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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오직주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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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리고의 그 황막한 광야는 차라리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몇번을 왔었기 때문일까?
이 광야는 옛적 여호수아의 영도를 받은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들어 온 가나안의 첫 지경이다.
이스라엘에서도 보기 드문 그렇게 거대한 광야가 펼쳐져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냥 어릴적 공을 차며 뛰놀던 동네의 공터마냥 편안하다.
그 한켠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드디어 눈앞에 끝없이, 길게 드리운 철조망이 보이고 요르단과의 국경지대에 왔다.
일순 갑작스런 회리바람처럼 긴장이 일었다.
"지금이 몇시냐?"
나의 물음에 앞자석에 있던 진상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홉시에 온다고 했는데...기다려 봐야지요.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
그 때, 갑자기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진상이 급히 전화를 열어 히브리어로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다큐멘터리로 잔뼈가 굵은 나는 대화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 그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 거의 체질이다.
진상이의 얼굴로 보아 반신반의다.
"좋은 일이냐?"
"우리(유대인 가이드)가 연락을 했다는데요....
아홉시에 군인들이 온다고 했다는데..."
흠...하고 깊은 숨이 절로 나왔다.
국경을 수비하는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안 올지도 모른다.
무작정 국경으로 가보라는 가이드의 말를 듣고 온 것이다.
요단강을 따라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이 구분되고 그 경계를 몇 겹의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그 중에서 여리고 근처의 이 국경 저 안쪽은 세레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이고,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신 성지(聖地)로 알려져 있다.
그 세례 이후에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상으로 예수님에게 임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여는 공생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며칠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다시 온 이스라엘에서 제일 먼저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음산한 분위기만 감도는 이 철조망이 그 세례터를 가로 막고 있었다.
거의 직격탄으로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아래 그곳을 막막히 바라다 보았다.
눈을 뜨기조차 힘든 강한 햇살과 무더위 때문에 세례터는 커녕 요단강조차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들어가기란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왔지만 너무나 아쉬움이 컸다.
"주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공생애를 시작한 그 곳에서
이 촬영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그런데 ...갈 수가 없습니다...주님..
주님이 기뻐하시면 그곳을 촬영하게 해 주세요."
약간은 무모하지만 나는 철조망을 붙들고 그렇게 기도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당연히 깊고 우리의 지각을 뛰어 넘는 평강으로 이끌며
측량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이곳을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짙은 아쉬움을 남기고 바람에 광야를 구르는 가시덤불처럼 황망히 떠나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후에 나는 또 다시 이곳에 온 것이다.
이 철조망 앞에 다시 선 것이다.
오랫동안 들어 가지 못한 이 곳을 열어 줄 것이란 한줄기 희망을 품은 채...
"형..저기 군인들이 오는것 같아요!"
긴장감 속에서 카메라를 끄지 않던 동훈이가 외쳤다.
사해 쪽으로 길게 이어진 국경을 따라 먼지를 일으키며 중무장한 차가
거칠게 달려 오고 있었다.
"아홉시에 올 것이라 더니...정말 인가보다!!..."
모처럼 느끼는 긴장 속에서 나는 속으로 기도만 하고 있었다.
'주님..그 세례터를 꼭 촬영하게 해 주세요.
거기서 기도하게 해 주세요.'
여러 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우리 보다 더 긴장된 표정으로 차에 타고 있었다.
그들의 두 손에는 전투용 총들이 꼭 쥐어져 있었다.
"샬롬!"
군인들 중에 한 여군이 리더인양 다가오자 진상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이들에 비해 아주 표정이 착해 보이는 아담한 키의 여군이었다.
그녀 역시 샬롬으로 인사를 하더니 히브리어로 이곳을 가기로 한 팀이냐고 물었다.
진상이 그렇다고 하자 특별한 질문도 없이 자기들이 먼저 가서 살피고 올테니
그 때 따라 오라고 했다.
'드디어 그곳을 가는 것인가요?'
웬만해선 긴장을 하지 않는 내 안에서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차창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국경선의 철조망으로 겹겹히 닫은 큰 문을
천천히 여는 것이 보였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예수님의 세례터를 열어 준다.'
그것은 영화속의 한 장면인양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것은 놀라운, 예언적인 장면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2천년 동안이나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대망해온 메시아가 왔는데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던 그들을 가리운 그 수건이 이제 벗겨질 것이다.'
내 안에 이런 말들이 창조의 시간처럼 자꾸만 만들어 졌다.
이런 무모한 발상은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것인가?
난 이상하게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먼저 국경에 들어가서 살피고 온 군인들이 우리에게 따라 오라고 손짓을 한다.
차를 몰고 그들을 서서히 뒤따라 들어갔다.
"드디어 들어 간다...예수님의 세례터로...
오! 주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내가 나즉히 외치자 여기 저기서 감사가 자동으로 튀어 나왔다.
참으로 예수님의 손이 움직여 주신 것이 아니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이 곳을 들어가 촬영하게 해 주세요."
처음에 이곳에서 드린 그 기도를 들으신 것일까?
그렇다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신 일인 것이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움직여 주신 것이다.
측량못할 하늘의 손이 천사들을 움직인 것이다.
2.
처음 그 아쉬운 기도를 하고 요단강 국경을 끼고 갈릴리로 치달아 갔었다.
멀리 차창밖에 이어진 메마른 요단강 흔적을 보면서 짙은 허허로움만 뒤따르고 있었다.
그것을 달려려고 갈릴리 호수 근처에 관광객들을 위한 세례터에 가서 발을 담그고
촬영을 하기도 했다.
여리고 근처보다 물과 나무도 많고 촬영을 위한 그림이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곳이 아니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요1:28
요한만이 세례요한의 세례터에 대한 지명(地名)을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대화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던 말씀이다.
그 베다니는 지금 요르단 지경에 있다.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 그 건너편 지경이 베다니인 것이다.
성지순례자들이 요르단을 통해 그곳으로 갔다는 말을 간혹 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주님의 세례터로 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결국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광야로 와서 공생애를 시작한 곳은 이스라엘의 광야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1:12
이 곳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님의 기름부음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주님은 그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하늘 아버지는 주님을 그 황막한 빈들로 자꾸만 내모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하시고 내모신 것이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광야로 가게 하신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만져야 그 사랑을 이해하리라.
그리고 자청하여 광야로 걸어 가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 도달한 그 지점에서, 가나안 정복의 그 시작점에서
다시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축약하여 광야로 가신다.
그 여정 속에 이스라엘의 모든 언약과 길들이 함축되어 녹아 있다.
주님은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곳이 바로 여리고 근처 유대광야인 것이다.
나는 그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 부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땀이 변하여 피가 되기까지
헌신과 충성으로 매진하신 주님의 마음과 형상을 만지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촬영에서 꼭 가고 싶었던 곳들이 몇군데 있었다.
먼저는 갈릴리 호수가에 근처에 있는 '한적한 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 하시더니 막1:35
나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이 한구절에 오랜동안 붙들려 있었다.
참으로 가슴이 뭉클한 이 풍경을 그리곤 하였는데, 새벽에 이 한적한 곳에 가시기 전에,
'해질 무렵'부터 수없이 찾아 온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 연약한 이들을
밤새워 치유하시고(눅5:40-41) 그곳을 가셨던 것이다.
그 황혼 녁을 나는 어릴 적 부터 무척이나 그리워 하고 사랑하였다.
마치 루오의 그림 <교외의 그리스도>의 그 황혼에 물든 그리스도....그 옆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작은 아이...그것이 바로 나라고 은밀히 상상한 것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오신 주님은 그들을 천국 복음으로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하늘의 긍휼로서 부둥켜 안으셨다.
밤새워 일일이 그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얹으시던 그리스도의 열심을 소유하고 싶었다.
그 처절한 긍휼과 사랑의, 하늘의 손을 내 작은 카메라에 담아 내고 싶었다.
그런데, 주님은 새벽 미명에 그 풍경을 슬며시 빠져 나오신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신 것이다.
'에레모스'(Eremos)라고 헬라어는 그곳을 표현하였다.
그 말은 '광야'를 뜻하며, ''빈들', '외진 곳'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놀라운 표적과 이적을 보고 몰려 오는 군중들을 피해
그 외진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는 그 곳을 너무나 가보고 싶었다.
그 한적한 곳에 서서 기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성지순례란 갈릴리 가버나움 회당터나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던
그 기념교회, 팔복 기념교회등을 가서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에레모스란 지명은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주님이 기도하신 그곳을 가서 기도하고 촬영하고 싶습니다.
그 길을 열어 주세요."
역시 촬영준비를 하면서 이런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한 고고학 책에서 그 '에레모스 산'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더 그곳을 꿈꾸었다.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갈릴리에서 더욱 깊게 나눌 것이다)
그리고 요단강의 그 '세례터'를 가고 싶었던 것이다.
참으로 나란 종자는 늘 이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들에 대한 갈망을 안에 키우고 산다.
물론 그곳을 들어간 자가 최근에 없다는 정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는 후배가 몇년전 요르단 쪽 국경으로 몰래 들어가 촬영을 하다가
국경 수비대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도 막연히 그곳을 가고 싶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갔던 것이다.
주께서 기뻐하시면 말이다.
역시 그런데 그 가로 막았던 국경의 장벽이 기적처럼 한순간에 열린 것이다.
수십년 닫혀 있던 그곳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갈릴리 촬영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우리는 광야 깊은 곳을 탐험하기 위해
짚투어(Jeep Tour)를 했다.
일반적인 차량으로는 갈 수 없는 곳에 예수님의 흔적들이 있다.
특히 가보고 싶었던 곳이 '아사셀의 산'이다.
나는 이곳 또한 너무나 가보고 싶었다.
이스라엘은 대속죄일에 두마리의 염소를 택하여 제비뽑기를 한다.
하나는 대제사장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것'(레16:8)이었다.
이 두번째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산채로'(레16:10,20)광야의
'무인지경'(無人地境)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800미터 고지의 아사셀 산에 이르러 절벽에 떨어져 죽게 되는 것이다.
그 염소가 떨어져 온 몸이 부서지고 내장이 파열되면 이스라엘의 죄는 벗겨진다.
그것은 단연코 세례요한이 요단강가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말한 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9
이 말씀을 위한 예표(豫標)였던 것이다.
아사셀의 산도 여리고 근처에, 아골골짝 근방에 있다고만 들었다.
주변을 물어 봐도 그곳에 가보았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거칠고 험한 그곳은 일반적인 차량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여러번 오면서도 역시 예수님이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신 대속을 상징하는
'아골골짝'이나 '아사셀의 산'에 들어가서 촬영하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였다.
나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요단강 여리고 근처에서 시작된 것이 이 예언과 언약들을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혐의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진정성을 만지려면 그 현장으로 가서 짙게 살펴 봐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사람들과 주로 기도하러 오느라 그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서 7인의 촬영팀만으로 단촐히 꾸려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장을 적지에 침투하듯 들어갈 수 있는 투어가 있음을 알았다.
짚투어를 위해 나타난 유대인 가이드의 이름은 뜻밖에 '우리'(Uri)여서 우리는 처음부터
웃으며 시작하였다.
그는 일반적인 유대인처럼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매우 친근하고 착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리들은 우리의 랜드로바로 아찔한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즐거움 속에
엄청나게 가파르고 거친 광야를 누비고 다녔다.
주님이 걸어가신 광야는 그렇게 험하고 거친 곳이었다.
특히 폭염속에서 촬영을 따라 오느라 고생하던 어린 딸 지우가 신나하여 기분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에 열살이 된 지우를 무척 데려 오고 싶었다.
성경에서만 읽던 그 땅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되는가!
이미 내가 그것을 경험했기에 아내 지연과 지우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렇게 아사셀의 산으로 가는 동안 우연히 그 '세례터'를 가지 못한 아쉬움을
가이드 우리와 나누게 되었다.
앞자리에 앉은 진상이가 그와 히브리어로 그런 대화를 하는 중에 갑자기 그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것이다.
운전 때문에 스피커 폰으로 하던 그는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게 누군가와 계속 통화를 했다.
"감독님...우리가 지금 이스라엘을 위해서 예수님의 세례터를 열으라고 말하는 데요."
진상이가 그렇게 통역을 하며 웃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군부대 관계자와 통화를 하는 것이다.
"혹시..내일 오전에 그곳을 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약간 당황했다.
왜 이 유대인 가이드는 갑자기 군부대에 전화를 해서 세례터를 열으라는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아사셀의 산에 올라 촬영을 하면서도 그것이 한켠에 낚시바늘처럼 의문으로 남았다.
놀랍게도 그 답을 그 날 저녁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알게 되었다.
참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길들은 측량할 길이 없음을 만진 것이다.
3.
그날 저녁, 예루살렘의 한 집에서 특별한 식사초대를 받았다.
우리는 작업의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 이스라엘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어느 선교사님의 집을 빌려 숙소로 삼았다.
"여기에 최근에 오신 감독님의 팬이라는 노 선교사님 부부가 계신데...
감독님 일행을 꼭 식사에 초대하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그 선교사님이 뜻밖에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촬영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왔기에 아무도 만나려는 계획이 없었다.
특히 오랫동안 꿈꾸었던 어린 딸 지우에게 성경의 땅을 보여 주고 싶었던 차라
가능하면 우리끼리의 시간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제안에 마음이 베데스다 연못처럼 동(動)함을 느꼈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이 만남 속에 주님의 뜻이 있다.'
내 영혼에 그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듯 그리하겠다고 했다.
성령님이 주시는 그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여 예루살렘의 외곽에 있는 그 집에 갔다.
"중국에서 오래 사역을 하다가 마지막 생애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미국 뉴저지의 한인교회에서 파송을 받으신 노 선교사님 부부는 인상이 서글서글하였다.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이 땅에 오면 꼭 먹고 싶었던 엄청난 양의 양고기와 케밥이
기분을 들뜨게 하였다.
"감독님의 책을 다 읽고...영상도 다 보았습니다.
부흥의 여정...하늘의 언어...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한 눈에 손이 커보이고 강력한 기도의 용사처럼 느껴지는 사모님은 내 책의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하고 있었다.
"정말 내 팬이 맞으시군요?!"
양갈비와 케밥에 들뜬 나는 안하던 농담을 마구 해대고 있었다.
"저는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는 제자인데..그 중에 가장 본 받은 점이...
바로 예수님의 별명처럼 '먹기를 탐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무척 추구하는데...저보다 한 수 위 시네요."
그런데 그분들이 정겨운 대화 가운데 뜻밖에 말을 하였다.
하루 전에 그분들도 우리처럼 광야를 짚투어로 다녀왔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 가이드가 바로 '우리'였다는 것이다.
"그 유대인과 영어로 대화하면서 ...얼마나 많은 한국의 크리스챤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지 아느냐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 유대인이 매우 감격을 하며 고마워 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율을 느꼈다.
그가 예수님의 세례터를 가보고 싶어했다는 그 말에 갑자기 군부대에 전화를 해서
강하게 '이스라엘을 위해서 열으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좀 오버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이스라엘을 위해 열으라니!'
그 때 나는 웃었었다.
그런데 그는 매우 진지한 사람이었다.
"유대인들 보다도 한국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이 땅의 회복에
이렇게 진지한 마음을 가진 것에 그는 감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비록 관광 가이드였지만 우리는 자기 민족과 땅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진지하고 겸손하며 열심을 가지고 광야와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었다.
하루 전에 만난 한국인 부부를 통해 미리 주께서 감동을 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촬영하는 우리가 세례터를 가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게 자기의 일인양 그것을 막고 있는 군부대에까지 전화를 한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들어 가지 못한 땅을 이스라엘을 위해서 열으라고 외친 것이다.
잠잠한 감격이 영혼을 타고 흘렀다.
'주님이 이렇게 앞서 행하시고...합력하여 선을 이루셨구나.
이 작고 진실된 충성들을 축사하시어 이 문을 여셨구나.'
정말 우리를 초대한 그 노 선교사님 부부는 그 남은 생애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드리기 위해 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여는 중요한 코드이다.
구운 양갈비, 케밥과 함께 식탁에는 무르익은 무화과가 있었다.
한 여름이어서인지 조금 맛보니 그 풍부한 단맛이 입안에 그득해 진다.
성경에서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마24:32,33
어릴적 '휴거'나 종말론'에 한창 관심을 가질 때에 너무나 자주 읽던 말씀이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을 조금만 심도있게 살펴도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연관을 가지는 비유다.
앞으로 그 여정을 탐구하면서 더욱 절절히 알수 있을테지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 삶의 길 하나 하나에는 구약의 모든 언약과 예언을
통전적으로 종합하고 관통하여 채우시는 그것에 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셨으니 히10:7,9
진정 이것이 주님이 삶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것들을 철저히 이루시고자 하는 열정...
촬영하고 탐구하고 뒤따라 가면 갈수록 드러나는 주님의 길이었다.
너무나 깊고 강렬해서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언약에의 순종이었다.
그 행적 하나 하나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약속들과 입체적으로 치밀히 이루시는 것이다.
(후에 벳바게에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셔서 마르게 하신 그 장면에서 더 깊이
나눌테지만) 마태복음의 무화과 비유도 예레미야24장, 호세아9장, 이사야28장등
무수한 '무화과'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을 깊이 이해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구세주라는 자가 애꿎은 나무를 저주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대단한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신학자들이다.
이 비유들은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흩어짐'과 '회복'에 대한 예언(렘24:8-10)이다.
그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온 세상으로
흩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예언들을 온전히 알고 계셨다.
이미 무화과를 저주하시기 전에 성전에 가셔서 뒤엎는 '성전 청소'를 하신 것도
구약의 언약을 철저히 이루시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터널과 실로암 연못에서 이것도 깊이 다룰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은 심판이 나무 뿌리에 놓였다.
결국 주님의 무화과 나무의 비유는 이스라엘이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고
흩어질 것과 그들이 다시 돌아와 민족을 회복할 것을 예언하시는 것이다.
그 뿌리까지 말라버린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
만일 그것이 가능해 진다면 하나님의 손이 이루신 것이리라.
그 때가 재림이 가까운 때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그런데 ...
정말 이 주님의 예언처럼 이스라엘은 기적처럼 2천년 만에 다시 돌아와
그 땅을 회복하고 나라를 건국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은 다시 건국하였고 67년에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였다.
정말 그 말씀대로 뿌리까지 말랐던 무화과가 다시 잎새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함이니라
렘23: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엄중(嚴重)하다 하면서도 정말 그것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는다고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을 흩으시고 심판하실 것이란 말씀을
무수히 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중시하지도 않았다.
그 말씀을 진정으로 경외함으로 두려움으로 받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에게 무화과의 환상을 보여 주시며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예언 하신 것이다.
그 엄하고 무거운 말씀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고역(苦役)속에 살아야 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 말씀을 두려움으로 발견하였다.
진정 아버지의 말씀은...주님의 말씀은 엄중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붙드신 것이다.
그 가지(무화과 나무의)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엄중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에 가장 놀라고 주목하며 주님의 다시오심을 등불에 기름을 예비하고
깨어 있어야 할 교회가 그것을 무시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이다.
남을 무어라 하기전에 내가 그러한 것이다.
그저 그런 말씀은 종말론에 심취한 이들의 전유뮬이라 치부한 것이다.
진리를 엄중하게 듣지도, 그 심령에 새기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무화과를 쪼개어 한 입 배어 물며 그것을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종말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들을 나누는 것이 금기처럼 되어 버렸다.
극단적인 종말론자들, 휴거론자들이 물의를 일으킨 이후에 교회에서 '재림'이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쉬쉬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교회가 타락하여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을 대치하는 '영적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세에 대한 것이나 계시록등에 대한 말씀연구조차 스스로 자가검열을 통해 비켜 나갔다.
마귀의 음험하고 치밀한 계략에 속고 농락을 당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연약함과 변질의 근원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과
갈망의 부재가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주님의 재림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 날에는 자기의 때가 끝이 날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신 예수님은 곧 재림하실 것이다.
우리가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는 그때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이것이 엄중하신 진리의 경고요 약속이다.
그 주님의 다시 오심과 이스라엘의 회복은 너무나 긴밀한 연관속에 있다.
이것 역시 엄중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이 말씀이 엄중하다고 말하나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마귀는 이것 역시 곡해와 변질로서 우리의 영적시야를 가로 막았다.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그 비밀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축복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음부의 권세를 깨트리고 '천국의 열쇠'를 소유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교회가
나타나는 것을 훼방하려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 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11:25,26
오늘 우리는 '이방인의 충만 한 수'가 차는 열방의 회복을 위하여 땅 끝까지 증인 됨의
선교적 추구를 힘쓰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약속은 그것만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놓치고 있는 또 한가지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란 말씀이다.
성경은 이 두가지를 명확하게 계속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엄중한 진리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성경은 무수히 그것을 말하지만 우리는 주목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마28:20
우리는 이 말씀을 섬세히 듣지 않앗다.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 명하신 모든 것을 온전히 붙들어야 하는데,
우리의 속한 교단과 개인적 지식의 경험과 성향의 체질을 따라 부분적인 것들만
취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한 부분만 아는 연약한, 반쪽의 기름부음에 들어 가게 하였다.
온 이스라엘과 열방의 회복...
이 두가지의 언약을 온전히 취할 때, 음부의 권세를 파하는 '갑절의 기름부음'이 임할 것이다.
흑암의 세력은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모르거나, 불편해 하거나,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로
그들을 대치하였다는 개념을 주입하였다.
바로 내가 그런 생각으로 살아온 장본인이다.
오늘 우리가 애쓰고 추구하나 여전히 연약한 것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온전한, 본질적인 모든 것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그 '대치신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은 이제 버림을 받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우리 교회가 진정한 영적인 이스라엘로 대치 되었다는 사상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에 대하여 미움은 아니어도 불신과 하나님 나라에서 이제는 끊어졌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날마다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길 위에서 나는 아버지의 마음과
언약을 만나게 되었다.
중엄한 진리는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수가 없느니라 롬11:1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버린 적이 없다고 하는데도 나는 그들이
버림을 받았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진리를 온전히 보지 않고 막연한 전통과 생각들, 사상들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역시 그것이 이스라엘의 패착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과 중엄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을 비판할 것도 없이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성경을 정확히 읽지 못했음을 알고 깊이 깊이 회개하였다.
내가 지금 이스라엘, 그 땅으로 이토록 댓가를 지불하며 가는 것은 그 회개의 여정이다.
"마라나타! 주여!..어서 오시오소서!"
이것이 최근 수건이 벗겨진 나 영혼의 간절한 갈망중에 갈망이다.
그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재림에 대한 열정을 성령님이 열어 주셨다.
이렇게 여전히 부끄러운 걸음이라도 열방을 치달으며 땅 끝에서 땀흘리고
씨를 뿌리는 까닭은 내 사모하는 그 영광의 주님을 속히 보고자 함이다.
그 간구의 여정 속에서 진리의 성령님께서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눈을 열어 주셨다.
아니, 내 손을 꼭 잡고 그 언약의 지평으로 이끌어 가셨다.
이것은 유행이나 자아로 부터 나온 전략적 추구가 아니다.
(이것을 후에 더욱 깊이 다룰 것이다)
밤 깊은줄 모르고 양갈비와 무화과, 보이 차를 먹으며 우리는 이런 대화들을
오랫동안 나누었다.
모처럼 말이 통하는 어른들을 만나니 나는 약간 흥분하여 마구 수다를 떨었다.
이 노 선교사님 부부도 오랜 섬기던 중국 땅에서 그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 땅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이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진정성을 소유했겠는가?
그들은 더욱 깊숙히 이 언약의 땅을 살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짚 투어를 하는 가이드에게 광야로의 동행을 부탁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문제적 가이드 '우리'를 만났고 그 한 유대인을 회복하기 위해
기도하며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 진지함이, 그 간구하는 열망의 에너지가 유대인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후에 알아 보니 우리는 이 부부에게 이미 감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만난 우리가 예수님의 세례터를 가고자 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자청하여 애를 쓴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중심과 진실을 살피시는 주님께서 그 일들을 연결하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니 울컥 감격이 솟았다.
짚투어를 하는 유대인 가이드는 그 '우리'만이 아닐터이다.
그러나 마음이 착하고 진실된 그 유대인을 택하여 주님이 그렇게 이끄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터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엇을 도모하기 전에 진정으로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이 땅을 위해 기도하고 종이 되어 섬긴다면...아무리 강팍한 유대인들이라도 문을 열것이다.'
나는 앞서 인도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바라 보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이제 잎사귀가 돋았으니 그 열매들을 볼 날이 무르익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주님의 그 '때'(Kairos)가 된 것이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군인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주님이 세례를 받으신 그 요단강에
발을 담구었다.
그토록 와 보고 싶던 그 요단의 강물에...
(사진: 이지연)
출처 : 김우연의 야생사과
---------그 길 위에 서다 2-----------
4.
<우리를 호위해 준 이스라엘 군인들>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으로 호위하는 가운데 앞으로 나아갔다.
눈앞에 요단강이 손에 잡힐듯 다가 온다.
건너편에 요르단의 군인들이 역시 총으로 무장한 채 약간 놀란 눈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저기 예전에 있었던 기념 교회 터며 세례를 위한 나무로 만든
구조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이스라엘 여군이 군용 짚에서 내려 조심스레 앞을 경계하며 인도했다.
그녀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앞에 작은 강이 나타났다.
드디어 요단강이다.
오랜 가뭄으로 상상보다도 훨씬 그 강폭은 작았지만 그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이곳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그곳인 것이다.
여리고에 인접한 요단은 세상에서 가장 낮게 흐르는 강이다.
세상의 해수면(海水面)보다 무려 400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가장 낮고 낮은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상징이다.
내가 이토록 다른 무수한 성지들 보다 이 장소를 와보고 싶어한 것은
여기서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님이 그 위에 강림하시자
그 하나님 나라의 여정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그 길은, 주님이 가신 그 여정은 우리를 위한 모델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8:29
<건너편 요르단 국경 안의 세례 기념교회가 보인다>
뒤늦게 성령 하나님을 만나고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행1:8)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인가를 구했었다.
거의 날마다, 하루에도 수십번을 구했었다.
성령님이 내게 오시고 그 능력을 부어 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 증인으로 사는
삶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 열어 주신 말씀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함이다.
'아아...이것이 나의 증인 됨...부르심이구나!
이 놀랍고 엄청난 삶을 위해 나를 부르셨구나!'
내 안에 이런 감격과 전율이 절로 솟아났다.
그전에 추상적으로 읽혀지던 그것이 너무나 실제적으로 만져지는 것이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토록 엄청나다.
'망하게 하는 자'인 마귀가 우리의 눈을 가리워서 보지 못할 뿐,
우리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그 걸어 가신 길과 삶을 닮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4:1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본(本)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과연 우리가 성령님을 '진리의 영'으로서 사모하여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그전에 그저 문자로서 읽혀지던 이 말씀들이 내 영안에서 환히 반응하게 된 것이다.
나의 부르심은 이제 명확하여 졌다.
이제 더 이상 그것으로의 고민은 사라졌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하여,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그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내게 능력의 기름부음이던지!
예수님을 닮아 그 가신 자취, 그 본질적 형상에 이르기를 힘쓰며 사는 것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단 한가지...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형상을 내 안에..내 삶에 채우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나며 흥분되는 천국의 삶인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무엇을 찾아서
늘 허덕이는 것은 아닌지요?"
그후 나는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고민하는 무수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예 나 자신부터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들의 시초부터 다 닯고자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베들헤헴의 탄생부터 마지막까지 그 가신 길들을 말씀 속에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시작된 공생애의 여정을 깊이 주목하며 살폈다.
그것에서 내 공생애의 길들을 조망(照望) 받고자 함이다.
주님이 사신 그 천국의 본질을 나도 닮고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단강에 인접해 있는 요르단 평원>
2006년 즈음의 일이다.
그것이 나의 작은 부흥의 시작이었다.
진리의 성령님께 지도를 구하며 가던 길에서 나는 그전에 보지 못했던,
전율하도록 깊고 치열하며 아름다운 예수님의 진실과 풍경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나는 이 삶을 갈구하였다.
'그리스도의 풍경'....
세상의 가장 남루하고 버려지고 절망의 극한에 이른 그 삶들 속에서 식사를 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풍경...
그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익명'(匿名)의 그리스도...
나는 사무치도록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주님이 숨어 계신다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25:40)들을 찾아
오랜 시간을 떠돌았다.
길섶에서.. 뒷골목에서.. 지하철과 벼랑끝에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서고 싶었다.
죄인이요 세례와 같이 친구들을 내 작은 카메라로 사귀고 삶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길을 가고 갈수록 보이는 것은 내 안의 '허위'(虛僞)였다.
멀리 멀리 갔다가 지치고 공허하여진 아이처럼 서러움으로 주님을 구할 때에
예기치도 않은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다.
'위로의 영(靈)'...
그분이 오시자 내 안에 어둠과 기갈과 허무가 사라졌다.
그것이 진정한 '복역(僕役)의 때'를 끝내는 보혜사의 위로였다.
2004년 봄 날의 일이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19
이 글을 쓰는 도중 이 말씀을 발견하였다.
주님의 길 위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해산(解産)의 수고...그 진통...그 애통(愛痛)이 요구된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각오와 그 헌신이 있어야 만져지는 길이다.
주께서 그렇게 가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힘겨움이 있더라도 이제 다시는 이 영광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으리라.
붉은 황혼을 마주한 선지자처럼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그 역정(歷程)들을 말씀 속에서 찾고 찾으며 나아갔다.
그런 여정 가운데서 다다른 공생애를 열어 준 그 장소...
이 요단강의 세례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오랫동안 집착하여 떠나지 못했다.
아니,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여 주셨다.
'주님을 닮는 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길과 본질을 뒤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열으신 그 공생애의 조건....그것이 내 안에 있어야
나도 진정으로 그 시작을 살 수 있으리라'
'공생애의 조건'....
잠잠한 생각 속에 튀어나온 그 말이 거대한 저작(著作)의 주제처럼 온통 나를 사로잡았다.
공생애(公生涯)....
나즈막히 이 단어를 읊조리는데 내 심장에 붉은 피처럼 선연히 스며오는
말씀이 하나 있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5: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후5:14)라고 선언한 후에
이 삶을 말하고 있다.
공생애란, 주님이 그렇게 사셨듯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온 생(生)을 다 드려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처럼, 그 사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그것이 처음 창조처럼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게 내 심비(心碑)에
'불의 정(鋌)'으로서 새겨진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부여하신 그 공생에를 살리라!'
압도하는 영처럼 그것이 내 안에 부어졌다.
오직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위하여 사신 주님의 그 사랑의 강권함이 내 안에 출렁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말씀이, 사랑이 임하자 내 안에 깊은 회개가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영혼의 자책이 일어난 것이다.
그 전에는 그저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추구하고 치달으면 된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을 열망이나 욕구를, 공허한 무엇을 메꾸기 위한,
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추구는 아닌가?' 하는 자문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과 진리앞에서 철저히 살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저 막연히 가다가 이 길 끝에서 겨우 그것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언젠가 당연히 설 주님 앞에서 "너는 너 자신을 위하여 추구한 것이다."하는 음성을
듣는다면...
골수까지 파고드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 때, 이 찬양들이 내 안에서 날마다 솟구쳐 나왔다.
'헛된 마음'....
'정결치 않은 영'...
만일 이것이 내 안에 있다면 그것을 진리와 보혈로서, 불로서 다스려 달라고
성령님께 날마다 구하고 또 구했다.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 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 시키시고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혼자 숲속이며 한 줌 햇살과 작은 새들 밖에 아무도 오지 않는 외진 빈터를 찾아
얼마나 이 찬양을 부르며 울고 울었는지...
어디서 그렇게 많은 숨어 있던 자아의 것들...허망함과 비진리들이... 툭툭 튀어 나오던지...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그 회개의 과정을 통해 성령님은 나를 서서히 변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층 맑아진 영혼으로 정말 예수님을 닮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신 것이다.
아니, 내 영혼이 비워지자 눈이 열리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基業)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威力)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7-19
추상적으로만 읽히던 이 말씀이 손에 잡히듯 너무나 실제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예 바울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 지게 하기 위하여 드린
이 간구를 내 기도로 차용하였다.
역시 날마다 그것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
그분을 따른 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엄청난 유업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위력'(威力)만이 아니라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본향의 풍경에 서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지문처럼 내 안에 새겨지기까지 나는 기도했다.
나는 그 삶을 너무나 갖고 싶었다.
마귀는 이 축복과 안목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갔다.
에덴의 그 사람들이 창조의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시고
부어 주신 그 생기(生氣)...생육과 번성의 신령한 부요, 그 복을 상실하게 하여
'가난한 자'로 만든, 그 마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의 부르심의 축복과 영광의 언약을 상실하게 하여
패망의 골짜기로 이끌어 간 그 망하게 하는자...
그 간교한 세력들이 오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눈을 가리어,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이 아닌 자신을 위하여 허덕이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일을 위한 도움의 수단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런 줄도 모르고 가게 하였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그 열심과 그것의 짜릿한 축복을 상실한 것이다.
나는 결코 그 하늘의 부르심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던 중 이 '공생애'(公生涯)란 말을 한자로 찾다가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그 '애'(涯)자가 '물가 애'자라는 것이다.
"물가에서 시작 되는 하늘의 삶..!!"
마치 주님의 그 길을 위하여 조성된 문자인양 그것이 다가왔다.
물가로 나오너라
내 곁에 서라
네 목마른 것을 내가 채우리라
어둠에 헤맬때 흘리던 네 눈물
그 눈물을 위해 내가 죽었노라
20대 초 이리저리 휘청이다가 다시 주 앞에 와서 부르던 그 노래...
그 물가...그 사랑...
아아...나는 그 주님이 서신 물가를 그리워 한 것이다.
그 갈릴리와 그 지류인 이 요단이 너무나 보고 싶어진 것이다.
요단강의 그 세례로 부터 예수님의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고후4:4)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 작은 문자 하나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 후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을 흐르는 이 작은 요단강...
그 세례터를 ...그 물가를 그리워 하고 서기를 너무나도 꿈꾼 것이다.
5.
<그토록 그리던 요단강에 발을 담근채..>
드디어 신을 벗고 요단강에 첫 발을 내디디었다.
언덕 위에서 총을 가슴에 품듯 움켜진 이스라엘의 여군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황토처럼 탁한 그 물에 맨발을 넣는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시력을 잃을것만 같은 강한 햇빛 때문인가?
순간 눈이 뜨거워지고 그 속에 물기가 서림을 느낄수가 있었다.
비록 가뭄으로 작아지고 좁아 졌지만 내 사랑하는 주님이 이곳에 서셨었다.
그 이유만으로 감격이 솟은 것이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 때 갈릴리에서 이곳까지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 하셨다(마3:13).
그 길은 지금 차로도 한 참을 가야할 먼 길이다.
당시 수많은 무리들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있었으므로 나사렛의 목수인
예수님이 그렇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선 것이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주님을 알아 보았다.
성령께서 증거하신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면 어떻게
당황하여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3:15
그 때, 주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당시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씻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엔 더럽혀진 것들을 씻는 '정결례'(淨潔禮)가 있었다.
요한의 불같은 심판의 메세지에 회개한 많은 이들이 요단강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죄인들이 받을 세례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받으시려 하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님은 남들이 스쳐 지나갈 이 부분을 자꾸 바라보게 하셨다.
'모든 의(義)를 이루기에 합당함...'
예수님의 공생애에 첫 말씀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님의 삶과 그 형상을 치밀하게 닮고자 하는 내게 이것은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그것을 깊이 알고 싶었다.
"성령님 가르쳐 주세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의 의미를 열어 주세요."
나는 그렇게 말씀에 의지하여 자꾸만 구하였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나는 성령님에 대한 이 말씀을 깊이 사랑하였다.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 말씀의 본질을 생각나게 하신다.
이 깨달음은 내게 혁명이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성령님께 가르쳐 달라고 아이처럼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작은 영역도 일부러 성령님께 구하려고 하였다.
주변을 보니 나처럼 구하는 이들이 너무나 적음에 놀랐다.
주님의 말씀에 주목하여 순종치 않음이다.
그것이 우리를 풍요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정말 '의'(義)대하여 가르쳐 주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린 그 깊이와 본질은 엄청나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14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또한 '주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소유하신 가장 본질적인 천국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늘 주님의 형상을 조명하신다.
또한 성령님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증거하신다(요16:8)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 영적 습관,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걸어가신 걸음 하나 하나가 하늘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나는 오랫동안 이 요단강가에 서신 주님의 얼굴을
말씀으로 뵈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1,22
예수님이 세례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그 의....
그것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나게 하는 그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였다.
'모든 의'에 대한 많은 깨달음 중에 먼저 나의 마음을 두드린 것은 이 말씀이다.
참으로 오랫만에 젊은 시절 천착하던 로마서를 다시 깊이 읽게 되었다.
이 '의'에 대하여 누구보다 깊이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는 바울이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래 모든 사람이 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그 길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의 의'는 그 '구원의 길이며 하늘의 방도, 대책'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다.
죄인된 우리지만 무한 무한히 사랑하신다.
그리하여 그 영광이 임재와 사랑 가운데 들어 오기를 너무나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속성은 또한 '공의'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죄악을 가지고는 그 사랑과 영광에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다.
사랑할지라도 그 공의라는 진리의 속성을 위배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모든 것을 어그러지고 질서는 파괴될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6:8
'하나님의 선(善)'은 그분의 본질적 속성과 길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직 공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이다.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즉 불변하는 언약적 사랑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인자'와 '긍휼', '은총', '사랑'이시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모든 속성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에 오직 아버지의 그 선하심과 뜻만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갈망이 나타난다.
요단강의 그 세례는 그저 유대인의 결례를 따르는 요식행위가 아니다.
그 주님의 공생애의 조건, 하나님의 아들이 가야하는 길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직 아버지의 뜻, 그 길, 언약이라는 선(善)에 온 생애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공생애(公生涯)다.
이 예수님을 깊이 영의 눈으로 보아야 나도 그 형상을 닮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도 아버지의 그 사랑 가운데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하여 그 공의를 충족시켜 하늘 문을 열 방도를 준비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롬3:24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바로 그 장소..>
아아...
나는 참으로 오랫만이 이 요단강의 풍경 속에서 복음의 본질로 들어가게 되었다.
너무나 익숙하게 알아 오던 이 진리가 강렬한 불이 되어 내 심령을 살랐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루시려는 그 의....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심판을 받으시겠다는
그런 의미였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짐으로 저주를 받아 죽으시겠다는 선언이다.
갑자기 심장이 고동치며 그 사랑이 내게 부어졌다.
주님의 길은 이토록 시작부터 십자가의 길을 내딛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인들이 받아야할 세례를 죄없으신 분이 기꺼이 받으시고자 하신 것이다.
다시 바울의 장엄한 선언을 읽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3:25,26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그 의는 이토록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래 참으셨다.
당신이 예비하신 그 아들이 와서 그 의를 이루기까지 참고 기다리셨다.
이 요단강의 세례는 그 하나님이 오랜 갈망이 성취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마3:17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자 하늘로 부터 성령님이 임하시고 이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의 그 오랜 갈망, 그 사랑, 그 언약을 이루시려는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시다.
이것은 모든 공생애를 내딛는 그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음성이다.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물에 잠그시는 순간...
세례 후에 요한의 입을 통해 증거 되듯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 되기로 작정하시는 순간이다.
세례를 받으시는 그 순간 주님의 죄인이 되셨다.
나를 사랑하사...나를 위하여...
나의 죄 때문에....
나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고통이며 사랑인가를 읽어내지 못하였다.
요단강에 더럽고 자아의 땀으로 범벅된 에고(ego)의 신을 벗고 맨발을 집어 넣는 순간,
그 주님의 아픔이 설핏 느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제한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 고통...
죄를 뒤집어 쓰시는 그 아픔....
그를 따르는 그 어떤 제자가 그 마음과 통증의 의미를 알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알고 싶어졌다.
너무나 주님의 그 심정을 만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뜨거운 물기가 심장을 타고 솟구친 것일까?
그 세례터에 서서 어쩌지 못하는 통증으로 나는 울고 있었다.
어린 딸 지우가 곁에 있었으므로 애써 그것을 참아내며....
<힘든 촬영에 지쳐있던 지우도 모처럼 웃었다>
6.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우리가 요단강에서 기도를 하며 촬영하는
지켜 보고 있었다.
건너편 요르단의 군인들도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의아해 하는 눈치로
하던 일을 멈추고 지켜 보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마음이 약간 조급했다.
깊은 기도도 하지 못하고 촬영을 하였다.
나는 언제 또 올지 몰라 좀 더 깊이 요단강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때, 떠오른 비둘기처럼 내게 임한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이 제사와 제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10:5-7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죄를 씻기위해 행해지던 율법의 속죄죄로는 온전히
우리의 죄가 사해지지 않음을 강조한다(히10:1,2)
만일 그렇다면 해마다 제사장들이 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아버지는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하시기 위하여 다른 '한 몸'을
오랜동안 준비하셨다.
온전히 죄를 씻지 못하는 짐승이 아닌, 우리를 동일하게 대신 속죄(代贖)하는 사람을
예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요단강에 나오셨을 때....
그 언약하신 '한 몸'으로 나아가신 것이다.
세례 요한이 그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에 인류의 모든 죄는 주님께 전가(傳加)되었다.
'이것은 바로 이 여리고 근처...아사셀의 산의 제물이다!
주님이 이곳에 나아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갑자기 내 영이 밝아지며 그것을 외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이 막혀 있는 세례터를 올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 가이드 '우리'를 통해서다.
그런데 그와 가고자 하였던 곳은 바로 '아사셀의 산'이었던 것이다.
그 산은 이 세례터와 더불어 이번 촬영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러나 유대광야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곳이라 일반적인 차로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날 짚 투어(Jeep Tour)를 하게 된 것이다.
"이곳이 저 여리고 에서 이어진 유대 광야의 정상 이군요!
바로 눈 앞에 요단강과 사해가 있고..."
<아사셀 산 정상에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
그 산에 올라서야 나는 여리고, 요단강, 사해, 예루살렘을 있는 가교처럼
아사셀의 산이 중심에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주님께서 그 공생애를 여리고 근방의 이 요단강에서 시작하셨는가 궁금했다.
그것을 알게 해달라고 구하는 여정에서 정말 생각지 않은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산에 오르고 나서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행적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요단 근처에 솟은 이 아사셀에서 죽은 염소로서 오신 것이다.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라
레16:10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두마리의 염소를 제비뽑고
한 마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안수하여 제사로 드렸다.
대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하여 뽑힌 염소에게 제사장이 안수를 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그 염소에게 전가되었다.
그 염소는 그 엄청난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내어 진다.
그리고 유대광야의 가장 높은 산인 아사셀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다가
그 절벽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그 염소의 몸이 갈기 갈기 부서지고 그 내장이 다 터지면 이스라엘의 죄는 속죄된다.
유대인 가이드 우리는 그 절벽에 서서 그것을 아주 리얼하게 설명했다.
카메라로 그 바위 투성의 절벽 아래를 촬영하면서 명치 끝이 저려 옴을 느꼈다.
너무나 험한 광야의 길을 걸어와 이 깎아 지른 벼랑으로 떨어지는 염소...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이 같은 염소들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았을까>
나를 위해 험한 실 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그 산에서는 이 노래가 그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세례요한이 주님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이스라엘의...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 되었구나.'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놀랍게도 아론의 자손(눅1:5)이다.
누가는 이 두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며 모든 계명과 율법의 규례대로
행하는 흠없는 자들'(눅1:6)이라 기록했다.
이 기록을 읽으며 다시 놀란 것은 '아사셀의 양'을 안수할 것을 명 받은 첫 제사장은
바로 '아론'(레16:6-10)이었다.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 세례요한...
그는 아론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율법의 마지막 상징인 것이다.
그에 대한 주님의 증거가 생각났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0-15
뜻밖에 귀가 열리고 깨달아 지는 것이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세례요한은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그 선지자보다 나은 자의 칭송을 주님께 들었으며 아론의 후예로서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을 때에, 모든 인류의 죄가 예수님께 덮여진 것이다.
아론이 안수한 아사셀의 그 염소처럼...
이제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심이
합당하니라
아아...
주님의 이 말씀을 그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본질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이며...주님이 가시는 모든 길은 이 길의 외연(外然)이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이 그 길 끝에서 역시 아사셀에서 이어진 그 골고다의 언덕에서
모든 살과 내장을 터뜨려 죽으심으로 주님은 진정으로 '모든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10:7
아버지의 그 구원의 길...
그 말씀하신 그 뜻과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죄인이 받는 그 세례를 자청하신 것이다.
그것은 내게 엄청난 기름부음이 되었다.
'나도 오직 아버지의 언약을 받고 그 의를 이루는 아들이 되리라.
그리스도의 그 사랑...그 의...십자가와 보혈..그 사랑에서 나의 모든 추구를
시작하리라.'
용암같은 멈추지 않을 뜨거운 다짐이 터져 나왔다.
그 후에 '어린 양 예수님'은 내 안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사랑...그 의...그 진실...그 길....
나는 너무 너무 너무 그 주님의 삶과 길과 희생을, 그 형상을 갖고자 하였다.
요단강의 이 세례터는 그 주님의 길을 여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것으로 끝나는 의미만이 아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자 예수님께 비둘기 같이 성령님이 임하셨다.
'성령 세례'가 부어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살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요 본질의 열림이었다.
그 하늘 문이 내게도 열렸을 때 비로소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천국의 작은 아이로서 그 나라를 침노하기 시작하였다.
<아골골짝, 빈들에.. 우리가 서 있었다>
(사진 : 이지연)
자료 출처 : 김우연의 야생사과 http://3-rd.net/bbs/zboard.php?id=flo_01&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