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한 구미는 우리동네 신부동 (신늪)은
잘 사는 부촌은 아니었다. 근대화의 상징이 된 구미공업단지가 형성된
것도 1969년 이후의 일이다.
제방이 허술한 낙동강은 여름만 되면 수해을 입어 땅이 없어지고 습지로
변했는데 그 습지가 자그마치 80만 평이나 되었다.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성실하게 사셨지만 겨울만 되면 노름이 빠져
셨다. 노름을 얼마나 크게 하셨던지 하룻밤에 과수원을 날린 적도 있었다.
나는 저녁이 되면 아버님을 모시러 동네 사랑방을 찾아갔다. 그러나 숫기
없어서 한동안 주위만 서성거리기만 했다.
가족 ~
신늪에서 학교가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껄깡 모래사장에서 친구들과 씨름
하는 일이 일과였다. 4학년때부터는 공부에 조금씩 재미가 들었는데 산수
을 잘해서 "산수박사" 호칭을 붙여진 은사님은 잊을수 없는 "황용수 선생님"
이셨다.
국민학교을 나온 큰형(원득)은 야간중학교를 졸업했고 , 작은 형(원근)은
중학교을 졸업하고 서울에 상경하여 자력으로 대학을 마쳤다. 누나와 형이
서울에 가는 바람에 3남2녀 중에 막내아들인 나는 집에서 농사를 도맡아
거들어야 했다.
놓쳐버린 코수술
초등학교 6학년 단체 신체검사에서 코를 많이 흘리던 나에게 친절한 의사
"코와 목이 안좋아 코수술을 해야만 좋아질수 있어" 했지만 집안사정이 여
의치 않아 수술 시기 놓쳤다. 변성기를 지나 한쪽 성대가 마비되면서 지금
처럼 허스키한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그후 중학교 졸업후 수술 했지만 확
장수술 시기을 놓쳐 그 휴유증으로 지금까지도 기관지가 좋지 않다.
학장시절 - 땡땡이
구미중학교를 2학년때 학교에 간다고 나와 엉뚱한 곳으로 새곤하였다.
그렇게 하여 여러번 떙떙이를 치다가 결국 꼬리가 잡히면서 어머니에게
들통이 나 혼줄이 났다. 중3이 되자 죽도 밥도 안되겠다 싶어 줄기 살기
식으로 공부를 했다. 서울에 명문고 두 곳을 보았지만 모두 낙방했다.
우리동네 신부사오동도 산업근대화 거대한 물결에 우리동네는 구미공업
단지 편입되어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고향을 그리워 하
는 실향민의 아쉬움으로 망향비가 세워졌다
계성고등학교 입학
고등학교 실패한 이후 큰형도(원득) 서울에서 내려오고 , 구미에 새집을
마련하여 아버님 농사일을 돕게 되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
짓고있는 나에게 서울에서 내려온 작은형(원근)형이 큰 자극을 주었다.
"어쩌려고 그러느냐" 다시한번 공부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늦게나마 그해 9월 체력장을 보고 서울학원 100일 코스학원에 등록했는데
끝날 무렵에는 성적이 1등으로 올라가 있었다.
서울, 부산등 알아보고 인천 명문 제물포고등학교 지원 계획을 세웠는데
고향의 선배가 대구 계성고등학교 교정을 구경시켜주었고, 105년 역사와
대학 캠퍼스 같은 교정에 매료되어 계성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또다시 찾아온 방황 그리고 경북대 합격
고2때 부터 농뗑이병이 번저 성적이 250등까지 내려갔다. 서울 농림부에
다니시는 외삼촌이 내려와서는 "이 성적으로는 대학을 못간다" 이 말은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때부터 살인적인 대구날씨에 여름날부터 입시공부를 몰입했다.
나는 한번 책을 잡으면 끝까지 몰입하는 끈기 있었다 .
사립대학을 갈 형편이 안되는 것을 안 나는 전혀 돈이 안드는 특차로
항공대 관리학과 지원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그당시 공과대학 특성화 육성하던 국립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 합격했다
제3회 끝 ("성공한 내모습을 상상하라 "의 글에서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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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의 원용부친(父親)에 단상(短想)
김상일
우리집은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 고인이 된 "원득이네 집" 이라 불렀다.
아버님은 늘 엄격하고 자식들에 가혹할 정도로 농사일도 시켯고 공부도
열심히 안하면 무섭게 매를 들어 보여 / 그시절에 우리또래 애들도 부친을
굉장히 무서워했다. 옆집에 살았던 종구친구도 같은 동의을 보내왔다.
반면, 어머님은 늘 섬세하고 자상하면서도 자식들에 한없은 애정을 보내는
단아하면서도 착한 한국적인 어머니상(像)이셨다. 원용이네 집에는
소죽이 있었고 ,
작은 디딜방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새롭다.
엄격한 아버지의 근면하고 자기자신에게 혹독하리 만큼 절제했던 모습과
자상하고 자식에 애틋한 사랑으로 자애로운 어머님-즉 엄부자모(嚴父磁母)
밑에 자란 원근.원용 두 형제분이 자수성가(自手成家0 된 계기의
원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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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빛들판님 글솜씨에 향토출신 인사들의 삶이 재조명되는군요.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몽이장군(강명수교수)을 조명한후 형님의 글 - "무소" 연재한한 후 약간의 슬름프에 빠져 있을때 --세미텍 방문후
김원용 CEO 에 대한 글을 올리게 되어 상당히 기분이 업이 되었습니다.
저는 금빛들판처럼 김사장님 부친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의 말씀을 옮겨 봅니다. 원득이 형님집 모심기를 할때 부친께선 모를 심지 못하신다고, 논두렁에서 길가는 사람들에게 막걸리 퍼 주시기 바빠서, 멀리있는 사람도 기어이 불러 막걸리를 퍼주시는 그런분이었다고,아들들도 같이 일하면서 한번도 불평없이 일하고 내일 학교가야된다며 가더라고,그래서 복받는거라고. 회사 방문날 김사장님도 비슷한 말을 하더라고요.
친구의 이야기로 보면 원용님 부친의 인간성을 엿볼수 있는 아웃에 대한 인심은 자식대까지 이어지나 봅니다.
논두렁에서 오가는 사람 이웃 밭에 있는 까지 배려하는 부친은 살아있는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농사일를 많이 거들면서도
그런 가운데도 묵묵히 공부를 열심히한 원근,원용님의 두형제분이 의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위사진의 고등학교의 사진
교실 전경은 친구님한테도 많이 낮설지 않은 교정이 눈에 선한듯 합니다.
너무도 기억이 생생한 고향마실의 마지막 전경 불과 40 여년전의 일이지요,,,
사진 중앙이 정미소이고 좌측으로는 기네댁으로 호칭되던
균섭이네 집이 또렷이 보이네요. 동지를 앞둔 지금쯤 옛고향에서는 땔감정도만 장만해가며
한가로롭게 보냈었죠. 광식이 형 집앞 빈터에서 자치기도 하고 샘가앞 미나리깡에서
얼음지치기를 하던 추억들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 김원용의 집도 정미소에서 불과 몇십미터에 위치해 있었죠.
아버님께서는 배포가 커신분이라 막걸리를 바로 두되씩 주문하신다는 일화가 있드니만
막내아들 원용이도 통크게 회사를 운영해가는 미래지향적 최고경영자인것 같습니다,
나그네님의 기억력은 대단합니다. 동네 마실사진을 바라보면 진한 향수가 불러옵니다.
정미소 광식이형 집, 균섭이네 등 아련한 기억을 새로 돌려봅니다.
정미소 툇마루에서 저녁에 서리할곳을 의논하는 곳이도 했습니다.
초롱불 켜놓고 가마니 치던 원용님 부모님의 근면하고 부지런한 그모습이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