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재
배다리에서 애관극장과 기독병원으로 가는 길(개항로)을 따라 경동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용동 큰우물 방면으로 빠지는 샛길 무렵에서 싸리재에 닿는다.
싸리재는 이곳 일대의 야트막한 언덕 지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오래전부터 쓰여 온 이름이지만 이제는 인천 토박이들 사이에서도 싸리재를 아는 사람이 점차 줄어 자칫하면 완전히 잊힐 처지가 된 이름이기도 하다.
싸리재는 흔히 “옛날 이곳에 싸리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풀이한다.
또는 싸리재가 ‘삼리(三里)재’에서 바뀐 말인데, 싸리나무 숲이 길게 늘어져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예전 이곳에 실제로 싸리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것은 사진이나 기록 등 어떤 자료로도 전혀 입증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또 싸리재가 ‘삼리재’의 발음이 바뀐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고개(재)의 길이가 5리(里)쯤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언덕길의 길이는 3리(약 1.2km)에 훨씬 못 미치는 만큼 이 역시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싸리재는 이보다 ‘높은 곳’ 또는 ‘맨 꼭대기’를 뜻하는 단어 ‘수리’에서 변형된 이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수리’는 고구려어에 나온 순 우리말이다.
추석 (秋夕)을 순 우리말로 ‘한가위’라고 하듯, 단오(端午)는 순 우리말로 ‘수릿날’이라고 한다.
이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즉 머리 꼭대기에서 똑바로 내려쬐는 날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천중절(天中節)’이라는 다른 한자 이름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수리’는 지금도 머리의 맨 위를 뜻하는 ‘정수리’ 등의 단어에 쓰이고 있다.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의 ‘수리’도 ‘높은 곳’을 날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산봉우리의 ‘―우리’도 ‘수리’에서 ‘ㅅ’이 탈락한 꼴로 보는 해석이 있다.
이 ‘수리’가 땅 이름에서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수리봉, 수리바위’ 등의 형태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원형(原形)인 ‘수리’ 외에도 ‘사라, 사리, 서리, 소리, 살, 쌀, 설, 솔, 수락, 술, 시르, 시루, 시라, 수레, 싸리, 쓰리…’ 등의 다양한 변형을 갖고 있어 언뜻 보아서는 그 원래의 뜻을 알아채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 바뀐 이름에 맞춰 각자 제 이름에 대한 설명이나 전설을 갖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수록 ‘수리’라는 본래의 뜻과는 관계없는 이름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를테면 “독수리가 새끼를 치고 살아서 생 긴 이름” (수리봉)이라거나 “옛날 어떤 관찰사가 수레를 타고 이곳을 넘어 가서 생긴 이름”(수레넘어고개)과 같은 식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땅 이름이 생긴 둬 그 이름에 맞춰 사람들이 만들어 붙인 것일 뿐, 사실과는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모두가 ‘수리’의 변형 일 뿐이다.
이곳 싸리재도 ‘수리재’ 의 발음이 바뀌어 ‘싸리재’가 되니까 “옛날 이곳에 싸리나무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싸리재’나 ‘수리재’의 ‘재’는 고개나 산마루와 같은 뜻의 순 우리말이다.
앞서 말했듯 ‘수리’라는 땅 이름은 대개 산처럼 높은 곳을 뜻한다 하지만 꼭 그렇게 높은 곳이 아니라도 주변 지역보다 초금 더 높은 곳이면 ‘수리’라 부르기도 했다. 동네에 있는 여러 동산이나 봉우리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은 곳을 흔히 ‘수리’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나라 곳곳에 ‘수리봉, 수리산, 수리재, 수리고개’ 같은 이름이 그토록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곳 싸리재는 느슨한 언덕지대여서 높은 고개라고는 전혀 말할 수가 없는 곳이다. 하지만 주변 지역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이면 그냥 ‘수리’라는 말을 붙이기도 했기에 이런 이름이 생 긴 것이다.
결국 싸리재란 ‘수리고개’, 곧 ‘높은 고개’라는 뜻이다.
사실은 이런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곳 싸리재가 싸리나무와 관계된 곳이라고 들어왔기에 한자로 이름을 바꿀 때도 ‘杻(싸리나무 축)’자에 '峴(고개 현)’ 자를 써서 ‘축현(杻峴)’이라 했다.
(‘杻’는 원래 감탕나무라는 나무를 나타내는 글자로, 발음은 ‘뉴(유)’이다. 하지만 이 글자가 싸리나무를 뜻할 때는 ‘축’으로 발음한다)
이곳에 있다가 지난 2001년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서 간 축현초등학교도 물론 여기서 그 이름이 생긴 것이다.
앞에서 ‘싸리재’라는 이름을 아는 인천 토박이마저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정감 있고, 사연도 담고 있는 ‘싸리재’를 살려 이곳의 길 이름을 ‘개항로’가 아니라 ‘짜리재길’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