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 마/우 병택 상택은 불혹에 들어선 지 5년,이제 사회 고참자리에서 별반 부러울 것이 없는 듯이 보이는 중년이다.그러나 그건 외양일 뿐, 그에게도 숨겨진 가슴 시린 사연이 있었으니…….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동남아 지역이 괴질 ‘사스’로 몸살을 앓는 등 세상인심이 흉흉한 2003년 3월이다.그래도 대 입종합학원은 실패를 딛고 일어서려는 젊은이들의 열기로 활 기를 띄었다. 강의 경력이 20년쯤 된 상택의 마음도 이런 분 위기에 휩싸인 체 자신이 강의할 교실의 문을 열었다. "안뇽, 여러분!” 소년처럼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그리고 습관적으로 수강생들을 휘 둘러보는 순간, 상택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전율을 느꼈 다. 지난 20년 동안 何時라도 잊고 산 적이 없던 젬마가 이 곳 에 있었다. 웃을 때마다 예쁘게 페이던 보조개, 그리고 살짝 보 이는 가지런한 옥니,그의 20대를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그녀.상 희는 3수생 친구인 다정이와 함께 강의실 남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창밖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과 너무 잘 어울렸다. 바깥에선 아직도 수업 벨이 울린 것도 모르는 녀석들이 넘치는 춘흥을 못 이겨 뭐라 재잘거리고 있었다.그런 배경 때문인지 상희의 자태는 40명 중 가장 돋보였다. 상택은 자신의 눈을 의 심했다. 그토록 그리던 그녀가 20년 전의 모습 그대로 그의 눈 앞에 있을 수 있는지를……. 상택은 일찍이 50분간의 강의 시간 을 그토록 길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생글거리는 얼굴에 유독 빛나는 눈빛, 어서 이 시간이 끝나고 그녀와 마주 앉아 그 예쁜 보조개며, 아름다운 옥니를 가까이서 봤으면 하는 생각으로 강 의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었다. “선생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다정이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때까지 상택은 옛 생 각에 빠져 있었다. ‘아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 거야.’ 상택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았다. 정신없는 중에 수업이 끝나자 상택은 상희를 자신의 연구실로 불렀다. 그리고 심호 흡을 한 후 그녀에게 물었다. “이름은?“ “상희, 김상희요.” 상희, 어딘지 낮이 설지 않는 이름이다. 상택의 맏아들이 희 상이,그의 뇌리가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젬마의 본명이 임 미 희, 그들은 아들을 낳으면 희상이로, 딸을 낳으면, 상희로 하 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상택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상희를 찬찬히 뜯어보며 물었다. “음, 그렇군. 그럼 엄만, 뭐하시는 분인가?” “전업 주분데요.” “종교는?“ “종교요?, 아무 것도 안 믿는데요.” 학업과는 전혀 다른 상택의 질문에 상희는 의아한 표정을 짓 는다. “아니 너 말고. 네 엄마께서 믿으시는 종교 말이다.” 그제야 퉁명스레 대답을 한다. “울 엄만 무지 믿어요.” “무지 믿으신다. 혹시 천주교 아니시냐?” “맞아요.” “………….” 순간 상택은 숨이 멈추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상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희가 이번엔 되물었다. “근데 선생님, 왜 울 엄마께 그렇게 관심이 많으셔요?” “응 그렇구나. 혹 네 엄마 세례명이?” “예- 에? 선생님 참 이상하시다.” 그러나 상택은 조급하게 또 묻는다. “아니 혹시 ‘젬마‘라고 하시지는 않는지?” “그럴지도 모르죠. 이젠 됐죠?” 상택의 의문은 풀리지도 않았는데, 상희는 그저 사무적으로 대 답하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강의실로 돌아갔다. 상택은 그 이 후의 수업은 더 이상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이십 몇 년 전, 상희와 꼭 닮은 젬마는 여고 2학년이었다. 상택 은 대학 3학년으로 친구 녀석의 누이동생이 모아온 4명의 여고생 을 가르쳤다. 한 주에 90분씩 두 번, 영어와 수학을 주로 가르쳤 다. 젬마는 그렇게 만나 상택과 사랑한 첫 여자다. 젬마의 첫인 상은 눈에 뛸 만큼 미인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점점 상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영특하다는 것과 이마가 특별나게 눈에 뛸 정도로 짱구였기 때문이었다. 그 짱구 이마는 상택이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의 이미지와 너무 닮아서 좋았다. 상택은 몇 년 전에 선생님의 부고를 받아들고 40을 넘긴 나이도 아랑곳 않고 꺼이꺼이 몇 날을 울음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상택은 봄에 만난 그들을 하루도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진 의도적으로 누구 한 사람과 만나지는 않 았다.그런 그녀와 상택이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 것은 의외의 돌발사태 때문이었다. 1980년의 봄은 근자에선 가장 따뜻한 봄이었다. 철권통치로 20 년 권좌를 지킨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된 후 소위 삼 김씨가 모두 서울에 모였다.백성들은 그 삼 김씨가 뭔가가 이루리라는 기대 로 잔득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해 5월, 그 끔직 한 5.18 광주 사태가 터졌다.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 계엄이 선포됐다. 대학에 내려진 휴교 령은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충분했다.한민족에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대사건이었지만,그러나 이로 인해 그들이 급속히 가까워질 수가 있는 계기가 됐다. 상택은 졸업과 동시에 육군에 입대했었고,이제 막 훈련을 받고 대구 근교에 배치되어 군 생 활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젬마는 S여자대학 2학년으로 휴교중이라 외가가 있는 대구로 내려와 있었다. 계엄이 길어진 만큼 그녀도 대구에 오래 머물렀 다. 상택은 휴일이면 면회를 오는 그녀가 무척 반가웠다.부대 내에서도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계엄이 풀리고 학교가 정 상으로 돌아가자 그녀가 대구를 떠나며 그들의 만남도 파국을 맞았다. 상택은 갑자기 공허에 빠졌다 . 무엇도 젬마의 빈 자리를 채워 줄 수가 없었다. 무의미한 생활 에 반기를 들듯 상택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젬마에게 편지를 썼다.그러나 상택이 그녀에게서 받은 것은 실망뿐이었다. 그녀 를 만나 팔공산이며, 동촌 유원지나 팔달 공원 등을 쉼 없이 다녔었다.그런 대구의 명소는 죄다 그녀와의 추억의 장소가 됐다.그래서 더욱더 그녀와 함께 했던 자리가 그리웠다.그리고 그 해 겨울, 그녀는 상택의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젬마의 어머니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문학도란 이유로 상택을 평소에도 달갑게 대하진 않았었다.그런 그녀의 어머니가 괜찮 은 집안의 막내와 서둘러 결혼시켜 버렸기 말았다.그 땐 그런 일이 통할 때였다. ‘젬마’는 그녀의 천주교 세례명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임미희다.상택은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군 생활 을 잘 견뎠다. 제대한 후 넉넉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무슨 일 이든 해야만 했다. 그것이 학원 강사 자리였다. 그 후 그는 이 십 몇 년을 국어 강사로 일해 왔다. 재산도 웬만큼 모았다. 그 동안에 결혼해서 2남 1녀를 뒀다. 그러나 젬마와 있었던 그 추억은 하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 젬마를 쏙 빼닮은 상희를 만났으니,상택으로서는 일생에 커다란 전기를 만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튿날 상희는 상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일 없었다는 듯이 천진한 얼굴을 하고 교실의 맨 앞자리 가운데에 앉아 있 었다.상택은 수업 시간 내내 그녀를 주시하느라 무슨 말을 했 는지도 모를 만큼 허둥댔다. 그러나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상택의 강의에 열중하는 듯이 보 였다. 그리고 어제완 달리 그녀의 옆엔 이 학원에서 여학생들에게 ‘킹카’로 불리는'정혁이와 나란히 자리를 하고 간혹 정혁의 귀에다 속삭이기도 했다. 상택은 괜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건 마치 젬마가 자신보단 훨씬 나은 녀석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 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깨까지 출렁이는 머리카락을 가 끔 채어 올리는 그녀, 상택에겐 너무나 눈에 익은 젬마의 모습 이다.상택은 허둥지둥 학생과를 찾았다. 그리고 입학상담기록에 서 상희의 가족 상황을 살폈다. 상희의 엄마는 분명히 미희였다. 임미희! 그날 밤에 상택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콘도를 찾았다.아내 연주에겐 오늘 좋은 착상이 떠올라 혼자 정리를 하겠다고 둘러 댔다.몇 년째 밤늦 도록 일식주점을 열고 있는 연주는 남편의 행동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그것이 상택이 느낀 연주의 모습이다.연주는 처음은 아이들 학비를 보태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젠 자신의 전부를 건 듯이 일에 메달렸다. 상택이 은근히 일을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면 연주는 갑자기 여성운동가 가 된 듯이 ‘Gender gap!'로 일갈해 버린다.상택은 그런 연주에 게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동시에 그로부터 받는 상택의 고독도 측량할 수 없이 컸다. 그런 그에겐 언제나 새로운 일탈의 촉매 가 필요했다. 어쩌면 그 촉매가 젬마를 통한 상희가 아닐까? 상 택이 30평이 넘는 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봇물 터지듯이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일탈을 꿈꾸는 자신 앞에 젬마가 나타난다면,어떻게 할 것인가? 아내 연주로부터 자신과 젬마는 온전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 봤다. 상희가 어제 집에서 그 엄마에게 학원에서 상택을 만난 이야기만 했더라도,젬마는 상택을 알았을 것이다.그럼 그녀는 어떤 생각 으로 오늘 하루를 지냈을까? 상택은 상희를 젬마의 딸로 설정해 놓고는 한 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까지도 그렇 게 지었다면,그 날 밤 젬마와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젬마는 아무 걱정 말라고 내게 말했었다. 그럼 왜 다른 남자와 결혼 했느냐고 만나서 따져 보고도 싶다. 그렇다 면 혹 지금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니 지금의 남편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아서 늘 자신만을 생각 하며 지낸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갖가지 상념은 전장 터로 나가는 장수마냥 상택을 편히 잠들 수 없게 만들었다. 남한강의 새벽은 영화‘은행나무 침대’에서 본 한 장면과도 같이 신비로움을 더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어느 한 컷에 젬마와 그가 함께 있었다. 20년 전 대구 근교의 낙동강 가에서 젬마와 그가 함께 한 날이 그랬다. 그 때 그들은 토요일 초저녁부터 마구 지나가는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다가 일요일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서로를 확인하고 아침을 맞게 된 적이 있었다. 한여름이라 추위는 없었다. 그러나 제법 세찬 강 바람에도 끈질기게 달려드는 모기는 아쉽게 시간을 짓이기듯 보내고 있는 그들의 의식을 가끔 깨워주었다. 상택은 한 주일을 온통 젬마를 만나 할 수 있는 일을 머릿속에 그려왔었다.그런데 정작 그녀와 단 둘이 한밤을 지새우면서도 머릿속에 구상해 둔 시나리오는 하나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그들은 초조감으로 짧은 여름밤을 아쉽게 보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서로를 아쉬워하면서도 또한 커다란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것은 젬마의 엄마 탓이 컸다. 그러나 그날 새벽녘 그들의 아쉬움은 종지부를 찍을 수가 있었다. 피 곤에 지친 젬마가 텐터 안에서 잠깐 잠든 사이에 상택은 젬마를 가질 수가 있었다. 어쩌면 젬마도 그러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격렬한 일을 끝낸 후 상택이 담배를 피워 물고 쳐다 본 하늘엔 빛을 잃은 별들이 성글게 떠 있었다. 그 일이 지금 상택을 편 안하게 잠들지 못하게 했다. 상택은 아침 일찍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척한 모습으로 강의실로 향했다. 상택은 지금 상희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 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낙동강 가에서의 일이 추측대로라면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상희를 찾았다. 상택의 앞에선 그녀는 영락없는 젬마의 모습그대로다.그런 그녀가 천진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 고 있었다. 마치 20년의 시간을 돌려놓은 듯한 착각에 상택을 혼란에 빠뜨렸다. 오늘은 문제를 풀이하는 시간이다.수강생들이 먼저 문제를 풀고 나면, 그가 풀이를 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 됐다.상 택은 이 때를 놓치면 안 될 듯이 휴대폰을 꺼내 상희에게 메 시지를 띄웠다. “헤이, 아씨! 쌤님께 짬 좀 내 주시지?“ 상택은 상담 자료에서 알아둔 상희의 휴대폰에 재빨리 메모 를 남겼다. “안됨요쌩님선약있음요.” 상희가 문제를 풀던 손으로 답신을 보냈다. “고럼, 온제?” “낼은 존대?” “몇 시?” “5교시 끝남” 그 뒤의 하루는 상택에겐 너무 길게 느껴졌다. 이튿날 상희가 그의 책상 앞 의자에 앉았을 때, 그는, 괜스레 울고 싶어졌다. 마치 일어버린 시간을 찾아다니다가 이제야 찾은 듯한 마음에 상택은 그런 격한 감정을 억눌리려고 애를 썼다.이런 상택의 표정에서 상희가 무었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선생님 편찮으셔요?” “응 아니,요즘 불면증에 시달려서...” 상희에게 상택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일순 현기증이 일었다. “오늘 수업은 끝났지?” 그는 미리 상희의 시간을 알아 두었음에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예, 그런데요 선생님? ” “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고3 때는 어떻게 공불 했나?” “열심히 했죠. 근데, 아빠가 크게 다치시는 바람에 공부완 쫑 났죠.” 상희는 어제완 달리 자신의 문제를 묻자 진지한 태도의 학생으 로 돌아와 있었다. “응, 아빠가 어쩌시다가?” 그저, 사무적으로 질문하던 그에게 상희의 대답은 커다란 충격 으로 들렸다. “아빤 토목 기사시거든요.공사장 감독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상택은 목이 말라왔다. “그 곳서 인부들끼리 싸우는 걸 말리시다가 머릴 다치셨어요.” “그럼, 지금은?” “다행히 별 문제는 없대요.” “그래서 열심히 공불하고 싶어도 환경이 따라주질 않았다. 이런 말?” “그런 셈이죠.” 그런 다음 상택은 또 젬마의 현재를 물었다. 아니,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엄마께서 일을 하셨나?” “엄마가요?.” “응, 그 동안 집안 경제는 누가 책임지셨나? 궁금해서” 이 물음에 상희는 상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예쁜 눈이다. 젬 마의 눈보다 더 상택의 마음을 끌었다. “아닌데요, 엄만.” “그럼 누가?” “지난 한 핸 제가요.” 순간, 상택의 머리는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근데, 왜 또 엄마 얘기만이죠?” “…………?” 상택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상희의 되물음 때문만이 아니었 다.상택은 여태 그렇게 고운 입술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네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너무 닮아서…….” 상택은 자신도 모르게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그런 상택의 말에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택을 쳐다보는 상희 의 눈길이 여지없이 상택의 심장을 파고들고 있었다. “제가요?” “응,‘젬마’라는 사람과 네가 너무 닮았어.” 신기한 듯이 두 눈을 빤짝거리며 쳐다보는데,스무 살의 젬마완 확실히 다른 상희가 거기에 있었다. “근데, 선생님 지금 저를 두고 소설 쓰시는 건 아니시죠?” “글쎄, 어쩜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선생님, 저 이만 가도 되죠?” “아니, 근데 난 상희와 좀더 얘길 하고 싶거든.뭐 더 바쁜 일이 있나?” “그렇긴 하지만, 근데, 선생님은 제겐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아니 섭섭하게 그 무슨?” 상택은 자신의 내부에서 근자에 느껴보지 못한 이글거림을 발견 하곤 얼굴이 화끈거렸다. “에구 선생님 좀 봐, 왜 빨개져요. 얼굴이? 그런데요. 이건 딴 얘기 지만 사실 전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아니 상희가 무얼 해서 돈을 버나?” 상택은 갑자기 상희가 무슨 일을 할지가 궁금해 졌다. “이것저것 다요. 돈 버는데 앞뒤 가릴 것 있나요?” 순간 상택은 답답함을 느꼈다. 앞이 깜깜함을 느꼈다. 스무 살의 삼수생이 돈을 번다? 순간 주유소에서 일하는 짧은 치마 의 아르바이트생이 떠올랐다. 그렇게 벌어서 집안을 이끈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기실 백 여 만원은 될 테지만 상희가 설마 그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을까? 그럼 코피 숍?,아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상 택은 캐묻지 않을 수가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데?” 상택은 질문을 던지고 상희의 눈을 넌지시 쳐다봤다.정말 예쁜 눈이다. 그러나 상희는 곧 시선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상택의 경험으로는 상담을 받는 쪽이 시선을 피할 경우 그 만큼 떳떳하지 못한 일이 있다는 증거가 된 사례가 많았다. 상희가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서 궁금증이 커질수록 상택은 그녀를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너무 서둘면 멀리 도망갈 듯한 느낌이 들어 오늘은 이만큼만 하기로 했다. “응, 그래 어서 가봐.” 그렇게 상희를 보내놓고 다정이를 우선 만나 상희에 대해서 더 알아 봐야할 것 같았다. 이튿날 상택이 다정이를 만났다.그러나 상희가 출석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먼저 들었다. 그 냥 머리 좀 식힐 겸 여행을 떠났단다. 삼수씩이나 하는 녀석이 뭔 머릴 식힌다고 난리냐는 상택의 말에 다정이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던 졌다. “사실은 선생님 땜에 그런 거라고요. 어쩌면 선생님이 찾는 분이 상 엄마일지도 몰라요.근데요. 상희 엄만요 지금 속세엔 계시질 안거든요.” “속세엔 계시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상택은 순간 온갖 생각이 맴 돌았다.그러나 달리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상희는 그와 젬마 사이를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알았단 말인가? “상희한테 들은 얘긴데요. 엄마가 아빠랑 헤어질 때쯤 한 마 디씩 선생님 말씀을 하셨나 봐요.” 그 말 뒤에도 다정이는 상희 엄마 아빠가 왜 헤어지게 된 거 라는 자기 나름의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상택은 심한 현기증 으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한 달 이상 상희는 학원에는 나 타나질 않았다. 다정이의 말로는 아빠 일자리가 시원찮아서 대 학에 갈 여유가 없을 것 같다고 하더란다. 상택은 더 이상 참 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든 상희를 다시 만나야 했다.그리고 이젠 상희를 그대로 놔 둘 순 없었다. 그는 상희의 일을 두고 아내 연주와 심하게 다퉜다. 상택은 연주가가 자신의 일에만 매달리는 타입으로 상택의 일에는 상관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 었다.그러나 연주도 역시 여자로서 보통의 여자들과 별반 다르 지 않았다. 이미 수녀원으로 자취를 감춘 지가 오래라는 젬마 에게 심한 질투심마저 느끼는 듯해 보였다.그러나 연주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상황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다. 우선 자 신을 만날 때, 상택은 젬마에 대한 얘기를 충분히 했었다. 그러고 연주 자신도 그 정도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장담한 터였다. 상택은 상희를 찾아 나섰다. 우선 다정이를 통해서 상희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곤 기다렸다. 마음은 초조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그런 얼마 후에 상희의 메시지가 왔다. "쌩님, 보고 싶어요. 엄마 얘기랑 제 얘기로요. - 상희” 그렇게 해서 그들은 다시 만났다. 상희와 그는 퇴촌의 한적한 곳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탁 트인 창 밖으로 봄 내음이 흠뻑 밀려오고,만개한 목련은 세속의 온갖 티끌을 정화시킬 듯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실내엔 멋으로 장식해 놓은 그 네가 있었다. 상택은 상희를 그네에 앉히고 밀어 주었다. 20년 전 대구의 동촌 유원지에서 젬마를 그렇게 태우고 밀어주던 생각이 났다. 그 땐 우악스레 생긴 대구 머스마들이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힐끔거리며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지나갔 었다. 상택은 그런 모습도 좋았다. 카페에서 나온 둘은 밤이 늦도록 시골길을 걷고 또 걸었다.상희는 엄마의 얘기를 소설의 한 토막쯤으로 들려주었다. 젬마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희를 낳았다. 그러나 남 편인 상희 아빠를 젬마가 무지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상희 아빤 재산 많은 집안의 막내로 철이 없었다. 그리고 삶의 무 게가 가벼웠다.자연 집안에서도 소외되고 물질적으로도 모자라 는 것이 점점 많아졌다.그런 여러 가지가 쌓여 젬마는 남편으 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상희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이미 이혼녀로서 정식으로 수녀는 될 수 없었지만,달리 의지할 곳이 없는 그 녀에겐 허드렛일이라도 하며 수녀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처 지가 됐다.그 이후 상희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의 생활은 너무 어려웠다.몇 번의 가출, 또, 차마 말 못할 상희 나름대 로의 돈벌이. 상택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그래서 상희가 자신 을 대함에 스스럼이 없었던 점이 못내 상택의 마음 한 곳을 시리게 했다. “그럼 엄마 있는 곳은 알고 있겠군?" "알긴 알죠. 그렇지만 찾아간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는데…….“ 상택은 왜냐고 묻진 않았다. 묻는다는 자체가 부질없어 보였다. 그 대신 “너는 엄말 사랑 하냐?” 라고 물었다. 이런 상택의 물음에 상희는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쩜 그 눈빛이 젬마를 닮았는지……. “자기 엄말 사랑하지 않는 딸이 어디 있겠어요?” 한결 부드럽긴 해도 퉁명스러움은 가시질 않았다. “그럼 왜 엄말 뵈러가지 않았었지?” “그래요. 그래서 지난주에 춘천 근교에 있는 수녀원엘 다녀왔죠.” “그랬었군.” 상택은 안도했다. 이젠 마음만 먹으면 젬마는 만날 수가 있겠 구나 싶었다. “하여간 지금도 아빤 여러모로 엄마에게 짐이 되나 봐요,” “왜?” “아빤 늘 속이 없는 껍질과 살았다고 푸념이시거든요.”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상택은 상희의 손을 꼭 쥐었다.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우리 엄마 한번 찾아가요?” 꽤나 시간이 흐른 뒤에 상희가 상택에게 제안해 왔다. 상택은 고개 끄덕거림으로 응답했다.그러나 상택 자신이 당장 젬마를 만날 자신은 없다. 이렇게 생각이 꼬여본 적은 없었다. 우선 이 얽히고설킨 사실을 정리하는 덴 꾀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생님!” 그 때, 상희가 상택을 불렀다. 그리곤 가슴을 파고들었다. 상 택은 순간,물러섰으나 이미 늦었음을 느꼈다. 어쩌면 상희의 그런 행동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카페의 불빛만 한 오 리쯤에서 비칠 뿐,인적이 드문 곳에서 상택은 그렇게 그리워했던 젬마를 마음껏 안아볼 수가 있었다. 희미한 달빛 이 벚꽃 나무 가지 사이로 이 기막히고, 언바란스한 남녀의 사랑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토, 일, 월요일! 그리고 화요일에야 상택은 학원에 모습을 나타냈다.상희에겐 먼저 필요한 게 많았다. 상택은 젊고 발 랄한 작은 젬마를 위해 아낌없이 그가 가진 모두를 썼다. 상희는 그런 능력이 있는 상택이 좋았다 .상희로서는 처음으 로 따뜻한 보호의 포근함을 느꼈다.상택도 처음 한동안은 머릿속에 젬마를 그렸으나, 차츰 상희에게 빠지는 자신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쩌면 한 7월도 중순으로 접어든 토요일, 상택이 상희와 춘 천 근교에 있다는 수녀원으로 젬말 만나러 가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상희와 꼭 닮은 젬마를 보게도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 둘만의 약속일뿐, 그 실현은 점점 더 멀게만 보인다.그만큼 상택이 상희를 필요로 했고, 상희 또한 상택이 아주 좋았다.상택과 상희는 오늘도 여주의 콘도를 찾았다.4월 중순의 상현달이 젬마보다 훨씬 예쁜 상희를 더 빛나게 비추고 있었다.상택은 과거의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상희에게 정성 을 다했다. 그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곳에서 소쩍새의 울 음이 즐거운 상희의 교성과 어울려 야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그런 그들에게 내일은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아 보인다. 어쩌면 그 동안 젬마의 존재는 상택에게 하나의 아쉬운 그림자 였는지도 모를 일이다.그 그림자를 밀어내고 상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상택으로서는 중년에 찾아온 천사의 선물 을 받아 챙기는 것일 뿐, 아무런 두려움도 도덕적 측도도 이미 그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지 오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