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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6구간-2(20201212)
흰돌메공원-와성만 해안-남문대교-도코다카오카코리아(주)-남문지구 동천3교-세스페데스공원
-주기철 목사 기념관-웅천읍성-곰내커피-웅천시장-다온플라자 세거리-한국쯔바키모토오토모티브(주)
-쏜덱스코리아-진해 쌍효각-농협셀프주유소-(주)풍산정밀-웅신고개-제덕네거리
1.보라, 雄飛하는 熊川의 날갯짓을!
흰돌메공원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해안으로 내려가 와성만 해안 길을 따라서 걷는다. 서녘으로 기우는 오후의 햇빛에 바닷물이 은회색으로 반짝인다. 와성만 서남쪽에 남산이 봉긋이 솟아 있는데 저곳에 웅천왜성이 있다고 한다. 원래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웅포성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長期戰에 대비하기 위해 熊浦城을 확장해 웅천倭城을 축조하고서 倭將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가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이라 한다. 아마도 임진왜란 초기에 이 웅포(熊浦)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 때문에 왜군들이 이곳을 장악하고 전투를 준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은 한산도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이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진해 3대 해전은 합포해전(진해구 원포동 합개), 안골포해전, 웅포해전인데, 남파랑길 제6코스는 웅포해전 그 역사의 현장을 따라가고 있다. 그런데 웅포해전비를 찾을 수가 없다. 안골포해전비는 안골포 무궁화공원 앞에서 만났는데, 웅포해전비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남문지구에 이르러 ‘진해바다 70리길’ 이정표를 보니 웅포해전비가 해안길이 아닌 그 위 도로 옆에 세워져 있음을 알아냈다. 흰돌메공원에서 진해바다 70리길은 곧바로 도로로 이어가고, 남파랑길 6코스는 와성만 해안으로 내려가 해안길로 이어지다가 다시 도로와 만나 진해바다 70리길과 합쳐진다. 웅포해전비를 보기 위해서는 진해바다 70리길을 따라가면 되지만 남파랑길을 걸을 때는 와성만해안길에서 도로와 마주치는 곳에서 뒤돌아서서 도로를 따라 조금 뒤쪽으로 가야만 만날 수 있다.
와성만 해안길에서 해안도로와 만나서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앞쪽에 남해고속도로 제3지선 남문대교가 와성만을 가로질러 진해남산으로 뻗어간다. 남문대교 아래에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첫 발을 디딘 '사도마을의 탕수바위'가 보인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서양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한 것이 1653년, 그는 전라도 강진에서 억류생활을 하다가 1666년 여수바다를 통하여 나가사키로 탈출하였다. 이후 13년 동안의 조선에서 겪은 일을 책으로 펴낸 것이 ‘하멜표류기’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네덜란드의 하멜보다 60년이나 앞서 조선 땅을 밟았다. 그의 조선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침략국 왜국의 종군신부냐 순수한 포교활동이냐를 두고 설왕설래한다.
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 세스페데스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의 부대에 천주교 신자 장수들이 많았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는 웅천왜성 완공 시점에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웅천왜성에 초청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27일 웅천 탕수바위에 상륙하여 1595년 6월 초순까지 1년 6개월쯤 조선에 머물며 웅천왜성과 주변성에 머물던 왜군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집전과 교리 강론을 하고 이교도(異敎徒) 병사들에게도 세례를 주는 등 목회활동을 했다고 한다. 침략국의 앞잡이로서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포교활동인가? 세스페데스를 알지 못하니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다. 놀이 나온 가족들이 남문대교 아래서 명랑쾌활하다. 그들의 행위는 탕수바위와 그 남쪽 남산 웅천왜성에 서린 아픈 역사의 흔적을 일깨우면서 오늘의 활기찬 역사를 새기고 있는 모습이다.
남해고속도로 제3지선 남문대교 아래를 지나면서 와성만 서쪽 내륙에 즐비한 고층아파트 건물들이 하늘로 치솟은 모습이 들어온다. 웅천(熊川)의 발전상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네거리를 지나면 왼쪽에 ‘도코다카오카코리아’라고 큰 글자가 쓰인 건물이 나온다. 무슨 공장일까? 궁금하다. 인터넷을 뒤적여 알아보니, 진해 남문경제자유구역에 세워진 일본기업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도코다카오카코리아(주)는 기계 융합분야와 초고압계기용 변압기 관련 세계 3대 기술을 보유한 일본기업 도코다카오카(도쿄전력 자회사)와 국내 중전기기 전문업체 청탑산업의 합작회사라고 한다.
도코다카오카코리아(주)를 지나 빛나는 빌딩숲으로 들어갔다. 왼쪽으로는 남문 호반베르디움, 건너편으로는 리젠시빌 란트(RANTT) 등의 고층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다. 그 사이에 아담한 웅천초등학교와 병설 유치원이 자리하고 있다. 동천3교를 건넌다. 동천은 시루봉 아래서 발원하여 웅천읍성 앞을 거쳐 웅천 신시가지를 가로질러 진해남산 북쪽을 흘러 와성만 바다에 합수하는 하천이다. 혹 이 동천이 熊川이 아닐까? 그래서 이 지역명이 웅천이 되었고 와성만 포구를 熊(川)浦라고 하지 않았을까?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법, 제 멋대로 생각하며 남문지구 신시가지를 걷는다. 웅천의 신시가지 남문지구에서 북쪽을 올려보면 불모산에서 내리벋는 시루봉과 천자봉이 그 독특한 형상으로 눈에 들어온다. 웅천을 감싸는 산세가 범상치 않다. 웅천 남문플라자 네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남영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웅천동로를 따라 주기철 목사기념관과 웅천읍성 방향으로 향하는데, 네거리 남쪽에 세스페데스 공원이 있어 세스페데스 공원을 둘러보고 가기로 한다.
임진왜란 당시 서양인으로는 처음 조선 땅을 밟은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1551~1611) 신부는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 장군을 수행하고 다닌 가톨릭 신부다. 창원시는 1593년 12월 진해구 사도마을을 통해 한국에 첫발을 디딘 세스페데스 신부의 역사ㆍ문화ㆍ교회사적 의미를 되새겨 세스페데스 신부를 기념하는 공원을 2015년 11월 30일 개장했다. 스페인 정부에서 1993년 옛 진해시에 기증한 청동 기념비가 설치된 '남문지구 1호 근린공원'을 스페인풍으로 재단장하고 공원 이름을 ‘세스페데스 공원’으로 바꾸어 개장한 것이다. 공원 입구 가벽을 이용해 왼쪽에는 세스페데스 신부 입국 모습을 황동 조형물로 재현했고 오른쪽에는 스페인에서 만들어온 스페인어 공원 명칭 ‘PARQUE SESPEDES’와 스페인을 상징하는 건축물ㆍ문화 등을 담은 그림 타일을 붙였다. 공원 남쪽, 진해 남문동 유적 기와가마 터 옆에는 세스페데스 신부 기념비와 세스페데스 신부 안내비가 세워져 있다. 세스페데스 신부 기념비는 가톨릭 마산교구에서 세웠다고 한다.
스페인의 중남미 국가(라틴아메리카) 정복은 종교에 의한 침략이었다. 포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원주민의 정복, 스페인의 모습이 그러했다면 혹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 신부도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영화 ‘미션’에 나오는 가브리엘 신부의 훌륭한 모습이었을까? 영화 ‘미션’의 주제곡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진실과 감동으로 환청(幻聽)되는데, 세스페데스 신부의 입국 모습을 조형한 황동 조형물은 가식적이라는 의심이 솟아난다.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니 의심만 일어나는 격이렷다.
세스페데스 공원과 진해 남문동 유적 기와가마터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해치우고 남문플라자 네거리에서 웅천동로를 따라서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으로 향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옥중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 신앙인이다. 그에게 항일 독립 운동가라는 말을 머리에 씌우는 것은 그의 활동을 순교와 항일의 일치된 행동으로 보고 항일을 앞세우는 듯하다. 주기철 목사의 기념관은 그의 출생지인 진해 웅천동에 건립되어 2015년 3월 24일 개관했다. 기념관은 코로나로 인하여 임시 휴관 중이어서 기념관 앞에 설치된 십자바위 조형물과 몇 설치물을 살폈을 뿐이다. 십자바위 조형물은 주기철 목사가 기도하던 마산 무학산에 있는 십자바위를 창원시의 도움으로 원형과 흡사하게 제작하여 기념관 앞에 설치한 것이라 한다. 바위에 십자 형상이 보인다. 그래서 십자바위이고 주기철 목사의 신앙 활동의 신비성과 연관시키는 듯하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의 의지 없는 형상을 자신의 뜻에 맞추어 해석하여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종교세계에서 더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적 신앙심이 없는 길손은 호기심으로 후다닥 살피고는, 맞은편 웅천읍성(熊川邑城)으로 건너갔다. 지역방송사에서 웅천읍성을 안내하는 영상을 웅천읍성 해자(垓子) 앞에서 제작하고 있다. ‘들어볼까? 시간이 없는데.’ 그 장면을 흘낏 살피면서 웅천읍성 관광안내소를 지나 ‘웅천읍성’ 설명안내판을 후루룩 삼키고 떠난다.
웅천읍성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정리하여 옮긴다.
"창원 진해 웅천읍성(昌原 鎭海 熊川邑城)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에 있는 平地石城이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읍성(邑城)이란 군(郡)이나 현(縣)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城을 말한다.
웅천읍성은 남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와 인접한 제포왜관(薺浦倭館, 제포는 현재의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왜관은 조선시대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교역하던 곳, 또는 그곳에 설치한 행정기관을 이르기도 하며,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이기도 하다.)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 세종 16년(1434)년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삼포왜란(삼포는 동래의 부산포, 웅천의 제포, 울산의 염포를 이르며, 삼포왜란이란 왜인들의 법규위반 사태가 빈발하자 중종은 1506년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삼포의 왜인들에 대해 엄한 통제를 가하자 삼포의 왜인 거류민들이 불만을 품고 1510년(중종 5년)에 일으킨 폭동 사건을 이른다.) 당시에 웅천읍성은 왜인들에게 함락되어 동문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2011년 동문인 견룡루(見龍樓)와 동측 성벽과 남측 성벽 일부가 복원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총 길이는 500m, 동벽 북단의 남쪽 100m 쯤에 누각이 있던 자리도 남아 있다."
웅천읍성의 해자(垓子, 성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그 둘레를 감싼 도랑)를 건너서 웅천읍성 성벽의 문자가 새겨진 돌인 명문석(銘文石) 앞으로 가보았다. 웅천읍성의 동벽과 남벽에는 모두 5개의 명문석이 확인되며 명문석의 내용은 읍성 축성구간을 담당한 군현(郡縣) 및 감독의 성명을 각석(刻石)하여 축성 후에도 그 책임을 연대하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銘文石 성벽에서 남쪽으로 뻗어간 곳에 동남치성(東南雉城, 치성은 성곽 일부분을 네모나게 돌출시켜 적들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게 만든 성곽 시설)이 보이는데 거기까지 가지 앉고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해자(垓子)와 해자 조교(釣橋, 해자를 출입하는 시설로 줄을 올리고 내리던 다리)를 살펴본 뒤 옹성(甕城,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문 밖을 반원형이나 ㄷ형으로 둘러쌓은 성곽의 시설) 안으로 들어가 동문루(東門樓, 문루는 대궐이나 성 따위의 문 위에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지은 집)인 ‘견룡루(見龍樓)‘에 올랐다.
성곽 위에서 옛 진해의 중심지 웅천의 영광을 상상한다. 그리고 현재 읍성의 안과 밖의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을 바라본다. 지난날 읍성 안 성내동이 웅천의 중심지로서 당당한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낮은 전통가옥들이 오랜 세월의 풍파에 씻겨 상흔이 새겨진 낡은 풍경이 되고 말았다. 반면에 웅천읍성 남문 바깥에 새로이 건설된 남문지구 신시가지는 높은 빌딩숲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권세가 당당하고, 남문 경제자유 구역의 산업체 시설들은 새로운 웅천의 웅비를 위하여 역동적이다. 새로운 날개를 펼치고 웅비하는 성 밖의 모습은 웅천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이 두 모습이 현재의 진해 웅천 모습이다. 웅천읍성 성곽에 서서 성 안과 성 밖의 중심 위치가 바뀐 두 풍경에 길손의 마음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다. 세월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취락(聚落) 구조와 모습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성내동의 모습은 낡아가는 내 모습 같아서 무상함을 달랠 길이 없다. 제덕만 쪽을 바라보니 초겨울 오후의 서녘으로 기우는 햇빛이 산산이 부서져 밀려와 두 눈이 아련해진다. 나는 뒤돌아서서 우뚝한 시루봉과 천자봉을 그리고 웅천고등학교를 바라보았다. 그때 메아리가 들려온다. “웅천 성내동은 의젓하게 제 자리를 지킵니다. 옛것은 옛것대로 본분을 지키고 새것이 힘차게 웅비하는 날갯짓은 아름다운 조화가 아닌가요? 감상적(感傷的)인 길손이여, 시대와 장소는 그렇게 서로에게 침투하며 흘러갑니다. 저 앞을 향하여 어서 떠나세요.”
읍성 동문 안에 있는 광고회사 ‘행복을 달다’가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저 디자이너는 사랑의 달, 행복의 별, 평화의 꽃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모두에게 베풀어줄 것이다. 그런데 그 광고 간판은 땅에 떨어져 있다.
동문 안 웅천동우체국 앞을 지나 진성한식집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웅천중로56번길을 따라 남파랑길은 이어진다. 성내마을회관과 노인회관을 겸한 건물 옆에 외관을 예쁘장하게 단장한 ‘쁘띠 어린이집’이 있다. 어린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어린이집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린이집에 '쁘띠(petit, 작은)'라는 프랑스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어린이들이 모이는 '작은' 어린이집이라고 하는 것이 친근하기도 하고 훨씬 정감이 간다. 그 앞에는 2층짜리 일본식가옥 장옥(長屋, 나가야)을 본뜬 듯한 ‘곰내커피’ 목조건물이 인상적으로 눈길을 끈다. 長屋(나가야)은 일본식 연립주택 또는 다세대주택의 일종으로 1층은 상점, 2층은 주택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곳 웅천(熊川, 곰내)의 우리말 표기 ‘곰내’를 상호로 쓰는 ‘곰내커피’는 ‘한옥카페’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데 ‘나가야‘라는 인상을 주는 카페이다. 커피와 맥주를 파는 일반음식점이라 하는데 주택모양, 상호, 카페명 등 혼돈의 이상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 조금 더 걸으면 왼쪽으로 웅천시장이 나온다. 웅천시장은 5일장(4일, 9일)이 서는 전통 재래시장인데 장이 서지 않은 탓에 텅 비어있다. 웅천시장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나가면 왼쪽에 노인장기요양기관인 진해용원노인복지센터, 더 나가면 웅천중로와 만나 왼쪽으로 꺾어나간다. 웅천제림의원을 지나면 곰솔 한 그루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 옆에는 낮은 기와집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면서 굳건하게 서 있다. 곰솔이 지켜주는 아담한 기와집의 굳건함을 보며 길손의 감상(感傷)은 사라진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면서 저 기와집은 몇 대(代)의 족속들을 키워내고 보존했을까? 족속의 보존을 이룬 기와집의 단단한 의지가 겨울 햇빛을 강렬하게 반사한다. 그 기와집을 지나서 만나는, 마당에 곰솔이 있는 고구려 중화요릿집에도 마음이 간다. 도대체 남쪽 바다가 있는 웅천에서 중화요리 음식점을 하면서 고구려 상호를 쓴 까닭이 무엇일까? 고향이 북쪽인 월남(越南)한 사람, 고구려 출신의 씨족(氏族), 고구려의 사랑? 궁금증만을 품고 떠난다.
웅천중로 끝 지점 다온플라자 세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나간다. 그 오른쪽에 세계적 자동차 부품기업 일본 쯔바키 체인의 한국 법인 회사인 ‘한국쯔바키모토오토모티브’ 주식회사가 있다. 한국쯔바키모토오토모티브(주)는 자동차용 타이밍체인 드라이브 시스템의 생산·판매 거점으로 2011년에 이곳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전세계 타이밍 체인 드라이브 시스템 시장에서 약 40%의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쯔바키모토오토모티브(주) 공장에서부터 서쪽 지역은 웅천의 산업공단 지역으로 웅천의 경제 활성화를 견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덴마크 선박부품 기업 쏜덱스코리아(주) 건물이 한국쯔바키모토오토모티브(주) 서쪽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 서쪽에 풍산정밀 주식회사가 있다. ‘(주)풍산정밀’도 자동차 분야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이라고 한다. 웅천 북쪽 성내동 읍성마을에서 웅천의 옛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읍성 밖 웅천 남쪽 지역 남문동에서는 웅천의 새로운 도약과 웅비의 힘찬 기계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두 풍경의 향기와 소리를 감각하며 걷는데 길 건너편에 비각이 보인다. 무엇일까? 궁금해서 건너가 보았다. 창원시 진해 쌍효각으로 호환(虎患)을 당하여 생명이 위독하게 된 부친을 구한 아들 달성 서씨 지순(徐志淳, 1734~1801)과 며느리 경주 이씨의 효성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이다.
쌍효각을 본 뒤 조금 더 걸어 올라서 쏜덱스코리아(주) 맞은편 농협셀프주유소 앞 네거리 웅천서로에 이른다. 이곳이 웅천 중심 시가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남영로가 끝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웅천을 동서로 관통하는 남영로와 남북으로 가르는 세 개의 대로 ‘웅천동로·웅천중로·웅천서로’의 위치를 분명히 감각할 수 있으며, 걸어온 웅천시가지가 손바닥의 손금처럼 뚜렷하게 가늠된다. 기억을 짚으며 도로이름을 따라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웅천 시가지의 남파랑길은 세스페데스 공원까지 ‘남영로’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주기철목사관과 웅천읍성이 있는 북쪽 길 ‘웅천동로’로 이어지다가 웅천읍성이 있는 ‘웅천중로’ 갈래길로 꺾어진다. 남파랑길은 웅천읍성에서 바로 ‘웅천중로’로 나아가지 않고, 성내동마을회관-곰내커피-웅천시장을 거치는 ‘웅천중로’ 갈래길(웅천중로56번길)로 굽이돈다. 웅천시장을 빠져나와 ‘웅천중로’와 만나서 웅천동복지회관-웅천제림의원-고구려중화요리-다온플라자의 ‘웅천중로’로 이어지는 남파랑길은 다온플라자 세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한국쯔바키모토오토모티브(주)를 지나서 ‘남영로’와 반갑게 재회하여 ‘남영로’를 따라가다가, 농협셀프주유소 앞에서 남영로와 이별하고 웅천서로로 이어진다. 영길리 월남천에서 남영로와 만나서 황포돛대노래비-흰돌메공원-세스페데스공원의 남영로를 줄기차게 걸었다. 길게 이어진 너와의 만남은 여기까지다. 안녕, 이제 너와 이별한다.
농협셀프주유소 네거리에서 북쪽으로 보는 풍경이 탁 트여있다. 뒤쪽으로 웅산-시루봉-천자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웅천을 북쪽에서 감싸주고, 앞쪽의 웅천서로 서쪽 (주)풍산정밀과 웅천서로 동쪽 쏜덱스코리아 주식회사는 웅천의 산업과 경제 발전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주)풍산정밀·쏜덱스코리아·한국쯔바키모토오토모티브(주) 등 여러 공장들이 줄지어선 산업체 공단은 깨끗하다. 그리고 남쪽 제덕만의 바다에 진해신항이 건설 중이다. 웅천의 미래가 눈에 훤하게 보인다. 웅천의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함께 아름다운 산과 바다와 들에서 삶의 휴양을 즐기는, 문명과 자연의 조화가 꽃처럼 피어날 것만 같다. 이제 웅천은 부산의 곁다리에서 벗어나 진해의 중심지로 우뚝 서서 울산과 포항과 어깨를 견주는 대한민국 으뜸 도시가 될 것이다.
웅천서로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건너갔다. 웅천서로 서쪽 길을 따라 웅신고개(개고개)를 넘는다. ‘전망좋은모텔’과 ‘유에스모텔’이 웅신고개 서북쪽 언덕에 서있다. 고개 위쪽에 서있는 ‘전망좋은모텔’에서 제덕만을 바라보는 풍경이 멋질 것만 같다. “바다에 건설되는 진해신항 시설물들이 들어서도 전망이 좋을까? 저곳에서 해넘이 풍경을 보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품으며 벚나무 가로수들의 마중을 받으며 초겨울 오후 햇볕이 따스한 호젓한 고갯길을 내려서니 제덕네거리이다. 이곳에서 웅천서로는 끝이 나고 남파랑길은 명제로 갈래길(명제로494번길)로 이어진다. 제덕네거리에서 제덕만을 바라보니 미세먼지 먼지 탓에 바다는 희부옇게 누워있다. 동쪽 언덕 아래에서 제포왜관 터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어디쯤일까? 제덕네거리에서 길을 건너 제덕만택지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남파랑길 6코스를 끝낸다. 그곳에 다음 코스인 남파랑길 7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이제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7코스를 이어간다.
제덕매립지 제2공원 송백 임시본부를 찾아간다. 햇볕이 잘 드는 들판에서 초겨울 오후의 햇볕을 받으며 황소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다. 그 풍경은 숨 가쁘게 남파랑길을 걸어온 길손에게 신선처럼 보였다. 바쁨 속에서는 자유와 한가로움을 목마르게 구한다. 국토순례 남파랑길을 바쁘게 숨이 차도록 걸으면서 신선의 자유와 황소의 한가로움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만 더 여유를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파랑길을 함께 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였습니다.
2.걸은 과정 영상
한국에 온 최초의 서양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는 스페인 출신으로 1593년 12월 27일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에 온 최초의 서양인이자 임진왜란을 목격한 서구인이었다. 조선에서 1년 정도 머문 후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세스페데스 신부의 내한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멜보다 60년이 앞선 때였다.
16세기 유럽과 동아시아간의 접촉의 문을 연 이들은 다름 아닌 가톨릭 신부들이었다. 특히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어 해외 진출이 가능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인데, 그가 1549년 극동에 첫발을 디딘 후,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조선을 비롯한 극동 아시아가 서양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55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부유하고 귀족적인 집안에서 출생한 세스페데스 신부는 살라망까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신학을 공부하였고, 1569년 1월 28일에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구 후에는 순방 신부였던 알렉산드로 발리그나노를 따라 인도의 고아 지방으로 가서 1년 6개월간 체류한 바 있다.
그는 신부가 된 후 1577년 일본으로 들어가 34년간 일본의 천주교 전파를 위해 일했다. 1592년 4월, 일본은 조선을 침공했고, 1593년 12월 28일, 전란 중에 일본교구장이었던 뻬드로 고메스(Pedro Gomez) 신부의 요청으로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을 방문하여 1년 동안 체류하게 되었다. 진해 웅천포를 거쳐 조선 땅을 밟은 세스페데스 신부는 천주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세를 베풀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고꾸라(小倉)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1611년 12월 어느 날 60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1551~1611)
세스페데스는 스페인 사람으로 1593년 12월 27일 우리나라 땅을 처음 밟은 서양인이다. 그는 예수회의 신부였으며 임진왜란 때 이곳 웅천포를 거쳐 이 땅에 들어왔고 1년가량 머물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세스페데스의 한국 방문은 1653년 8월 제주도에 표류되어 들어왔던 하멜(넨덜란드 사람)보다 60년이나 앞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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