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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백일장 논술 논제
특정한 용어가 그 사안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주는 경우가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골라 그 용어를 사용하게 된 사회적 맥락과 배경, 문제점 등을 분석하고 그 용어를 어떻게 바꾸는 게 좋을지 대안을 제시하시오. (1500자 안팎)
제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작_ 윤상은
말은 힘이 세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이 말에 표현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반대도 만만치 않다.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하거나 그를 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상이 “싫다”고 입 밖에 내고 두루뭉술했던 이유들을 하나하나 규정하다보면, 어느새 그 대상에 대한 미움이 의식에 뚜렷이 자리 잡게 되곤 한다. 듣는 사람 역시 다르지 않다. 험담의 대상이었던 제3자를 볼 때마다 들었던 험담을 나도 몰래 하나씩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현실에는 말로써 되레 의식이 견고하게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저출산’ 또한 그렇다.
‘저출산’은 현재 한국 사회가 대면한 문제점을 짧고 굵게 설명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인구 피라미드가 기형적으로 변한다. 노인층에 대한 사회부담이 늘어난다. 성장 동력을 잃은 사회가 도태되기 시작한다···. 출산율 1.24명의 절망적인 현실은 더 강하게 ‘저출산’ 대책을 요구한다. 그러나 매번 실효성이 의문인 대책을 반복하기 전에, ‘저출산’이라는 표현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문제의 첫 단추를 잘못 꿰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산(出産)의 주어는 여성이다. 곧 ‘저출산’은 책임 주체를 여성으로 규정하고 ‘저출산’ 문제는 ‘여성이 아이를 잘 안 낳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여성이 겪어온 현실을 돌이켜보면 이 용어가 가진 전근대성은 더욱 명확해진다. 자녀의 탄생과 양육을 책임져야 했던 주체는 오래간 오로지 여성이었다. 아이를 못 낳아서, 아들을 못 낳아서 구박받던 전근대 여성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모습을 교묘히 바꿔 맥락이 전혀 다른 ‘저출산’이라는 용어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에 ‘요즘 여자들은 애를 안 낳아서 문제’라는 무의식이 사회 기저에 남아 있게 된다. 이는 잘못된 성 의식을 방치한다. 더해 왜곡된 문제의식으로 대책 마련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제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_ 전재현
‘따뜻한 계모’, 어딘가 어색하다는 인상을 준다. 어릴 적 익숙하게 접한 동화책에서 계모는 언제나 악랄하고 고약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계모는 늘 의붓딸을 죽이거나 죽이려 하고,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아이를 괴롭힌다. 친엄마와 새엄마의 역할은 한결같이 고정적인데, 이는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언론은 계모를 ‘악랄한 가해자’로 부각시킬 때 활용한다.
수많은 언론 매체들은 원영이 학대 살인 사건을 ‘악마 같은 계모의 아동학대 사건’으로 이름 붙이고 각종 서사를 덧붙인다. 한 기사에서는 7살 원영이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계모를 ‘엄마’로 불렀다는 사실을 언급했는데, 여기서 계모와 엄마의 어감 차는 극명하다. 계모는 끔찍하게 아이를 학대하고 죽였으나, 아이는 마지막까지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줄 엄마를 부른 것이다. 계모와 엄마의 거리는 닿을 수 없이 멀게 느껴진다.
아동학대 가해자를 계모라는 이름으로 비난하지 말자. 보호 의무를 저버리고 폭력을 행사한 이를 비난하고 싶다면 그게 누구든 ‘보호자’ 혹은 ‘부모’로 일관하자. 아이는 계모가 아닌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사회는 사람이 아닌 행위를 제한해야 한다. 고약한 계모라는 비틀린 편견에 사로잡혀 진짜 악마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제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_ 최준선
영화 <곡성>은 폐쇄적인 작은 마을에 외지인이 도착한 이후 벌어지는 아비규환을 그렸다. 영화는 의문의 살인사건 배후에 외지인이 있다는 의심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외지인이 악마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설정돼있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는 외지인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증오로 이어지도록 유도한다. 나를 현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게 관람의 묘미다.
최근 외지인이 실제로 나타났다. 정확히는 ‘외부세력’이, 사드 반대 시위가 열리고 있는 성주에 등장했다. 성주군민 외의 반대 시위 참가자가 있었던 게 논란의 시작이었다. 시위의 배후에 외부세력이 있다는 주장이 등장했고,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만한 시위 참가자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간첩 개입론’까지 불거졌다. 의심은 일반 국민을 불순한 ‘세력’으로, 나아가 ‘간첩’으로 까지 몰고 갔다. 영화 <곡성>만큼이나 수준 높은 현혹이다.
보수 세력은 이 반감을 교묘히 이용해왔다. 일상적 상황에서도 위기국면을 조성해 전쟁을 수행할 때처럼 이념과 법, 공권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반대 세력의 정치적 행위는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불순한 행위라며 공격했고 ‘외부세력 개입론’을 슬며시 흘렸다. 1980년 광주 민주 항쟁은 외부 불순세력이 주도한 것이라는 일부 보수 세력의 주장이나, 최근 세월호 유가족들의 활동에 대한 일각의 폄하가 그 예다. 외부세력 프레임은 일반 국민을 악마로 여기게끔 현혹하는 의심의 씨앗이다.
외부세력 프레임의 가장 큰 문제는 직접적인 이해가 얽힌 ‘내부세력’만이 시위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는 인식을 퍼트린다는 것이다. 사안에 대한 논의를 특정 집단에 국한해 전국 단위로 토론이 확대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특정 집단의 논의를 ‘지역 이기주의’로 깎아내린다. 결국, 폭넓은 민의 수렴을 불가능하게 하고, 논의의 본질을 흐린다. ‘뭣이 중헌지’를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국가에서 일어난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든 내부세력으로서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 이기주의라는 공격에 힘을 잃기 쉬운 소수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외부세력 프레임은 해체돼야 한다.
해체작업은 별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부터 시작돼야 한다. 사안에 대한 공감조차 없이 단순히 일당을 받고 동원된 용역 시위꾼들을 ‘동원세력’으로 지칭하고, 이 언어를 확산시킬 것을 제안한다. ‘외부’라는 모호한 개념보다는 가리키는 대상이 명확해져 객관적인 시시비비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적 논의와 언론의 지속적인 조명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프레임 해체가 불가능하다. 시위 주체의 자정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 외부세력 개입 논란은 시위 주체가 자초한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성을 해치는 동원세력을 멀리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고, 동원세력 외의 폭력시위대를 ‘갈등조장세력’이라고 지칭해 국가와 함께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만 ‘의심의 씨앗’을 제거할 수 있다. 영화 <곡성>을 보면 관객을 현혹하는 게 무엇인지 짐작은 가능하지만, 워낙 여러 가지가 현혹하려 들어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러나 외부세력 논란은 다르다. 의심의 씨앗은 하나다. 그 씨앗만 제거한다면 우리는 현혹되지 않을 수 있다.
제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_ 이우연
경제학에서의 인플레이션처럼 언어에도 인플레이션이 있다. 언젠가 시장 기름가게 앞에 붙여진 ‘100퍼센트 진짜 순 참기름을 팝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서글퍼진 적이 있다. 순(純)과 진짜라는 형용사를 덧붙였다.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100퍼센트까지 운운하는 꼴이라니. 몇 번이고 힘주어 말해야 겨우 뜻이 통할 정도로 저 단어들은 효용가치가 떨어진 셈이다.
이는 정부가 여전히 국가의 군사력 중심으로 안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때 국가는 유일한 안보 행위자가 된다. 하지만 ‘국가안보’는 국제적으로는 이미 낡아도 한참 낡은 개념이다. 이미 1982년의 UN 팔머위원회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본 위원회는 국가들이 서로의 희생을 토대로 안보를 성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사력만으로 안보를 성취할 수 없다고 믿는다.” 대신, 국가가 막강한 군대를 유지하면서도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위협의 원천이 되는 사례는 흔하다. 안보딜레마 상황이 속출한다.
안보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정작 중요하게 취급돼야 할 ‘인간안보’는 방치되고 있다. 인간안보는 주권국가를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안보 대상을 인간 개개인으로 돌리자는 시각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이 과정에서 안보의 범위는 전쟁뿐만 아니라 환경파괴, 질병, 재해, 경제난, 성폭력, 아동 학대 등으로 넓어진다. 인간안보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면 ‘사드’와 관련된 성주 주민의 극렬한 반발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안보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동참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성주 주민의 핵심 정서는 의사결정과정에서 전적으로 배제 됐다는 데서 오는 모욕감이다. 사드 배치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주한미군은 수차례 성주의 부대를 방문했다. 도나 군은 주민들에게 전혀 정보를 알리지 않고 소외시켰다. 긴급한 결정을 필요로 하는 외교∙국방 사안이라고 변명하기엔 사드 배치의 논의 기간은 길었다.
인간안보의 개념이 정부의 안보에 대한 사고와 정책에 적극적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제 국가안보보다 인간안보의 개념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공감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안보는 중요하다. 다만 공감대가 부족한 구시대적 국가안보만을 내세우며 안보라는 단어를 남발하다 보니 정작 필요한 안보에 구멍이 생기고 있다. 안보는 민주주의, 평화, 인권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들을 포용하며 갈 수 있으며 가야 한다. 인플레이션화(化)된 안보 대신, ‘인간안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자.
제2회 백일장 논술 논제
차기 대통령의 조건을 3개의 키워드로 논하라. (1500자 안팎)
* 최우수작 수상작 없었음.
제2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_정수연
미국의 정치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마지막 어휘’란 용어로 우리 시대를 설명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최후까지 지키는 신념어가 마지막 어휘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비선(秘線)’을 최후의 신념어로 삼은 것 같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순실 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쳤다는 의혹, 민정수석실 인사에 개입했다는 논란 등이 그 예시다. 비선실세 국정논단의 근본 원인은 권력의 사유화다. 차기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감투로 여기지 않고, 신념과 책임이 있는 사람이어야 마땅하다.
차기 대통령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이다. ‘문고리 권력’ 등 역대 대통령마다 정상적인 지휘라인이 아닌 자가 대통령과의 친분을 빌미로 공권력을 휘두른 일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 근본적인 원인은 권력이 사유화됐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은 투표를 통해 권력을 대통령 등 선출직 공직자에게 이양한다. 공직자의 권력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인 셈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권력을 하나의 감투로 여긴다. 자신의 소유물이라 생각하니 공권력을 법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써도 된다고 받아들이며, 권력을 측근에게 나눠준 것이다.
정치지도자에겐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도 필요하다.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공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되 그 권력을 신념과 책임을 바탕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얘기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꼽는다. 신념윤리는 공직자 내면의 양심이고, 책임윤리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적절한 수단을 동원해 실현해내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 지도자에겐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모두가 요구된다. 권력을 이양받았다면, 올바른 신념을 갖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얘기다. 공직을 자신의 성취물로 보지 않고, 공직 윤리를 따르되 국익에 일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신념윤리는 있지만 책임윤리는 빈곤한 정부였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검찰은 국민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신념을 가졌지만, 적절한 수단을 찾아 검찰개혁을 해내진 못했다. 신념윤리만 있고 그 신념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정부는 무능력한 정부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책임윤리는 있되 신념윤리는 희박했다. 4대강 사업 등 목표한 바를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는 강했지만, 정부의 사업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윤리는 없었다.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는 공직자,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모두 가진 정치 지도자가 필요하다. 권력을 자신의 뜻이 아니라 법에 따라 사용해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개입이 없어야 한다. 동시에 공권력을 국민의 이익을 위해 행사하며 성과를 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의 마지막 어휘가 비선이 아니라 국민이 된다.
제2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_나보배
투명함은 ‘책임정치’로 이어진다. 정부 결정이 투명하게 이뤄진다는 것은 기록함을 의미한다. 기록물이 있다면 대통령에게 더 강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5년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제도 아래에서, 그간 대통령은 책임에서 다소 자유로웠다. 시민과의 약속인 공약을 파기하거나 녹조가 짙게 낀 4대강 사업처럼 부작용이 큰 정책을 시행해도 임기가 끝나면 책임지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이제 시민들은 대통령이 행한 행동에 대해 책임지기를 원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에 모여 최순실 국정농단을 비판한 시민들이 외친 구호도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지고’ 하야하라”였다. 투명하게 국정을 운영하고 언행에 책임지는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신뢰’을 줄 수 있다. 막스베버의 말을 빌리자면 신뢰는 곧 정부의 지배를 유지시키는 정당성이기도 하다. 대통령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정부는 국정운영 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민의 한 사람인 나를 지켜준다는 최소한의 믿음, 시민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 것이 시민의 가장 큰 권리다”고 했다. 두려움에 빠질수록 시민을 쉽게 통제당하기 때문이다. 시민이 두려움에 빠지지 않아야 주권을 온전하게 행사할 수 있다. 그래야 헌법 제1조 1항에서 규정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실현할 수 있다. 현재 시민들에게 팽배해 있는 두려움이 걷히도록 차기 대통령은 투명하게 국정을 운영하고, 언행에 책임을 져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정부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
제3회 백일장 논술 논제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대통령’이라는 직제가 생긴 뒤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제3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작_ 강보현
'President'라는 말은 다른 이보다 앞(pre)에 앉는(sidere)사람 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이는 회의를 주재하고, 진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를 부르는 말로 원래는 ‘전하’라는 의미의 ‘His Highness'를 붙이려 하였으나, 당시 하원의 반대로 ’Mr.‘를 붙였다. 그래서 뉴욕타임즈, WSJ, CNN등은 자국의 대통령을 부를 때 대부분 ‘Mr. Trump'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의미는 ’(백성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우두머리‘라는 의미이다. ’President‘가 직책·역할을 보여주는 뜻인 것과 달리, ’대통령‘이라는 말은 신분·지위를 나타낸다. ‘대통령’이라는 말 자체가 가진 권위주의적 성격이 대통령의 흔적 하나하나를 퇴색시켰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옆집 아저씨를 부를 때도 쓰는 ‘Mr.’ 라는 호칭을 붙이는 이에게는 권력의 냄새가 덜 느껴지지만, ○대통령 이라는 말에는 무언가 권위주의적인 간극이 느껴진다. 그래서 ‘대통령’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대통령’을 대체할 말로 순 우리말인 ‘가람’을 추천하고 싶다. ‘가람’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흘러가는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단임제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당선된 대통령들은 모두 5년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이 5년간 남긴 흔적은 이후 몇 십년간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오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는 당시 금융거래의 틀을 전면 바꾼 개혁이었으며, 현재 우리의 모든 금융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여 이명박 대통령까지 이어진 '한미 FTA'는 당시 우리나라 내수 및 외수시장에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이 때 비준된 협정은 현재까지 우리나라가 미국에 수출의존도가 가장 높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현 정권인 박근혜 대통령의 정강·정책 또한, 그의 임기 후에도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신의 업적이 5년에 그치는 것임이 아닌, 계속 되는 것임을 인지할 때, 그들은 책임감 있는 정치를 할 수 있다. 또한 국민들도 그들을 한번 잘 못 뽑는 것이 혹은 잘 뽑는 것이 앞으로 우리 삶의 몇 십, 몇 백년을 바꿀 수 있음을 인지해야 정치의 질을 높일 수 있다. 현대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로 매번 언급되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들은 선거기간에 표를 확보하기 위해 ‘선심성 공약’을 내건다. 하루 동안 진행되는 선거에서 표를 얻어 당선되면, 4년에서 5년은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그 공약이 몇 십년이후 우리의 삶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할 지 따져 본다면, 그들도 선심성 공약을 내세워 잠깐 사탕 물리려는 짓을 할 수 없다.
제3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1 _김형락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표는 익숙한 존재다. 동시에 대표는 논쟁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정치학자 토머스 페인과 에드먼드 버크는 대표의 권한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페인은 민주주의의 대표를 ‘대리인’으로 정의했다. 대리인으로서 대표는 시민들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 페인은 대표가 자신의 이익과 선호를 앞세우는 것을 경계했다. 버크는 ‘위임’으로서 대표 개념을 제시했다. 버크는 대표란 국민의 뜻과 이익을 대표하는 신탁자로서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 민주주의의 대표는 ‘대리인’보다는 ‘위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대표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위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표의 권력행사는 민주공화국의 사회계약인 헌법에 따라야 한다.
대통령은 민주공화국의 대표를 부르는 적절한 명칭이라고 볼 수 없다. 대통령을 한자어로 풀어보면 국민을 거느린다는 뜻이다. 대표보다는 명령자에 가깝다.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암묵적 위계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대통령은 군대를 지휘하고, 사정기관을 운영하는 정부의 관리자다. 하지만 이는 민주공화국 대표의 일부 권한일 뿐이다. 대통령은 정부의 최고 의사결정자이며, 헌법을 수호할 의무를 지니는 국가의 책임자다. 대통령이라는 명칭에는 대표의 책임이 담겨있지 않다. 대통령은 ‘신탁’으로서 대표 개념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신탁관계에서 시민들은 대표에게 정치적 문제에 대한 모든 책임과 관리를 맡긴다. 상하관계를 전제한 개념이다. 이는 페인과 버크의 대표 논쟁이 벌어지기 전에 존재한 전근대적 대표관이다.
민주공화국 최고지도자를 부르는 용어는 ‘위민원(爲民員)’이 돼야 한다. 시민을 위함이라는 ‘위민’은 민주주의의 지향점과 공화국의 가치를 담고 있는 말이다. 링컨은 민주주의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라고 정의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권력은 인민의 소유이고, 인민에 의해 행사된다는 점을 설명한 연설이다. 권력의 정당성은 선거를 통해 확립된다는 말과 같다. 링컨이 세 번째로 제시한 인민을 위한 통치는 당선 이후 대표자가 실현해야 할 가치다. 대표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 시민들의 행복을 고려해야 한다는 소리다. 민주공화국의 대표는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공화주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리다. 헌법은 시민의 기본권 보장을 국가의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 위민원은 다수 국민의 뜻을 실현하면서도,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는 시민을 위한 지도자의 자세를 뜻하는 말이다.
제3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2 _ 이슬아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표현한다. 특정한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천국(天國)’이라는 단어가 우리들로 하여금 천사들이 나팔 부는, 하늘나라 어딘가를 상상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대상을 어떤 말로 부르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 체계와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대통령(大統領)이라는 단어도 그 예시 중 하나다. 제왕적 위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오늘날 대통령이 가지는 이미지가 이러한 걸 보면 말이다.
‘크게(大) 거느리고(統) 다스린다(領)’ 대통령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자를 칭하기엔 지나치게 위계적이고 권위적이다. 거느린다거나 다스린다는 말은 절대왕정 시기의 왕에게나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어 자체의 뜻과 실제 쓰임새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대의제 하에서 그저 국민을 대표하는 이에게 대통령이라는 수직적 호칭은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란 단어 안에서 ‘대신(代身)하다’ 혹은 ‘대리(代理)하다’와 같은 의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민주주의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간접 민주주의 즉 대의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해서 대통령이 권력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껏 대통령이라는 호칭은 그 자체로 막강한 권력을 담보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다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마저 훼손했고, 군사 정권 시기의 대통령들은 조국근대화 및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권력을 사유화했다. 이렇듯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들의 행적에서 ‘거느리고 다스린다’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올바른 명칭 쓰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 했다. 이른바 ‘정명(正名)론’이다. 명칭이 올바르지 않으면 사회 질서가 올바로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을 필두로 한 행정부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분석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대통령’이라는 호칭이 정명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바꾸는 것이 대통령제의 모든 폐단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은 권력의 주인이 아닌 자에게 그러한 당위를 부여하는 호칭을 붙이는 것부터 막자는 이야기다. 이것이 대통령이라는 이름 안에 깊게 뿌리 내린 제왕적 권력 의식을 지워가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제3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3_ 방준원
대부분의 전쟁은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승자는 압도적 우위에서 패자를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것은 전쟁에 대한 명명에서 잘 나타난다. 승자의 전쟁명명권은 절대적이다. ‘포에니 전쟁’이 대표적이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가 그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명했다. 카르타고 섬에 거주하는 페니키아(로마인들은 페니키아를 포에니로 부름)인들이 로마를 도발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였다. 여기서 핵심은 갑을관계에서 정립된 이름의 성격이다. 사실 따져보면 그 당시에 지중해 패권은 카르타고에 있었다. 도발자는 로마였다는 의미다.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 때문에 전쟁의 진실이 굴절된 것이다.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權力)이 민중(民衆)에 승전(勝戰)하면서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민중은 통치받아야 한다’라는 타성에 젖은 ‘권력’이 로마였다면, 본디 국가의 주인이었던 ‘민중’은 카르타고였다. 거느릴 통(統)과 거느릴 영(領)이란 한자가 이를 방증한다. 거느리고 통할하는 의미가 전부다. 앞에 붙은 대(大)자는 일체를 잘 통할하라는 힘만 더해준다. (행)정부를 잘 거느리고 통할하라는 의미다. 물론, 정부를 잘 거느리고 통할해야 민중의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2차적 연산 후에야 가능하다. 이름 자체만 두고 봤을 때, 대통령의 제1 목표는 거느리고 통할하는 것이다. (행)정부가 국민보다 우선이다. ‘민중을 위해서’라는 의미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만 도출할 수 있다. 인간 개인은 누구나 제1 목표에 최선을 다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권위주의’ ‘제왕적’이란 단어는 대통령 앞에 필수불가결한 수식어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4회 백일장 논술 논제
다음 4개의 단어를 활용해 논술을 작성하시오. (1500자 안팎)
사실, 진실, 팩트폭력, 탈진실(post-truth)
제4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작_ 반수현
19세기 랑케의 실증주의 사학은 역사를 개별적인 사실들의 기록으로 보고 철저히 고증한 사료만 집성하면 객관적인 역사가 도출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아가 E.H.카는 사실은 역사가의 주관적 채택에 의해서 역사서술에 등장하며 이때 역사가의 진정한 관심은 일련의 사실들에서 교훈, 즉 역사적 진실을 이끌어내는 일반화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역사학의 이론은 학문적 진보를 이룩했으나 오늘날 역사학계 현실에선 역사왜곡과 허위사실의 유포가 일부 국가들에 의해 자국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행되고 있다. 이 문제에는 철저한 사료 검증을 통해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학계의 자정노력과 대중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의식이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기록으로 보존될 사건을 선별해내 현대 역사의 초고를 기록하는 저널리즘은 역사 분야와 유사성을 지닌다. 따라서 역사학계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은 최근 저널리즘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
탈진실 시대에 공정성이 결여된 가짜뉴스의 범람은 저널리즘이 공정성의 효과적 구현을 위해 ‘사실’보도에서 ‘진실’보도로 진화해온 과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공정성이란 사건과 관련하여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고 형평성을 유지하는 보도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저널리즘은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 실제 일어난 일인지 확인하고 그것과 관련해 다양한 관점을 균형 있게 취급하여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보도의 사실성을 강조했다. 이후 보도는 단편적인 사실과 기계적 균형성에만 연연하기보다는 사건에 대한 전체적 맥락, 즉 사건을 둘러싼 진실을 수용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저널리스트의 해석인 진실성도 강조하기 시작했다. 저널리즘의 목표는 수용자들로 하여금 확인된 사실에 대하여 부분이 아니라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므로 보도의 추세가 사건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이처럼 저널리즘에서 사실과 사실에 맥락을 더한 진실이 공정성을 담보해왔지만 최근 편향된 가짜뉴스가 난무하면서 이것들은 이전처럼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저널리즘에서는 공정성을 수호하기 위해 사실과 진실의 영역을 되찾고 탈진실의 확산을 막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뉴스 생산자와 이용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기성 언론의 뉴스 생산자들은 다시금 정밀한 사실 검증을 통해 뉴스를 생산하고 여기에 진실한 맥락을 덧붙여 공정하고 믿을 만한 뉴스를 대중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뉴스 이용자들은 가짜뉴스를 골라낼 수 있는 비판적 안목과 이를 통해 디지털 콘텐츠를 정확히 이해하고 쓸 줄 아는 능력인 미디어 리터러시를 향상시켜야 한다. ‘팩트폭력’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사실과 진실은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 상대의 정곡을 찌르는 힘을 갖고 있다. 이 신조어의 유행은 거짓된 정보가 무차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지금 정확한 사실과 올바른 진실에 대한 미디어 이용자들의 욕구가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탈진실의 시대에 팩트폭력의 의미는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해지고 있다.
제4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1_ 전채은
스마트폰이 필요한 당신은 여러 종류의 스마트폰 중 기종 A를 선택한다. 구매이후,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스마트폰 구매후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싶을 거다. 실제 선택과 추가적 정보가 엇갈리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피하기 위해서다. 스마트폰 A에 대한 호평을 찾아보는 한편 A에 대한 혹평이나 타 기종에 우호적인 구매후기는 부정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인지부조화를 피하기 위한 ‘확증편향’적 모습이다. 이 두 가지 심리가 탈진실 현상에도 그대로 작용한다. 탈진실은 예기치 못한, 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것의 뿌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리다.
탈진실 현상은 이런 인간의 비합리적인 심리가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은 경우다. 기술의 발달과 뉴스 소비형태의 변화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가짜뉴스와 가짜뉴스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 SNS라는 새로운 뉴스 유통 경로와 SNS의 큐레이션 서비스가 이 가짜뉴스를 정확한 타겟에게 빠르게 유포한다. 몇 사람의 인지부조화 및 확증편향이 가짜뉴스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뉴스가 다수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구조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뉴스의 진위여부를 판별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해진다. 무엇도 믿지 않거나, 아무거나 믿어버린다. 진실이 권위를 잃은 상황. 반(反)진실도, 역(逆)진실도 아닌 탈(脫)진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상황이 저널리즘 자체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조사 결과 “진짜 뉴스를 볼 때도 가짜로 의심한다”는 사람이 약 76%였다. 가짜뉴스와 진짜뉴스를 섞어 보여줬을 때 이를 정확히 분류한 실험자는 1.8%밖에 되지 않았다. 신뢰라는 저널리즘의 핵심 가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탈진실 현상 해체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이라는 인간의 심리에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개별적 심리를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발전시킨 가짜뉴스의 근절이 지금의 탈진실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다.
초점은 ‘가짜뉴스 판별’이다. 가짜뉴스를 비롯한 탈진실 현상이 기성언론이 잘못으로 발생한 건 아니다. 가짜뉴스는 기성 저널리즘 외부에서 생산된다. 각 언론사 내부 뉴스의 팩트체크 기능을 강화하기보다는 언론사 외부에서 유통되는 각종 뉴스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준은 두 가지다. 팩트 왜곡 여부가 물론 중요하겠고, 그 이전에 사실과 팩트를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팩트(fact)라는 단어의 뜻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두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적 의미는 다르다. 사실이 실제로 발생했던 개별 사건 전반, 즉 ‘역사’와 가까운 의미로 사용된다면 팩트는 진실 추구의 질료로써 활용될 수 있는 핵심적 사실만을 뜻한다. 팩트가 사실에 포함되는 관계다. 이 구분이 끝나야 각종 기록과의 비교를 통한 팩트체킹이 유의미해진다.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더라도 지엽적인 사실이라 팩트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진실은 왜곡되기 때문이다.
팩트폭력. 팩트로 정곡을 찔러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그 자체로 무기가 될 만큼 팩트의 위상이 높아졌음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앞에 붙은 ‘폭력’이라는 단어는 이 말이 상대방의 믿음이 기댄 탈진실에 팩트로 균열을 내는 데서 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있음을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탈진실이 만연함을 드러내는 표현인 것이다. 팩트가 폭력이 아닌 상식인 세상이 됐을 때 저널리즘은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가짜뉴스 솎아내기를 통해 쾌적한 뉴스 유통환경을 조성하는 게 그 출발이다.
제4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2_ 배양진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그와 정 반대로 행동한다. 스스로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인지부조화를 겪는 대신,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인다. 이 때 그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뒤로 밀려난다. 최근 범람하고 있는 가짜 뉴스가 파고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가짜 뉴스는 특정한 입장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거짓 내용을 담아 그들의 클릭을 유도한다. 정보가 자신의 입장에 부합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 진위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의심 없이 정보를 받아들인다. 이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드는 심리적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용자의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탈진실의 시대에 언론사가 수행해야 할 역할로 가장 중요하게 제시되는 것이 바로 ‘팩트체크’ 기능이다. 언론사가 주체가 되어 사안에 대한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정보 수용자들의 합리적인 판단을 돕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믿는 이유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굳이 신뢰성 없는 출처의 편향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심리적 비용이 가장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사가 팩트체크를 통해 그들의 잘못된 믿음에 가할 ‘팩트폭력’은 정보 수용에 드는 비용을 오히려 더욱 증대한다. 그러한 비용을 기꺼이 부담하려는 수용자에게는 팩트체크가 의미 있는 정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많은 수용자들에게는 그저 입바른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리 언론사가 정확한 사실을 제공하더라도 이미 특정 대선후보가 종북이라고 믿는 이들은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누군가의 내밀한 속마음을 듣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약점을 드러내는 상대방을 보면 내 약점을 방어하려는 심리도 약해지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심리적 비용을 낮추려면 언론사가 먼저 자신의 편향성을 먼저 드러내어 보임으로써 유권자가 스스로의 편향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선 기간에 언론사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공개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신문이 야당을 지지한다고 밝히면 그 신문을 읽는 유권자는 그 정보가 꼭 객관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 신문의 논조에 동의한다면, 그는 그 신문이 실제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야당 지지자이기 때문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언론이 먼저 스스로의 편향을 드러냈기 때문에 야당 지지자로서 자신의 편향성을 인식하는 데 드는 비용이 줄어든 셈이다.
민주화 이후 각 언론은 비록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강한 당파성을 드러내 왔다. 그러다보니 언론사가 특정 정치집단에 우호적인 내용을 보도하면서도 중립성의 뒤에 숨어 비난을 피해갔다. 이는 언론사의 신뢰를 오히려 떨어뜨림으로써 출처가 불분명한 가짜 뉴스에 사람들이 빠져들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금껏 발생해 온 표면적 중립의 부작용은 언론사가 스스로의 편향성을 드러내지 않은 탓이 크다. 진정성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언론사 지지후보 공개를 고려할 때다.
제4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3_ 차소현
탈진실(Post-truth)은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이전에는 로널드 레이건이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연이은 오일쇼크로 물가 상승과 경기침체를 견디던 미국인들 앞에 영웅처럼 등장했다. 레이건 정부는 대규모 감세와 재정지출로 미국에 유례 없는 경기 호황을 가져왔고, 레이건의 인기는 수직상승했다. 이후 로널드 레이건이 테러지정국인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팔아 인질을 협상하고, 무기 판매 대금을 친미 정부 수립을 위해 불법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했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차기 대통령이 되었다.
사실 탈진실(Post-truth)은 죄가 없다. 탈진실(Post-truth)은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 현상이다. 인간의 인지 체계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학습을 통해 형성된 신념과 가치관을 통해 외부 정보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여, 기존 인지 체계와 일치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실'이 모두에게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다. 그래서 때론 '팩트'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사실은 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적 성향이 바뀔 때 받는 스트레스 지수가 배우자가 사망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 지수와 거의 흡사하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 바 있다.
문제는 탈진실(Post-truth) 현상이 극단화되어 거짓된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신념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거짓된 정보라도 수용하고, 그에 의해 사회적 혼란과 분열이 발생하는 게 진짜 문제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로 볼 수 없다. 문제는 그들이 거짓된 정보를 퍼트리며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평가의 긍정과 부정 여부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의 영역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독재폭력정치의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는 용납될 수 없다.
탈진실(Post-truth)의 또 다른 의미는 '진실이 밝혀진 후'이다. 이는 진실이 밝혀진 후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진실 여부를 결정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진실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개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언론사의 팩트체크도 수용자가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갖추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물론 고통스럽다. 그러나 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더 큰 사회적 손실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팩트는 '폭력'이 아닌 '경종'이다.
5회 백일장 논술 논제
‘자신이 청와대 민정수석이라면 고위공직자 인선 배제 기준인 5대 원칙(탈세•부동산투기•위장전입•논문표절•병역면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5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작_문상혁
5대 원칙의 탄력적 적용은 도덕주의를 경계해야 하나, 도덕성까지 지나쳐선 안 된다. 공직자의 전문성에 도덕적 흠결이 있다면 정책 추진력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사 검증의 ‘레드라인’은 도덕성이 공직자의 전문성과 관련될 때를 기준으로 설정해야 한다.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비교육적 행보를 걸어왔고, 국방부 장관이 방산 업체에 도움을 줬다면 어떨까. 해당 분야의 개혁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아 정책을 도입하기 어렵다. 이 기준으로 보면 이른바 ‘김송조(김상곤·조대엽·송영무)’트리오는 재고돼야 한다. 세 사람 모두 전문 분야에서 도덕성 문제가 발견됐다.
여당은 우리 사회에 티 하나 없는 ‘도덕적’인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야당은 민정수석의 인사검증이 부실하다고 비판한다. 둘 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결국 도덕 원칙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현실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다. 5대 원칙도 최소한의 기준을 정하되, 그 안에서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유연한 인사 검증 기준’은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인사가 그렇다. 사람 뽑는 일은 무 자르는 일과 다르다. 민정수석이 칼이 아닌 저울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공직자의 전문성과 도덕성 사이에서 ‘운영의 묘’를 발휘할 수 있는 저울 말이다.
제5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1_ 조현찬
100년 전 범죄학은 범죄의 원인으로 개인의 성향과 심리나 개인이 처한 사회경제적 요인을 꼽았다.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말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본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관점이 많이 수정되었다. ‘범죄를 유발시키는 환경’이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간, 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나 더러운 장소 등이 범죄를 유발한다고 보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 한 예다. 더 이상 범죄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제5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2_ 김나윤
헌법에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켜야할 6대 의무 조항이 있다. 헌법 제39조1항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38조에는 납세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제31조, 32조, 23조, 35조는 각각 교육, 근로, 재산권행사, 환경보전의 의무를 명문화하고 있다. 정치공동체의 최고 규범인 헌법에 국민의 의무가 규정되어 있는 것은 지휘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사회적 약속이자 가치규범임을 뜻한다. 국민이 6대 의무를 위반하는 것은 엄연히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인 셈이다.
고위공직자 후보자가 헌법이 규정한 국방과 세금의 의무를 위반한 것과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위장전입을 위반한 것은 비판의 무게가 다르다. 얼마 전 임명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후보자 시절 논문 표절과 부동산 다운계약서 논란, 위장전입 등 각종 의혹이 따라다녔음에도 상대적으로 임명 찬성 여론이 높았다. 도덕성에 흠결은 있으나 국정운영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국민의 판단이 읽히는 대목이다. 이와 달리 97년 당시 이회창 대선 후보자는 아들의 병역 문제로 결국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고 박근혜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와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였던 김용준, 한만수 후보자도 각각 아들 병역문제와 탈세 의혹이 제기되 자진 사퇴했다. 고위공직자 후보자가 국민의 의무와 혹독한 대가를 맞바꾼 대표적 사례다.
문제는 고위공직자 후보자가 여러 흠결 중 병역면탈과 탈세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국민이 느끼는 박탈감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갤럽의 6월 첫째 주 조사에 따르면,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복수 응답 가능)’라는 질문에 응답자 중 71%가 압도적으로 ‘탈세’라고 답했다. 이어 병역과 부동산 투기, 논물표절이 각각 42%, 38%, 16%, 13%를 차지했다. 이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상적인 병역 생활과 세금 납부가 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최소한 지켜야할 도덕적 레드라인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뜻한다. 고위공직자가 이 레드라인을 넘는다는 것은 사회통합과 국민의 평등권 실현이라는 공직자의 제1임무를 부정하는 꼴이다.
따라서 정부의 고위공직자 후보의 검증 기준은 헌법상 규정된 국민의 의무 조항을 중심으로 재정립 되어야 한다. ‘고위공직자 5대 배제 원칙’ 속의 원칙들은 애초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원칙들이 묶여있었던 셈이다. 청와대 인사수석은 병역과 세금 문제뿐만 아니라 후보자가 공공복리에 반하는 재산권 행사를 한 적은 없는지 집중 검토해야 한다. 만약 기업인 출신의 공직자 후보자라면 기업 경영 과정에서 환경 파괴를 야기하는 사업을 추진한 적이 있는지가 조사되어야 한다. 해당 후보자가 국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지만 ‘고위공직자 후보자’라는 출발선상에 설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후보자의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논물 표절, 대기업의 비위 변론 등 논란 사항은 청와대 인사 담당이 투명하게 공개하되, 판단은 국민의 몫으로 남겨두면 되는 것이다.
제5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3_ 강예슬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의 저자 조성주는 “‘열정’은 사회 변화의 중요한 동력이지만 무한정 지속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박근혜게이트에 분노했던 이들이 대통령의 탄핵안이 결정되자, 이내 분노를 가라앉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걸 보면 ‘열정의 유한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열정이 자취를 감춘 현재 ‘비정상의 정상화’를 주도할 이는 국정운영의 주체, 사람이다. 고위공직자 인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박근혜게이트는 인사실패로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을 위하는 고위공직자가 있었다면, 정당성 없는 사인(私人)의 전횡은 훨씬 더 빨리 밝혀졌을 테다. 제2의 국정농단을 막기 위해 부역자로 전락할지 모르는 이들을 거를 인선기준이 필요하다. 때문에 인선 배제 기준 5대 원칙은 엄격히 적용돼야 한다.
5대 행위는 자기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논문표절은 누군가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고, 부동산투기는 진짜 주택이 필요한 이들의 주택구입을 막는다. ‘자식 가진 부모로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위장전입은 힘없는 부모와 그들의 자녀에게 박탈감을 준다. 헌법에도 규정돼있는 병역과 납세의 의무는 공동체에서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으로, 이를 지지 않으면 공동체에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5대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자, 즉 자기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에 눈감을 수 있는 자는 고위공직자가 돼선 안 된다. 자리보존을 위해 블랙리스트에 눈감은 고위공직자들로 정부 비판적 예술인들이 생존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걸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고위공직자가 될 사람이라면 5대 인사 원칙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욱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국정농단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세세한 기준은 필요하다. 5대 원칙을 서툴게 적용할 경우 무고한 희생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살인에도 정상을 참작해 다른 형을 선고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5대 기준에 해당되는 행위가 언제 일어났는지, 일어났던 당시에도 도덕적 지탄을 받을 행위였는지 ‘통시적’으로 해석하는 게 필요하다. 논문 표절 의혹이 대표적이다. 과거 표절의 기준과 현재 표절의 기준은 엄연히 다르다. 자기복제 역시 표절이라는 인식이 없었던 시대에 했던 행위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는 건 부당하다. 위장전입 논란도 비슷한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 거주지 이전 시 14일 이내 신고를 강제하는 주민등록법은 주민의 감시를 원활히 하고자 독재정권 시절 만들어진 법으로 제도적 허점이 많다. 해외 체류 중이었음에도 우편물을 받기 위해 실거주지를 국내에 둔 것은 위법일지언정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인선에서도 정상참작은 이뤄져야 한다.
민정수석은 5대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되 정상참작의 논리를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그게 민정수석의 역할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선 연설가라는 뜻의 ‘레토르(Rhetor)’가 정치가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당시나 지금이나 말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기 때문일 테다. 올바른 말은 신뢰를 쌓는 시작이다. 인선 과정에서 민정수석의 ‘혀’가 중요한 이유다. 내가 민정수석이라면 ‘5대원칙을 지킨다. 혹은 지키지 못한다.’와 같이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날 것이다. 모든 사안이 그렇듯 인사도 칼로 무 자르듯 판결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정상참작 사유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그리 한다면 인사는 물론 만사 모두 평탄하게 흘러갈 거라 믿는다.
6회 논술 논제
‘적폐청산 대 정치보복’과 같이 정치권이나 사회세력들이 프레임 전쟁을 벌일 때 언론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현재 언론의 대응이 적절한지를 글 내용에 포함하라. (1500자 안팎)
제6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작_ 김준기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소수의견이 보호받아야 할 이유를 세분화 해 논증했다. 우선, 다수 의견이 틀리고 소수의견이 진실에 가까웠던 사례는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하다. 우주의 중심을 둘러싼 갈등부터 인간의 진화에 관한 논쟁까지, 때론 낭설로 치부되던 의견이 다수가 받아들이는 견해로 변모하곤 했다. 소수의견이 틀리고 다수 의견이 맞은 경우에도 소수의견엔 효용이 있다. 소수 의견은 부분적으로 통찰이 담겨 있어 이를 수용한 다수 의견은 군데군데 뚫린 결함을 보완한다. 이렇듯 밀은 다양한 의견의 공명을 사회가 발전하는 척도로 보았다. 언론을 설명할 때 흔히 따라붙는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란 측면에서 의견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민주 사회의 건강함은 다양한 프레임이 경쟁하며 살아남는 토대에 달려있다.
한국 언론은 이 지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다원성이 실종된 프레임 환경 탓이다. 한국의 언론은 정치권이 거대 담론을 제시하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방향으로만 논쟁이 매몰된다. 무상 복지 논란이 대표적이다. 보수 언론은 재원을 이유로 도입을 반대하고, 진보 언론은 보편적 권리란 제도의 취지에 보다 집중했다. 하지만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가부만을 다투니 갈등 비용만큼의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적페청산 대 정치보복’이란 프레임도 다르지 않다. 보복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쟁점화돼 모든 논의를 덮어버리는 양상이다. 서울대 최인호 교수는 저서 <프레임>에서 개인은 자신 가진 프레임의 크기만큼 세상을 조망한다 말했다. 즉 프레임은 언어를 규정하고 생각으로 머물게 하는 힘인 것이다. 국민의 말과 생각이 한 곳에만 머물러 있을수록 더 나은 담론을 위한 논쟁이 자취를 감추는 이유다.
프레임을 깨는 프레임을 제시해야 언론의 의제 설정 기능이 빛을 발할 수 있다. 사건을 사회가 고민해야 할 의제로 만드는 것이 언론이 가진 힘이기에 언론의 프레임이 다양해 질수록 의제의 다원성은 높아진다. 가령 청산이란 프레임은 인물과 체제를 가리지 않고 일거에 소거한다는 의미가 강해 보복과 연관된다. 또한 그것에 따른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그렇기에 ‘국민 주권 회복을 위한 개혁’, ‘자치의 정상화’란 새로운 프레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난 정권 교체의 시발점이 권력의 사유화에 있음을 기억할 때 구조개혁과 부역자 처벌은 국민의 주권을 정상화하는 길이다. 대의민주주의 정상화, 국민 자치의 실현과 같은 사회에 끼칠 효용을 중심으로 프레임을 짜면 개혁은 보복이 아닌 회복이 된다. 이렇듯 프레임의 질과 양에 비례해 시민은 사실의 조각을 짜맞추며 보다 나은 현실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다.
고차화된 프레임에서 시선을 돌려 언론은 무엇이 국민을 위하는 길인지 자문해야 한다. 이는 언론의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자 프레임이 다양해지기 위한 시작점이다. 과거 부시 행정부는 감세를 대신해 세금 구제(tax relief)란 프레임을 들고 나왔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세금이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니 감세로 구제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보수 언론뿐 아니라 진보 언론까지 세금 구제란 표현을 가감 없이 썼고, 민주당은 중산층을 위한 세금 구제안을 마련하며 프레임에 종속됐다. 세금 구제가 재정 적자로 돌아온 건 그 뒤의 일이다. 세금 구제란 프레임에 맞서 '재정 파탄 감세' 등과 같이 다양한 프레임으로 경쟁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지 모른다. 이렇듯 지배적인 프레임을 두고 그것을 깨는 언론의 시도가 잦아져야 시민은 현실의 다양한 결을 포착해낼 수 있다. 프레임 안이 아닌 프레임 밖의 보다 다양한 논의를 위한 언론의 노력이 필요하다.
제6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2_ 김서이
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 일명 ‘안아키’가 화두다. 아토피로 괴로워하는 아이에게 일체의 약을 바르지 말기를 권한다. 논란이 커지자 대한한의학회는 안아키 카페 정보들이 의학적 근거가 없다는 공식 성명을 냈다. ‘정보 비대칭성’의 폐해다. 안아키 카페는 잘못된 정보에 대한 책임소재를 묻기 비교적 수월한 구조다. 피해 사례가 극단적이고, 조직의 경계선이 비교적 명확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어떨까.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으로 나뉜 프레임 전쟁의 중심에도 ‘정보 비대칭성’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치는 그 경계선이 명확치 않고, 피해 역시 서서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책임소재를 묻기 어려운 구조다. 언론이 나서서 ‘정보 비대칭성’을 적극적으로 해소해야 하는 이유다.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대의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민의를 잘 반영하기 위해 뽑아놓은 대표자들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유화한다. 개인의 잇속을 위해 잘못된 정보를 미디어에 유포하기도 하고 유리한 정보만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적폐’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범위 설정 등의 생산적인 대화 없이 상대 정당을 맹비난하는 것에만 치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 정치 진영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보와 주장들을 접한 국민들은 합리적인 사고과정을 거친 다해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언어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폐단청산’이 또다시 ‘정치싸움’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정치권의 ‘정보 비대칭성’에 언론이 편승하고 있다. 정치권이 배포한 보도 자료와 정치인의 말에만 초점을 맞춘 정보가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다.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기보다, ‘받아쓰기’ 형식의 보도행태가 이뤄진다. 정치인들의 주장과 상대정당의 비난 언어를 그대로 옮길 뿐이다. 그 안에 생산적인 논의는 없다. 이는 ‘대중정치’가 양산되는데 가속도를 붙인다.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진영에 유리한 정보만을 국민과 공유한 대표자들은 국민에게 적폐에 대한 ‘명목상의’ 판단권을 내어준다. 진영 논리에 기반한 여론에 따라 적폐청산의 정당성 여부가 판가름 난다. 대표자들은 서로가 더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보싸움을 한다. 협치는 불가능해 진다. 대중을 선동하는 포퓰리즘은 여기서 발생한다.
언론이 적극적인 의제설정을 통해 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해야 한다. 당장에 원전을 둘러싸고도 정보 공유에 정치권력 개입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정치권에서 정보 공유에 많은 제약이 있어왔다는 방증이다. 언론이 ‘적폐’의 명확한 기준과 범위를 정하는 생산성있는 대화를 유도해야 한다. 흥미 위주의 자극성 정치정보들을 강조하면서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비정치적인 차원으로 분산시키는 물길을 내선 안된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초기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못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 지속적인 추적보도가 이어지고 이에대한 여론이 환기되면서 닉슨 대통령은 결국 하야했다. 언론의 ‘고발의무’는 집요하고 끈질긴 정보 공유를 바탕으로 한 의제설정을 통해 완성된다.
개념의 경계가 모호한 의제일수록 권력자들에게 이용하기 쉬운 정치수단이 된다.‘적폐’의 기준이 무엇인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치 않은 시점에 ‘적폐청산’이란 용어는 진영 싸움만을 양산할 뿐이다. ‘적폐청산’이라는 글자 그대로 묵은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선 적폐의 기준에 대한 객관성이 확보돼야 한다. 정치인의 ‘말’이 아닌, 객관적인 ‘정보’가 보다 투명하게 공유돼야 할 때다. 적폐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정보 공유의 장(場)을 마련해주는 것. 권력의 감시견인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제6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3_ 강서영
프레이밍은 본디 언론의 ‘고유한’ 역할이다. ‘고소득자 증세’라는 하나의 사안도 언론에 따라 ‘부자증세’ 혹은 ‘공평과세’라는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다. 언론의 역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흔히 언론을 세상을 취사선택해 보여주는 ‘창틀’로 비유한다. 똑같은 사안도 언론이 어떤 부분을 조명하고 소외시키느냐에 따라 사안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언론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시민들이 사안을 생각하는 ‘틀’이 바뀐다. 프레이밍은 언론의 특징적인 기능이자 책무다.
그러나 현재 언론의 프레이밍 기능은 고장 났다.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으로 대두되는 정치권의 프레임 전쟁을 보도하는 행태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언론이 재해석한 메시지가 아니라 정치권의 프레이밍을 그대로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은 두 진영이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략적 단어다. 정치권이 언론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수사인 것이다. 적폐청산인지 정치보복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언론이 한정된 정당 관계자와 관련 전문가만을 인터뷰하고 보도하는 건 정치권이 의도한 프레임을 재생산한다. 선정적인 두 수사가 대치하는 동안 갈등은 격화된다. 이재경 교수가 한국 언론의 보도 형태를 ‘갈등 유발형 저널리즘’이라고 통찰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언론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언론은 정치권의 프레임을 앵무새처럼 재생산해왔던 기존 보도 관행을 넘어서야 한다. 언론이 직접 대안을 ‘프레이밍’ 하는 새로운 보도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왜 이러한 프레임 전쟁이 발생했는지, 프레임 전쟁을 멈추고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지를 고심해야 하는 것이다. 덴마크 저널리스트 울렉이 주장한 ‘솔루션 저널리즘’은 단순한 사실 보도를 넘어 갈등의 맥락과 해결책의 제시를 지향하는 실제 사례로써 우리나라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시사한다.
진영에 따라 프레임이 극명히 갈렸던 ‘탈원전 이슈’를 데이터저널리즘을 통해 보도한 뉴스타파의 사례는 이러한 솔루션 저널리즘과 맥을 같이 한다. 해당 보도는 우리나라 지진의 역사를 설명하고 원전 주변의 지진 빈도 데이터를 정확하게 제시했다. 선정적인 정치적 수사 대신 불편부당성을 내포한 맥락과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원전 정책의 대안을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이 같은 보도 행태가 정착돼 다양한 성향의 언론사에서 다양한 배경의 솔루션 저널리즘이 제시돼야 한다. ‘대안’이 오가는 공론장이 형성돼야 하는 것이다. 갈등 자체가 아니라 ‘해결’에 방점이 찍힐 때 언론은 ‘갈등 고착’이라는 고질병을 극복하고 사회 통합에 기여할 수 있다.
제 4부 권력이라는 명칭처럼, 언론은 입법부의 프레임이 아닌 언론만의 독립적인 프레이밍을 제시해야 한다. ‘정권의 나팔수’라는 시민들의 원색적 비난은 정치 프레임을 확대 재생산해왔던 언론의 기존 관행을 절실히 꼬집는다. 사안의 원인과 본질을 흐리고 정파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정치권의 프레임 전쟁에서 언론은 근본적인 해결책과 대안을 발굴해 중심을 잡아야 한다. 이를 통해 언론은 사회 통합이라는 공익적 가치에
7회 논술 논제
아래 제시하는 <르몽드>의 칼럼과 오프라 윈프리 연설 동영상을 보고 칼럼과 동영상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하시오. (1500자 안팎)
- 칼럼은 프랑스어 원문으로 되어 있는데 영어로 번역해놓은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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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라 윈프리 연설 동영상과 스크립트를 보려면 아래 보기를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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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작_ 김서이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할 수 없다’. 노예제 폐지 논란 당시 반대 측 주장이었다. 당시 노예의 개념은 가축이나 물건과 마찬가지로 교환의 매개였다. 개인이 노력해 시장에서 사들여 가지게 된 법적 사유재산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결국 노예는 해방됐다. 인간의 평등권이 사유재산권 이전에 추구돼야 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 실현’이라는 대명제 차원에서 말이다. 미투 캠페인 역시 이와 같은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미투 캠페인은 성범죄 범주 차원의 논의에 국한되지 않는다. 캠페인의 방점은 궁극적으로 ‘평등권 실현’에 찍힌다. 미투 캠페인은 성범죄 그 자체를 고발하기 위함이 아닌, 성적 치욕을 느끼고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고발이며 저항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가사 노동자와 농민 등 평범한 이들의 삶을 언급하고, 미투 캠페인이 문화,지리,인종 또는 직장을 초월한 논의라고 말한 이유다. 많은 경우, 성범죄 문제를 단발적인 사건으로 인식하고, 성평등 논의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성평등 논의의 불씨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몇 차례 점화될 뿐,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들의 삶까지 스며들지 못하는 이유다. 드뇌브 역시 미투 캠페인의 본질을 평등권 실현이 아닌 성범죄 고발 차원으로 봤다. "성폭력은 범죄지만 여성을 유혹하는 건 범죄가 아니다“라는 드뇌브의 핵심주장은 여기에 기원한다. ‘성범죄’와 ‘유혹’의 구분이라는 한 단계 낮은 층위의 논의로 치환한 것이다. 드뇌브의 논리는 이 지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유혹할 자유라는 성적 표현의 자유가 원활하게 보장받기 위해서는 성평등이 먼저 실현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건강하게 작동한다.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주장하는 권리의 자유는 일부 계층의 특권이 될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 작가 콜린이 “만약 드뇌브가 미모가 뛰어나지 않거나 부유한 여성이 아니라면, 성희롱에 대해 다른 의견을 냈을 것”이라 평한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대다수 일반인의 사정은 이와 다르다. 개인의 피해에 비교적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국에서조차 성희롱 피해자 여성 10명 중 6명이 성희롱을 신고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해고 등 신고를 함으로써 입게 될 피해를 우려해서다. 호감표시로 둔갑한 성범죄에 불쾌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성평등 실현이 진정한 권리 간의 균형을 갖추기 위한 토대인 이유다.
성 불평등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 비로소 성평등 실현의 발판이 마련된다. 법제도의 변화만으로는 사회변혁을 이룩할 수 없다. 미투 캠페인은 우리 주변사회까지 성평등 문화가 스며들도록 하는 촉매제로 기능한다. 공간적 제약 없이 누구든 온라인으로 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는 시대다. 성평등 문제를 공유하지 못했던 이들이 캠페인으로 용기를 얻는다. 미국 언론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여성의 80%가 미투 캠페인으로 “앞으로 젠더 문제가 불공정하게 취급된다면 더 목소리를 낼 것 같다”고 말했다. 검열 장벽이 있는 중국에서조차 일반인들 중심으로 중국판 미투운동이 태동했다. 유명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성평등의 실현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치에 다가설 수 있다. 성별에 따른 부당한 압력 없이 동등하게 시민의 기본권을 누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의기 때문이다. 성 그 자체에 매몰되기보다 평등이라는 가치 구현에 힘써야 한다. 이를 통해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의 격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실현이라는 보다 깊이 있는 논의가 가능해진다. 피부색의 차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신체적 차이와 같이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고 인간 그 자체로서의 평등을 실현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노예해방 역시 사유재산권 이전에 존중돼야 할 평등권을 수면위로 끌어올려 민주주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를 기고문의 주장에 적용해 반문해보자. 민주사회라는 현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성적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고 있는가. 해답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제7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1_ 신혜연
독일 경제학자 발터 오이켄은 ‘질서자유주의’를 정립했다. 질서와 자유라는 모순된 말들을 한 단어로 녹였다. 고전주의 경제학을 거꾸로 뒤집는 혁명이었다. 예컨대 신호등은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이 아니다. 빨간 불에서 멈춰 서도록 약속한 덕분에 모든 차들이 사고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규제 안에서 더 자유롭다. 평등은 사회를 조율하는 신호등이다. 신호등 없이 ‘자유로운 운전’이 불가능하듯이, 평등 없는 자유도 불가능하다. 평등은 어떤 이도 다른 사람 위에 설 수 없다는 다짐이다. 한 계단 위에 서 있던 이를 아래로 내리고, 아래에 섰던 사람을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동반한다. 망가진 신호등을 고치는 일이다.
<르몽드> 칼럼 필진들은 망가진 신호등을 고집한다. ‘성적 자유’를 위해 성폭력 고발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자유를 오해하고 있다. 신호등이 ‘내가 원하는 때에 달리겠다’는 자유의지를 방해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방비 상태의 도로에서는 크고 빠른 차들만 자유를 누릴 뿐이다. 불평등한 사회의 자유란 강자의 자유다. 사회적 약자에게 선택권은 없다. 굶을 자유나 성적으로 착취당할 자유는 약자에게 주어진 현실일 뿐, 선택이 아니다.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인 성추행도 마찬가지다. <르몽드> 필진들에 따르면 남성은 ‘가벼운 성추행을 저지를 자유’가 있고, 여성은 이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자유’가 있다. 결과적으로 성폭력에 대한 저항은 자유에 대한 저항이 된다. 필진들이 말하는 성적 자유의 실체는, 사실상 성적 불평등이다.
불평등과자유는양립할수없다. 역사적으로 노예, 여성, 흑인 등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 이들은 한 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사회적 불평등의 굴레에 짓눌려 지냈다. 그럼에도 평등을 향한 외침은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오인돼 왔다. 강자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논리다. <르몽드> 필진들이 성폭력 고발 캠페인을 ‘전체주의’에 비유한 것과 같다. 차별을 증언하는 일은 이 같은 반동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레시 테일러와 로자 파크스라는 수십 년 전 인물들을 무대 위로 불러냈다. 억압을 증언하고, 차별에 저항한 이들이다. 이날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오프라 윈프리는 흑인 여성이고, 과거 성폭행을 당했다. 그가 오늘 누리는 자유는 평등에 빚졌다.
미투캠페인은자유에반대하는운동이아니다. 자유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일각에서는 불평등한 현실을 짚어내는 일이 오히려 피해자를 나약하게 만들고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일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일부 맞는 말이다. 불평등을 인지하기만 해서는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가 확대되지 않는다. 현실 인식을 변화의 동력으로 삼는 게 남겨진 과제다. “여성운동은 남성을 죄인으로 만들고 성적 자유를 억압한다” 는 주장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무질서한 현실을 방치하는 건 자유가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평등한 질서 아래서 모두가 자유를 누릴 때, 그 때서야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투 캠페인은 쓸모가 없다고.
제7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2_ 나보배
"아시아계 미국인의 모습을 복원시켜 달라".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향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요청이었다. 뮤지컬 속 아시아여성이 백인의 구원을 갈망하는 나약한 인물로 묘사되는 건 백인우월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었다. 제작사는 표현의 자유로 맞섰다. 예술은 사회와 무관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논쟁은 곧 제작사 주장대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가로 변해갔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받았던 인종차별 문제는 외면됐다. 최근 카트린 드뇌브 등이 르몽드에 기고한 칼럼도 비슷하다. 칼럼은 "미투 운동이 남성을 성급한 폭행범으로 몰고, 자백을 강요해 전체주의 기운을 심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권력을 쥔 남성의 성폭력이란 미투 운동의 본질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미투 운동은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자에 의해 성범죄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을'들의 목소리였다. 칼럼의 주장처럼 남성이 여성을 유혹했을 뿐이라면, 여성은 남성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었어야했다. 하지만 여성은 합의 없이 몸을 더듬는 남성의 손길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증언에서 보듯 거절은 인생을 통째로 맞바꿀 용기를 필요로했다. 상대는 여성의 일자리를 쥔 투자자였으며, 여성을 해고할 수 있는 상사이고 선배였다. 거절할 용기를 낼지라도 여성은 손가락질받기 일쑤였다. 지난해 말 한샘 사건에 관한 사법부의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는데도 문제를 제기한 여성은 먼저 남자를 유혹할 여지를 준 게 아니냐는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유럽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갑과 을이라는 기울어진 힘과 사회의 시선 속에서 남성의 손길은 일방적인 성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미투 운동이 전체주의를 심는다는 비판은, 미투 운동의 본질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대부분이 SNS에 미투 해시태그를 달고, 자백을 한 남성만이 올바르다는 분위기가 누군가에게는 강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미투 운동의 본질이 아니다. 층위가 다른 문제로 미투운동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런 주장이 확대된다면 <미스 사이공>의 논란처럼 '주류 남성 권력 VS 억압받는 여성'의 구도는 '희생양 남성 VS 전체주의'의 대립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다는 두려움에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마저 나타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다시 여성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설령 칼럼이 미투 운동의 이면을 짚어내려했을지라도, 그 결과는 오히려 여성을 더 숨죽이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오프라 윈프리는 골든 글로브 수상소감을 통해 여성을 응원했다. "큰 용기를 가지고 입을 연 모든 여성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오프라를 차기 백악관 주인으로 보내자는 지지가 이어졌다. 인상적인 수상소감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는 이전에도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가진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등 여성에게 씌워진 억압의 굴레를 벗기고자 했다. 오프라를 향한 지지에는 어쩌면 그가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미투 운동이 구체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르몽드 칼럼으로 미투운동은 변화의 길에 섰다. 한걸음 나아가지 못한다면, 미투운동이 전체주의를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미투운동으로 한데 모인 억압의 목소리를 더 크게 만들 구체적 변화가 필요하다.
제7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3_ 장인경
‘미투’vs카트린 드뇌브의 논쟁이 뜨겁다. 오프라 윈프리의 연설 이후 드뇌브를 대표로 한 공개서한이 발표된 것이다. 서한은 ‘미투’ 운동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전체주의적이며, 여성을 영원히 피해자화함으로써 여성의 힘을 오히려 약화시키고, 남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혐오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 같은 논리는 허점을 지니고 있고, 여성의 권리 신장을 지연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드뇌브는 ‘미투’ 운동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그는 ‘정치적인 것’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옹호한다. 하지만 사회집단 간 권력 불평등으로 인해 생긴 불의를 시정하는 노력을 ‘정치적’이라고 배제·비판하면 수많은 고통이 은폐·재생산된다. 정치적 올바름과 개인의 자유·예술의 자유는 상충하는 가치가 아니다. 서로 조화시켜나가야 하는 가치다. 개인은 사회에 존재하는 이상 ‘정치적 삶’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고,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의 고통 해결에 동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미투’ 운동은 여성 우위 사회를 만들려는 목적이 아니므로,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은 초점이 빗나가 있다. 만약 ‘미투’를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사회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지켜 온 남성우월주의를 먼저 비판해야 한다.
‘미투’ 운동이 여성을 영원히 피해자화함으로써 여성의 힘을 오히려 약화시킨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투’ 운동 참여자들이 본인의 성폭력 피해 경험과 고통을 공개한 것은 용기있는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피해 사실을 숨기고, 고통을 혼자 감내했을 때 스스로가 작아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드뇌브는 여성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지하철에서의 ‘가벼운’ 접촉 행위가 남성의 성적 박탈감으로 인한 것이므로 이해하고, 이로 인해 트라우마를 느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범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해할 수 있는 이유는 ‘성욕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피해자를 상대로 ‘성욕을 참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상처받고, 존엄을 침해받는다.
남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혐오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미투’ 운동은 성범죄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남성들과 연대하고 있고, 남성인 성범죄 피해자 또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착취적이고 폭력적이지 않은, 상호 동의와 존중에 기반한 성적 자유를 옹호한다. 다만, 여타 이념과 종교처럼 ‘미투’ 운동도 절대선이 되면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 따라서 ‘미투’ 운동은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경계하고, 가해자의 범죄사실에 대한 비판이 가해자에 대한 린치나 분풀이를 정당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같은 문제는 충분히 ‘미투’ 운동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미투’ 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결론적으로 드뇌브의 주장은 남녀 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에 눈을 감고 있다. 드뇌브의 언어처럼 사회적인 불의를 은폐하고 무화(無化)하는 언어는 전형적인 기득권의 언어이다. 이는 여성 인권 발전을 가로막는다. 성폭력을 성폭력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성폭력과 유혹을 구분하지 못하는 쪽은 ‘미투’ 운동이 아니라 드뇌브이다.
8회 논술 논제
위선(僞善)과 위악(僞惡) (1500자 안팎)
제8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_ 정세진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1면의 헤드라인이다. 사실을 정반대로 왜곡한 오보였다. 일본의 식민지서 독립한 지 6개월이 채 안 된 상태였다. 대중은 소련을 ‘악’으로 미국을 ‘선’으로 받아들였다. 잘못된 보도가 왜곡된 인식을 만들었다.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게 됐다. 국제 뉴스에서 깊이 있는 분석 없는 보도는 선악의 이분법적 분석을 만든다. 그 결과 국가 행위자를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인격을 가진 대상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위선’에 가깝고, 북한의 핵무장은 ‘위악’에 가깝다. 국가 정책의 근본 목표는 자국의 이익추구다. 따라서 겉으로는 선해 보이거나 악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본래의 의도가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외교 정책이 위선(僞善)적이거나 위악(僞惡)적인 이유다. 뉴스 수용자는 국가 행위자가 본래 의도를 숨기고 선하거나 악해 보이는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석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에 싸드를 배치했다. 한국의 대중 관계 보다 자국의 군사적 이익을 고려한 결과다. 북한 지도부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극복하고자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핵무기를 선택했다. 미국이 선해서 싸드를 배치해 한국을 보호한 것이 아니고 북한이 악하기 때문에 핵무기를 계발해 주변국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위선과 위악일 뿐이다.
선과 악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이익과 손해를 분석할 수 있는 프레임 설정이 필요하다. 한국 입장에서 주변국의 외교 전략이 국익에 미치는 손익 계산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대북문제와 미국의 외교정책을 다루는 국제 뉴스는 영미권 언론의 보도 논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북한을 일방적으로 신뢰할 만한 대화상대로 설정하는 것도 위험하다. 한국의 관점에서 프레임을 설정해야 한다. 종국에는 위선과 위악을 걷어내어 국가 행위자의 전략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보도가 필요하다. 아랍권은 국제 뉴스의 일방적인 소비자였다. 하지만 알자지라를 만든 후 달라졌다. 알자지라만의 관점이 담긴 뉴스를 만들어 전 세계에 제공한다. 한국에도 ‘알자지라’의 역할을 할 언론이 필요하다.
왜곡된 언론 보도는 국가 행위자가 계획한 정책 결정을 방해할 수 있다. 본래의 의도가 가려져 있는 주변국의 외교정책을 깊이 있는 분석 없이 그대로 보도하면 뉴스 수용자는 선악의 이분법적 이미지를 갖게 된다. 주변국에 대해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해당 국가와 관련된 외교정책에 대한 지지로 쉽게 전이된다. 북핵문제를 주변국의 협조아래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한국의 이익을 극대화 시킨다. 한국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하려면 국내 여론의 지지가 필요한데 왜곡된 보도로 생긴 선입견은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는 정부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잘못 형성된 여론의 반발이 분단을 고착화시킨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제8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1_ 최나실
삶은 일종의 연극 무대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저서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남들 앞에서 개인이 자아를 ‘연출’하는 인상 관리 공연으로 설명한다. 고프먼의 이론에 비춰보면 위선은 쉽게 이해된다. 속내와 달리 사회의 보편 윤리를 지키는 이유 말이다. 위선자는 체면을 차리면서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기만하여 목적을 달성한다. 반면에 위악은 의도를 헤아리기가 더 까다롭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짐짓 악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개 위악은 일종의 방어 기제이자 약자의 생존 수단이다.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 부러 ‘센 척’을 하거나,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옳지 않은 현실에 ‘타협'해가는 것이다.
약자의 위악에도 나름의 변은 있다. 이미 악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위악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게 가장 명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한국 사회의 성(性) 문제다. 페미니즘의 형태로 부상한 ‘미러링’은 위악의 기제를 활용한다. 성녀/창녀의 이분법을 비판하기 위해 성구매자 남성을 ‘창놈’이라고 재전유하는 식이다. 여성 혐오에 무감각한 이들이 역지사지를 체감해야, 비로소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시에 위악은 성 윤리를 ‘인지’하는 남성들조차 마초 문화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변명해주기도 한다. 학창시절부터 더 거칠고 성적인 언어를 내뱉을수록 ‘남성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또래 문화 속에서 자라난다. 군대와 회사를 지나며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임과 상관으로부터 성매매 등을 강요받기도 한다. 이탈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을 악행으로 이끈다.
그러나 반복되는 위악은 위험하다. 연극 속에서 악행이 체화되며, 내면을 지키던 도덕률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자아와 가면 사이의 경계에 갈수록 무감각해져 간다. 이미 일각에서는 ‘미러링’이 그 취지와 자기반성적인 자세를 잃고 있다는 우려를 내비친다. 남성 동성애자를 ‘똥꼬충’이라고 칭하면서 희화화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위악적 전술이 폭력적 유희로 변질될 것에 대한 경계다. 또한 처음에는 ‘마초 문화’에 대해 윤리적인 거부감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남성들도 그 문화에 젖어들면서, 불편함의 감각을 잊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생존을 위해 시작한 악행이지만 연기를 할수록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자기반성적 질문은 사라진다. ‘진의’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결과적으로는 표면의 ‘악행’만 남으면서 갈등만이 반복된다.
위악의 연기는 끝나야 한다. 물론 같은 위악이라도 미러링이라는 ‘센 척’과 마초 문화와의 ‘타협’은 층위가 다르다. 전자가 남성 중심 문화의 변혁을 요구한다면, 후자는 어쨌든 그에 편입해 살아남고자 하는 방식이다. 다만 두 위악의 묘한 공존 가능성을 짚어낼 수는 있다. 어쩌면 둘 다 원하지 않았을 악행이다. 여성 청년은 위악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사회가 바뀔 것이라 기대하지 못한다. 반대로 남성 청년은 조직 내 마초 문화에 대한 반기를 든다고 한들, 오히려 더 피해만 입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행을 끝내려면 이들끼리의 대화가 필요하다. 이들이 함께 기득권 남성 문화의 ‘의도된 위선’과 ‘무지한 악행'에 반격을 가해야 한다. 학교부터 회사까지 모든 조직 내 폭력적인 가부장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악’을 부려야 했던 청년들이 성별과 상관없이 서로 대화하고 연대해야 한다.
제8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2_ 김치연
에릭 홉스봄은 자신의 저서 <폭력의 시대>에서 민주주의에서 정부가 유권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리석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더 많은 표를 얻어야 권력을 쥘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위선적인 정부는 있을지 모르나 위악적인 정부는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위악적인 정부는 사회 전체를 위한 일이라면 사회적 비난이나 여론 악화를 감수하고 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반해 위선적인 정부는 ‘국민의 뜻’을 최우선시 하며 국민의 심기를 거스르는 정책은 나서서 추진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된 ‘국민의 뜻’이란 허상에 가깝다. 만약 ‘국민의 뜻’이 있고 어떤 식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것만을 기초로 사안을 결정하는 정부는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 손쉽게 ‘국민의 뜻’을 앞세우는 정부의 말이 위선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하는 이유다.
정부가 국민의 뜻을 앞세운 정책 추진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위선이다. 공론화위원회 방식이 대표적이다. 공론화위원회는 숙의민주주의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시민이 직접 참여해 합의를 이루는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다. 일견 나쁠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공론화위원회에서 모든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소수는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국민에 의해 뽑힌 정치인은 ‘공익’을 우선시할 의무가 있으나 시민은 그렇지 않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 해당 사안에 대해 단기간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전문성을 가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이런 위선적인 절차는 민주주의를 교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공론화 위원회가 표방하는 절차적 정당성이 공론화 위원회에 속하지 못한 절대 다수의 국민을 침묵하는 방관자 신세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정략적으로 택하는 위선적 방식은 편의주의에 기댄 직무유기에 가깝다. 시민 참여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책을 추진할 때 정부가 수행해야 할 기본 임무까지 떠넘긴 것이다. 정부는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내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설득하고 소통할 임무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정치적 책임을 피해 ‘위악’을 택하지 못하고 공론화 같은 방식을 취하면 순간의 사회적 갈등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더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모두가 동의하거나 만족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확실한 정책적 방향 없이 사회적 논의를 진행한다면 결국 찬반 구도만 강화할 뿐이다. 사회적 갈등비용을 줄이기 위한 절차가 오히려 그 비용을 크게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때로 위악을 택할 필요가 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지만 민심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후보 시절 실업 위기에 처한 월풀 노동자를 만나 “공장 문을 닫는 건 불가피하지만 더 나은 고용환경을 만들겠다”고 불편한 현실을 말해 야유를 받았다. 마크롱이 당선된 후 월풀은 문을 닫았지만 그 자리에는 전기차 제조 공장이 들어서 새로운 고용을 창출했다. 마크롱은 노동자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기보다 현실을 말하고 설득하는 길을 택했다. 소통과 설득을 통해 위악은 악이 아닌 선이 됐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의견을 가진 이와 최대한 합의점을 만들어나가는 게 최선이다. 정부가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좋은가를 제기하고, 시민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때 사회는 성숙해질 것이다.
제8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3_ 이장준
정치판은 대다수의 위선자와 소수의 위악자로 이뤄진다. 짐짓 선한 체라도 해 정치 생명을 유지하려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악역’을 자처한 정치인들 역시 표를 얻기 위해 다른 전략을 택한 것이다. 언뜻 자신을 악인으로 만드는 행위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나 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가령 막말은 뇌에서 감정 처리를 담당하는 편도를 자극하고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각성케 한다. 정치인의 선행보다 막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다. 이런 부정적 자극이 반복되면 해당 정치인은 어쩌다 실수를 한 사람이 아니라 원래 악인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악인 이미지가 공고해진 시점부터 위악 프레임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위악자는 도덕적 굴레로부터 자유롭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계속 너그럽다가 한 번 공포스럽게 대하면 그는 원한을 품지만, 계속 공포스럽다가 한 번 너그럽게 대하면 그는 감복한다’고 밝혔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일종의 ‘기저효과’가 적용된다는 말이다. 기대치가 낮은 만큼 악인에게 악덕은 자연스러우며, 미덕은 더 큰 칭송을 부른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혐오∙비하 발언으로 악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위악 프레임은 그의 막말을 용인했고 때로는 속 시원한 ‘사이다’ 발언으로까지 치부했다. 탄핵 직후 대선에서 24%의 득표는 위악의 힘을 보여준다. 절대권력이 아닌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악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건 이를 유통시킨 언론 덕택이다.
언론은 뉴스가치 측면에서 위선자보다 위악자를 선호한다. 위선을 떠는 정치인이 뉴스가치를 갖는 경우는 위선이 거짓임이 들통났을 때에 불과하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미투 가해자로 지목돼 지금껏 구축한 선한 이미지를 잃은 것이 대표적이다. 반면 위악자의 일상적 막말은 늘 뉴스가치를 지닌다. 자극적이고 영향력이 큰 만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때문에 언론은 위악자와 공생하는 관계에 놓인다. 정치인이 독한 말을 받아쓰는 언론은 기사 트래픽이 올라 수혜자가 된다. 언론이 재구성한 악인 이미지는 다시 정치인에게 관심과 도덕적 자유를 부여한다. 문제는 위악으로 인한 비용을 국민 모두가 치른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개인의 악함을 지적하느라 중요한 정책 현안을 공적으로 논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쉽다.
지키기 어렵지만, 언론 윤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위악자의 막말은 장기적으로 언론에도 독이 된다. 언론이 막말 전달 창구로 전락하면 진실보도와 요원해진다. 국민들이 신뢰를 거둘 뿐 아니라 흥미 위주 보도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킬 때 가치가 있다. 자극적인 정보만을 유통시키는 황색저널리즘은 도리어 공적 사안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킨다. 따라서 언론인은 ‘악당을 자처한’ 정치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전달해서는 안 된다. 이로써 정치인에게 위악자가 되는 것이 매력적이지 않은 전략임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정치인의 위악은 개개인을 끌어들이는 데 유용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해악이 되기 때문이다.
제9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심사평 & 최우수작
논술 논제
한국 보수에게 없는 네 가지 (1500자 안팎)
제9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_ 이동환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알아야 군자다.’ 「논어」의 구절이다. 한국 보수에 군자가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여 군자가 아닐 지라도 이 성인의 말은 새길 필요가 있다. 한국 보수에겐 자(自), 유(由), 한국(韓國), 당(黨)이 없고, 그 말은 곧 ‘보수’로선 이제 나아갈 곳이 없다는 뜻 이어서다. 한국의 가짜 보수는 진짜 보수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 한다.
한국 보수에겐 자(自), 즉 자아가 없다. 정체성의 혼돈 상태다. 그동안 자신을 수구 반동, 급진•전체주의 세력으로 규정지을 만한 행위나 발언을 일삼아 왔으면서도, 보수를 자임하고 설파하며 유권자를 홀려 왔다. 에드먼드 버크에 따르면 보수란 개인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역사, 전통, 제도의 힘을 신뢰하는 집단이다. 법치주의•자유시장의 보존이 핵심 가치이며, 반국가•민족적, 그리고 권위주의적 가치완 무관하다. 그래서 한국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가치는 청산되지 못한 반민족유산이나 군부독재정권의 부유물, 즉 극우 파시즘의 그것이다. 자신을 모르면 백전불태다. 대다수 국민들이 알게 된 본인의 정체성을 혼동했던 결과가 6.13 선거 대패다. 유럽 극우정당처럼 정체성을 급진 우파로 설정하지 않을 바에야, 이제 한국 보수엔 물러날 길 밖에 없다.
한국 보수에겐 유(由), 즉 ‘말미암을 것’도 없다. 그동안 이들이 자유민주주의 제도 정치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정당성의 뿌리들이 이젠 모두 거세당했다. 국정농단과 탄핵 과정에서다.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지는 강력한 국가, 경제 발전의 신화는 교도소에 수감됐다. 강한 지지의 원동력이 돼 왔던 반공 이데올로기 등 ‘안보’ 의제마저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 휩쓸려 나갔다. 지방선거 패배 이후 부랴부랴 ‘안보 상황에 제대로 대처 하겠다’는 발언을 내 놓고 있지만, 배는 떠났다. 독재의 성지 구미엔 여당 후보가 당선됐고, 정당 지지율은 10%에 머문다. 물러남에 대해 곰곰이 성찰해볼 때란 소리다.
심지어 한국 보수엔 한국(韓國)도 없다. 러셀 커크는 보수주의의 특징으로 공동체와 가족주의를 든다. 공동체 가치로 경제•사회적 부조리를 극복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애국’을 구현할 수 있단 것이다. 한국 보수는 이런 특성과 거리가 멀다. 보수정권 동안 대한민국 사회 공동체는 와해됐다. 헬조선 같은 체념적 어휘가 유행하고, 이민자 수가 급등하기도 했다. 한국 보수가 공동체보단 기득권 세력을 옹호해 왔기 때문이다. 친기업주의 정책으로 노동을 배제하고, 4대강 같은 친자본 프로젝트에 세금을 쏟았으며, 그 사이 재벌 계열사 수는 60% 이상 늘었다. 양극화 심화가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세월호 대처 문제까지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한국 보수가 지키려는 게 기득권이지, ‘한국’이 아니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다행인 건, 한국 보수엔 당(黨)도 없단 것이다. 한국 보수의 몰락 원인은 당 차원의 전략에서 여당에 패했기 때문이다. 여당은 최근 몇 년간 포괄정당(catch-all party)화 했다. 좌우에 상관없이 국민, 즉 유권자의 뜻을 받아들여 정책화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 국민참여경선이나 공론화위원회 등이 그렇다. 의제를 선점당한 한국 보수는 이제 차별화 전략이 없다. 최근엔 이를 인지하고 아예 포기한 듯하다. ‘원내정당화’ 한다는 얘기가 그렇다. 중앙당 차원의 비전이 없으니, 해체하고 각자도생하잔 소리다. 의원 개개인의 역량에 맡겨 살 사람만 살잔 것이다. 굳이 원내정당화가 그들이 주장했던 ‘이원집정제 개헌’과 조응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 보수의 미래엔 체념뿐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사실들, 즉 한국 보수에 ‘없는 것’들을 고려한다면, 한국 보수로 자칭하는 세력들은 이제 한국 사회를 위해 물러나야 한다. 사회와 공동체, 민주화의 역사, 항일 투쟁의 거룩한 전통을 사랑하고 아끼는 진짜 보수는 이미 원내에 존재한다. 그들에게 보수의 이름을 물려주고 사라지는 게 이제 한국 보수에 남은 유일한 임무다. 그렇게 공간을 내줘야 진보의 원내 진입이 용이해지고, 보수-진보 간 발전적 공존이 가능해질 수 있다.
제9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1_ 류태준
이념은 생물과 같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진화하기 때문이다. 유기체처럼 현재 상황을 ‘인식’하고, 고민을 거쳐 미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기능을 갖췄다. 모든 이념은 항상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보수의 시조로 꼽히는 에드먼트 버크는 <혁명에 대한 고찰>에서 보수는 변화에 반대하지 않는다 했다. 오히려 변화를 자연적 질서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큰 틀의 연속성을 추구하라 말한다. 한국 보수가 힘을 잃은 이유도 변화에 대한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바뀐 세상의 목소리를 ‘듣고’, 풍기는 분위기를 ‘맡으며’, 그 속도와 깊이에 맞게 ‘바라보고’, 바른 길이 어딘지 ‘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찬란했던 ‘황금시대’와 타락한 현재라는 가상의 이분법에 갇힌 생물은 도태될 뿐이다. 지금 ‘한국 보수’라는 종(種)은 ‘눈, 코, 귀, 입’ 네 가지가 모두 없다.
지금껏 한국 보수의 감각이 향했던 곳은 ‘생존’이었다. 분단과 냉전이라는 환경적 요인 때문이다. 눈앞의 적은 5감을 반공주의와 근대화라는 요소에 집중하게 했다. 이미 만들어진 서구의 외양과 동일한 모습을 갖춰 살아남기 위한 힘을 길러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 주도 경제발전과 전체주의 질서를 외쳐댔던 것도 그 이유에서다. 유럽 보수는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 같은 지식인을 내세워 전통사회 붕괴와 산업화의 비인간적 측면을 비판하고 개인 권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반면, 한국에서는 낙수효과와 같은 긍정적 가치에만 몰두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질주했다. ‘생존으로의 집중’이 경제와 안보에서 국력이 약할 때는 합당한 목표였지만, 주변 세상이 바뀐 지금에도 기존 지향점만 바라보니 먹잇감을 잃어버린 ‘우물 안 개구리’로 취급받는다.
‘보수 개구리’는 우물 밖으로 나와 ‘듣고, 맡고, 바라본’ 결과물로 유권자를 ‘설득해야’ 한다. 기존에 살고 있던 ‘생존의 장’은 낡은 집이 됐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를 향하고, ‘북괴’의 수장은 미국 대통령과 평화를 논한다. 이념의 무대는 생존의 공간에서 현실 정치의 세상으로 옮겨왔다. 철지난 색깔론과 반공주의 사상을 넘어 통일과 복지 같은 미래에 대한 적극적 비전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해야 한다. 서울시립대 이성규 교수는 <한국 보수개혁의 길>에서 보수도 복지와 배분 정책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저술했다. 분배를 좌파의 전유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에 동력을 위한 장치라 말한다. 기존 성장 방식의 성과는 인정하되, 지속을 위해서는 바뀐 세상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갇혀있는 생물은 멸종된다. 갈라파고스를 탈출하지 못한 동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좁은 생태계 속에서 진화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한국 보수의 상황도 같다. 원래 기반인 반공과 근대화는 무너져가는데, 현실 정치의 무대로 갈 수 있는 ‘비전’이라는 티켓이 없다. 지난 기간 힘으로 통치해온 보수 세력은 자신들이 지닌 미래 목표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중세 이념 공격이 상대방을 적그리스도로 만들었듯, 한국 보수는 상대방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이제는 현실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통해 유권자에게 합리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때다. ‘눈, 코, 귀, 입’이 모두 없이 도태되는 ‘보수 개구리’는 살아남을 수 없다.
제9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2_ 신혜연
영국 정치인 윈스턴 처칠은 한국식으로 따지면 ‘보수 적자’다. 보수당 소속인 그는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할아버지도 전쟁 영웅으로 유명했다. 1,2차 대전에 모두 참전한 유일한 정치인이란 칭호가 그에게 따라붙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치러진 총선에서, 전 세계는 처칠의 압승을 예측했다. 착각이었다. 다수당을 차지한 건 복지 공약을 내세운 노동당이었다. 일명 ‘베버리지 보고서’로 불리는 영국 복지 제도가 이렇게 탄생했다. 전쟁 후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이끈 건 결국 ‘먹고사는 문제’였다.
정치는 자원배분 과정이다. 한국 보수가 쇄락 하는 이유는 결국 경제 문제다. 이념 논쟁에만 골몰하는 정치 집단은 망할 수밖에 없다. 분단의 역사 때문에 한국에선 이념논쟁이 한수 위라는 지적이 있지만, ‘총풍 사태’ 이후로 북풍 효과를 부정하는 분석을 여러 정치학자들이 내놓은 바 있다. 선거는 경제관의 충돌이다. 보수식 승자독식 구조와 진보식 균등배분 구조는 각기 장단점이 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양쪽 가치관을 적절히 뒤섞으며 발전해왔다. 한국 보수를 망가뜨린 건 지난 10년간의 극심한 불평등이다. 부패와 불공정 경제를 목격한 시민들은 ‘경쟁을 통해 승자를 가린다’는 보수식 경제관에 동의할 수 없게 됐다.
인의예지(仁義禮智). 한국 보수는 경제의 네 가지 틀을 놓치고 있다. 인(仁)은 어짊을 뜻한다. 최하위 계층에 대한 복지다. 기초연금을 내걸었던 박근혜는 각광받았지만, 지금 보수는 진보에 복지 프레임을 전부 빼앗긴 상태다. 무상급식, 청년배당 등 복지 정책을 선점한 진보가 승기를 잡았다. 의(義)는 정의로움이다. 보수가 내거는 정의로움은 ‘개천에서 용이 날’ 자유다. 계층 사다리가 망가진 상황에선 무너져 버린 잣대다. 청년들은 ‘흙수저’라고 자조한다. 예(禮)는 절차적 정당성이다. 적법해야 한단 뜻이다. ‘강남 땅부자’ 최순실이 재벌 대기업과 결탁해 부를 쌓았다.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지고 ‘1%만의 나라’라는 믿음이 퍼졌다. 지(知)는 이론이다. 극심한 불평등은 낙수효과에 대한 믿음을 깨뜨렸다. 소등주도성장론이 득세한 배경이다.
유교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신(信)으로 귀결된다. 정치활동은 자원배분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행위다. 보수적 가치가 득세하려면 인의예지의 틀에서 보수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선별복지를 추구하되, 약자에 대해서는 적절한 사회안전망을 약속해야 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복지이슈를 섭렵하는 게 보수 재집권의 비결이 될 수 있다. ‘개천용’ 사다리를 부활시켜서 공정경쟁을 통한 자원배분을 가능하게 하는 게 맞다. 법을 지키면서도 성공할 수 있게, 시장 질서를 재정비하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사람들이 결과적 평등보다는 기회 균등에 매력을 느끼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출발선이 똑바로 그어져 있어야 ‘참가할 만한 경기’가 된다. 해묵은 이념갈등을 부추겨 표를 챙기려는 얕은 수를 쓰는 보수에게 한 마디를 바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제9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3_ 강서영
자유주의는 시장 절대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시초로 개인의 사적 소유권을 강조했던 존 로크 역시 “인간은 타인을 위해 양질의 것을 충분히 남겨놓는 만큼만 점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핵심은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자유주의는 천부인권을 근간으로 하며, 그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자유당, 민주자유당, 자유한국당이라는 이름처럼, 한국 보수 또한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한국 보수가 자유주의의 핵심 이념인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해왔는지는 의문이다.
한국 보수는 시민의 자유에 둔감했다. 학문,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야말로, 한국 보수가 보호하지 못한, 그래서 한국 보수에겐 없는 4가지다. 시민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분단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만을 이식받은 한국에서, 한국의 자유주의는 ‘공산주의에 반대되는 자유세계’라는 진영 논리의 의미가 강했다. 반공은 자유주의란 탈을 쓰고, 국민의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억압해왔다. 광범위하게 적용된 국가보안법이 다양한 학문의 자유와 그에 따른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앗아갔다. 반공은 최근까지도 반정부적 의견을 탄압하는 주요 근거가 돼 왔다. 보수정권의 명박산성, 민간인 사찰, 정당해산심판, 문화계 블랙리스트등이 그 예다.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이비 자유주의는 국민이 아닌 정부와 기득권을 위한 자유일 뿐이다.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개진할 수 있는 시민의 자유는, 시민이 여론을 형성해 거대 권력이 된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대의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부패정권은 시민의 혁명과 민란으로 무너져왔다. 흔히 보수의 몰락 시점을 국정농단 사태로 조명한다. 국정농단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분노는 최순실 사태에 대한 분노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4대강 사업처럼, 지금껏 반정부적 의견을 탄압하고 여론을 조작해 권력을 사유화해온 보수정권에 대한 축적된 분노가 한 순간에 터진 것으로 봐야 한다. 보수정당의 지지율이 궤멸 수준으로 추락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보수는 다른 이름의 ‘신’자유주의를 세워야 한다. 보수가 진정으로 지키려고 했던 자유가, 기득권과 정부권력의 자유가 아닌 국민을 위한 자유라면 말이다. 영국 보수당의 경우 사회 변화에 따라 노동계를 포섭하는 등 보수 이념의 의연을 넓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 보수도 반공에 기반을 뒀던 기득권 자유주의를 타파하고, 자유주의의 의연을 넓혀야 한다. 기득권만이 아닌 ‘국민의 자유’를 표방하는 정당이 돼야 한다. 전통과 기존의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의 정당성은, 보수가 보수하려는 가치를 국민들이 지지해야만 기능할 수 있다. 국민들과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며 지지받는 진짜 ‘자유’한국당이 돼야 한다.
제10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심사평 & 최우수작
논술 논제
당신은 대학교수다. <교수신문>이 당신에게 “2019년 대한민국 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를 사자성어 하나로 표현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당신은 어떤 사자성어(四字成語)를 고를 것인가. 그것을 고른 이유를 논하라. (1500자 안팎)
제10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최우수_ 기아영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다. 맹자는 이를 측은지심이라 일컬으며 인간이 가진 선한 본성이라고 봤다. 타인의 불행을 내 일처럼 여기기에 생기는 마음이었다. 사회가 아무리 각박해졌다 해도 측은지심은 여전히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다만 오늘날 측은지심은 내 자신, 멀어봐야 겨우 내 가족에 가닿을 뿐이다. 우리는 이를 경계 삼아 타인에 대한 높고 견고한 벽을 쌓고 있다. 우물에 빠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고서야 구해야겠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시대다.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모두가 같은 범위의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2018년은 우리 사회가 가진 측은지심의 한계가 뚜렷이 나타난 해였다. 우리는 내전을 피해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 온 난민을 외면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면 그 아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그를 내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측은지심은 민족단위를 넘지 못했다. 같은 민족이더라도 측은의 심정이 반드시 작용하지는 않았다. 미투 운동은 여성이 처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억압을 드러냈지만 그들의 고발을 부정하고 일부의 일탈이라 외면한 사람들이 있었다. 여성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을 살피기에 앞서 남성에 대한 공격이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측은지심은 성별단위를 넘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측은지심의 범위를 좁히고 있었다. 우리는 측은지심의 외면이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낳기도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성공이 추구해야할 유일한 가치인 상황에서 이기심의 발로는 합리적 선택으로 인정받는다.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난민과 여성은 배척해야할 대상이었다. 어느새 이기심은 우리 사회의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개인은 나의 위기에 도움을 줄 곳이 결국 나와 내 가족뿐이라는 폐쇄성을 경험할 뿐이다. 이로부터 이기심은 더욱 강화된다. 최근에는 방어적 이기심을 넘어 공격적 혐오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나와 가족을 제외한 타인은 위험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진다. 상대의 측은지심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물론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나’라는 존재들이 점점 늘어날 것 같아 보인다.
측은지심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의 측은지심을 경험할 때 사회는 더 안전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은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반면 측은지심이 사회에 일상적으로 퍼져있을 때 이것은 일종의 사회 안전망 역할을 하게 된다. 예컨대 상대의 측은지심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경험을 통해, 그는 더 이상 나와 분리되는 남이 아니게 된다. 나의 측은지심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 구성원들의 측은지심이 연쇄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겹치고 겹쳐 위기에 대응하는 단단한 방어망이 마련될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는 사회로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맹자는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며 느끼는 안타까운 심정이 곧바로 아이를 구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측은지심은 그저 어진 행동(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원천일 뿐이다. 그것이 아이를 구하는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측은의 마음이 개인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본성 깊숙이 숨어있는 측은지심을 발굴하고 키우는 노력이 가미돼야 한다. 상대의 어려움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감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상화된 측은지심으로부터 실제 타인을 돕는 선행이 가능하다. 이런 경험을 누적한 사회 구성원들은 공동체의 안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수 있다.
제10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작문부문 우수작1_ 한예나
혁명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덕분에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의 기본 정신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바꿨다. 독재에 반대하며 점화된 우리나라의 4·19혁명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다시 꽃피웠다. 어떤 변화가 사회에 새로운 질적인 요소를 세울 때,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 부른다. 2019년, 우리 사회를 기다리고 있는 혁명은 4차 산업혁명인 것처럼 보인다. 4차 산업혁명 앞에서 우리는 ‘대동소이’를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식당 앞에 점원 대신 위치한 키오스크 기계의 편리함에 감탄하다가도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이런 예측은 기술결정론적인 시각에서 기인한 걱정이다. 기술결정론은 기술이 사회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술결정론보다 기술과 사회의 공동구성론이 더 타당하다. 과학기술은 시대적 배경, 사회적 요구와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이 이론을 잘 뒷받침하는 사례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은 유럽 전반의 현상이었지만, 산업 혁명은 영국의 현상이었다. 영국의 값싼 석탄과 비싼 임금은 증기 기관 발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기술과 사회의 상호 작용이 산업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의 기술뿐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를 함께 봐야 한다.
크게 보면 같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이다. 4차 산업혁명은 결국 1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이다. 기술은 과거보다 발전했고 사회는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질적인 도약을 일으키지 못했다. 우리가 미래에 직면하게 될 문제는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문제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와 권력의 집중이다. 크게 보면 ‘부와 권력의 집중’이라는 문제점은 같다. 누가 소유할지에 대해서만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윤 공유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주목해야 한다. 기업이 오픈 소스 코드나 빅데이터,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할 경우 생산의 한계비용은 0에 근접한다. 이는 판매 이윤의 사유화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IT 대기업에게 디지털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생기는 이유다.
이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선 기술적 발전과 동시에 양극화 해소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여전히 나타난다. 이제 사회가 큰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선 필요한 것은 ‘공유’ 혁명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의 핵심이 공유된 생산수단이라면 이윤 역시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산업혁명 이후 유지되어 왔던 이윤의 사유에 대한 맹목적 지지에서 벗어나 공유를 사회적 가치로 인정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높아진 생산성이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활용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혁명을 맞이했다고 볼 수 없다. 2019년에는 대한민국 사회에 공유 혁명이 일어나 부와 권력이 공유되기를 기대해본다.
제10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2_ 김지연
2009년, ‘경제 대통령’을 자칭한 대통령이 취임한지 1년이 지나지 않아 두 건의 국가 폭력 사건이 일어났다. 용산 참사와 쌍용차 사태는 각각 건설사와 자동차 제조사라는 기업들의 영업을 위해 공권력이 나서서 강제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후 법인세 인하, 규제 완화, 부동산 경기 활성화 정책까지, ‘경제 대통령’이 살리겠다는 경제의 실체는 민생의 희생을 통한 대기업 살리기였다. 문제는 IMF 이래 최대의 경제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지금이다. 또다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어떻게, 어떤 경제를 살려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2019년에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경세제민’, 경제의 본말인 그 사자성어에 담긴 가치를 되새겨 봐야 하는 이유다.
현재의 경제 위기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한국 제품들이 기술력으로는 선진국의 밑에, 가격경쟁력으로는 개발도상국 위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의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모두 공감하지만, 문제는 방법이다. 한국사회에서 구조조정은 IMF 외환위기 사태의 경험으로 인해 대량의 해고로 인식되어 있다. 당시의 구조조정은 국민의 희생으로 대기업을 살리는 정책들이었다. 부실 기업들의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의 덩치를 키워서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정부는 합법적인 인력 비용 절감을 돕기 위해 파견법과 비정규직법을 제정했다. 이런 정책들은 큰 말은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를 증명하면서 결국 구조조정이 대기업 중심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조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독과점의 대기업 중심 구조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창조와 혁신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기업들은 한편으론 중소기업의 신기술을 탈취하면서 한편으론 하청업체에 단가 압박으로 가격경쟁력을 확보해 시장을 독과점하는 행태를 반복했다. 창조와 혁신은 다양한 도전 속에서 나오며, 대기업으로 인해 독과점되고 양극화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기업이 빨리 신산업에 뛰어들 수 있게 규제를 완화하고 관련업체와 노동자라는 ‘기존의 방해물’들을 털어내게 돕는게 아니다. 오히려 안정적으로 창업이라는 도전과 중소기업의 혁신이 가능하도록해야 한다. 이런 도전과 혁신의 기회와 성공을 늘릴 수 있도록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 감시를 통해 공정한 시장질서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경영진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수많은 대기업들이 공적 자본 투입으로 살아남을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었던 해고와 명예퇴직, 희망퇴직은 우리 사회 전체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대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투여했던 공적 자금도, 고용보험과 실업급여 등 사회적 안전망에 투입한 자금도 결국은 모두 국민들의 세금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기업에 합당한 책임을 묻고 산업 구조의 이동으로 생긴 ‘피해자’들을 제대로 구제해야 한다. 구조조정의 광풍이 예견되는 2019년에 ‘경세제민’, 경제의 목적은 기업이 아닌 ‘국민을 구한다’는데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제10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부문 우수작3_ 손민익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基本)이 바로 서면, 길 또한 자연(自然)스럽게 생긴다
한국인들은 중심부와의 거리로 순위를 매긴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했던 외교관이자 한국학 연구자 그레고리 핸더슨은 1986년 출간한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에서 이같이 밝혔다. 한국인들이 권력이 강해지는 중심부에 눈독을 들인다는 얘기다. 이는 공직자 집단에서도 나타난다. 정치인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것,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도 서열을 매기는 것이 대표적이다. 맨 뒷자리에는 당 대표‧중진 의원들이, 맨 앞자리에는 초선 의원들이 앉아 있는 게 단적인 예다. 같은 배지를 달아도 중심부와 주변부를 철저하게 나눈다. 반세기 전 외국인의 주장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응용되고 있다.
공직을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는 현상은 공직의 의미를 오역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공직의 지위‧권력을 자신의 것, 즉 사유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거리가 멀다. 민주주의에 입각한 권력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익적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약속하여 위임받은 것이다. 민주주의 가치관에서 공직은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위임받은 자리라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반세기 전 외국인의 주장의 일환처럼, 공직은 위임받은 자리가 아니라 쟁취의 대상으로 굳어져 있다. 공직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사유화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공직이 쟁취의 대상이 되면 공직자들은 사적 이윤을 추구하게 된다. 권력 오‧남용이 시작되는 것이다. 의원들이ㅡ 서열놀이는 물론이고 공직자들과 공금을 지원받는 사람들에게도 이 현상이 나타난다. 최근 불거진 공기업의 친인척 채용비리 의혹, 판사들의 사법농단, 사립유치원의 보조금 횡령은 이 선상에 맞닿아 있다. 자신의 직위를 사적인 지위라 착각하고 주어진 권한으로 공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적인 목적으로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공기업 직원의 자사 채용에 대해서 공기업 직원이 관여했으면 안 됐다. 사법부는 상고법원을 빌미로 재판 거래의 유혹을 뿌리쳐야 했다. 사립 유치원이 일정 부분 사금을 들여 지어졌지만, 국가에서 지급받는 공금은 개인의 몫이 아니었다. 공금은 아이들을 위해 쓰여야 했다. 공직과 공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공금을 자신의 것이라 착각한 행동은 결국 시민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이 사자성어의 뜻처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할 때다. 자신의 직위와 의무를 올곧이 이해하면 최근 불거진 비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공직자들과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는 단체들은 자신의 직위가 쟁취의 대상이란 고정 관념을 바꿔나가야 한다. 자신의 직위는 주권자들에게 위임받은 자리이며, 위임받은 자리에서 공직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비리로 점철된 공직 사회와 국가 보조금을 받는 단체들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부와 국회가 최근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 대책을 논하는 중이다. 법이 개정되어 처벌이 강화되면 권력 오‧남용은 줄어들 것이지만, 그전에 당사자들이 본분에 맞는 행동을 추구해야 한다. 스스로 자신들의 본질을 이해해야 시민들을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 만들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제1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심사평 & 최우수작
논술 논제
아래 두 영상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논하시오.(1500자 안팎)
( https://www.youtube.com/watch?v=qXSFuX1t7bA)
( https://www.youtube.com/watch?v=jkz75VIVVrc)
제1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최우수작_ 전유리
정밀한 팩트체크의 필요성은 가짜뉴스의 횡행으로 인해 제기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가짜뉴스가 횡행하지 않았더라면 사회는 팩트체크의 중요성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가짜뉴스가 증가한 만큼 팩트체크 시스템도 증가했는데 여전히 언론기관을 비롯해 정부, 정당과 시민사회는 가짜뉴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가짜뉴스라는 원인을 잘못 분석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도출된 팩트체크라는 결과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것이다. 즉, 가짜뉴스가 왜 등장했는지를 잘못 짚었다.
가짜뉴스는 ‘의도된 무지’를 원하는 공급과 수요의 원리에 따라 나온 결과다. 의도된 무지란 모르기를 바라는 것, 알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짜뉴스는 일반적으로 공급자의 의도가 명확하다. 예를 들어,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TV홍카콜라’는 과거 DJ‧노무현 정부 때 북한에 송금한 현금이 북핵 개발용으로 들어갔다는 주장을 통해 한반도에 최악의 핵재앙이 오고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자신의 팟캐스트 ‘고칠레오’에서 이 내용을 반박하며 가짜뉴스라고 판단했다. 반면, TV홍카콜라를 운영하는 홍준표 전 대표와 이 채널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에게 그 내용은 가짜뉴스가 아니다. TV홍카콜라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은 진보 정권으로 대변되는 현 정부의 집권에 반대하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보의 참거짓보다는 내집단의 안정화가 우선이다. 의도된 무지로 발현된 가짜뉴스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왜곡하며 원하지 않는 것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가짜뉴스에 다가가는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 가짜뉴스는 의도적으로 구성된 결과물인 셈이다. 가짜뉴스를 단순히 ‘무지’의 사전적 의미로 이해하고 다가간다면 이는 무지의 일면만 본 것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무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독립적이고 보편적 현상으로 변화했다. 특히, 정보의 취사선택이 어느 때보다 용이해진 환경에서 사는 사회 구성원들은 특정 사건들의 인지 폭이 좁아질 가능성이 높다. 경험이 결여되면 이에 따른 기대 또한 부재하기 마련이다. 가령,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현 정부를 두고 조중동 및 유튜브를 비롯한 보수 채널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시민들은 우리 정부가 자진해서 북한의 핵 인질이 되는 것을 통탄한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언론보도는 빈번히 최저임금 인상으로 경제가 어렵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한다. TV홍카콜라 구독자와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구독자가 평가하는 시국이 달라지는 것이다.
가짜뉴스의 성격에 맞게 팩트체크 시스템을 수정해야 한다.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추가한다고 가짜뉴스의 횡행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한다. 의도적으로 구성된 무지는 복잡하고 논쟁적인 사회적 구성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가짜뉴스의 수용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 상황을 인정하고 접근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고려해 실시되는 팩트체크는 단순히 사실관계 확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시각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제기되는 가짜뉴스의 사안이 어떠한 의도를 갖고 어떠한 측면에서 바라봤는지, 어떠한 결과를 예상하고 해당 가짜뉴스를 만들어냈는지 등 현재와 잠재적인 결과까지 관찰하는 단계가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제1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1_ 강일구
언론이 자신의 보도가 자동으로 민주주의에 기여하리라는 생각은 ‘낙수효과가 양극화를 해결할 것이라는 주장’만큼이나 현실과 괴리된 그럴듯한 논리에 불과하다. 뉴스를 빨리 그리고 많이 만들어내는 것은 언론의 산업적·상업적 이해와 연결됐을 뿐, 민주주의의 성장이나 발전과는 관계가 없다. 시민들이 정치인이 직접 진행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현상이 보여주듯, 언론은 이전처럼 산업적 논리를 바탕으로 뉴스를 만들어서는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정치인의 발언을 검증하고, 맥락을 짚는 것과 같은 전통적 저널리즘의 기능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보도의 가치를 인정받고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다.
우리 언론의 보도는 그동안 민주주의 파괴에 책임이 적지 않다. 사건의 종합적 이해와 검증된 사실 전달은 간과한 채, ‘따옴표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언론의 보도는 정치인의 말과 프레임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며 여론 양극화에 기여했다. 속보성과 흥미를 중심으로 많은 뉴스를 생산하는 ‘공장식 보도’는 언론의 공적 기능에 대한 의구심 낳았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자 시민들은 사회 문제에 대한 나름의 전문성과 통찰을 갖고 있는 유튜버 정치인들의 콘텐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치인 유튜버의 성공은 언론을 통하지 않고도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게 된 미디어 환경의 변화만이 아니라, 언론의 공적기능 부재가 낳은 현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정치인 유튜버의 성공은 언론의 부족한 공적기능을 온전히 보완해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 또한 아니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생산된 콘텐츠는 언제나 정보 왜곡의 우려가 있고, 시민들이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은 더욱 악화 될 수 있다. <홍카콜라>에서 북한에 보낸 귤상자에 돈이 들어 있다는 의혹제기나, 진보 정부 통일안이 연방제라는 것은 근거도 없을뿐더러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한 것이다. 특히, 남북 연방제는 통일의 과정일 뿐인데, 이를 진보 정부 통일의 실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왜곡된 정보로 사회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론의 게이트키핑 없는 유튜브와 같은 공간에서 정치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은 언제나 사회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유튜브를 통해서 가짜뉴스를 만들거나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현재 언론의 문제들이 극복돼야 한다. 뉴스라는 상품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전달하는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검증된 사실과 사건의 맥락을 전달해 시민들에게 언론의 전문성과 공익성을 각인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필요성을 입증해야 한다. 미 대선 토론 때 현장에서 팩트체커들이 실시간으로 후보자들의 발언을 검증하는 일이나, jTBC의 <팩트체크> <비하인드 뉴스> 같은 코너는 언론의 전문성과 공적기능을 보여줄 수 있는 활동들이다. 시민들이 언론의 공적 영역에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효능을 느낀다면, 시민들은 다시 언론을 신뢰하고 돌아올 것이다.
이제 언론의 영향력과 존재감은 ‘사실을 전달한다’는 표면적인 특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언론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보도를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보도 그 자체만으로는 민주주의에 기여한다고 볼 수 없다. 미국의 사회학자 하버트 갠스는 저작 <저널리즘 민주주의에 약긴가 독인가>에서 “저널리즘의 가장 큰 맹점은 언론이 공중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를 신장시킨다는 생각”이라고 언급했다. 보도 자체가 공익성을 갖는다는 게으른 생각에서 벗어나, 공익을 위해 어떤 보도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언론은 항상 해야 한다.
제1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2_ 강덕구
민주국가는 최악의 체스선수다. 체스선수에게 필요한 덕목은 침착성과 결단력이다. 민주국가는 국민여론을 수렴하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거치는 체제의 특성 상, 침착성과 결단력을 결여하고 있다. 즉 흥분은 잘하지만 판단은 느린 선수유형이다. 반대로 전제국가는 국민여론의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 민주적 의사결정을 거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민주국가와 전제국가가 벌이는 외교전은 최악의 선수와 최고의 선수가 대결하는 체스게임과 같다. 한반도라는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오판을 거듭하는 최악의 선수는 한국이다.
남북 정상 회담을 추진할 때 장점으로 여겨졌던 조급함은 외교 정책에선 패착이 됐다. 남북 정상 회담이라는 '행마'가 보이자, 남북연락사무소, 종전선언 등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해빙조치를 실시했다. 이러한 조치는 국내에선 야당을 배제했고, 국외에선 미국과 협의 과정을 생략했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이 불러올 지체를 피하려 했다. 행정부는 국민여론이 평화분위기를 지지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의사결정 과정을 최소화한 것이다. 민주국가의 단점을 피하기 위해 밀실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의사결정에서 배제된 야당은 비핵화 단계가 축소될 가능성을 보자 안보위협을 이유로 정부를 압박했다. 더욱 큰 문제는 미국은 한국 정부와의 협력을 일정 부분 포기했다는 점이다.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ICBM을 폐기하는 스몰딜은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다.
우리 정부는 지금 체스게임을 뒤집어야 한다. 국민여론에 영향을 받는 민주국가의 단점을 오히려 역으로 활용해야 한다. 미국이 쿠바 미사일 사태를 해결한 건 전제국가를 상대하는 민주국가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 덕분이었다. 민주국가 내에선 어떤 결정을 내릴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굉장히 느리지만 국민여론을 수렴하여 결정을 내리는 순간 그것을 되돌리기란 굉장히 힘들다. 케네디는 이러한 민주국가의 특징을 이용하여 흐루시쇼프와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국민여론이 전쟁을 원하고 있다는 점을 허세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민주국가가 전쟁을 선언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흐루시쇼프는 핵미사일 기지 건설을 포기했다. 스몰딜을 통해 핵보유국 반열에 오르려는 북한의 선택을 되돌리려면 ‘국민여론’를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때로 북한을 협박하는 홍준표 의원의 독한 말이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무기가 될 수 있다.
‘체크 메이트’는 킹이 잡힌 것과 마찬가지인 외통수 상황을 가리킨다.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인 체크 메이트를 반전하려면 규칙을 뒤바꿀 관점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스몰딜에 직면한 우리 정부는 국민여론이라는 패를 활용해야 한다.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선 보수 국민의 분노와 음모를 북한을 상대로 한 압박수단으로 이용하는 외교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포용정책으로 일관하는 한국 정부가 또 다른 수를 염두에 두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북한이 추진하는 스몰딜을 막을 수 있다. 즉 체스 게임에 한국과 북한, 미국 외에도 국민 여론을 앉히는 것이다. 이는 정부만이 존재하는 전제국가에게 없는 민주국가의 장점이다. 외통수에 갇힌 한국정부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소란스러운 국민여론에 달려 있다.
제11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3_ 유동현
제12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심사평 & 최우수작
논술 논제
고위 공직자가 갖춰야 할 도덕성의 기준에 ‘국민의 눈높이’라는 요소를 포함해야 하는가. (1500자 안팎)
제12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최우수작_ 조다운
청와대 정체성은 비서동 간판에 드러난다. 노무현은 비서동 이름을 ‘여민관’이라 지었다. 맹자의 여민동락, 국민과 더불어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였다. 후임 이명박은 비서동 명칭을 ‘위민관’으로 바꿨다. 성리학의 위민정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뜻이었다. 한 글자에 담긴 의미는 적지 않다. 여민은 민중을 정치의 동반자로 본다. 반면 위민은 민중을 정치의 수혜자로 본다. 주권자는 파트너인가, 고객인가. 이 질문이 보혁의 정체성을 가른다. 인사에 반영하는 민심 또한 이 질문이 결정한다.
한국 보수는 위민을 말한다. 이는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정치학 이론 중 ‘신탁자론’에 가깝다. 핵심은 엘리트 정치다. 보수주의의 시각에서, 시민은 생계유지로 바쁘다. 통치에 필요한 자질을 기를 여유도, 좋은 정책을 판단할 능력도 없다. 엘리트가 정치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들이 시민보다 성숙한 판단력과 책임감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탁자론에서 정치는 일종의 ‘주권 신탁’이다. 공동체 발전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치인이 책임을 지고, 주권을 대신 운용한다. 때문에 정치가는 시민의 의견에 반하는 결정도 내려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대표자가 유권자의 의견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단념한다면, 봉사하는 게 아니라 배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민을 강조하는 보수의 정체성에선, 국민 정서에 반하는 판단도 때로는 필요하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인사도 문제가 아닌 셈이다.
진보는 다르다. 진보 정부는 여민을 얘기한다. 이는 ‘대표위임론’과 유사하다. 대표위임론은 신탁자론의 왜곡을 경계한다. 토머스 페인은 정치가의 주도적 판단을 비판했다. 대표자의 판단이 민심에 앞서면, 사익 추구에 정치를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력으로 자기 소유 기업의 이익을 추구한 이명박은, 우려가 현실로 바뀐 사례다. 대표위임론에서 정치는 ‘주권 대리’다. 정치인의 역할은 주권자의 의지 대행에 그친다. 그러므로 시민의 견해가 명확히 정치에 반영돼야 한다. 대표위임론이 시민 발안권과 소환권을 주장하는 까닭이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는 개헌안을 내놨다. 촛불혁명으로 시민이 민주주의 역량을 입증했으므로, 국민발안제와 국민소환제를 도입해 직접민주제를 확대하겠다고 했다. 대표위임론의 교과서에 실어도 될 말이다. 이런 정부가 유권자의 견해에 반하는 인사를 임명했다. 정체성 파괴다. 헌법에 직접민주주의를 담자고 했지만, 인사 기준엔 국민 눈높이가 없다. 전후모순이다.
정부 정체성에 부합하는 인사 기준을 마련할 때다. 촛불정부가 국민 눈높이를 외면해선 안된다. 국민 정서가 대표위임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국민 눈높이는 ‘국민의 이익’과 다르지 않다. 토머스 페인은 <상식>에서 “선출된 자들이 유권자와 분리된 이익을 형성해선 결코 안된다”고 말했다. 대표자의 이익과 주권자의 이익이 멀어지면, 주권자에 반하는 정치가 이뤄지는 건 시간문제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은 단적인 사례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고위 공직자도 다르지 않다. 국민 절반이 무주택자다. 3주택자 국토부 장관이 국민 이익을 대표할 수는 없다. 특정 기업 주식 수십억을 보유한 채 판결을 내려왔다. 그런 법관이 국민 권익 보호 최후의 보루인 헌법재판관이라면, 신뢰할 국민은 많지 않다. 국민의 이익이 인사 기준에 포함돼야 한다. 국민 눈높이가 공직 도덕성 평가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를 포함한 외부인사의 공직 인사 검증 참여는 고려할 만한 대안이다.
촛불정부라는 수사만으로 국민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주권자는 자신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 공직자를 원한다. 여민의 정체성 없이, 외제차 가격표만 읊어서는 국민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 초심을 돌아볼 때다. 문재인은 당선 직후 청와대 집무실을 위민관으로 옮기며, 그 이름을 바꿨다. 바뀐 이름은 여민관이다.
제 12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1_ 지윤수
지나친 도덕은 독이 된다. 진화론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도덕의 두 얼굴>에서 도덕의 절대화를 경계한다. 100% 완전무결한 도덕성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도덕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면 지배와 억압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전체주의, 히틀러의 나치즘도 ‘도덕 절대주의’와 함께 등장했다. 히틀러는 독일의 도덕성 회복을 구호로 내세웠다. 이는 유대인이 도덕적으로 독일인과 동등하지 않다는 그릇된 인식을 낳았다. 수만 명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엔 ‘정직은 인생의 보물’, ‘예의 바르게’와 같은 표어가 적혀 있다. 도덕을 최상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다른 가치에 대해선 묵인하거나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고위공직자의 도덕성 검증이 도덕의 절대화로 흐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민의 눈높이는 ‘도덕 절대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국민 눈높이라는 말은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보인다. 민주사회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실상 실체는 모호하다. 국민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지닌다. 도덕성에 대한 눈높이도 제각각이다.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고액 주식 보유에 대해 위법 사항이 없어도 박탈감을 느낄 이가 존재한다. 경제적 자유에 따라 납득 가능하다는 이도 존재한다. 이들 기준을 ‘국민의 눈높이’라는 한 단어로 치환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실체가 모호한 국민적 기준을 내세우는 것은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강제하는 ‘도덕 절대주의’의 모습과 유사하다. 모호하면서도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후보자는 도덕성에 흠결 있는 자로 쉽게 규정된다.
도덕이 절대화될수록 정쟁과 억압의 수단이 된다.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은 후보자의 도덕성을 공격하고 여당은 방어한다. 정권이 교체돼도 여야 구도는 반복된다. 이는 정치권에 있어 청문회의 본질이 인사 검증보다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함에 있음을 방증한다. 이 때 도덕성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도덕성에 대한 흠집내기가 과해지면 후보자의 사적 영역을 침해하기도 한다. 공적 관련성이 떨어지는 사생활까지도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려 드는 것이다. 혼외자 문제나 가족관계가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부담을 느낀 인사들이 중도 사퇴하기도 했다. 그 결과 공직자의 능력은 도외시된다. 인사청문회는 공직에 적합한 도덕성과 전문성을 함께 검증하는 자리다. 정치세력이 도덕적 흠결에만 집중한다면 국민이 알아야 할 후보자의 가치관, 지식, 이념, 경험은 설 자리가 줄어든다.
도덕 절대주의에서 벗어난 ‘도덕 상대주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고위공직자에게 도덕성은 중요한 요소다. 정책을 구현할 때 국민의 신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 장관이 다주택자라면, 교육부 장관이 논문 표절을 일삼았다면 국민은 정책자를 믿고 따를 수 없다. 따라서 후보자가 맡을 직무와 도덕성을 조화하는 기준이 적합해 보인다. 고대 아테네에서도 공직 진출을 제한하는 도덕적 기준이 있었다. 그러나 ’도키마시아’ 제도를 통해 후보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기준을 유연하게 적용했다. 후보자의 도덕적 흠결이 미래 직무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정치권의 자성도 필요하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도덕성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거꾸로 국회의원들은 도덕적으로 무결한가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그들에게 도덕 재판의 권한은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도덕성에 대한 집착을 벗고 합리적인 도덕성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제 12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2_ 송영준
포퓰리즘은 분노를 동반한다. 포퓰리즘이 일으키는 분노는 시스템에 의한 통치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세금만 축낸다는 정치혐오가 시스템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당 정치가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해 대의민주주의라는 기존의 틀을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포퓰리즘이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유다. 문제는 이 분노가 토론과 합리적인 결론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분노는 상대방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배제시키며 생산적인 토론을 통해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을 방해해서다. 그 결과 포퓰리즘은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에만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게 된다. 포퓰리즘으로 인해 독재에 가까운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탄생하여 오히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견제 세력은 국민의 적이 될 뿐이다.
포퓰리즘은 고위 공직자가 갖춰야할 도덕성의 기준에 국민의 눈높이라는 요소를 포함시키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국민의 눈높이는 포퓰리스트들이 이용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다. 대선 당시 트럼프는 러스트벨트 지역의 백인 노동자들이 외국인들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백인들의 분노를 이용해 외국인들을 본국으로 추방시키는 걸 공약으로 세운다면 지지율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백인들이 외국인들에게 일자리를 뺏긴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지금까지도 트럼프의 외국인 차별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지탄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국민의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는 포퓰리즘은 분노의 대상을 배제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국민들의 열망을 왜곡시켜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더불어 전쟁이 일어나 수천만의 인명이 죽은 사례를 본다면, 포퓰리즘을 이용한 지도자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고위 공직자 선출의 문제는 국민의 눈높이에 안 맞아서가 아니다. 공직자 후보 자체의 자격미달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임명하고자 했던 후보자들 중 다수가 임용되기 전부터 내내 비리와 투기 의혹에 휩싸였다. 헌법재판관 이미선 후보는 국민들의 여론조사가 있기 전부터 수십억 어치의 주식투자 의혹에 부딪히기도 했다. 주식 거래 행위에 대해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에 위배된다는 지적 또한 제기되었다. 그래서 여론이 반대하기 전부터 이미 여야 5당 모두가 이미선 후보를 비판할 정도였다. 기존 정치권에서부터 충분히 자격미달의 후보라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국민의 눈높이라는 포퓰리즘적 관점 말고도 다른 기준으로도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을 충분히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을 검증하기 위한 방법은 국민의 눈높이 같은 포퓰리즘적 요소가 아니다. 현 인사검증의 체계 자체가 허술하다는 점을 고치는 게 급선무다. 지금 고위 공직자 검증 업무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 법률이 없는 상황이다. 청와대의 비공개 내규가 전부이다 보니 검증 기간이나 강도가 시도 때도 없이 바뀌곤 한다. 어느 때는 검증 자체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 사례가 '스폰서 의혹'으로 낙마했던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다. 그러므로 인사검증의 내규를 공개하고 제도화하여 더욱 강력한 인사검증 체계와 기준을 마련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인사검증을 할 때부터 미리 도덕성을 검증해 두는 틀이 명확하다면 국민의 눈높이 같은 포퓰리즘적 요소는 필요하지 않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위협하는 포퓰리즘적 시선인 국민의 눈높이는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제 12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3_ 박서희
국민은 업무수행능력과 도덕성을 따져 누구에게, 어떤 정당에 권력을 위임할지 결정한다. 이때 항상 문제가 되는 건 도덕성이다. 도덕성에 대한 눈높이가 사람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도덕성은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이며, 그러므로 모호한 개념이다. 도덕성의 표준을 정하기 어렵다. 간접민주제에서 국민이 대표자에게 권력을 위임할 때 국민 하나하나가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의 총량을 반영해야 하는지, 평균치를 반영해야 하는지, 중위값을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합의한 바 없고, 현실적으로 그런 도덕값을 구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고위공직자가 갖춰야 할 도덕성의 기준이 국민의 눈높이라는 요소를 포함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될 때 의지할 수 있는 구석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간접민주제의 기본원리인 대표성이다.
국민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인물 혹은 정당을 지지한다. 각기 다른 국민의 눈높이는 선거라는 형태로 수렴돼 권력 편성에 직접 반영된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눈높이는 다양한 국민의 도덕적 잣대를 이론적으로 수렴하는 구체적 개념이 되며 이는 당선된 인물로 형상화된다. 선거로 국민이 위임한 권력에 의해 부차적 권력의 위임이 이뤄지는데, 이는 간접적으로 국민의 눈높이가 반영되는 과정이다. 간접민주제에서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 권한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행위는 국민의 눈높이가 반영되는 행위다. 이러한 가정을 부정한다면, 간접민주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간접민주제에서 권력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국민의 지지뿐이며 이것이 곧 권한의 위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간접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고위공직자가 설령 국민에 의해 직접적으로 선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이 위임한 권한에 의해 선출되므로 모든 고위 공직자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인물이어야 하며, 이론상으로는 국민의 눈높이에 이미 맞는 인물이다.
이론상으로는 도덕성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아야 하는 고위공직자가 현실적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면 그것은 제도에 허점이 있기 때문이지 국민의 눈높이를 맞춰야하는가를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전수안 전 대법관은 후보자였던 이미선 헌법재판관을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헌법재판관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국민의 눈높이’ 프레임이 정말로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냐고 날 선 질문을 던졌다. 몇몇 국회의원이 마치 따옴표 저널리즘과 같은 방식으로 국민의 입을 빌려 의원과 의원이 속한 정당의 입장을 밝힌 것이 아니냐는 의미다. 그의 말대로 의원들이 말하는 ‘국민의 눈높이’는 ‘국민’으로부터 나온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국민의 입이 되어야 할 국회가 그렇지 못한 것의 문제이지, 국민의 눈높이 자체가 인사과정에 반영되는 것에 회의를 가질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간접민주제의 존립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진짜 문제는 국민의 눈높이가 권력에 잘 반영되고 있는가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국회의원이 고위공직자 임명을 반대하며 외치는 ‘국민의 눈높이’는 공허해진다. 선거제 개편이나 국회 인준 강화와 같은 장치로 국민의 뜻이 권력에 잘 반영될 수 있게 해야 한다. 국민의 눈높이가 제도적 문제로 제대로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민의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므로 절대 간과돼서는 안 된다. 그것만이 고위 공직자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그것만이 고위공직자의 권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13회 논술 논제
친일(親日) 친미(親美) 친북(親北) vs. 반일(反日) 반미(反美) 반북(反北) (1500자 안팎)
제 13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최우수작_지윤수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유치한 이 물음은 인간이 최초로 마주하는 ‘구분짓기’ 순간일 것이다. 여기엔 자신이 더 좋다고 대답하길 바라는 바람이 깔려있다. 구분짓기는 우리 편을 확인하려는 욕망에서 온다. 이를 통해 내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결속을 강화한다. 국가 간 문제에 있어 구분짓기가 불러오는 것은 ‘애국심’이다. 위기를 맞은 한국 사회는 애국심을 중심으로 뭉치곤 했다. IMF 금모으기운동이 대표적이다. 힘을 합쳐야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불매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강제징용 판결에 반대한다면 ‘친일’이라는 딱지도 붙는다. 과연 이를 민족적 정체성을 둘러싼 구분짓기와 대립이라고 볼 수 있을까.
‘친일 친미 친북vs반일 반미 반북’이라는 구분짓기는 허상이다. 국가관은 더 이상 정체성의 구분기준이 될 수 없어서다. 과거 전쟁은 국민의 삶과 의식주를 위협했다. 무력 없는 국제분쟁이 빈번한 지금 국민은 크게 영향 받지 않고 삶을 영유한다. 국가이익이 곧 개인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가치관은 국가관을 압도한다. 평창올림픽 남북단일팀 논란에 달라진 인식이 담겨 있다. 애국심이 주효하다면, 단일팀은 평화 국면에 이롭다는 점에서 합당하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국가가 개인의 노력을 훼손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제 국민은 국가와 관계없이 개별 가치관을 추구한다. 그동안 한국 보수는 ‘반북 친미 친일’, 진보는 ‘친북 반미 반일’ 성향으로 규정돼왔다. 오늘날 평화 가치를 우선하는 개인이라면 친북, 친미, 친일할 것이다. “일본 좋아, 싫어?”라는 물음만으로 구분짓기 자체를 할 수 없는 이유다. 그에 따르는 애국심 또한 실재하지 않게 된다.
국가 간 문제는 오히려 자본을 둘러싼 갈등에 가깝다. 이라크 전쟁은 국가 간 첨예한 대립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라크 석유자본을 둘러싼 미국의 욕심이었다고 평가하는 시각이 다수다. 한일갈등도 같은 맥락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양국 동의 하 청구권 ‘소멸’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쓰지 않았다. 오랜 시간 묵혀온 갈등의 소지가 강제징용 배상을 계기로 불거진 것이다. 일본 기업의 경제적 손실을 우려한 일본은 수출규제 카드를 꺼냈다. 이는 한국 자본을 겨냥한다. 사안은 ‘한국vs일본’에서 ‘한국 자본vs일본 자본’으로 치환된다. 국민 불매운동은 ‘일본이 경제적 피해를 끼쳤으니 일본도 피해를 봐야한다’는 인식의 결과다. 불매운동이 소비에 국한될 뿐 일본, 일본인 자체에 대한 혐오로 표출되진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애국심보다 이해득실 문제의 연장선이다.
그럼에도 정치세력은 ‘친일 친미 친북vs반일 반미 반북’ 구분짓기를 외친다. 남북정상회담을 ‘종북’으로 매도하고 죽창가로 반일을 부추긴다. 그러나 실재하는 건 각각 평화국면과 수출위기일 뿐이다. 낡은 국가관은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민주사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구분짓기 프레임은 갈등 해결에도 해롭다. 한국 정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국민을 동원해야 한다면, 거꾸로 일본 국민도 아베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강대강‘ 대치의 연속이다. 되살려야하는 건 실리다. 김대중-오부치공동선언으로 일본대중문화가 국내에 개방됐다. 여론의 반발이 컸다. 그러나 이는 훗날 한류가 세계로 확산되는 데 기여한다. 철저히 실리를 계산한 결과다. 자신의 정치 이익을 뒤로 하고, 국민 이익을 지킬 방법을 고민할 때다.
제 13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1_ 이정한
독일어 퓌러(Fuehrer)는 ‘있지만 없는’단어다. 퓌러는 본래 지도자를 뜻한다. 그러나 나치 시대 때 히틀러를 지칭하던 단어로 사용된 후 이제는 원래의 지도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단어에서 히틀러가 강하게 연상되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단어가 정치사회적 배경에 갇힌 것이다. 친일, 친미, 친북과 반일, 반미, 반북도 마찬가지다. 단어들 각각이 정치사회적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각 단어는 정치 프레임으로 많이 사용돼 왔다. 상대에게 부정적인 색채를 씌워 공격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친일은 한국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하나의 금기가 됐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의 이익에 반할 수 있는 반일도 긍정적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친북과 반미는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세력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반북은 한민족을, 친미는 민족의 자립을 부정하는 것만 같다. 상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레이코프가 말했듯이 단순히 프레임을 부정하는 것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 결국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데 힘을 쏟기보다 상대를 프레임에 가두는 데 열을 올린다. 정치판에서 계속되는 이념 논쟁의 양상이다.
이런 프레임은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단순하게 만드는 ‘위축의 효과’를 낳는다. ‘쇠고기 시위로 돌아온 반미 단체들’2008년 5월 5일 자 『조선일보』 기사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반미로 규정했다. 그러나 당시 집회에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던 수십,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학교 자율화 정책을 반대하는 학생들과 한미 FTA를 반대하는 농민들,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말을 하고 있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나온 반미 프레임에 시민의 목소리는 왜곡됐다.
정치권은 프레임에 갇혀 정책과 이념을 다양하게 펼치지 못한다. 친미반북과 반미친북은 마치 등식처럼 엮여 있다. 2008년 촛불집회 때도 한나라당은 반미와 친북을 동일선상에 뒀다. 친북 세력이 그들의 목적을 위해 반미를 주도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친일과 반일이 추가되기도 한다. 현재 진행 중인 한일 갈등에서 ‘토착 왜구’의 대응 프레임으로 ‘토착 빨갱이’가 나온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프레임 안에서는 ‘친일’적이고 ‘친미’적이며 ‘친북’적인 정책이 나오기 어렵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계는 계속 변하는데 한국의 정치권은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모적인 구시대적 프레임 싸움을 끝내야 한다. 사회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국가에도 무익한 이념 논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독일에서 퓌러는 하나의 터부가 됐다. 단어는 남아있지만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배경이 강하게 연상되는 단어를 정치적으로 쓰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현실과 무관하게 프레임이 남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면 친일 등의 단어에 포함된 부정적 의미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권이 무의미한 논쟁에서 벗어나 현실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제 13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2_ 김신애
<어떻게 민주주의가 무너지는가>는 정치규범이 준수되지 않을 때 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한다. 대표적인 정치규범으론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든다. 상호관용은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의 집단 의지를 뜻한다. 제도적 자제는 권리를 행사할 때 강대강 대치를 피하기 위해 신중해야 한다는 자제의 정신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상대를 적이 아닌 경쟁자로 바라보며 협치하는 태도를 말한다. 정치권에선 상대를 친일 친미 친북 또는 반일 반미 반북 세력으로 낙인찍는다. 과거부터 지속된 빨갱이 프레임이나 요즘 논란이 되는 친일 프레임이 예가 된다. 이러한 낙인은 상대를 적으로 상정하는 것으로 협치를 어렵게 한다. 우리는 정치규범이 지켜지지 않을 때,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친일 친미 친북 대 반일 반미 반북 프레임은 한국정치의 수구성을 드러낸다. 일제강점기, 미군정, 6.25를 겪으며 우리는 외세와 북에 대한 입장차로 대립해왔다. 정치인들은 외세(미, 일)와 북에 대한 입장차를 정권유지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반북 반공을 이유로 독재를 정당화했던 이승만, 박정희 정부와 선거승리를 위해 북풍을 활용한 정치인들이 그 예다. 한반도 평화가 진전되고 한일 교류 협력이 심화된 현재도 외세에 대한 친/반 대립 프레임은 여전하다. 자유한국당은 합리적 근거와 대안 대신 좌파독재, 친북 낙인으로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한다.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여당은 신 친일파, 일본을 위한 X맨이라며 야당에 친일 딱지를 붙인다. 수구란 변화를 거부하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도를 뜻한다. 이러한 대립적 낙인은 변화된 시대상을 뒤로하고, 과거 시민을 분열시켰던 외세에 대한 입장차를 재활용한다는 점에서 수구적이다.
수구적인 친/반 대립프레임은 정치규범의 와해를 동반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정치인들은 외세와 북에 대한 친/반 프레임을 상대를 비난할 때 활용한다. 프레임 대립으로 상대의 다른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상호관용의 정치규범은 사라진다. 상대는 경쟁자가 아닌 적이 된다. 적으로 상정된 상대를 비난하는데 법적 권리를 오남용한다. 결국 제도적 자제의 규범마저 저버린다. 박근혜 이명박 정부는 야당을 폄훼하기 위해 친북, 종북이란 색깔론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했다. 이를 위해 정보기관을 동원해 권력 분립의 원칙을 저버렸다. 한국당은 색깔론을 들며 패스트트랙 저지를 위한 장외투쟁을 이어갔다. 여야간 대치국면은 심화되고, 국회에 산적한 민생법안과 추경처리는 지연되었다. 정당 간 설득과 타협을 통해 변화를 이뤄내는 민주주의 정치 과정은 멈춰섰다.
정치권은 수구적인 친/반 대립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란 정치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그리고 수구는 변화를 대하는 태도에서 갈린다. 변화의 위기가 닥쳤을 때 위기에 맞서는 사람은 수구다. 반면 보수와 진보는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한다. 파도에 맞서거나 파도를 타는 것이다. 파도에 맞서 이기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수구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한반도 평화가 진전되며 북미와 남북 간의 화해의 기류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와 달리 한일은 전 영역에서 긴밀한 협력을 필요로 하는 관계다.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이라면 변화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수구적인 친/반 대립프레임을 꺼내든다면, 그들은 수구일 뿐이다. 정치세력이 수구가 아닌 보수와 진보로 거듭나기 위해선 시민들의 견제가 필요하다. 시민들은 친일 친미 친북 대 반일 반미 반북 프레임으로 한국사회를 편가르기 하는 이들을 주목해야한다. 수구가 역사속에서 사라졌든 시민은 수구적 프레임으로 편가르기 하는 정치세력을 표로 사라지게 해야 한다.
제 13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3_ 김수연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갈등을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으로 구분했다. 전자는 경제적 분배나 복지 문제와 같은 협상과 조정이 가능한 영역을 뜻한다. 반면 후자는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 등 나눌 수 없는 관념적 특성을 지닌다. 한국 사회의 고착화된 이념이 이에 속한다. 문제는 이 나눌 수 없는 영역을 무리하게 나누려 할 때 발생한다. 친일-반일, 친미-반미, 친북-반북 등으로 나뉘는 이념적 대립은 나눌 수 없는 갈등의 특성상 양보나 타협의 여지가 낮다. 결국 사회는 양극단으로 갈라지고 통합은 부차적인 사안으로 밀려나게 된다. 한반도 평화라는 궁극적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이념에 매몰된 인식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이념적 양극화는 ‘나눌 수 없는 갈등’의 영역이다. 실체가 없는 시대착오적인 허상이기에 그렇다. 북한에 대한 이념적 대립이 대표적이다. 6.25 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대표되는 공산당에 대한 반감은 2019년 현재 그 의미를 상실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며 남북 회동이 열리고 평화협정이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더 이상 남한의 주적이 아님을 국방백서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념의 고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를 이용하는 정치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 선거철마다 상대 진영의 후보에게 ‘종북’ 프레임을 씌워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1년, 1987년에 이어 1992년까지 보수 야당의 빨갱이 공격을 받았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손잡은 끝에 프레임 공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상 본질과는 무관한, 보이지 않는 허상이 사회를 이분법으로 나누고 정치싸움을 부치기는 꼴이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을 나눔의 영역으로 끌고 올 때 복합적인 문제는 단순화되고 해결은 요원해진다. 다양한 관점이 필요한 외교나 역사 문제조차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다보니 해결 방안 역시 이분법 결말로 한정되는 것이다. 최근 여야의 ‘친일’ 낙인찍기 전쟁이 그렇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유한국당을 향해 “토착 왜구세력”이라 비난하고, 한국당은 “친일파 후손은 민주당에 더 많다”며 받아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무의미한 논쟁에 국회는 파행을 거듭하며 일하지 않는 국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친일파냐’가 아닌, ‘일본의 경제 보복에 어떻게 대응할까’이다. 한일 갈등에 대해 합의하고 결속해 안보 대안을 마련해야 할 정치권이 국론 분열만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문제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을 했을 때 얼마나 머물렀고, 다자회담 때 우리 대통령과 몇분을 대화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친미-반미 논쟁에 휩싸여 우리 정부의 대미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한반도 평화는 고차원의 논의는 사라지고 편가르기에만 매몰된 모양새다.
이념적 대립에서 벗어난 탈이념적 사고가 필요하다. 실질적인 대화와 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해 허상이 아닌 현실적 관점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정치권은 이념 대립없이 통합이 가능함을 깨달아야 한다. 양극단 사이의 ‘교집합’ 찾기가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보수 정당에도 진보 정당과의 공통점이 있다. 이전 보수 정당들의 평화 통일 정체성이 그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7.4 남북공동성명’을,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남북 기본합의서’를, 이명박 전 대통령은 ‘비핵‧개방 3000’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진행한 역사가 있다. 이념의 시각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국제 정세에 대응할 단단한 내부 결집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제14회 백일장 논술 논제
선출된 권력 vs. 선출되지 않은 권력 (1500자 안팎)
제14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최우수작_ 김준태
‘인간은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협력하지 않고 서로를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다.’ 제임스 메디슨을 비롯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골치 아프게 했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그들은 파벌 문제가 심각하다고 봤다. 공공선보다는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개인이나 집단 얘기다. 권력을 가진 강한 파벌은 사회를 좀먹었다. 이들의 폐해를 막아야 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 건 없다.
‘기소율 2%’라는 수치에서 드러나듯 내부인에 대해선 봐주기 수사를 일삼으며 사법 정의를 훼손하는 검찰이 있다. 노동구조 이원화 속 절규에도 아랑곳 않고 더 많은 이익만을 탐하는 경제권력도 있다. 파벌의 횡포는 우리도 마주하는 현실이다. ‘선출권력론’은 여기서 탄생했다.
선출권력론은 엇나가는 권력집단에 대한 대응이다. 검찰이나 경제, 언론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의 손아귀에 놓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검찰 따위의 파벌이 국민의 뜻을 이행하는 정부의 개혁안에 반발한다는 사실은 문제가 된다. 이는 선출권력이 더 나을 것이란 믿음에서 출발한다. 비선출권력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집안과 같은 조건이 권력을 부여한다. 선출권력은 국민의 지지로 힘을 얻는다. 권력의 원천이 다르니 충성의 대상도 다르다. 국민에게 충성하며 주기적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공공선을 추구할 것이라는, 그래서 더 우월하다는 분석이다.
안타깝지만 파벌은 선출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마주한 현실이 그랬다. 이들에게 파벌의 대표적 예시는 영국의 의회였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의회는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사실 흔한 일이다. 인권 말살의 대명사 히틀러조차 국민의 지지로 힘을 얻었다.
최근 계엄령 논란에 휩싸인 자유한국당 모 의원들도 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시민들을 억압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는 이들은 선출된 권력이다. ‘선출된 파벌’은 국민을 위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선거가 끝나면 다시금 노예로 돌아간다는 루소의 말은 일견 현실적이다.
필요한 것은 선출권력론이 아니다. 국민을 위하지 않는 선출권력이 여타 권력을 올바르게 계도한다는 전망은 힘들다. 오히려 자신의 입맛에 맞게 다른 권력들을 주무를 수 있다. ‘올바른 권력’의 가늠자가 되지 못하는 선출권력론은 벗어던져야 한다. 그렇다고 파벌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것도 우습다. 자유로운 의견개진과 결사를 막는 셈이다. 제임스 메디슨의 말처럼 ‘불이 문제라고 공기를 없애버리는 꼴’이나 다름없다.
메디슨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파벌은 자유로운 사회에선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그러니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상호견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서로 함부로 할 수 없게, 엇나갈 수 없게 하는 관계를 만들자는 얘기다. 현재의 파벌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교훈이다. 검찰에겐 공수처가, 경제단체나 언론에겐 시민단체와 국가기관 등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한 쪽을 우위에 두고자 하는 것.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 사이에 ‘vs’ 딱지를 붙이는 데는 저런 마음이 숨어있다. 둘 중에 나은 것이 진짜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나은 쪽이라도 변질될 수 있다. 상호견제가 아닌 한쪽의 통제는 파벌의 폐해를 막을 수 없다. 힘센 쪽은 새로운 파벌이 될지도 모른다. 액튼의 말마따나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테니 말이다.
제14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1_ 배민구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이 마주하는 첫 민주주의 활동은 초등학교 반장선거다. 희망하는 학생들이 출마를 선언하면 선거를 치러 한 명을 선출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경험하는 첫 선출된 권력이다. 그러나 반장의 권력은 미약하다. 반의 대소사는 선생님의 지시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반장선거 후보가 제시할 수 있는 공약은 몹시 한정적이다. 결국 반장 선거는 후보 간 공약 대결의 장이 아닌 인기나 영향력 대결의 장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문열 작가가 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처럼, 대한민국 국민이 뽑는 첫 선출직은 힘이 세거나 돈이 많아 영향력을 발휘하기 쉬운 일진들을 위한 자리로 쉽게 전락하고는 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학교의 또 다른 이름은 작은 사회다.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대결 구도는 허상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처럼, 선출된 권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시리즈는 가정의 재산이 자녀의 학력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연구를 소개했다. 연구 결과, 고소득 가정의 자녀일수록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이 현저히 높았다. 이렇게 학력으로 이어진 부는 선출된 권력에도 영향을 준다. 20대 국회의원의 평균 재산은 20억이 넘으며, 서울대‧연세대‧고려대 학사 학위를 가진 사람은 절반에 이른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동등하게 대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을 놓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끼리 대결하고 있다. 이 대결장에서 가난하거나 학력이 부족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부의 불평등을 비판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버니 샌더스조차 가난한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선출된 권력은 기득권층에게 돌아간다. 비기득권층은 선출된 권력을 가지기는커녕 선출된 권력을 위한 대결장에 서기조차 힘들다. 국회의원 후보 1인당 선거에서 평균적으로 사용하는 선거 비용이 1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비기득권층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란 매우 제한적이다. 대다수의 비기득권층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기득권층을 투표해주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
비기득권층도 선출된 권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한 이상, 선출된 권력의 의사결정은 모든 국민의 의사결정과 같은 정당성과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기득권층이 비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상황에서 비기득권층의 목소리가 사회에 반영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근 불거진 조국 법무부 장관 논란은 단적인 사례다. 지금의 촛불 정부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권력이다. 그런데도 촛불 정부가 임명한 조국 법무부 장관은 자녀의 논문 제1저자 논란 등 다른 기득권층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여 수많은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고민할 때가 아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가졌든 가지지 못했든 차별 없이 선출된 권력을 갖기 위해 대결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게 나라냐”는 국민들의 외침에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나라다운 나라에 비기득권층도 들어있는지 초심을 돌아볼 때다.
제14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2_ 신현정
권력은 선출과 별개로 견제와 통제가 필요한 요소다. 대의제에서 선출은 주권 위임과 동일시된다.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통제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위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권리를 위임한 순간부터는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선출된 권력이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든 핵심은 선출이 아닌 권력이다. 선출에서 민주적 정당성을 찾으려는 두 권력 간 대결은 무의미하다.
우리 사회는 ‘선출’에서 권력 행사의 민주적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 대의제에서 선출은 선거를 통해 국민의 주권, 권력을 위임한다는 의미다. 국민의 주권 위임이므로 민주적 정당성과 권위를 가진다.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 등에 의해 훼손되면, 이는 곧 국민의 주권 훼손과 동일시돼 민주주의 위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국민의 주권은 제대로 행사되지 않는다. 국민의 뜻과 다르더라도 선출된 권력에 의해 권력은 행사된다. 주권 위임 후 국민이 선출된 권력을 통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루소의 말처럼 국민은 투표소 안에서만 주권자이고, 선거가 끝나면 권력자의 노예가 될 뿐이다.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문제는 선출이 아닌, ‘권력’에 있다. 선출로서 민주적 정당성을 얻는 것과 별개로 권력은 부패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선출된 권력이었다. 하지만 선출된 권력이 가진 권력은 남용됐고 국정농단이란 결과를 초래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찰 또한 마찬가지다. 수사, 기소, 공소제기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검찰 권력은 부패했다. 민생법안 처리를 국민들은 바라지만 국회는 여전히 조국 사태에 빠져있다. 대의제에서 주권은 제대로 행사될 수 없으며, 권력이 있는 곳에는 부패가 필연적이다.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대결은 무의미하다.
선출된 권력이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든, 권력에는 견제와 통제가 필수다. 결국 권력이 존재하는 곳에는 선출과 별개로 견제와 통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민주적 정당성은 주권이 행사될 수 있는 견제와 통제 장치에서 나타난다. 권력이 집중된 곳은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특히 막강한 검찰의 권한 분산에 검경 수사권 조정이 필요하다. 현재 인사 청문회의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검찰총장과 경찰청장에 대해서도 국회 동의를 받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 또한, 권력기관 내 국민의 참여 통로를 열어야 한다. 국회에는 국민 참여형 입법제도와 국민 소환제, 사법에서는 국민 참여형 재판의 확대 등이 필요하다. 선출된 권력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견제하고, 두 권력을 모두 국민이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는 권력을 대결구도로 본다면, 민주주의는 발전하기 힘들다. 선출된 권력도 부패하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도 부패한다. 두 권력은 서로를 견제해야하며, 그 견제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국민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에 방점을 두고 두 세력을 견제, 통제해야 한다는 의미다.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 대결의 핵심은 선출이 아닌, 권력이다.
제14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우수작3_ 박상연
대통령은 선출된 권력인 동시에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지난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자는 41%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됐다. 투표자 60%의 동의나 지지 없이 제1 권력을 독차지한 것이다. 18대 대선은 더 치열했다. 문 후보자는 48% 득표율을 받았지만, 3%p가량 차이로 박근혜 후보자가 당선됐다. 유권자와 지지자 입장에서 볼 때 ‘51대 48’이 ‘1 대 0’으로 귀결되는 것은 불합리하다. 권력을 선출한 시민과 선출하지 않은 시민 사이에 긴장과 균열이 민주주의 안에서 숨 쉬는 이유다. 긴장과 균열을 흡수해 권력에 대한 적절한 감시와 비판, 지지로 전환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가 이에 실패하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독이 된다.
대의 민주주의의 구성요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적대 정치로 변질되기 쉽다. 대의제 속성 자체가 배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등은 결과적으로 승자독식주의 구조라 2위 이하 후보를 지지한 민심은 국정 운영에 반영되기 어렵다. 권력은 한 곳으로 집중되지만 민심은 다양하기에, 사회엔 정당, 시민단체 같은 대변 기구와 언론 등의 감시 역할이 필수다. 그러나 정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에 몰두하면 민심은 정당 지지를 위한 거수기로 전락한다. 언론이 보수와 진보 대결 구도를 부추기고 편 가르기에 동참한다면 유권자는 투사로서 존재할 뿐이다. 최근 ‘광화문 대 서초동, 여의도’ 집회에 대응하는 정치권과 언론의 행태가 이를 선명히 보여준다.
적대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가 인물 중심 정치로 협소해진다는 점이다. 적대 정치는 갈등을 자양분 삼아 생각이 다른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 집중한다. 공약이나 정책 방향 비판 같은 건설적인 토론의 장이 설 곳이 없다. 선출 권력에 대한 비판과 지지는 맹목적이다. ‘반(反)문재인 연대를 만들겠다’는 유력 정치인의 공언이 대표적이다. 민심 역시 문 대통령의 공약과 개별 정책들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문 정부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로 나뉜다. 타협의 정치는 멀어지고, 승자독식의 선거 정치만 이어진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인 이유는 시민이 직접 대표를 뽑는 기회라서만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들이 자신을 선출하지 않은 민심까지 포용하고 공존하기 위한 방향을 고심해야 하기 때문에서다. 이른바 ‘조국 사태’로 국론이 분열되고 광장이 쪼개졌다고 하지만 이는 틀린 분석이다. 본래 대의제는 언제든 적대정치를 낳을 수 있다. 조국 사태 이전부터 정당 정치는 갈등을 해소하는 능력이 부족해 대립과 반목만 낳았고, 언론은 이를 생중계하듯 부추겨 왔다. 대의제의 가치는 권력을 선출한 쪽과 선출하지 않은 쪽 사이의 이견과 갈등을 협의해가는 과정에서 빛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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