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제 5장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 '믿는 자'에 해당
하는 헬라어 '피스튜온'(* )은 현재형이고 '난 자'에 해당하는 헬라
어 '게겐네타이'(* )는 완료 시상이다. 양자의 헬라어 시상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인 것이다(Smalley, Stott, Barker).
'믿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4:15; 요9:22)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본문은 4:21의
반복이다. '내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겐네산타'(* )는 '낳
다'러눈 의미의 동사 '겐나오'(* )의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아버지'라
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낳으시고 자녀삼아 주셨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셨
다. 요한이 이같이 하나님을 '내신 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을 가족 관계로
유비(類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게서 난 자'로 번역된 헬라어 '게겐네
메논'(* )은 단수형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
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나(Augustine)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법상 단수로도 집합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전체를 지칭할
수 있으며, 문맥상 본문이 믿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
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한
다. 요한은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
분리적 관계성을 강조한다(4:19,20).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본서는 전반적으로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
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본절에서는 그 표현이 반대 형태로 되어 있
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역설적 표현의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로써'가
앞절에 설정된 원리를 가리키며, '우리가...사랑하는 줄을'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한
다'로 해석한다(Marshall, Dodd). 그러나 '이로써'가 앞절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이유
는 없다. '이로써'는 본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에 근거함을 나타낸다(4:8,16,19, Smalley).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불가
분리의 관계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형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증된다.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 하나님
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순종과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는다. 모
든 계명 중 가장 우월한 계명이 사랑 계명인 바 그 안에 하나님의 계명이 내포되어 있
으며(Smalley) 그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그
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예수께서 모범을 보
이신 것이다(요14:31; 15:10).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무거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이아
이'(* )는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는 무거운 또는 가벼운 율법이
라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마23:23, Smalley, Schnackenburg).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셨
고(4:19)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셨으며
(Dodd)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
문에(Calvin)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
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
메논'(* )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
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
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
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 )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
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
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
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
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
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
)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
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
(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1절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라는 표현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 안에 계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Marshall).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된다. 한편 '이
기는 자'의 헬라어 '니콘'(* )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4절의 '니카'(*
, '이기느니라')와 같은 시상이다. 이는 투쟁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겨나가고 있
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5:6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 본문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옆구리를 창에 찔렸을 때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
한다고 주장한다(Augustine, Williams) (2)혹자는 요4장과 6장을 근거로 하여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ullmann, Westcott, Luther, Calvin). (3)혹자는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와 연관하여 물은 정결케하는 것이며 피는 희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Plummer, Candlish). (4)혹자는 물은 예수께서 받으신 요한의 물 세례요 피는 십자
가의 대속의 보혈이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Alford, Meyer, Barker, Stott,
Marshall).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요한 당시에 케린투스
(Cerinthus)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임
하셨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
체를 입고 오셔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을 분명하게 설
파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심을 강조하고 있
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상반절의 반복으로 영지
주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강조한다. 본절 상반절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디'(* , '...을 통하여')를 사용한 반면에 본문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엔'(* , '...안에서')을 사용한다. 본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
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 안에서 그리고 피 안에서 임하신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위치나 장소를 나타내는 두개의 전치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더욱 강도하고 있다(Marshall, Smalley).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 개역성경에는 본절이 앞절과 분리되어 또 하나의 절
로 기술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절이 앞절에 포함되어 있다. '증거하는 이'
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마르튀룬'(* )은 현재 분사로 성령께
서 지속적으로 증거하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
체로 오셨음을 믿게 하는 성령께서 믿는 자안에 내주하셔서 지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신다(2:20,27; 4:1-6, Stott). 또한 성령은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임하심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보이셨다(요1:32).
성령은 진리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요14:6)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셨다(요15:26; 16:13).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
이 본문에서 성령께서 진리이심을 선언한 것은 진리이신 성령만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
스도를 올바로 증거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Johnson).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 '성령과 물과 피'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과 물과 피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세 가지 등급으로 생각하
여 예언자와 세례요한, 그리고 요한 일서의 저자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Bengel). 그러나 성령을 예언자와만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발살이며 피를 요한 일
서의 저자와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2)혹자는 세 가지 증거
들이 세례(요3:5-8), 성만찬(요6:54-56), 그리고 성령을 받음(요20:22)의 '신비적인
사건들'에 각각 상응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그러나 이 주장은 상당히 작위적이
다. 이 견해는 정당성을 주장키 위해 본절의 세 가지 증거들의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더욱이 근거로 제시된 참고 성경 구절들도 예수를 증거한다는 개념과는 무관한 것들이
다. (3)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기독교 초기에 존재한 '기름 부음과 세례와 주의 만
찬'이라는 예배 의식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Manson, Nauck).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 이전에 기름 부음을 실행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4)혹자는 물과 피를 세
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전의 상징으로 보아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된다는 견해를 주장한다(Dodd, Bultmann, Law, Westcott, Barker). 세례와 성만찬
즉 이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여 증거한다. (5)혹자는 '물과 피'를 6절
과 같은 의미로 보아 물은 예수의 세례를 상징하고 피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상징하며, '성령'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의 머리 위로 강
림하셨고(요1:32),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흘리사 그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요19:30)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증거하심을 가리킨다고 주
장한다(요7:39; 20:22, Smalley).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
성을 지닌다.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 요한은 본문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같은 결과를 향
하여 함께 작용함으로써 한 점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세 가지 증거들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
함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 시대 율법에 의하면 증인이 둘 이상이라야 어떤 사실이 입
증되었다(신19:15). 요한이 이러한 율법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을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다(Stott).
=====5: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 율법에 의
하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증거하는 일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신19:15). 죄악되
고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증거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면 더욱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선포되며 물과 피를 통하여 역사 속에 선포된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면(裏面)에
서 세 가지 증거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
호티 하우테 에스틴 헤마르튀리아 투 데우, 호티 메마르튀레켄 페리 투휘우 아우투).
- 본문은 두 개의 '호티'(* , '왜냐하면')로 구성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
여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 하나님의 증거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세 가지 증거들,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증거하신'에 해
당하는 헬라어 '메마르튀레켄'(* )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
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유효함을 나타낸
다. 즉,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의 아들
임을 확증하셨으며(마3:16,17; 요1:33,34)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증언하셨다(요12:28-30). 이러한 역사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
람들에게 증언되고 있으며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의 내증으로 실현되고 있다
(Stott, Barker).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
정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절). 그 결과 믿는 자들은 자
기 자신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소유하게 된다. 이 증거는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
하여 증거하시는 내적 증거를 의미한다(8절, Brooke, Law, Williams). 이러한 내적 증
거는 외적 증거인 '물과 피'와 조화를 이루어 믿는 자들의 믿음을 근원이 됨과 동시에
결과가 된다(Stott).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음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
시며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한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
님께서 아들에 관해 이렇게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
님이 하신 증거를 거짓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것
이다. 요한은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극단적으로 확증한
다. 한편 본절은 롬1:19,20을 상기시킨다. 우주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들은 도무지 자기의 불신앙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 '영생'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이 생명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가(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현시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신 예수와의
관계성 속에서 믿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과 유일
하시며 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고의 생활이다(요17:3,
Smalley). 이러한 영생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
육신하신 인간이심을 증거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 들일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그러기에 이 결과인 영생을 알고 소유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며, 예수께
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주신'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에도켄'(* )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보정 과
거 능동태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 구속
사역을 행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이미 주셨으며, 영생을 주신 사실은 불변한다는 의
미를 함축한다.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과 아들의 불가 분리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
에 한 인간이신 예수 안에 현시되어서 그 아들이 행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즉 '물과
피'의 증거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생명임에
도 불구하고(요14:6) 요한이 예수와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고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여기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
(* )은 '에코'(* , '가지다')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이다. 요이1:9에
서는 같은 뜻의 현재 동사 '에케이'(* , '가지다')가 '모시다'란 말로 번역
된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란 현재 아들을 마음 속에 모신 자를 가리킨
다. 아들이 생명 자체이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11절; 1:2; 요11:25; 14:6)
아들을 모신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높은 수준의 영적,
도덕적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서 아들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아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며(3:24) 완전하게 하며(4:12) 영원한
삶을 영위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
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
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절 상반절에서는 '아들'
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
며(Bengel, Plummer) 혹자는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
님께서 영생을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ooke,
Marshall).
=====5:13
이것을 쓴 것은. - '이것을'의 헬라어 '타우타'(* )는 문자적으로 '이
러한 것들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우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1-1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혹자는 본서 전체
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malley, William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
하다. 왜냐하면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20:31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타우타'가 다양한 주제를 가리키는 복수로서 1-12절까지 언급된 영
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 )는 서신체 부정 과거로 비록 요한이 현재 본서를 기록한
다 할지라도 본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로 기록되어 있다.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히나'(*
,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서 본절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임을 나타낸다. 본절
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요20:3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
신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이 요한 일서의 본론이고 14-21절은 후대의 삽입
이라고 주장한다(Bultmann). 본절이 요한 일서의 전체적 결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성을 가지나 결론적 언급이 꼭 이 편지의 맨 마지막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본절은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끝맺기 위한 결론적 언급의 서두로 간
주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 여기서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
음을 암시한다(Brooke).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아'(* )는
본서에서 네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과(2:28
;4:17),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3:21,22). 본절에
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구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메
다'(* )는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
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
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요15:7, Marshall).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 본문은 14절의 반복이다.
14절의 간구와 응답은 구체적 현실성이 강조된 반면에 본절의 경우는 일반적 원리성이
강조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는 죄악된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간
구는 당연히 제외되며 앞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올바른 기도를 가
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요11:42) 믿
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신다.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테카멘'(* )은 직설법 완료형으로서 기도자의 객관적 기도 사실
과 그 결과를 강조한다.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간구는 이미 그 결과를 얻은 것
이다. 기도의 가시적인 응답이 미래에 나타날지라도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였
다(Plummer, Brooke, Dodd). 한편 본절은 '안즉...아느니라'(*
, 오이다멘...오이다멘)로 되어 있어 지도자가 갖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초래하여 기도자의 확신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시사한다(Stott).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
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 본절에 나타난 '사망에 이르지 아니
한 죄...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살인이나 간음 혹
은 우상 숭배와 같은 특별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그
러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로 분류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이 견해는 적합하지 않다(Stott). (2)혹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배교나
적그리스도 혹은 거짓 교사들의 죄와 같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부합
되지 않는 죄를 가리키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믿는 자들이 유혹에 넘어가 범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Smalley, Johnson,
Alford, Clarke). 이 견해는 이제까지 요한이 언급한 문맥과 일치한다. 이 두 번째 견
해에 대해 혹자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게
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반론을
제기한다(Stott). 그러나 이 반론 역시 문맥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즉 지속되는 불의
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배교를 하도록 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기에 요한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며 우상을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며(18,21절)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배교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히6:4-6, 10:26-31). 한편 요한은
앞에서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진술한 바와 같이 본절에서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범죄한 형제를 위한 기도는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직접 제공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행위로
(3:17)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이다(Johnson). 이러한 중재 기도를 통해서 범죄
한 형제는 죄의 고백의 필요성과 서로의 용서의 필요성을 확인하며 행하게 된다(요20:
23). 이러한 중재 기도의 권면과는 달리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 즉 배교의 죄를 범
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금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는다.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 여기서 '불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키아'(*
)는 '옳지 못한 행실'을 의미한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
르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본문을 진술한 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인간적으로 구분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죄들의 경중을 마음
대로 구분함으로써 '죄 자체의 심각성'이 축소되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5:18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본문에 대한 해석
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앞절과 관련시켜서 믿는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Calvin). (2)혹자는 '범죄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
라어 '우크 하마르타네이'(* )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믿는 자는 계속 반복되는 범죄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Stott). 두 가지 견해는 나름
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우리가 아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멘'(*
)은 18-20절에 걸쳐 세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오이다멘'은 지식으리 활
동 상황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 '알다')와 달리 주로 지식의 상태
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절에서 영적 지식의 확실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
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본
절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 호겐
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상반절의
'난자'(* , 게겐네메노스)는 완료 분사형인 반면에 본문의
'나신 자'(* , 겐네데이스)는 부정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2)'나신 자'를 예수 그리스도
로 보아야만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은 신약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17:12; 벧전1:5; 유1:24).
요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악과 사단의 영향력에서 보전하실 것임을 선언
하고 있다(요17:12,15).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 본
절은 하나님과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
미한다. 비록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게 속하여 사단이 만
지지도 못할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
게 하신 것과. -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며(1:1,2)
'참된 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Smalley, Stott, Brooke).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로서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요14:6) 하나님을 바
로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
에게 참된 자되신 하나님의 실재를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 본문은 본절 상
반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고 있
음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시는 중보자가 되신다. 그 결
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은 참된 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게 되며 예수 그
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수께서 하나
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17:2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는 문자적으로 '이 사람'을 의미한다. '후토스'가 가리키는 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Smalley,
Brooke). (2)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uther, Calvin, Marshall,
Hass, Schnackenburg, Brow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녀서 어느 하나를
지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토스'는 문맥상 그리스도를 가리키
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Johnson).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는 참 하나님
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
육신을 부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한 것에 대한 요한의 결론적인 공격이다. 한편 그리스
도께서 '영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서 서두에 언급된 것으로(1:1,2; 요11:25;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수신자들
이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결론적 진술이다
(Smalley).
=====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
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
서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
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우상에서 멀
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요한일서 주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