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을 우리는 보통 문제의 원인이자,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나의 의지대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은 우리 사회의 관념 (그가 속한 모든 사회적 배경) 들로부터 만들어지는
하나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바꾸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왜이럴까,,,' 라던지 '내가 왜그랬지?' 또는 '역시 나는 대단해'' 라는 등의 이성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내가 잘모르는 나의 모습은 다 내가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이다.
우리 행동의 대부분을 결정하는것은 소위 말하는 '무의식' 의 세계이다. 무의식은 체화된
나의 사고방식이자 아무런 의식없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나의 생각, 행동, 감정인 것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에는 무척이나 힘들고 신경을 많이 써야하지만, 타는 법을 익히고나면
아무 생각없이 탈수 있게되는 것처럼, 무의식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것도 나의 일부분이자
내 뇌의 일부분일 뿐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고, '나는 어떤사람일까?' 라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나의 모습인 것이다.
이 무의식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10세 이전의 어린나이에 완성이 되고, 특히나
36개월 이전에 거의 성격형성이 완료된다. 이 시기 한 아이의 신체적, 정서적, 지적 발달은
그 아이가 물려받은 유전적 기질과 아이가 자라나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다.
이 시기에 뇌의 신경망 연결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이 신경회로가 어떤 구조를
가지는가에 따라서 사람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미 태어날때 1000억개의 신경세포와
50조개의 시냅스 (신경세포들간의 연결) 를 가지고 태어난다. 거의 성인과 버금가는 수준의 개수이다.
생후 몇 개월간 아기의 뇌는 이 연결을 1000조개까지 늘리게 되지만, 그 연결 강도는
매우 미약하다. 생후 3년간 이 미약한 연결을 강화하고, 또 불필요한 연결을
잘라내는 가지치기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가지치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후에 여러
발달장애를 겪을수 있다.
이것은 아기의 경험과 자극을 통해서 강화되는데, 이것이 아이가 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불필요한 연결은 없애고, 또 자주 경험하는것은 강화되는 연결과정을 통해
한 아기가, 즉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자전거 연습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처음 탈때 무척이나 힘든것은, 실제로 우리 뇌가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시냅스 연결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고, 자꾸 연습해서 반복하게되면, 그 경험과 자극은
이 연결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이 강화된 연결은 결국 큰 에너지 소모 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우리 몸에 체화된 상태로 남게되는것이다. 이를 통해 나라는 사람의 모습에, 자전거를
탈수 있는 '나' 가 추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100%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기질과
아기가 자라나는 환경의 영향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아기의 '의지'라는 것이 작용할수 있는
순간은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자라온 환경과
나의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기질이 조합된 모습이다'가 될것이다.
('금쪽같은 내새끼' 라는 문제아이 행동치료 TV 프로그램을 보면, 모든 아이들의 문제는
전부 부모로부터 생겨난 결과였었다.)
한 인간은 수동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나의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라던지
, '내 의지로 나를 변화시킬수 있다' 라는 말은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내 뇌의 신경망이 다른 조합으로 재배열이 되야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유전자를 재조합 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이 변해서,
경험하는 일들이 변화해야 가능한 것인데, 이것이 없다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변하는 순간은 그 사람의 사회적 배경과 경험이 변화할때만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내가 변화했다라던지, 성장했다라고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그때의 내 주변환경이
어땠는지 생각해보라. 만나던 사람, 주변 사람의 기대, 일하던 직장, 주로 다니던 길,
내가 경험하던 것들 중에 아주 작은것이라도 뭔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또는 나의 몸이 성장하면서, 그 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나에게 새로운 자극과 경험을 제공하고, 이것이 나의 뇌의 새로운 신경망 연결을
촉진시킨다. 우리가 성장했다라고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런것이다. 예를 들어, 기어만 다니던
아기가 첫발을 떼고, 스스로 걸어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두손이 자유로워지면서 아기의 뇌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스스로 걸어다니면서 보이는 풍경, 경험 그리고 두손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는 환경은 아기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의 경험을 제공하게 되고, 이는 곧 뇌의 수많은 새로운
신경망 연결이 활성화 되고, 강화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아기는 성장하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신체적 성장에 한계가 있듯이 인간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 사회가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끊임없는 성장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등은 모두 '환상' 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내 '의지' 라고 말하는 것중에, 실제로 내 의지가
존재하는건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예를들어, '내가 오늘 짜장면을 먹기로 결정했다' 면,
우리는 이것을 내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배고픔을 느낄때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사실 우리 의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를 먹게 만들고 이를 거역하면 우리는 생명의 지속이 불가능해진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 의지대로 결정하는게 아니라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먹고 안먹고는 내 의지대로 결정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짜장면은 어떨까, 우리가 짜장면을 먹고 싶다고 결정한것은 우리가 이미 먹어봤기
때문이다. 아니면 짜장면을 먹는 사람을 볼수 있었기 때문에 나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것이다.
짜장면이 없는 환경에 사는, 짜장면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에스키모 인들이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할수는 없다.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짜장면을 먹을수 있는, 또는 먹어본 사람이 있는 환경에서 만들어질수 있는 결과이다.
우리는 결코 짜장면이 없는 환경에서 짜장면을 먹고싶다는 생각을 할수 없다.
결론적으로 '짜장면을 먹기로 했다' 라고 결정했을때, 우리의 의지대로 짜장면이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내 현실을 결정할수도 없고 (태어나고 자란 장소와 시간), 무언가를
먹고 안먹고의 문제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 본성의 문제)
이 외에도 중국집이 문을 열고 안열고의 문제 또는 내가 짜장면을 직접 만들어 먹는다면,
그 재료를 구할수 있는문제 등등,,,모든 상세한 사항들을 살펴보더라도 내 스스로 결정할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내가 짜장면을 먹기로 했어' 라는 것을 우리의 의지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이는 아주 단순한 예이고, 어떤 생각과 결정이던 분석을 통해서, 우리의 의지가 존재하는지
확인해볼수 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다른 사람들이 존재할때만 대답할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내 의지로 나를 만들어간다' 와는 달리, 주어진 환경에 의해 수동적으로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기쁨, 슬픔 그리고 불안과 우울등 여러 정신적 문제들
역시 후천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 현대 뇌신경학자들로부터 계속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이미 쥐 실험을 통해, 불안과 우울 행동장애가 모두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결과가 있다.)
개인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우리의 세계관이 사회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중에 하나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규칙, 제도, 법률 등등, 모든 사회
규제가 모두 한 개인의 문제를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왜 발생하게 되는지 원인이 되는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학문이나 기술 또는 제도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등등 동서양의 대표적인 철학자들부터
이러한 세계관이 정립된것으로 생각된다. 자아 성찰과 자기 절제. 그리고 나를 변화시킴으로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간 철학을 정립해 나아갔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의
사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그 믿음의 뿌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철학도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그 당시 사회적 관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절대 불변의 진리가 아닐수도 있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는 대략 B.C.500 년경 즈음에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 당시는 철기가 발달하면서, 대규모의 농업 생산이 가능해지게 되었고, 이런 대규모의 생산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사회 계층이 다양하게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황제와
거대한 제국이 출현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사람의 판단과 결정이
이 세상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키는지 볼수 있었던 시기였고 (황제의 한마디에 평민들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한 인간의 지혜와 판단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리더 중심 승자 독식 체제가 극에 달한 시기라고도 볼수 있다. 세상은 온통 황제의
일거수 일투족에 시선이 집중되어있을 것이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얘기일 것이다.
이것을 보고 자란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수 있을까를 평생 고민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문자와 책들을 통해 많은 사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접할수 있었고,
이를 통해 철학 사상의 정립을 이루어 낼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고, 우리는 나 자신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나의 의지대로 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잘못된 인식은 우리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을 바꿀수 있는데,
바뀌지않고 계속 실패한다면 한 개인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를 아예 못하게 만들고, 문제의 근본원인도 찾지 못하게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한 개인의 잘못으로 쉽게 덮을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우리 세계관에도 적합하고, 아주 재밌고 쉬운 방식이다.
하지만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