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 7. 23. 15:05
■ 재사당 이원선생 묘(再思堂李黿先生 墓)
[생졸년] 1471추정(성종 2) ~ 1504년(연산군 10)
▲재사당 이원선생 묘로 숙부인 최씨와 합폄이다.(2006년 7월 18일 ⓒ이재훈 )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덕계동 산64번지 도락산(道樂山)이다. ⓒ이재훈
▲청음 김상헌선생이 찬한 묘갈명 비석(좌)와 우측은 2002년에 새로 세운 비이다.
ⓒ이재훈
사진의 아래 보이는 비석은 청음 김상헌 선생이 찬한 舊 묘갈비와 2002년에 새로 비문을 옮겨 세운 비이다.
재사당(再思堂) 李黿先生의 墓域은 京畿道 楊州市 德溪洞 山 64番地 道樂山에 位置해 있다.
墓域 아래에는 지대석(址臺石)과 長方形의 碑座에 碑身을 올리고, 팔작지붕 形態의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墓碣이 세워져 있다.
墓碣에는 『再思堂李先生墓銘』이라는 篆額이 새겨져 있고, 淸陰 金尙憲이 撰한 墓碣銘이 새겨져 있다.
墓碣 右側에는 비좌이수(碑座螭首) 形態의 墓碣이 세워져 있다.
2002年 11月 後孫들이 새로 세운 墓碣에는 舊 墓碣의 碑文의 原文을 그대로 옮겨 새겼고, 解釋文도 새겨 넣었다.
墓所에는 配位 開城崔氏와 單墳 合葬墓로 構成되어 있고, 圓形의 封墳에는 호석(護石)을 둘렀다.
封墳 앞에는 비좌관석(碑座冠石) 形態의 墓表가 세워져 있다.
墓表 右側에는 비좌이수(碑座螭首) 形態의 墓碑가 세워져 있다. 2003年 10月 後孫들이 새로 세운 墓碑 前面에는「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再思堂慶州李公諱黿之墓 配淑夫人開城崔氏酉坐合兆」라 記錄되어 있고, 後面에는 미수 허목(眉叟許穆)이 撰述한 墓誌文이 새겨져 있다.
封墳 앞에는 魂遊石, 長臺石, 床石, 고석(鼓石), 香爐石, 준석(樽石) 等이 配置되어 있고, 左右에는 望柱石과 文人石이 세워져 있다.
또 中央에는 火窓이 4個인 長明燈이 建立되어 있다.
-------------------------------------------------------------------------------------------------------------------------------------------------------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 / 경주이씨 24世
[생졸년] 미상(1471년 추정)∼1504년(연산군 10). 향년 33세
[문과] 성종(成宗) 20년 (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33
[진사시]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2위(2/10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7세손으로, 현령(縣令-從五品) 공린(公麟)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판서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의 둘째 딸이다.
夫人은 開城崔氏로 參判에 追贈된 崔鐵孫의 딸이며, 禮曹參判을 지낸 송석 최명창(松石 崔命昌은 그의 妻男이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文人이다.)
1480년(성종 11)에 진사가 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正九品)이 되었으며 1495년(연산군 1)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뒤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을 거쳐 봉상시(奉常寺-正三品衙門)에 재직하면서,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시호(諡號)를 문충공(文忠公)으로 올렸다는 이유로 파직(罷職)되고, 황해도 곽산(郭山)으로, 유배(流配)되었다,
3년 후 나주(羅州 : 오늘날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복암마을)에 양이(量移 : 먼 지방으로 유배했던 사람을 죄를 경감해서 가까운지방으로 옮기는 것)되었다가. 1504年(燕山君 10) 甲子士禍에 또 연루시켜 서울로 불려와(조선왕조실록 참조) 10월 24일 참형(斬刑)을 당했다.
甲子士禍를 당했을 때 夫人의 동생인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正九品) 최명창(崔命昌)공이 벼슬을 버리고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모셔다가 자기네 선산인 이곳에 안장(安葬) 하였다(당시 재사당 사가에는 부모 형제 모두가 죄를쓰고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귀양가 있어서 일을 처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문장에 능하고 특히 행의(行義)로 추앙받았으며,.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제향되고,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伸寃)되어 도승지(都承旨-正三品)에 추서(追敍) 되었다. 저서로《금강록 金剛錄》·《재사당집》 등이 있다.
◈족보에는 甲子士禍 당시 참형지(斬刑地)가 나주(羅州)로記錄 되어 있으나, 조선왕조 실록 및 승정원 일기를 살펴보면 당시 서울에서 참
형을 당한 것으로 여겨져 바로 잡았다.
[참고내용]
●최명창(崔命昌 :1466-1536)
개성(開成)최씨로 호(號)는 송석(松石)으며 훗날 예조 참판과, 황해도 관찰사 및 원주 목사를 역임하고 중종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는데 이분의 산소도 재사당의 좌측 능선에 있는데, 경기도 지정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