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의 진수, <닥터 슬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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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6.07 / 신진아(애니메이션 컬럼니스트)
시간을 초월한 감동과 재미, 말이 쉽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닥터 슬럼프>를 보고 있으면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로봇 하면 지구를 지키는 영웅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80년대 일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중에 지구 수호와는 전혀 상관없이 탄생된 로봇이 있다. <닥터 슬럼프>의 아레라가 바로 그 주인공. <닥터 슬럼프>는 <드래곤 볼>로 유명한 도리야마 아키라의 만화이자 동명의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은 80년부터 일본의 주간 소년 챔프에 연재됐는데, 막강한 인기로 그 이듬해 TV 시리즈로 제작됐다. <닥터 슬럼프>는 만화체의 귀여운 캐릭터가 다수 등장하는 폭소만발의 개그물로 여타 작품을 무차별 패러디한 작가의 기발함이 돋보인다. 그래서일까? 시리즈가 종결되고 10여 년이 지난 97년, 성우와 제작진을 전면 교체해 97년 판 <닥터 슬럼프>가 제작됐다. 최근 MBC에서 <닥터 슬럼프>를 방영하고 있는데, 이 작품이 바로 97년 판이다.
만화적인, 너무나 만화적인
원작의 탄탄한 구성 때문인지 TV 시리즈는 만화를 충실히 애니메이션으로 옮기고 있다.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시리즈의 내용을 대충 다 짐작할 수 있을 정도. 그리하여 작품을 보고 있으면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어떻게 옮겼을까, 라는 궁금증이 졸졸 따라 다닌다. 그리고 이내 감탄하게 된다. <닥터 슬럼프>는 만화 특유의 과장이 극대화된 작품인데, 그걸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아무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지만 자칭 천재인 센베 박사가 인조인간 아라레를 만들면서 시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 도리야마의 한 친구가 만화의 지면을 빌어 이렇게 묻는다. "대체 센베 박사는 왜 아라레를 만들었지?" 그도 그럴 것이 아라레는 다수의 만화 영화 주인공처럼 악의 무리와 맞서 지구를 구하는 용사도 아니고, 미혼인 박사를 위해 집안 일을 돕는 가정부 로봇도 아니다. 단지 장점이라면 힘이 세고 명랑하다는 것. 아라레의 괴력은 지구를 반 조각 낼 정도다. 그리고 꼬챙이에 응가를 꽂고 다니거나 심심하면 머리를 빼내 던지기 놀이를 하는 등 눈만 뗐다 하면 말썽을 일으킨다.
아라레 못지 않게 만화 세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캐릭터로 아라레의 친구 가짱이 있다. 겉으로 봐선 귀여운 천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지막지한 괴물. 어느 날 센베 박사가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시대로 간다. 가짱은 그때 가져온 알에서 태어난 천사다. 가짱은 고무를 제외한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 어쨌든 아라레와 가짱 그리고 그들의 친구 덕분에 작품의 배경이 되는 펭귄 마을에는 매일 시끌벅적한 사건이 일어난다.
<닥터 슬럼프>는 이처럼 만화적인 인물과 상황으로 가득 차 있다. 만화가 아니고서야 동물, 사람, 로봇, 괴수, 우주인 등이 어울려 사는 펭귄 마을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사람은 개에게 말을 걸고, 동물들은 모여 음악대를 만든다. 태양은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를 피우며, 돼지는 아침마다 "여러분 펭귄 마을에 아침이 왔어요"라고 말한다. 뒤죽박죽 모든 것이 가능한 펭귄마을. 작가는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을 펭귄 마을로 초대하고 드디어 포복절도 패러디는 시작된다.
기존의 것은 패러디하고 없는 것은 창조한다.
슈퍼맨과 타잔, 울트라맨, 사무라이, 고질라를 비롯한 귀여운 괴수 등 <닥터 슬럼프>를 보고 있으면 곳곳에서 패러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익숙한 모든 것은 뒤집고,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버무려 훌륭한 개그, 패러디 만화를 완성한다. "난 왜 못 날아요? 배에서 미사일 안나와요. 손에서 레이저 광선은?" 탄생순간 내뱉은 아라레의 말에서 <아톰>이나 <마징가 Z >등의 로봇을 떠올리며 폭소를 터뜨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이러한 면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잡다한 얘기로 자유롭게 그려나간 18권을 보면, 70년대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발레를 소재로 한 순정 만화 패러디가 배꼽을 잡게 한다. 여기서 땅딸한 센베 박사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분한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인물은 아무래도 정의의 사자 슈퍼맨과 정글의 왕자 타잔이다. <닥터 슬럼프>는 알다시피 만화체 스타일의 작품. 대부분의 인물들이 3-4등신이다. 어른의 얼굴에 어린이의 몸매를 한 슈퍼맨과 타잔을 상상해 보라. 외모에서부터 영웅의 면모를 거세당한 그들은 도리야마에 의해 무참히 재창조된다. 펭귄 마을의 왕따, 바보 슈퍼맨과 타잔으로. 그도 그럴 것이 슈퍼맨은 사건이 발생하면 일단 공중전화 박스에서 변신을 하고 '메실 장아찌 먹고 슈퍼맨'을 외친다. 그리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지만 아무런 역할도 해내지 못한다. 불룩한 배 때문에 제대로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급기야 심술난 영웅은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를 폭파하고, 기절한 사람을 안고 외친다. "정신차리세요 당신을 구해드리죠" 정글의 왕자 타잔의 신세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겨울이면 콧물을 달고 동분서주하지만, 그의 멍청함에 질린 치타는 결국 타잔을 떠나고 만다.
폭소의 지뢰밭, 숨은 재미 찾기
항상 새로운 적이 무한정 등장하는 <드래곤 볼>을 보면 알 수 있듯 도리야마는 캐릭터 창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준다. <닥터 슬럼프>에도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 분명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여자의 손이 닿으면 호랑이로 변하는 권법소년, 슈퍼 히어로가 꿈인 거대인간형 파리 부비빈맨, 엉덩이가 머리에 붙어있는 우주해적 등. 이밖에 구석구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그마한 동물과 그림이 숨어있다. 한 예로 오토바이를 멈추면 죽는 불치병에 걸린 오토바이 소년. 그는 죽기 않기 위해 바이크를 타면서 먹고, 자고, 싼다. 가운데가 뻥 뚫린 바지를 입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꼼꼼히 보면 구멍을 통해 앙증맞게 묘사된 성기가 드러나는데, 오토바이 질주 방향에 따라 휘날리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결국 볼 때마다 무심코 지나쳐 버린 숨은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도리야마는 또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재치 있게 활용한다. 신기한 것을 발견했을 때 아라레가 내는 "호요요요" 는 말할 것도 없이, 만화에서 감정이나 상황묘사를 위해 사용하는 단어를, 예를 들어 공포감을 나타내는 '오싹', '두근두근' 등을 애니메이션에도 적용했다. 애니메이션은 사운드가 지원됨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의미도 없이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는 돼지는 "어슬렁어슬렁"이라는 소리를 내며 어슬렁거린다.
이외 센베 박사의 발명품 감상도 <닥터 슬럼프>를 보는 큰 즐거움이다. 최근 사회 문제화되고 있는 투시카메라는 이미 센베 박사가 시리즈 초반에 선보인 발명품. 작가인 도리야마는 프라모델이 취미인데다 그림이 달필이라 매카닉이 제법 사실적이다. 물론 황당한 것도 많지만, 그런 것은 그냥 만화적 상상력으로 즐기면 된다. 어차피 이건 만화고, 도리야마 또한 자신이 만든 세상이 가짜고, 만화적인 세상임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 넌 왜 콧구멍이 없니?"라고 물으면, 그는 대답한다. "이건 만화니까 그래!"
시간을 초월한 감동과 재미, 말이 쉽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닥터 슬럼프>를 보고 있으면 실감하게 된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이 유니버설한 작품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