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김두한이 화제이다. 7월 말 방영을 시작한 서울방송 월화
드라마 (연출 장형일, 극본 이환경) 때문이다. 요즘 남자 중고
생 사이에서는 ‘긴또깡’(김두한의 일본식 이름)을 모르면 화제
에 낄 수 없다는 말도 들려온다.
이같은 현상은 영화 (감독 임권택)이 개봉되었던 10년 전을 연상
케 한다.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룬 이 액션 활극은 당시로서는 경
이적인 흥행 기록(서울 관객 67만 명)을 세웠었다. 그렇다면 과
연 김두한은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의리의 협객
이자 투철한 민족주의자였을까? ‘김두한 신화’의 허구와 진실
을 파헤쳐 본다.
김두한은 낭만적인 협객이었나
겨우 열여덟 살에 종로통 뒷골목 주먹 세계를 평정한 김두한은
협객(俠客)을 자처하며, 당시를 협객 시대라 칭하곤 했다. 그렇
다면 협객이란 무슨 뜻인가. 자유당 시절에 활약한 전설적인 깡
패 유지광은 에서 건달(놀고 먹는 사람), 어깨(조직으로 뭉치기
전의 폭력배), 파락호(공갈·행패를 일삼는 무위도식자) 등과 구
분해 협객을 ‘동정심이 많은 폭력배’로 구분했다. 한국전쟁 이
후에는 이들을 통칭해 깡패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유지광은 ‘경
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수단 삼아 패거리를 이룬 불
법적 집단’을 깡패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김두한은 이런 깡패와는 무관한 ‘낭만적인 협객’이었
을까. 김두한은 낯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딱한 사정에 처해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동정심 많은 폭력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조직 범죄 연구가들은 이런 개인 성향과 무
관하게 한국 조직 폭력배의 시조로 김두한을 꼽는다. 이전에도
시라소니 같은 주먹들이 있었지만 엄격한 위계 질서와 조직 내
부 규율을 갖춘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는 김두한이 최초라
는 것이다. 특히 광복 이후 김두한이 이끈 정치적 청부 폭력·경
제적 이권 개입 행위 등은 후대 조직 폭력단의 활동 원형이 되었
다.
김두한은 항일 투사였나
드라마 에서 암흑가 두목 쌍칼은 만주로 떠나겠다는 김두한을 이
렇게 설득하며 만류한다.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독립 운동이
지만 종로의 상권을 지키는 것도 독립 운동이야. 우리는 거리의
독립군이 될 수 있어.” 신주백 성균관대 연구교수(한국사)는,
그러나 이같은 대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김두한은 조
직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선 상인들에게 기생했던 깡패에 불과하
다고 평가한다. 명동 상권을 장악했던 하야시패와의 대립 또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과장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63년 김두한이 펴낸 회고록 를 보면 조선인 상권을 보
호하기 위해 야쿠자패와 맞섰다거나 하는 대목은 전혀 나오지 않
는다. 광복 이후 공산주의자를 섬멸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활
약했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김두한이
힘깨나 쓴다는 일본인을 주먹으로 제압한 것만으로도 당시 사람
들이 대리 만족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야시와는 대립하기보다 공생하는 관계였다는 것이, 하
야시패의 중간 보스였으며 훗날 김두한과도 절친한 사이였던 김
동회씨의 증언이다. 1999년 MBC가 방영한 에 출연한 김씨는, 이
른바 장충단 대혈투 사건 이후 하야시가 김두한에게 자전거보관
소 운영권을 넘겼고 그 뒤 두 사람이 호형호제하는 관계를 유지
했다고 주장했다.
김두한 또한 회고록에서 하야시가 자신에게 매달 용돈 삼아 천
원씩 보내주었다고 기술했다. 측근의 회고에 따르면, 광복 직후
하야시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김두한에게 남은 한국 돈 일체와
일본도 및 권총 한 자루를 선물로 주고 갔다고 한다. 이 시기 박
헌영에게 설득당해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을 맡았던 김두한은 하야
시가 준 이 무기들로 무장하고 박흥식·백낙성 등 조선인 유지들
의 집을 털러 다녔다.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김두한은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나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씨는 생전에 이런 질문을 즐겨 던졌다고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세 사람이 누군지 아나? 이
승만, 나 그리고 김두한이야.”
대공(對共) 투쟁에 관한 한 이는 맞는 말이다. 광복 직후 공산당
에 몸 담고 있던 김두한은 우익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사 단
장 염응택을 만난 뒤 무자비한 ‘백색 테러리스트’로 변신했
다.
염응택으로부터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
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이남 출신으로는 유
일한 백의사 단원’이 되었다는 김두한은 박헌영 저격 미수 사
건, 여운형 암살 사건 등 각종 테러 사건에 깊숙이 간여했다.
당시 김두한이 이끈 청년단체 대한민청(대한민주청년동맹)은,
‘경찰에 걸리면 살아도 청년단에 걸리면 죽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좌익계 활동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한민청의 활약
은 1946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9월 총파업에
서 두드러졌다. 당시 김두한은 실습용 총과 수류탄, 죽창으로 무
장한 돌격대원 3천명을 위스키에 만취케 한 뒤 용산역 기지에서
파업 중이던 철도 노조원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노조원들의 무장
을 해제한 대한민청은 이 중 핵심 간부 8명을 추려내 죽창으로
살해한 뒤 역 구내 하수도에 시체를 묻었다.
김두한은 또 공산당 간부나 노조 핵심 요원들을 몰래 납치해 죽
인 뒤 열차가 철교 위를 달릴 때 이들의 시체를 던져 버리는 수
법도 즐겨 썼다. 회고록에서 김두한은 이렇게 해치운 ‘인간 화
물’이 72구에 달했다고 회고했다. 수표교 아래서 거지 생활을
할 때부터 죽마고우였던 정진영을 납치해 쇠파이프로 직접 때려
죽인 것도 이즈음이다. 정진영은 김두한이 전향한 뒤 공산당에
그대로 남아 ‘좌익 주먹’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 테러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김두한은 미군정 재판부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듬해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사면
을 받기는 했지만, 김두한은 이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여보
게, 사람 좀 그만 죽이게”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러
나 따지고 보면 그를 백색 테러의 선봉장으로 만든 배후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해방 정국 청년운동사를 연구한
김행선 박사에 따르면, 대한민청은 이승만 및 한민당의 친위대이
자 이들이 지향하는 건국 이념을 전파하는 ‘대공 전투부대’였
다.
이에 대해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테러 행동이 영웅적인 단
독 결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미군정도 경찰도 방
관만 하고 있기에 자기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만 이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더욱이 김두한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종
류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측
근 인사의 주장이다.
한때 김두한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던 이 측근 인사(전기는 결
국 발행되지 않았다)는, 김두한을 일컬어 ‘단순하고 직정적이
며 귀가 얇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훗날 온 나라를 발칵 뒤집
어놓은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또한 김두한 자신이 아니라 핵심 브
레인이었던 박 아무개씨(시나리오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
다고 그는 주장한다.
김두한은 독재 정권에 저항한 투사였나
드라마 는 앞서 언급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만
큼 이 사건을 비중 있게 해석했다는 뜻이다. 1966년 9월 벌어진
이 사건은 재벌가 삼성이 벌인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해 당시
한독당 의원이었던 김두한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똥이나 처먹
어. 이 새끼들아!”라는 폭언과 함께 정일권 총리 등 국무위원들
에게 오물을 흩뿌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의원 직을 상실했을 뿐더러 박정희의 미움
을 사 중앙정보부에 불려다니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대
신 김두한은 일반 국민들의 가슴 속에 ‘서민의 대변자’‘군사
정권에 대항한 투사’의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비록 그의 행위
가 1인 정당의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쇼맨십이자 법치주의에 대
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그가 보
여준 행각은 군사 정권 아래 억눌려 있던 서민들에게 속시원한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뒷골목 깡패에서 정치인으로 거듭난 김두한은 우리 역사에서 다
시 만나 보기 힘든, 드라마틱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일 수도 있
다. 그럼에도 소설가 서해성씨의 말마따나, 철학 없는 폭력은 끔
찍한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영웅이 될 수도 있었을 김두
한은 올바른 세계관의 부재로 인해 결국 한국 최초의 구사대이
자 극우 청부 테러리스트의 원조로서 한국 현대사를 폭력으로 얼
룩지게 만드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고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원은 평가한다.
물론 드라마는 픽션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
은 제작진의 자유이다. 그렇지만 제작진 스스로 제작 의도에서
밝혔듯 는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대하 드라마이다. ‘긴또
깡’ 숭배자들이 액션에 압도되어 역사는 돌아보지 않는 우를 범
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1917년 서울 사직동에서 탄생.
1920년(4세) 아버지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대
파.
1927년(11세) 외할머니·어머니 사망.
1930년(14세) 외숙댁 가출. 혼자 서울로 상경. 거지 왕초에게 붙
들려 거지 생활.
1932년(16세) 쌍칼에게 영입돼 주먹 세계 입문.
1934년(18세) 신마적, 구마적 등을 꺾고 종로 우미관 뒷골목 주
먹 황제로 등극.
1946년(30세) 대한민청 감찰부장 겸 별동대장으로 좌익 파업 진
압 활동.
1947년(31세) 미군정에서 사형 선고 받고 오키나와 형무소에 수
감.
1948년(32세) 건국 특별 사면 대상자로 석방.
1954년(38세)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 당선 3일 만에 김
관철 살해 미수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
방.
1958년(42세) 4대 민의원 선거 출마, 낙선.
1965년(49세) 보궐선거에 한독당 공천받고 입후보, 당선.
1966년(50세)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 고문당함.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의원직 박탈.
1972년(56세)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