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경기에 선수교체 제도가 도입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처음으로 선수교체가 가능해진 대회는 1970년 월드컵이었는데, 그 전까지 각 팀들은 경기에 참여하고 있던 선수가 부상으로 실려 나가더라도 벤치 멤버를 교체 투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로 인해 한 명의 선수가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빠져나간 팀은 10명으로 경기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비한 규정에 희생된 대표적인 팀은 1958년 대회의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핵심 수비수 종케가 전반 초반에 부상으로 실려 나가는 사고를 당했고, 그로 인해 일찍부터 10명으로 브라질에 저항하다 2-5 패배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더 나아가 1966년 대회에서도 미드필더 불가렐리를 부상으로 잃은 이탈리아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북한에 0-1로 무릎을 꿇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은 사례가 늘어나자 피파로서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셈이다.
결국 피파는 1970년 대회에 이르러 한 경기에 두 명까지 선수를 교체 투입할 수 있도록 새로운 규정을 적용시켰다. 그러나 처음으로 선수교체가 도입된 대회인 만큼, 감독들의 용병술은 오늘날과 같이 체계적이고 치밀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잉글랜드의 램지 감독은 서독과의 8강전에서 보비 찰튼을 지나치게 일찍 벤치로 불러들이는 유명한 실수를 범했다. 2-1로 앞서고 있던 후반 25분, 램지 감독이 4강전에 대비하여 찰튼에게 휴식을 부여한 것이다. 이 결정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경기 종료를 20분이나 남겨둔 시점에서, 그것도 미드필드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던 찰튼이 그라운드 위에서 사라지자 경기 흐름은 무서운 속도로 뒤바뀌어 버렸다. 이는 램지 감독으로서는 좀처럼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결국 잉글랜드는 서독에게 2-3 역전패를 당하게 된다. 램지 감독의 실수는 세계 각국의 감독들이 선수교체 용병술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발카레지 감독은 1970년 대회 당시 마쫄라에게 전반 45분을, 리베라에게 후반 45분을 맡기는 ‘전·후반 분담제’를 도입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는 얼핏 보면 공정하고 효과적인 용병술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두 선수 모두가 빛을 보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반복한 끝에 감독들의 용병술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체계적인 발전을 거듭해나갈 수 있었다. 그 밖에 피파는 1994년 대회에 이르러 선수교체 가능요원을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렸고, 선수들이 더욱 폭 넓게 체력을 안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
첫댓글 승부차기가 1978년에 처음 새행되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