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아무개라는 자는 프로 기사가 되려다가 실패해서 중이 되었고, 끝내는 중도 되지 못해 결국은 소설가가 되고 말았다.” 어떤 급수 낮은 하늘 밑의 벌레가 이 중생을 가리켜 한 악담이라는데, 우선은 맞는 말이다. 바둑쟁이가 되어보겠다고 입단대회에 나갔었고, 그 무엇을 찾아보겠다고 불볕의 산야(山野)를 헤매며 시주밥만 도적질하였으며, 그리고 시방은 이야기를 팔아 밥을 먹는 이른바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입단대회에 나갔던 것은 열여덟살 때였다. 그 도(道)를 깨쳐 국수(國手)가 되고자 함에서가 아니라, 다만 배가 고파서였다. 돌멩이라도 깨물어 먹고 싶고 흙이라고 파먹고 싶었으며 그리고 잠자리라도 잡아 구워먹고 싶었을 만큼 언제나 배가 고팠다.
육신의 배고픔은 그러나 두번째였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이 중생이 태어나서 갓 돌도 되기 전에 장총을 멘 순사한테 끌려가신 채로 상기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계신데, 외로웠던 것이다.
맨 처음 집을 나갔던 것은 고등공민학교 2학년 때였다. 오일륙이 일어났던 해 여름이었다. 열다섯 살. 대전발 영시 오십분 차를 ‘빠방틀어’ 갔던 곳은 목포(木浦)였다. 땅의 끝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 끝의 끝에 서보고 싶었다. 끝의 끝에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기차와 마찬가지로 ‘빠방틀어’ 타고 끝의 끝으로 가보고자 했던 외항선은 그러나 저 먼 바다의 한복판에 섬처럼 막막하게 떠 있었고, 거기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첫 절망이었다.
출가(出家)라는 이름의 그 가출(家出)은 열아홉 살 나던 해의 찔레꽃 머리였다. 졸업을 몇 달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65년. 분명하게 이 중생은 알아버렸던 것이다. 월사금을 대기 벅찼지만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떻게 또 간신히 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이 될 수 없고, 군대를 가더라도 장교가 될 수 없으며, 그리고 속소위 ‘고등고시’에 패스를 한다고 하더라도 임관이 안된다는 것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없는 출신 성분임을 알게 된 열아홉 살짜리 소년이 꿈꾸어 볼 수 있는 길이 무엇이었겠는가? 입단대회를 통과해서 그 가진 바 실력만큼 밥을 벌 수 있는 승부사(勝負師)가 되든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진실로 진정한 ‘밥’을 벌 수 있다는 중이 되든지, 꾸며낸 이야기이되 진실로 진정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또한 밥을 벌 수 있는 소설가가 되는 셋 가운데의 하나일 밖에.
어린 시절 할아버지한테서 행마법(行馬法)을 배운 바둑은 그러나 그 재주가 빼어나지 못했고, 진실로 그 이름에 값하는 납자(衲子)가 되기에는 맺혀있는 것이 너무 많은 중생이었으니, 이야기를 팔아 밥을 먹게 된 것 또한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귀결로 된다.
문학잡지사에서 현상모집하는 신인문학상에 응모를 하기는 하였으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당최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 중생은 ‘학력별무’였으니까. 이 세상은 모두가 정상적인 삶의 조건 아래 태어나 정상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정규의 과정을 거쳐 유치원과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와 대학교와 그리고 대학원을 나옴으로써 이른바 ‘쯩’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연애를 해도 자기들끼리만 하고 혼인을 해도 자기들끼리만 하고 이층을 해도 자기들끼리만 하고 친구를 사귀어도 자기들끼리만 사귀고 세상을 씹어도 자기들끼리만 씹고 술을 마셔도 자기들끼리만 마시고 하다 못해서 불륜을 저질러도 자기들끼리만 저질러서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두고 대를 물려가며 이 세상을 지배하고 나누어 갖고 즐기게끔 조건지워져 있으니까. 그것이 이른바 기존의 질서이며 기득권일 터이니까.
시방도 마찬가지지만 그때에 이 중생은 소설책을 읽더라도 맨 먼저 작가의 약력란을 읽고는 하였는데, 하나같이 모두가 ‘모모하는’ 대학교의 국문과와 영문과와 불문과와 독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기로 학력 같은 것을 쓰지 않고 곧바로 처음 쓰게 된 작품 이름을 쓰는 작가나 시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쓸쓸한 것이었다. 문학이라는 것이 결국은 혼자서 개척하고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고독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따로국밥처럼 문학 따로 삶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곧 삶이요 삶이 곧 문학이며, 그리하여 몸 전체를 붓 삼아서 죽을 작정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인생 그 자체라는 것도.
그리하여 문학이야말로 ‘쯩’이 없어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살아낼 수 없는 이 중생 같은 음지의 젊은 영혼들이 온몸으로 한번 달려들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도. 이 세상에는 어찌하여 ‘쯩’이 있는 자와 ‘쯩’이 없는 자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나뉘어져서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인가를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이 세상은 왜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지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 나뉘어지고 착취하는 자와 수탈당하는 자로 나뉘어지며 세상이 즐겁다고 웃는 자와 세상이 막막하고 인생이 슬퍼서 고통스럽다고 우는 자로 나뉘어져서 끝없이 서로 물고 뜯게 되는가 하는…. 그늘의 꽃.
그래서 무엇인가를 써보았던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써서 응모해 보았던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데 무엇일까? 무엇인가 세상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는 이야기이겠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은 맺혀 있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겠다. 맺혀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세상 또는 세상 사람들한테서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이겠다. 그것도 회복 불능의 깊은 상처를. 그리하여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잘못되었으므로 뜯어고쳐야 된다는. 뜯어고쳐서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는.
응모를 했다고는 하나 이 많이 모자라는 중생의 작품이 ‘쯩’이 있는 숱한 응모작들과 겨루어 당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선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백만원이라는 상금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상금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없었으므로 생계의 대책이 없었다. 소설을 쓰는 석 달 동을 국수와 라면쪼가리로 연명하였으므로 당장의 끼니가 골칫거리였다. 78년 여름이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 있었다.
연꽃은 그만두고 호박꽃 한 송이 피워보지 못한 채 진흙창, 사바의 똥바다로 다시 내려오게 된 것은 76년 늦가을이었다. 그 전 해에 활자로 찍혀진 바 있던 단편소설 ‘목탁조(木鐸鳥)’가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만들지도 않았던 ‘중쯩’을 빼았겼던 것이다
. 만들지도 않았던 ‘쯩’을 빼앗겼기 때문에 다시 흙바람 부는 저자로 내려왔다고 했지만 진실로 이 중생을 못 견디게 만들었던 것은 만들고 싶지도 않았던 ‘쯩’ 따위가 아니었다. 공밥을 먹고 있다는 죄스러움. 내 손으로 내 밥을 벌고 싶었다. 내 손으로 번 밥으로 늙으신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싶었다.
인연의 수레바퀴는 참으로 묘해서 다시 바둑으로 밥을 먹었던 적도 있었다. 바둑 잡지에서 밥을 벌었던 것과 ‘석남거사(石南居士)’라는 필명으로 일간지에 관전기를 썼던 것이 그것인데, 한 수 한 수가 그대로 승부와 직결되는 중반싸움의 한복판에서 포석(布石) 시절을 떠올려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지난 겨울 이곳에 왔을 때의 심정을 적어보았다.
천지를 삼킬 듯 눈은 내리고 개울물은 꽝꽝 얼어붙었다
배는 고프고 목은 타는데 눈보라는 또 휘몰아친다
나는 왜 또 이 산 속으로 왔나 물통은 또 어디 있나
도끼로 짱짱 얼음장 깨면 퍼들껑 멧새 한 마리
천지를 삼킬 듯 눈은 내리는데 나한테는 般若가 없다
없는 般若(반야)가 올 리 없으니 燔惱(번뇌)를 나눌 동무도 없다
산 속으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평안도 시인은 말했지만 내겐 버릴 세상도 없다
한 번도 정식으로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그립다
배고픈 것보다 무서운 건 외로움이고 외로움보다 더 무서운 건 그리움이다
念佛(염불)처럼 서러워서 나는 또 하늘을 본다 눈이 내린다
--------------------------------------------------------------------------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1) 소설가 박영한
◀난 마음의 집을 짓는 '25년 경력 목수'▷
친애하는 미스 스윙.
조석으로 가을이 몰아쳐 제법 선선해졌구나. 하오의 햇살 곁에 앉았지. 날 놀려대면서 까무룩 자지러지는 네 웃음소리 들리누나. 이 목수 아저씨 흉내를 내느라고 발을 통통 까불리며 “오케이!” 하고 톡톡 튀게 내쏘던 네 그 목소리도 말이다.
이번에 펴낸 책 ‘카르마’의 무대가 되는 마을의 고개 너머에 너는 살았었지. 서울에서 우연하게 널 다시 만나기 전 갑자기 네가 궁금해져 지프를 몰아 강원도까지 내리 달려간 적이 있지. 넌 이미 오래 전에 서울로 유학을 떠났으며, 가족들은 뿔뿔이 객지로 흩어지고 네 외할머니만 집을 지키고 있다더구나. 느티나무 앞에다 차를 세우고 사나운 비바람을 맞받으면서 소주를 들이켜며 밤을 지새고 돌아왔지.
인연이란 참 모를 일이지? 그런 일이 있었으니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뒤 서울에서 용케도 다시 만나게 된 걸까. 뜬금없이 넌 전생에선 나와 모종의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지?
해발 700㎙ 고지 첩첩오지의 그 불구자 사내 집으로 놀러오곤 했을 때 넌 눈매가 잘 익은 머루 빛깔이었어요. 서울에서 재회했을 때 네 눈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곤 놀랐지. 어릴 시절의 널 눈 큰 아이로 기억해두고 있었거든.
그토록 쬐그맣던 계집아이가 말쑥한 이십대 처녀로 변해버렸으니 얼마나 반갑고 놀랍던지. 그 불구자 사내 집으로 네가 이따금씩 놀러오곤 하던 그땐 네 나이에다 삼을 곱하면 내 나이였는데, 서울에서 다시 만났더니 넌 내 나이의 절반이더구나. 너무 신통해 우린 얼마나 웃었더냐.
스윙, 참, 잊기 전에 이 이야기부터 해두자. 내가 새벽마다 산을 오르는 이유를 넌 모를지도 몰라. 단순히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지. 두 가지 이유에서야. 하나는 내 직업하고 관련된 거고, 나머지는 널 쌩쌩하게 만나기 위해서라고 고백하고 싶구나.
머리숱이 희끗희끗 서리 날리기 시작한 목수 사내가 튼튼한 집을 짓자면 심신이 단단하지 않으면 안돼. 집 짓는 이력이 근 25년이구나. 근력을 키우고 백태가 끼기 쉬운 의식의 눈을 맑게 가다듬어야 하니까. 널 마주하기 위해선 왜 튼튼해야 하느냐고?
너는 발랄하니까. 넌 서울에서만 공연하는 연극 영화 기타 등등 공연물을 보려고, S시로부터 자동차를 몰고 네 시간 만에 총알같이 달려오곤 하니까. 넌 잡을 수 없이 빠르니까. 넌 요시모토 바나나와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니까. 넌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도 곧잘 보내고 넌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거품 커피랑 피자를 좋아하니까. 넌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책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요리조리 바쁘게 날아다니니까. 숱한 남자 친구들이 또한 널 에워싸고 있으니까. 그러면 나?
늙어가는 목수로서 대패질이든 망치질이든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니까. 내게도 신명이 남아 있어요, 제발. 그러니 몸 쓸 일이 생기면 신명나게 신체를 놀려야 하니까. 너도 좀 알고는 있으리라만 내가 지어왔던 집들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구나.
보석(寶石)의 마음이 들어있는 집을 짓는 일이 궁극적인 목표지. 황혼에 사위어가는 내 집을 보고 사람들이 슬퍼하며 눈물짓고, 지즐대는 새들과 햇빛 반짝이는 잎새들로 둘러싸인 내 집 안에서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할 그런 집을 말이지. 집을 둘러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흔치 않은 귓속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지. 진짜배기로 세상 사랑하는 법을 전해줄 메시지를.
스윙이여, 넌 알고 있겠지. 내가 어이하여 오늘 이때껏 마음의 집 짓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이따금씩 번민에 휩싸이곤 하는지를. 최근 새로 지은 ‘카르마’란 제목의 이 집은 여태껏 지어 올린 집들 가운데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이에요. 현세적(現世的)인 안목으론 넘볼 수 없는 그 어떤 다른 무언가를 그 집의 영혼에다 불어넣으려 애썼거든.
세속의 관심 그 너머, 우리 눈과 의식으로 가늠해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비의(秘義)를 간직한 집이라 감히 말해도 될는지. ‘머나먼 쏭바강’이나 ‘우묵배미’ 연작들로는 성에 안 찼었지. 그것들은 아무래도 이 지상의 질료들로 구조된 집들이었지. 이번의 새 집은 생과 사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범신론(汎神論)의 어떤 지점과 교신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이는구나.
서울에서 우리가 재회하게 됐을 때, 어떤 이유로 네가 나를 믿고 의지하게 됐는지 난 좀 알고 있어요. 그건 내가 짓는 집들 속에 해답이 들어 있다고 말해야겠지? 신명이 솟구치면 목수는 대패질과 망치질을 시작하지. 그는 지어 올리고 싶은 자기 세계가 있으니까.
그걸 못하게 되면 그는 존재가치를 잃게 되고,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작가 사내처럼 풍토병 같은 데 걸려 온몸이 썩어 들어가니까. 진실로 ‘진정한 의미의 인간들’이 모두 다 못 말리는 무당이듯이 진정한 목수 역시 못 말리는 무당이겠지.
신명, 그건 곧 내 속에서 움터 자라 새로운 집으로 완성되어 주기를 바라는 생의 불꽃이요, 그건 또한 목수의 운명을 목수의 운명답도록 강인하게 뒤받쳐주는 그 무엇일 테지. 나는 원래 재능의 면에서는 목수 재질이 아니었지만 거칠고 고단한 삶을 거쳐오면서 목수로서의 이력을 쌓은 거라 생각하곤 하지. 그래, 목수가 아니었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을 거니까.
참, 너와 내 주위의 그 누구나 우린 전생에 어떤 인연으로 옷깃을 스친 사이였다는 걸 넌 요즘에사 뒤늦게 인정하기 시작하더구나. 우리? 우린 당연히 옷깃만 슬쩍 스친 사이 정도는 아니었으리. 만약 그랬다면 왜 네가 들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내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던가를 설명할 수 없어질 거야. 넌 언젠가 내게 보낸 메일에서 이렇게 나를 뒤흔들어놓고야 말더구나.
“난 언제나 대장(隊長)의 거소 주위가 걱정스러워져요. 어젠 대장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대장 작업장 주위라도 밟아보고 싶어서 강을 끼고 마구 달려갔지요. 강은 작업장 저만치서 무심히 흘러가고 역시나 대장 없는 집은 쓸쓸하기만 하더군요. 대장이 먹이를 주면 그토록 많이 날아들던 새들도 안 보이고 자주 놀러오던 들개도 들고양이도 기척이 없더군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작업장의 나무토막이며 못통을 들고 요렁조렁 만져보다가 부엌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서려는데 어둠 속에서 들고양이가 사뿐거리며 걸어나오는 거지 뭐예요. 따로 해먹일 건 없고해서 달걀 후라이를 구었죠. 베란다 난간 앞의 제 밥그릇에다 가만히 내려놓았죠. 제 그릇을 주인도 아닌 내가 만지는데도 반가와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라구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은 나는 그만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말았어요. 야생의 것들을 그냥 그대로 두시지, 왜 인연을 만들어서 새들과 들고양이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는 거지요? 집 지을 궁리로 여기저기 바쁘게 나다니시면서, 늘 돌봐주지도 못할 거면서, 뭐 하러 불쌍한 것들과 인연을 맺느냔 말예요.
저 영리한 고양이는 낮 동안 사냥감을 보고도 고개를 돌렸을지 모르잖아요. 대장이 갑자기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요. 주인이 주는 음식 양만큼은 항상 위장을 허기로 비워둘 거잖아요. 야생의 것들을 야생의 상태로 그냥 놔두었더라면 고양이든 개든 더 행복하고 더 평화로웠을 거예요. 굳이 주인을 기다리지도, 허기를 남겨두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너무 가슴이 아프고 대장이 원망스러웠어요.”
넌 한동안 네 야생의 들판으로 달아나 내게 가까이 올 생각을 않더구나. 아니, 넌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서 달아날 생각만 하는 거지? 아무렴. 그래도 내겐 할 말이 없어요. 내 마음의 적설(積雪) 위에다 넌 순결한 토끼 발자국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떠났구나. 우리가 나눈 그것은 흔히 세인들이 이르는 ‘사랑’이란 것과는 약간 다른 명명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넌 이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요번 겨울 시골 구석에 틀어박혀 스윙, 너의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쓰겠다고 새끼 손구락 걸고 약속하마. 보상 없는 사랑 이야기, 그 무지막지한 폭풍, 그 하객 없는 황량한 신전(神殿)에서의 혼례식 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거듭날 수밖에 없었던… 그 희망과 좌절, 푸른 풋콩 비린내 나던 너의 시샘, 제어할 수 없던 질주에 관한 이야기를. 알레그로 비바체의 폭풍 같은 필치로. 그날들을 되살릴 수 있으려나. 새 집을 짓기 전엔 늘상 이토록 마음이 설렌단다.
▦오늘의 작가상(1978) 동인문학상(1988) 연암문학상(1988) 등 수상
--------------------------------------------------------------------------
임철우
"이름없이 살다간 이들의 꿈·절망 되살릴 수 있다면… "
내 고향 마을 한 가운데 우물이 있었다. 유독 물이 귀한 섬 마을 사람들에겐 하나 뿐인 그 우물이야말로 생명수였다. 어린 시절, 까치발을 하고 들여다보면 너무 깊어서 밑도 끝도 없이...
--------------------------------------------------------------------------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29.강석경
◁내 영혼을 탐색, 그 본질에 닿고 싶다.▶
많은 작가들이 성장기부터 작가를 꿈꾸었다고 하지만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대학신문에 난 추계문예현상 공고를 보고 응모했고 당선이 되었다. 졸업반 때였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금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써본 것인데 심사했던 이어령 선생님이 나를 불러 격려했다.
선생님은 당신이 맡고 있던 ‘문학사상’에 등단하라면서 단편 2편을 써오라고 했다. 기대치 않았던 추천이었지만 나는 교수 연구실을 빌려 밤늦도록 소설이라는 것에 매달렸다. 혼자 글을 쓸 나만의 방이 없었고 이런 악조건이 나를 문학으로 떠밀었는지 두 편의 단편이 통과되었다.
이리하여 대학을 졸업한 해에 나는 내 인생의 설계도에 없었던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원래는 미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조각과 함께 미술 평론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무의식 중에 썼지만 등단 단편들을 보면 무엇이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는지 알게 된다. 세 편 다 조직 사회에서 자기를 잃은 인물의 자아찾기가 주제였다. 아동잡지사에 근무하다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세 달만에 첫 직장을 잃게 된 당시의 경험이 조직사회 속의 개인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고 사회의식을 싹트게 했다.
20대의 마지막에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 생활로 들어섰다. 삼 년간 직장 생활을 했으나 나는 늘 물 위에 뜬 기름 같았다. 마음이 공허했고 어떤 영혼의 갈망에 흔들렸다. 언어는 늘 머리 속에 있었기에 원고지 위에서 그것을 모색해야 했다. 영혼의 눈은 어느덧 조각에서 문학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문학은 필연으로 다가온 자아찾기의 방편이었다.
전업작가 생활로 들어서면서 문학에만 매달리자 글쓰기가 높은 산을 넘는 것처럼 힘겨웠다. 그즈음 기지촌을 배경으로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취재는 충분히 했으나 글이 도무지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늪에 빠진 듯 했고 절망한 나머지 소설을 못쓰면 자살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객관적 거리감과 함께 여유가 생겼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는 것이 힘이 되었다.
소설 하나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다니. 그만큼 젊었고 그때는 문학이 삶의 전부였다. 문학으로 삶의 무의미와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에 매달리지 않으면 반생의 내 삶에 어느새 침투한 허무주의에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이 허무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했다.
나도 한때는 보랏빛 꿈으로 사랑에서 구원을 찾기도 했지만 인간의 사랑은 허망하지 않은가. 인간 자체가 늘 변하므로 감정은 변덕스런 바람일 뿐.
우리가 찾아다니는 사랑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도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끼니 걱정을 했던 50년대 말에도 자가용을 탔던 유년은 풍족했지만 나는 지금도 자개농이 늘어선 방에서 맴돌던 공허의 냄새를 기억한다. 뒷날 생각하니 그것은 행복과도 무관한 물질의 공허였다.
이렇듯 공허한 것들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나는 비본질적인 것에서 등돌리고 문학으로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 나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자아찾기란 다름 아닌 나의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본질에 다가가기’를 위한 모색으로 나는 두 가지 주제를 나의 문학적 화두로 삼았다.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에서 나를 탐구하고, 또 하나는 제도에 상처받은 인물들을 통해 완고한 인습과 제도가 얼마나 우리 삶을 억압하며 비인간적인가를 고발하면서 그 모체인 한국사회를 탐구하려 했다.
1989년도에 인도를 여행했던 일이 떠오른다. 사막지대인 라자스탄에서 사파리투어를 했는데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사막에서 잠을 잤다. 여행자로부터 별이 쏟아지는 사막의 밤하늘에 대해 이미 들은지라 기대에 찼지만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니 광대무변한 우주가 펼쳐진 듯 했고 나는 우주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보는 신세계 앞에서 나의 자아도 해체되었지만 그 작은 반도에서 상처만 받고 살았구나, 불현듯 생각했다. 내가 받은 고통은 본질과 무관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사막의 밤하늘 아래서 고통의 낭비를 깨닫고 억울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상처를 문학의 화두로 삼고 있다. 그 상처를 푸는 방법으로 문학을 택한 것 같다. 분단 현실로 가족이 상처받은 작가는 끊임없이 분단소설을 쓰고 아버지의 부재도 번번히 작품에 등장한다.
사랑에 상처받은 자의 시엔 사랑과의 투쟁이 되풀이해 그려진다. 그래서 문학을 패자의 기록이라 말하는지 모르지만 작가의 상처 혹은 작중 인물의 상처는 곧 그 사회의 단면이므로 작가들은 상처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속한 사회의 왜곡된 면이나 인생의 환부를 열어젖힌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여, 지켜보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상처의 밑바닥까지 응시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대중의 무감각한 일상-본질에서 먼-을 비트는 작가의 이 ‘온순한 복수‘는 물론 보다 인간다운 세계를 위한 것이다. 하여 문학은 궁극적으로 휴머니즘이다.
권력이든 제도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은 폭력이니, 문학은 진정한 삶을 방해하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벗겨내면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소설 속에서 크게든 작게든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은 이러한 억압적인 인생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본질에 다가가려는 자유정신에서다.
내가 사는 천년 고도 경주에는 수백 개의 고분들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작은 산처럼 솟아있는 1,500년의 거대 고분들은 죽음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태고로부터 강물처럼 흘러온 세월 속에 생성과 소멸이 되풀이되는 인류의 삶. 희로애락 속에 발버둥치다가 나도 너도 풀잎처럼 스러지고 저렇게 생명이 순환하는구나, 생각하면 이 단순한 삶의 법칙 앞에 구원의 한 자락을 보는 듯하다.
경주의 고분들은 삶의 원형을 보여주고 한 장의 풍경으로 본질을 말해주는데 왜 나는 밤을 지새우며 광대처럼 수많은 인물들을 조정하고 보상도 없는 소설을 쓰는 것일까.
인도에서 체류할 때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바라나시 힌두대학 교정에 인도 전통의학 체계인 아유르베다에 쓰이는 약초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의 영적 진화에 있어 기초가 되는 육체의 치료로서 아유르베다를 공부하여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나무 그늘 아래서 살까, 생각한 적이 있다. 정말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국 사회 곳곳에 배치돼있는 정신적 독재자들, 완고한 가부장제, 여성들조차 한몫 하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왜곡된 가족주의를 생각하면 여성작가로서의 나의 문학작업이 바위에 달걀치기 같은 헛된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 과감하게 인도전통의학을 시작했더라면, 십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데 죄를 씻듯 수도하듯 공부했더라면 지금쯤은 인도에서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주고 약초를 키우며 살아갈 텐데. 그것이 문학보다 더 보람되지 않을까? 나는 왜 문학을 버리지 못했을까? 명예욕이 강한 작가는 자신이 없으면 한국문학사에 공백이 생긴다고 확신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망상을 하지 않는다.
인도 여행 후 ‘모든 집착은 미개한 것’임을 깨닫고 내 존재의 기반인 문학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언어로 돌아오고 만 것은 그것이 본질인 영혼을 탐색하는 최적의 보루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기술을 연마한다면 누구나 육체의 치료사가 될 수 있지만 작가는 상처에서 진주를 캐내는 정신의 의사가 아닌가.
■ 연보
▲1951년 대구 출생
▲1974년 이화여대 조소과 졸업
▲1974년 ‘문학사상’에 단편 ‘근(根)’ ‘오픈게임’이 추천 등단
▲작품집 ‘밤과 요람’ ‘숲 속의 방’
장편 ‘순례자의 노래’ ‘청색시대’ ‘가까운 골짜기’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내 안의 깊은 계단’
산문집 ‘인도기행’ ‘일하는 예술가들’ ‘능으로 가는 길’ 등
▲녹원문학상(1986) 오늘의작가상(1986) 21세기문학상(2001) 등 수상
--------------------------------------------------------------------------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28. 김영현
◁독재에 스러진 꿈·열정… "소설은 내 영혼의 치유제"▷
내가 소설이라고 처음 써 본 것은 대학 삼학년 무렵이었다. 대학시절의 나는 그야말로 천방지축이어서 당시 법대생이었던 평론가 이동하 형이 나를 일컬어 ‘행복한 낭만주의자’라고 놀렸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낭만이란 장발에 통기타와 생맥주를 빼고는 온통 암흑과 같았던 유신 치하의 낭만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울하고 갑갑하던 시절이었다.
가끔 김민기가 잡혀가서 죽도록 얻어터져 병신이 되었다더라는 소문도 들렸고, 가리봉동 어느 공장에서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썼다더라는 풍문도 들렸다. 우리는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을 읽으며 낄낄거렸고, 황석영의 ‘객지’를 읽으며 무언지 모를 비장함에 잠기고는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친구 중의 한 녀석이 군대를 갔다. 내가 다니던 국립대도 아닌 삼류대에 다니던, 지지리도 가난했던 놈이었다. 그 녀석과 청계천에서 통행금지 때까지 술을 마시고 사이렌과 함께 차와 사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텅 빈 거리를 소리치며 걸어가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낼모레 군에 갈 놈이라니까 근처에 있는 여인숙으로 들어가라고 보내주었다. 담배가게 이층의 쓰러져가는 여인숙, 겨우 계단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올라갔다. 돈이 없어 시계를 끌러주고 주머니를 털어 소주 됫병을 사왔다. 이불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나서 도저히 누울 수도 없었다. 엉망으로 술에 취한 그 친구는 기어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 그리고 “복수할거야, 복수할거야”라고 밑도 끝도 없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밤을 온통 추위와 이유없는 청춘의 아픔과 설움에 젖은 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새벽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그 ‘소설’이란 것을 썼던 것이다.
‘닭’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것은 제목 그대로 날개를 잃어버린 채 대가리를 땅에 처박고 지렁이를 찾는 닭의 족속에 빗대어 우리의 탈출구 없는 청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대학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대학문학상을 타서 일약 대학문단의 혜성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게 조용히 문학을 하거나, 혹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철학도로서 상당한 자부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의 본질과 이면을 개념에 의해 논리적으로 추구하는 작업에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의 발톱은 나처럼 감수성이 강하고 세상일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을 사정없이 나꿔채 어디론가 데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학보사 편집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는데 대학 사학년 말미의 초겨울, 밤에 등사기를 들고 가다가 기어코 들키고 말았다. 초겨울 비가 추절추절 내리던 날 나는 마치 오랫동안 예감되어온 것처럼 어딘가에 내팽개쳐졌는데 그곳은 바로 영점칠평의 어두운 감옥소 독방이었다.
시골 한의사의 십남매 중 아홉번째로 태어나 가장 총명하다고 서울까지 유학 보낸 나의 추락은 실로 우리 집안의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오년, 나는 세상의 밖에서 살았다. 발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독방에서 일년여 있다가 다시 여러명이 어울려 사는 방에서 반년을 보내고 나오자 집으로 영장이 날아와 있었다. 이번에는 군대로 가라는 전갈이었다.
말하자면 유배를 보내는 것이었다. 오랜 단식으로 몸이 말이 아니었다. 병석에 누워계신 늙으신 아버지를 뒤로 하고 병무청 직원과 담당 형사와 함께 훈련소로 떠났다. 늦은 가을 코스모스가 바람에 비누방울처럼 날리고 있을 때였다.
전방 포병부대에 가있는 동안 광주사태가 터졌다. (광주민주화운동보다 내겐 이 말이 더 사실적으로 들린다.) 그러자 보안대에서 불렀다. 근 보름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짐승의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적막강산 그 자체였다.
내가 이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은 82년 겨울이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독재의 권좌에는 박정희 대신 전두환이 앉아있었다. 복학은 하였지만 어느 곳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같이 감옥을 살았던 후배, 그 후 영화감독이 된 여균동의 집에 빈대살이를 붙었다. 몸도 마음도 사막과 같은 시절이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헛구역질을 하고 비가 내리거나 어둡거나 하면 까닭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취직이 되지 않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윤구병 선생을 만났더니 마침 잘 되었다며 출판사에다 취직을 시켜주었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아니, 소설이 아닌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끼적거려보고 싶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어딘가가 망가져 있었고,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도록 치명적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열과 발작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자신을 추스리며 서있었다.
나는 글쓰기에서 어떤 희망을 찾았다. 자신을 서술하는 것, 자신의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리하여 내가 살았던 것, 우리들이 살았던 것, 대학시절 가리봉동 공장 어두운 담장 아래로 걸어가며 수없이 되뇌었던 것,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와야 한다는 것, 독재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민주주의를 노래하는 것, 감옥과 지하 고문실과 강원도의 달빛과 감자꽃에 대하여…아니,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까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이 다 퇴근하고 난 출판사의 책상에 앉아 하루에 한 편의 단편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 첫번째 소설이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였다.
창작과비평사에 갖다 주었더니 당시 계간지는 폐간되고 없었던 터라 신작소설집에 넣어주었다. 실로 십여년만에 다시 ‘소설가’로 등단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서 ‘포도나무집 풍경’ ‘멀고 먼 해후’ ‘벌레’ 등 많은 단편들을 잇달아 발표하였는데 어떤 해에는 그해 작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 시집 ‘겨울바다’를 세상에 냈다. 김명인의 긴 발문이 붙어있는 이 시집은 이제 절판이 되었지만 칠십년대 세대인 우리가 살아온 초상화 같은 것이어서 지금도 읽으면 내 속에 잠들어있던 피가 끓어대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의 문학은 나의 병력(病歷)과 다름 아니다. 다만 그 병이란 게 광풍처럼 우리를 휩쓸었던 배반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다소간의 객관적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나도 괴로웠던 젊은 시절의 추억, 폐쇄회로와 같은, 회색빛 겨울날과 같은,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오래되고 무거운 낡은 옷처럼… 훌훌 벗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난 세상의 도처를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다. 낯선 세상, 낯선 거리에 서면 열병처럼 앓았던 내가 보이곤 했다.
지난 겨울 내내 나는 장편을 쓰기 위해 조립식으로 지은 서울 근교의 허름한 화실에서 보냈다. 폭설로 길이 끊어지고 보일러가 얼어터져 불씨 하나 없는 방에서 한밤중 나는 혼자 한마리 거대한 벌레처럼 변해 꿈틀거리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징그럽고도 괴기한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문득 이것이 이 생에 지워진 나의 숙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나는 작가라는 것이다. 작가란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처럼 설사 그 누가 읽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목마른 열정으로 차있던 나의 청년기가 나로 하여금 이 문학의 숲 입구에 서 있게 하였다면 작가라는 선택된, 어쩔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지금 이 숲을 지나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그렇다. 지극히 행복하다. 나는 이제 내 인생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시간의 강 위에 흘려보내야 하는 것과 남겨두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헛된 명성에 눈멀지도 않고 내 능력 밖의 일 때문에 부대끼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몫만한 삶이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작가에게나 자신의 몫만큼 주어진 소명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내게 주어진 몫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로서 내게 주어진 소명에 대해 생각한다.
꽃은 백화난방(百花亂邦) 해야 아름답고 새는 백조쟁명(百鳥爭鳴) 해야 아름다운 법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선후배 작가들이 내겐 문득 모두 꽃이며 새처럼 보인다. 보잘 것 없는 재능이지만 나 역시 그 중의 하나가 되어 꽃 피우고 노래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숙명일까.
<연보>
▦1955년 경남 창녕 출생
▦1982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84년 창작과비평사 발행 14인 신작소설집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에 단편소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발표 등단
▦1997년~현재 실천문학사 대표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그리고 아무 말도
‘남해엽서’ 등
▦한국일보문학상(1990) 수상
서울 마포의 실천문학사에서 만난 김영현씨는 새 소설이 11월께 나올 것
같다면서 “늘 내 소설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말했다.
--------------------------------------------------------------------------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27. 소설가 이동하
◁홀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작심한 것은 아마도 중2 때였지 싶다. 직접적인 동기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밀고 올라온다.
1950년대 중반, 낯선 도시의 빈민촌, 가장 부재의 극한상황 속에서 당신은 마흔 수도 미처 채우지 못한 나이셨다. 훗날 나는 이 무렵의 궁핍한 삶을 중편 3부작 ‘장난감 도시’에 썼다. 지금 읽어보면, 내가 왜 중2의 나이에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을 그처럼 독하게 했는지 실감된다.
문학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소설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랬다. 나는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비정한 세계에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성장기에, 나와 내 가족들이 겪어야만 했던 그 가혹한 체험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고, 이야기하면서 가슴속에 고여 있는 울음을 퍼내고 싶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위로 받고 상처를 치유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다른 동년배 작가들에게도 공통적인 게 아닌가 생각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 동기와 소박하지만 강렬한 이 욕망은, 두말할 것 없이 6촵25 전쟁의 소산이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는 전쟁이 있었고, 전쟁의 배후에는 폭력적인 세계가 있음을, 골방에서 오직 소설 쓰기에만 코를 박고 사는 동안 조금씩 깨쳐갔던 것 같다. 대학 재학 중에 쓴 단편소설 ‘전쟁과 다람쥐’가 등단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가능했다고 믿는다.
이 난폭한 세계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찮게 망가지고 있는가를, 다람쥐 한 마리의 운명을 빌어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전쟁처럼 엄청난 폭력도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전쟁은 한결같이 절대적인 명분을 치켜들기 때문이다. 대량 살상도, 무자비한 인종 청소도 그래서 정당화된다.
지난 70, 80년대에 이르러 연작소설 ‘폭력연구’를 쓰면서 나는, 인간집단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이 이제는 인류 최대의 재앙이란 생각을 했다. 마침 폭압적 권력이 우리 사회를 숨막히게 지배하던 시기였다.
폭력은 폭력을 확대 재생산하고, 급기야는 인간성 자체를 황폐케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말하자면,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항 이데올로기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라는 회의와 전율을 어쩌지 못했다.(다소 비약하는 건지 모르나, 지난해 전세계인을 경악케 했던 9촵11 테러사건이 그랬다. 무자비한 폭력성 자체도 그러려니와 나를 더욱 경악케 한 것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살맛이 난다’고, 어느 젊은 시인은 말했다)
문학의 언어가 꼭 사랑을 담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엿먹듯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증오나 원한의 언어일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구호와 시는 어떻게 다른가? 편을 가르고 담을 쌓고 완전무장을 요구하는 언어가 구호라면, 시는 어깨를 겯고 담을 허물고 무장해제를 강조하는 언어인 것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 ‘오직 사랑을 위해서’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대신, 오늘 우리들이 일용할 양식처럼 너무나 흔하게 중독되곤 하는 그 증오와 원한의 수렁으로부터 헤쳐 나오기 위해 나는 소설을 쓰고 있노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본즉,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지금까지 너무 거창한 소리들을 늘어놓은 것 같아 적지않게 얼굴이 뜨겁다. 굳이 의미를 붙여 말하라면 그렇다는 얘기일 뿐, 다른 꿍꿍이 속은 없다.
고백하자면 내가 굳이 소설을 쓰게 된 데는 아주 단순하고 분명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소설을 쓰는 일은 이 세상에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업이라는 자각이 그것이다. 저 50년대의 극한적 가난 속에서 어머니를 잃은 다음부터 나는 삶의 근원적인 허무의식 못지않게 생존의 위기의식에 심하게 내몰렸었다.
어쩌면 나와 내 가족들이 졸지에 엄동설한의 길바닥으로 나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식의 강박증에 늘 시달렸던 것이다. 손이 어설퍼서 어릴 적부터 딱지 한 장 제대로 접을 줄 모르고 팽이 한 개 깎을 줄 모르던 위인이었다. 평소 못 한 개 야무지게 박지 못하는 내 손을 가지고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기가 도무지 가당찮아 보였다.
세상 사람들과 다부지게 맞서지 못하는 심약한 마음이 나를 책 속으로 숨게 했고, 망치 따위 일상적 도구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무력한 손이 원고지를 붙잡게 했다고도 생각된다. 어쨌거나 그것들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만은 저 도저한 허무의식으로부터도, 그리고 저 생존의 불안감으로부터도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써낼 수 있는 재주란 어쩌면 결핍에서부터 얻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남들은 흔히 가지고 있는 생활능력 같은 것을 아예 갖추지 못한 채로 등을 떼밀려 세상에 나왔거나 아니면 천방지축 어설프게 굴다가 일찌감치 엎어먹었거나, 그래서 결국은 달리 대책 없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이런 이들에게 소설은 대리만족과 함께 약간의 보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중2 이래 단 한번도 진로를 고민해본 적이 없다. 문학에 대한 신념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나로서는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탓이다.
그나마 내가 매달려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일이 소설 쓰기였던 것이다. 나라고 왜 다른 길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면 소설 쓰는 일이란 것도 생업을 위한 다른 일들, 일테면 농사를 짓거나 운전을 하는 일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한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30년 넘게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감정에 늘 부대껴 왔다고 생각된다. 열등감과 자부심이 그것이다. 나는 왜 남들처럼 삐까뻔쩍하게 살지 못할까라는 열등감과, 그래도 덜 속물 아니냐라는 자부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해 왔던 셈이다. 그런 중에도 오늘까지 나를 지탱해 준 것은 후자이다.
소설을 쓰고 문학을 한다는 행위가 별나게 의미심장한 것은 아니라고 치자. 그래도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하는 사람 아니냐, 순수를 추구하는 사람들 아니냐 하는, 그런 자부심을 껴안고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믿음도 잃어버린 듯싶다. 남은 것은 뿌리깊은 열등감 뿐. 내 안에서 한사코 껄떡거리고 있는 속악한 욕망들을 더 이상 숨기거나 다스리기가 어렵다는 느낌이다. 오히려 누구보다 더 속물적이고 몰염치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면서도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어느 새 저 젊은 날의 문학적 열정도 순수도 다 잃어버린 채 빈 껍데기만 남아있는 기분이다.
‘이순’의 나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요즘 들어 종종 자신에게 던져보곤 하는 물음 중 하나다. ‘불혹’과 ‘지천명’을 지나온 나이가 그것이라면 이순이란 어떤 말에도 감정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뜻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순의 문턱을 넘어서고 본즉 거기 가려져 있던 다른 의미가 알밤처럼 또렷이 만져진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는, 다시 말해 당위를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시야가 좁아지고 고집이 세지며, 분별력은 떨어지고 낯가죽은 두꺼워지는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곧잘 벌컥벌컥 화를 터뜨리곤 한다. 자신을 돌아볼 줄도, 적절히 제어할 줄도 모르게 되는 것, 그것이 늙음이라면 이순의 교훈은 바로 ‘순해지고 또 순해져라!’는 죽비 소리가 아니겠는가.
돌아보면 나의 소설은 전쟁의 상처였고, 폭력적 세상에서 내가 탄 추위였다. 그것은 또 생존의 불안과 강박증의 산물이었고, 한심하고 초라한 자화상 그리기였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예나 지금이나 문학은 자기 삶을 돌아보는 작업이다. 특히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곰곰 되새김질함으로써 자아와 세계를 성찰하고자 소망하는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는 여전히 난폭하고 비정하며, 나는 또 너무나 자주 그리고 깊이 상처받고 전율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도 순수도 거덜난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도 한사코 소설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입력시간 2002/09/18
--------------------------------------------------------------------------
이동하
홀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작심한 것은 아마도 중2 때였지 싶다. 직접적인 동기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
박태순
'독자가 누리는' 글쓰기로 부드러운 세상을 위하여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우선 세 가지 답안을 제출해 본다. 첫번째로는 ‘문학이 있으니까’이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는 알피니스트가...
김원우
엉터리 세상…言語의 힘으로 바꾸고 싶다
흔히 일컫듯이 인체가 소우주라면 소설의 세계도 언어제도적 유기체로서의 그 위상만큼은 그에 버금간다. 모든 유기체가 대체로 그렇듯이 소설도 사회적...
서정인
세상은 혼돈…캄캄한 미로 벗어나기 위해 쓴다
왜 쓰냐?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별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거나 받은 적이 아마 없었다...
김광규
말해질 수 없는것 포착하려 홀로 '중얼중얼 중얼…'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숫자와 결부된다.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생년월일이 결정되고, 뒤따라 주민등록번호가 ...
이성부
山에서 다시 만난 詩는 내게 삶을 보여주었다
그 무렵 내가 만났던 좋은 시들은 내 정신의 키를 자꾸만 높여 주었습니다. 나는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이 볼 수 없는 ...
김원일
전쟁·가난 얼룩진 가족史,그 기억을 풀고 싶었다
내가 만약 문학의 길로 나서지 않았다면 60 나이에 접어든 지금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얼른 떠오르는 게...
윤후명
소설속에서 잃어버린 내 꿈★이 이루어진다
마라토너가 달리는 걸 보면 가슴이 뛴다. 한때 나는 마라토너의 삶을 꿈꾸었다. 중학교 때는 방과후에 홀로 남아 운동장을 돌았고 ...
전상국
"내끼 발산과 신명내기에 제격"
왜 쓰는가. 대답은 늘 분명했다. 쓰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1963년 등단하여 단 두 편의 단편소설을 쓴 것을 끝으로 만 10년 동안 글과 담을 쌓고 ...
신경림
詩는 스스로 충만한 한그루 나무
내가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이다. 내가 추천을 받은 시는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이강백
현재진행형의 희곡은 바로 우리의 삶!
희곡은 문자로 읽는다는 점에서 문학에 속하고, 무대 위에 공연된다는 점에서 연극에 속한다. 마치 박쥐 같다. 그 옛날 날개 달린 짐승들과 다리 가진 짐승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박쥐는 양쪽을..
현기영
"4·3은 나의 숙명…세상의 모든 억압은 나의 적"
문학을 숙명처럼 생각해온 나는 문학 이외의 다른 삶을 살아볼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참혹한 유년을 겪은 자는 어려서 문학을 만나면 곧장 그 길로 들어서기 쉽다는데, 아마 내가 바로 그러한...
김지하
"어둠속 '흰 그늘'과도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쉽게 말하자. 궁상도 청승도 허풍도 다 접고 한 마디로 말하자. 넋이 내 시의 기점(起點)이다. 넋이 무엇인가? 넋은 사람이 죽었을 때 ‘날아오르는’ 혼(魂)이요 ‘흩어지는’ 백(魄)이다...
최인호
"문학은 세상의 고통에 감응하는 하소연의 눈물"
어릴 때부터 내가 꿈꾸었던 장래희망은 오직 소설가 뿐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부터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무렵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되는 장면이 있다. 어렸을 때...
이호철
여섯살적 셰익스피어와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보다는 ‘나는 왜 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쪽이 훨씬 더 가까이 살갗에 와 닿는다. 같은 얘기가 아니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천만에! 한 마디 말이...
박완서
"날 억압하는 찌꺼기로부터 가벼워지기 위해"
또 6월이다. 올 여름을 어떻게 나나.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여름을 날 일을 미리 걱정하면서 지겨워하게 된다. 내 기억은 50여 년 전에 못박혀 있다. 마음의 못 자국을 몸이 옮겨 받아 같이 시난고난 앓는 건...
--------------------------------------------------------------------------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11. 소설가 이제하-가난에의 의지
◁"문학은 거창한 것 다 버려야 만날 수 있는 실체"▷
순정에 겹던 문청 시절에는 “왜 글을 쓰는가” 라는 물음이 “왜 밥을 먹는가” 라는 소리처럼 해괴하게 들렸다.
목수더러 대패질, 못질을 해서 왜 집을 지으려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얼마 전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온 일이 있다.
“문학을 하려고 합니다. 월수는 얼마쯤 되며 전망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좀 알았으면 합니다.”
문학이라는 말의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 실업계 고교 졸업반쯤의 학생이려니 했다가 정작 질문자가 여중생으로 드러나 더 놀랐을 것이다.
글을 읽었을 때 도대체 어이가 없던 그 첫 느낌은 그러나 차츰 가시가 씹히는 듯한 그런 기분으로 변했다.
“여성 상위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성천하의 시대가 오는 것도 시간 문제겠지요. 그러므로 전망도 아주 밝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월수 천 만원 정도는 예사가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사진발도 잘 받아야 하니까 얼굴 가꾸는 일에도 게을리 마시고….”
힐책 삼아 눙쳐 본 소리가 아니다. 잡다한 영상 매체들의 영향을 들먹이면서 여기저기서 ‘문학의 위기’ 운운 하는 소리는 나오고 있어도, 그 많은 대학의 그 많은 문예창작과 학생들조차도 ‘데뷔’라는 소리가 입에 익고 ‘사진발’이 노상 염두에 늘어붙어 괴롭히고 있다면 이건 어쨌든 문학에 대한 열정의 증좌이지 불모 현상은 아니다.
그 표출방식이 어쩐지 뒤틀려 있다고 생각될 뿐이다.
비근한 예로 이를테면 근자 나온 창작집들 중에 사진 대문짝만하게 겹으로 안 실리고 평론가의 보완해설 곁들이지 않은 책을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가령 전람회 팸플릿 같은 것에 간단한 약력 외에 상 받은 이력이나 여타의 직함과 해설 따위들이 줄줄이 페이지를 메우고 있으면 “이 작자 작품이 허하니까 간판이나 내세우는군” 하는 생각이 제풀에 들어도, 문학 쪽은 어떻게 된 셈인지 그런 요란이라도 떨지 않으면 책이 팔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우라고 치장한 책이 저자의 아집이나 야망, 상품광고에 동원되는 탤런트의 이미지부터 전달한다면 분명 뭔가가 잘못된 게 아니겠는가.
물론 몰염치한 출판업자들의 파행으로 전적인 탓을 돌릴 수도 있다.
문지나 창비 도장을 배꼽에 찍지 못하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거나 그게 싫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인 행세라도 해서야 그나마 몇 권쯤 책이 팔린다는 소리 역시 그런 눈요기 파행의 한 증좌다.
문학의 주 소비층이 만화 독자들이기 때문인지 바야흐로 멀티 영상 시대이어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우리의 문화층이 아직도 과도사회의 난장판 대합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일까.
그런 식의 데뷔나 그 부침이 가수들처럼 월 단위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는 해도, 이건 시장의 도떼기판이지 제대로 가고 있는 문학의 행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음의 가난이나 겸손이 작가가 지녀야 할 기본 덕목의 하나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 필자가 시대에 뒤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왕년의 사대부나 제도권의 먹물 선비들을 비웃던 이념권의 먹물 선비들처럼 가난을 짐짓 체통으로 여기고 자랑 삼을 생각이 필자에게는 없다.
배가 부르면 하루아침에 부르주아지 속성을 드러내고 여의치 못하면 송곳니 갈기를 계속 강요하는 세태가 여일하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단세포적인 그런 시대의 속성 만을 탓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변덕스럽고 누추한 그 꼴들을 그동안 너무 흔하게 보아와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써서 정당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비로소 문학도 당당한 그런 것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글 쓰는 일이 자기 구원이니 세상에 대한 보복이니 하는 소리도 그런 시류와 허세의 악순환 틈에서 비어져 나오는 비명일지 모른다.
문학이 구원이 되려면 죄를 인정해야 하는데 진보도 보수도, 참여도 순수도 제 허물을 자인하는 사람은 지금 아무 데도 없다.
필자는 문학을 구원에 이르는 무슨 종교 같은 것이라고도, 그것을 넘어서는 해탈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더구나 그것이 민족혼과 그 중심에 가 닿을 수 있는 결연한 의지라거나 공평한 세상에 일조하는 도구라는 식의 가당찮은 생각 같은 것은 꿈에서조차 떠올려본 적이 없다.
그런 것들을 믿었다면 지금쯤 사제가 되었거나 지사라도 되어 벌써 문학을 버렸을 것이다.
충만하면서도 근원적으로는 공허한 바다처럼, 필자에게 문학이란 차라리 어깨에 힘주어야 하는 그 모든 거창한 것들을 완전히 제외시켜 버리고 난 뒤에야 만날 수 있는 어떤 실체이다.
굳이 따지라면 그것은 나와 세상 사이의 혹종의 ‘관계’이고 그 알파 내지 플러스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한 올의 거짓도 틈입 못할 정도로 나와 세상 사이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을 때에야 그 핀트도 바로 잡힌다.
쓸쓸한 빈소에서 홀로 절하고 있는 사내의 양말 뒤꿈치에 구멍이 나 있으면 그것은 어김없는 이 나라의 시인이고, 술 한잔 걸쳤다고 그런 시인에게 덤벼들어 무작정 주먹다짐을 하는 것도 자세히 보면 영락없이 시인이다.
좋은 세상 만든다고 외치고 있는 자는 정상배고, 광주를 떠들고 있는 자는 틀림없이 거기서 도망쳤던 자이다.
이런 부정적인 시선을 강요하는 세상과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하려는 자아 사이의 긴장. 굳이 주제까지 말을 하라고 한다면 필자가 여태 써온 글들의 중심 뼈대는 모두가 그것이었다고 할밖에는 없다.
이 땅의 세칭 그 ‘민주화 투쟁’ 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요량으로 1970년대를 백 플래시로 삼은 어느 소설에서던가 ‘저는 발끝 하나 다치기 꺼리면서 남의 목숨은 분신이나 하라고 불구덩이 속에 차 넣던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대화를 지문으로 썼다가 일간지의 어느 서평 담당 기자에게서 시비 비슷한 항의를 지상으로 당한 적이 있지만, 노조 위원장 같은 유형은 절대로 소설 속에서도 악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그 적절하고도 해괴한 논리나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소설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어떤 형식이 아닐까 보냐는 이쪽의 해명도 말하자면 나와 세상과의 그런 시각적 관계이다.
적절하다는 것은 ‘노조 위원장’이라는 대명사가 당대 시류의 긍정적인 대세를 이루고 있거나 그 일반적 연민 아니면 공감 같은 통념을 가리키고 있어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이 해괴하다는 것은 문학의 자주성과 그 반역의 속성과 정체성 따위를 말하는 소리이다.
국문과 출신의 어느 비평가가 국문학자를 소설 속에서 희화화 시켰다고 비비 꼬였다느니 뭐니 하고 횡설수설한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비평이고 옳은 비평가라고 할 수가 있을까.
이 나라에서 문학을 한다는 소리는 그래서 결국은 가난의 의지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일견 깨끗하고 겸허해 보이기는 하지만 속은 텅 빈 채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가난이라고 한다면 일제 말기부터 시작된 필자의 가난은 한마디로 벌거벗은 자연(自然)이었다.
새삼 바라볼 것도 없던 그 자연. 그것도 새나 나무나 수풀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울창한 숲 같은 것이 아니라 눈 닿는 한 벌겋게 묻어나는 황토와 시든 잡초가 반점(斑點)처럼 얼룩진 황폐한 들판이 전부였던 그 자연.
미당의 시를 빌리자면 ‘말라버린 여울바닥은 독자갈들을 드러내고 그 위에 또 무당이 포개어 앉아 오른손의 금을 펴보는’ 그런 벌거벗은 자연 말이다.
지루해서 더 이상 견디며 바라볼 수가 없던 그 가난한 자연이야말로 뜻밖에도 예사롭지 않은 인내심을 밑천처럼 필자에게 남겨놓았던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제하 연보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중퇴
▲1957년 ‘신태양’ 신인문학상에 소설 ‘황색 강아지’ 당선촵1958년 ‘현대문학’에 시 ‘노을’ 등으로 추천 완료
▲소설집 ‘초식’ ‘기차, 기선, 바다, 하늘’ ‘유자약전’ ‘용’ 장편소설 ‘광화사’ ‘소녀 유자’ ‘진눈깨비 결혼’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 영화칼럼집 ‘이제하의 시네마천국’ ‘괴짜들 짱구들, 젊은 영화들’ 등
▲이상문학상(1985) 한국일보문학상(1987) 편운문학상(1999)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