 열녀, 효자를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정문)를 세웠다. 이는 모두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친인척의 자손들은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오직 직계자손 몇 사람만 여기에 기록한다.
익경(益慶)은 4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집(㠎)으로 현감을 지냈고, 집(㠎)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혁으로 판관을 지냈으며, 혁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상형(尙珩)으로 현감을 지냈다. 상형(尙珩)은 1남을 두었으니 현감을 지낸 식(寔)이다.
식(寔)의 양자 수린(壽麟)은 현감을 지냈고, 수린(壽麟)은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종(綜)으로 현감을 지냈으며, 종(綜)의 양자 성호(聖祜)는 부사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성호(聖祜)는 1남을 두었으니 안창군(安昌君) 용이며, 용의 양자는 최조(最朝)이다.
공의 사위 백사(白沙 : 이항복)공은 유원(裕元)의 9대조이니 예전에 백사(白沙 : 이항복)공이 공의 묘지(墓誌)를 썼고, 지금 용이 선조를 추모하고 이를 세상에 밝히기 위하여, 유원(裕元)에게 글을 부탁해서, 비석에 새긴다. 유원(裕元)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사실을 모아 좌측에 쓴다.
신유년(철종 12, 1861년) 중하(仲夏 : 음력 5월) 외가 10대 손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삼가 적고, 숭정기원후 234년 신유년 겨울에 세우다.
국역(國譯) : 박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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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朝鮮國八道都元帥贈」
朝鮮國八道都元帥 贈領義政永嘉府院君謚忠莊權公神道碑銘并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申 欽撰。
贈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永嘉府院君。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八道都元帥權公之墓。麗牲之石旣具。右議政申欽脩辭而勒之曰。公之攻討之績。簡易崔公岦紀之於幸州。公之事行之懿。公之壻鰲城相國李公恒福誌之於幽隧。宜無以加諸。顧稽古昔典章。如公茂烈。行應銘法。法當表之大逵。以詔來者。公諱慄。字彥愼。遠祖幸新羅宗姓。討甄萱有功。麗祖賜姓權。封之安東。仍籍焉。十三世而溥。政丞以壽福終。一家封君者九。歷三世而近。官贊成。卽公六代祖也。曾祖曰僑。楊根郡守。祖曰勣。江華府使。考曰轍。議政府領議政。歷事四朝。爲太平宰相。妣曰曹氏。迪順副尉承睍女。夏城府院君益淸之後也。嘉靖丁酉生公。弱不好弄。長而無紈綺華靡之習。議政公奇之曰。吾門有人。攻經學甚勤。而少踸踔。滯於公車。萬曆壬午。中式年文科。時年四十六。識者或知爲將相器也。由承文院正字著作博士。陞成均館典籍。更司憲府監察,禮曹佐郞戶曹正郞全羅都事鏡城判官。辛卯。復除戶曹正郞。超拜義州牧使。壬辰春。坐事罷。夏。日本酋秀吉逞射天計。遣秀嘉,行長等。衆號六十萬。入寇。擧國劻勷。宣廟下敎曰。予聞權慄才可試之 。拜光州牧使。公卽日陛辭。賊踰鳥嶺陷忠州。巡邊使申砬死之。賊長驅薄京城。大駕西狩。全羅道觀察使李洸與忠淸道觀察使尹國馨,慶尙道觀察使金睟。領兵十萬到振威。洸問策於將佐。公曰。主公掃境內以來。國之存亡。在此一擧。今宜奬率大軍。直指水原。由通津涉祖江。遮遏臨津。稟命行在。則我得其勢。可以圖大。洸不從。未見賊而潰。公還光州。奮曰。廟社丘墟。主上播越。爲臣子者。豈可坐待國亡。傳檄旁郡。得兵一千五百。進屯梨峙。扼兩南吭。嶺南賊與錦山賊合力來攻。公挺劍而出 。先冒白刃。諸將相謂曰。儒者亦如是耶。士氣百倍。敗之於嶺下。朝廷欲試之巨鎭。秋。遷守羅州。未之官。躋授全羅觀察使兼巡察使。公拜命痛哭。大選全州。自領精兵一萬。爲西上計。據水原禿城爲固。危動京師。直搖西路。秀嘉懼乘其虛。行長慮議其後。若防制水。坐牢關西心。宣廟解尙方劍馳賜之曰。諸將不如令者。以此從事。又令義兵諸陣悉統於公。京城賊患公落其角距。出數萬衆作三陣。往來挑戰。公堅壁不應。間出奇兵摧之。居五日。賊燒營遁。畿輔之賊亦捲入京城。癸巳。自禿城移柵於陽川。分兵列援。欲直渡陽川江。進壘城西鞍峴。諸將力止之。軍於高陽之幸州山。京城賊方盛。見公孤軍深入。二月十二日。賊盡其精勇。分二路夜逼幸州寨。公起視之。則兇鋒蔽野。圍寨數重矣。公卽令士卒傳餐。擇善射者列於睥睨間。下矢如雨 。且揀力士。投石擊之。繼放車子火。自朝至暮。賊九進九却。已而賊待束草縱火。大喝登寨。公提尙方劍。立督諸將。諸將爭先薄戰。賊遂熸。賊之將卒死者。不紀其數。委其軍實而走。收斬一百三十餘級。捷聞。特加資憲大夫。將士賞賚有差。皇朝游擊査大受來見公嘆曰。外國亦有眞將矣。宋經略應昌移咨奬之曰。權布政可謂板蕩忠臣。中興名將。賞以綵幣白金等物。兵部尙書石星奏曰。陪臣權慄獨守孤城。以抗強勁。天子嘉之曰。全羅斬獲數多。該國人民。尙可振作。公旣蹂幸寇。徙營坡州。坡乃迤西孔道。賊憚之。又欲報幸州之敗。刺血祭天。謀犯公而竟不敢窺足而右。四月京城賊遁去。公將以輕兵躡之。會李提督如松方用計退賊。阻公使不得南。六月。拜諸道都元帥駐嶺南。冬。拜刑曹判書。轉議政府右參贊。甲午春。以疾辭。宣廟軫之。醫問交道。有武士避戍匿於全州。公斬之。體臣聽其家人訴請公罪。公罷笑曰。爲將數歲。不得以軍法斬一卒耶。謝事歸江華故里 。未幾。敍拜漢城判尹。戶曹判書知義禁府事兼管備邊司。入侍前席。 宣廟敎曰。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輟內廏馬賜之。丙申 。拜忠淸道觀察使。宣廟命爲都元帥曰。卿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慴敵國。元帥之任。捨卿伊誰。及辭朝。召見賜酒以勞之。復賜內廏馬。七月。湖西土人李夢鶴反。連陷五邑。朝廷命公討之。公提兵急趨。賊已就殱於洪州。治其黨與。上讞甚晳。湖路獲安。冬。我國人自日本來者傳言。淸正欲再入寇。朝野洶洶。公曰。設令淸正復來。自有待之之道。聚首憂畏何益。奏陳列柵制賊之策。丁酉秋。果再肆。陷晉州南原。直指畿甸。公且戰且行。斬級以聞。承 召赴朝。倚公防截漢津。還朝翌日。旋與天朝將官彭友德渡江。戰於稷山大破之。冬。天朝大發兵。遣提督麻貴,經理楊鎬。攻蔚山賊。公領衆先攻。突騎徑前 。斬後進者以徇。諸軍距躍蟻附以登。陷其外城。提督,經理交口稱之。戊戌春。以疾乞免。宣廟慰諭勉留之。天朝遣兵部尙書郉玠。督三提督分路討之。公隨劉綎攻順天賊。綎素無戰心。持重不進。公累畫策而綎不聽。未久賊大衂於水軍都督陳璘。且其酋秀吉死。諸路賊倂捲還。己亥夏。公病𠫷控辭。宣廟許遞。七月六日。竟不起。享年六十二。宣廟震悼輟朝。賻賵有加。遣官致祭。命贈贊成。九月。窆于楊州洪福山戌坐之原。先兆也。越七年乙巳。論功錄宣武功臣一等。贈領議政府院君。公前夫人曰昌寧曹氏。僉正輝遠之女。溫莊和厚有壼範。年二十四而卒。贈貞敬夫人。有一女乃鼇城公也。生二男一女。男長星男。次井男 。皆蔭仕爲郡守。女曰尹仁沃。星男初娶判書權徵女。生一男一女。後娶主簿金繼男女。生二男四女。井男娶承旨尹顗女。生一男一女。尹仁沃生一男一女。後夫人曰朴氏。竹山望族。縣令世炯女也。明惠持法度。奉姑承公。一順無違。公歿。以未亡自處 。節祭時祀。無不式禮。時製衣服。設奠焚之。後公十年卒。戊申二月也。年六十二。封貞敬夫人。四月祔葬於公墓之兆。無子 。公取仲氏子益慶爲後。益慶補蔭職爲縣監。初娶李光輪女。生三男。曰㠎武科縣監。曰岦。曰嶪。後娶李淨女。生一男三女。男曰巘。女曰李道基。餘幼。㠎有二男一女。嶫有一男。道基有一男。幷幼。公身頎八尺。容貌魁偉。符彩嚴重。制行忠朴。處父母兄弟。愉婉和厚。喪哀祭誠。一出眞素。待遇宗族。咸盡其懽。性好施與。家無長物。處事周愼。擧必萬全。臨敵對壘。言爲整暇。建牙開府。再領儲胥。身先士卒。號令嚴明。將士親附。謀行功從。剗削大敵。以寡敵衆。雖古名將。有不及者。皇朝石尙書星遇我國使者。詢公起居曰。爾國若有權公數人。何憂焉。倭人亦見我國人。必問權元帥何在。其爲華夷所共服如此。在戎行。手錄聖旨及天朝咨揭曰。我死。李議政必能誌我墓。此足矣。洎釋負。構一室於江鄕。號晩翠堂。寓其志也。嗚呼。欽是公元帥時幕佐也。有虞卿白璧之知。無中郞黃絹之辭。竊嘗評之曰。高山深林。龍虎變化者。公其人也。汾陽之勳而不得致中書之考。晉公之德而不得享綠野之樂。茲爲可嘅。而若其仗節盡瘁。身佩安危。丹書鐵倦。永保始終。足與二公媲云。銘曰。
若昔壬辰。蠢彼介鱗。鞠頑裒兇。奔突跳躑。孰獮孰剔。遍我箕封。惟上曰咨。疇董我師。繄爾其才。公膺其重。八路是總。
再燃于灰。熸之于幸。大鋤其梗。于稷于蔚。左水右陸。扼項批脊。莫我敢越。斗極重恢。黃道褰開。伊公之烈。人謀畢凝。
鬼神與能。伊公之籌。赫赫厥靈。巍巍其名。伊公之休。有山嶻峛。有碑嵽嵲。伊公之藏。公有幕佐。載揚載播。銘于墓陽。
<끝>
象村稿卷之二十七 / 神道碑銘 一十一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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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記]
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筳春秋館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原任 奎章閣直提學李裕元 書 并篆。
壬▨▨▨公累立奇功 皇帝詔曰今觀全羅道斬獲甚多該國人民尙可振作因差鴻臚寺官宣諭 天朝東征將士相謂曰權家軍與他鎭自別總督軍。門▨▨宋應昌移咨本國另行獎賞略曰王國三都諸郡悉皆望風奔潰曾無一英雄傑士倡義師排大亂守封疆以圖恢復者王國可謂無人獨權某扼守。孤縣▨集衆庶屢出奇謀時抗大敵近復囊沙爲糧誘倭來搶而劫殺此正王國板蕩忠臣興名將兵部尙書石星奏本以爲陪臣權某獨守孤危以抗强。勁 宣祖大王前後獎諭備至至曰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慴敵國又日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此數者具載 於白沙所撰行狀及墓誌及戰捷」碑陰記最後象邨申公又表章于此碑之面後幾年余又特揭于其陰曰此數者宜屢書而不一書也夫誰曰疊床而架屋也其子孫之不載於原碑者平市。今第二第三女壻參判趙壽益姜元祉也縣監一男判官嶫二男俶休巘二男任仁也判官二男尙珩尙珪長齋郎俶四男尙中尙正尙經尙稱任三男尙」忠尙文尙質也曰寔聖輔尙珩尙珪出也外裔多不能盡錄嗚呼自古中興之君無不得人而任之周之方召二甫尙矣漢之雲臺諸將唐之郭李諸人皆以」忠義誠懿蒙被委任成功如建瓴然宋之李張讒間搖惑卒無以成然則公雖智勇邁古而徵我 宣朝知人之哲而委任之專則焉而有濟㢤然當時如李。忠武舜臣猶不免於對吏幾死則公之以忠信善道自結於 君上者可知也 主聖臣良可謂千載一時也時 崇禎癸亥仲春日恩津宋時烈記。洪惟 宣祖大王中興我家邦時則元帥權公屢平倭奴建大勳後象邨申文貞公撰神道碑尤菴宋文正公述追記訖數百年尙闕顯刻公之九世孫。始謀樹貞珉屬裕元書之又爲追刻之記裕元曰公之茂烈懿德已有兩先生文而今可補者猶有一二矣公初謚莊烈因 國諡改以忠莊建祠幸。州賜額紀功公之子益慶官縣監殉江都 贈職旌閭此皆不可不書者而至若內外雲仍不能盡記惟嫡傳若干人錄之益慶四男長曰㠎縣監㠎三。男長曰仁判官仁三男長曰尙珩縣監尙珩一男曰寔縣監寔系子壽麟縣監壽麟二男長曰綜縣監綜系子聖祜府使 贈參判聖祜一男曰安昌。君系子最朝公之壻白沙公即裕元九世祖也昔白沙公誌公之隧今追先講世使裕元操觚而述臨石而寫裕元之所不敢辭乃摭。其實而書之」于左辛酉仲夏外十世孫月城李裕元謹識。<끝>
崇禎紀元後二百三十四年辛酉冬立。
판독자 : 유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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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장군 묘
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보(溥)의 9세 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 정경부인 창령조씨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422년 전,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2월 12일,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이긴 날입니다. 3만여명의 왜군은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9차례의 맹공격을 해왔지만 권율장군이 이끄는 1만 여명의 군사는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부녀자들도 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도록 도와 나중에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 168-1
▲정면에서 바라본 묘지원경
▲권율장군의 신도비각
▲신도비각에 있는 원래의 신도비가 풍우에 글자 마멸이 심해 1847년(헌종 13) 후손들이 새로 세운 신도
비입니다.
▲앞의 묘가 권율장군 묘이고, 위쪽 중간의 묘는 양주 목사를 지낸 형인 권순(1536~1606)의 묘이고,
제일 윗쪽 상단의 묘가 영의정을 역임한 아버지 권철(1503~1578)묘 입니다.
권율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부인 창녕조씨와 후부인 죽산박씨가 안장되어 있으며, 묘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동자석 1쌍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습니다. 권율장군의 묘는
경기기념물 제2호로 1972년에 지정되었습니다.
권율장군 묘갈/사진출처>개미실 사랑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