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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파동을 거치면서 쇠고기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이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는 원산지 표시를 엄격히 시행한다고 하지만 현저한 가격 차이는 미국산 쇠고기를 한우로 둔갑시킬 것이 자명합니다.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소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값싼 상품을 비싼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마술을 곧잘 부려왔습니다.
영국에서는 광우병 파동을 거치면서 채식주의자들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불교계가 나서서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선도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아직도 촛불은 끄지지 않았고, 대중의 역동성이 뜻밖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전한 쇠고기가 확보된다고 할지라도 채식은 불교적인 삶의 양식으로 확장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새로운 신행운동 차원에서 채식문화를 정착시켜 나간다면 가장 불교적이면서 대안적 문화운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래 글은 촛불문화재가 한참일 때 기고한 글입니다.
채식, 밥상위의 자비
서재영(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1. 연기와 불살생
불교는 모든 존재의 연기적 상호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핵심으로 한다. 삼라만상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법계연기론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자각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불살생과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실천윤리가 나온다. 불살생을 계율의 제1조항으로 제시하는 것도 이와 같은 연기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연기설하면 형이상학적 문제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연기는 우리들의 밥상 위에도 있다. 모든 존재는 밥상 위에서 먹이사슬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매일 매일 밥상 위의 성찬(聖餐)을 통해 삶과 죽음의 순환을 거듭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바로 그 밥상이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생명의 근원인 밥상이 오염되므로 인해 인간의 삶도 위협받고 있다. 밥상이 오염되었다는 것은 밥상을 매개로 한 무수한 생명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살생과 자비의 실천도 밥상머리에서부터 고민되어야 한다. 밥상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삶의 공간이자 생명활동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밥상을 위협하는가? 표면적으로 보면 그것은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광우병, 아시아를 휩쓴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등이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대응은 밥상을 위기로 내몬 현상을 제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일례로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330만두의 소를 살처분했고, 구제역이 창궐한 아시아에서는 5백만 두가 넘는 돼지를 살처분했다. 특히 2008년 봄 한국에서는 불과 한 달 만에 조류독감을 이유로 7백만 수가 넘는 가금류를 잔인한 방식으로 살처분했다.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 100만개의 촛불이 밝혀졌다. 물론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은 마땅히 저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일까? 가축질병을 차단하기 위해 동물을 살처분하고, 위험한 쇠고기의 수입을 막는 것만으로 정부의 역할은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비와 불살생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불자들이라면 설사 안전한 쇠고기가 들어오고,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완전히 통제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삶이 지속되는 한 자비와 불살생의 실천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2. 동물과 인간의 비극
흔히 사람들은 밥상의 위기를 불러온 주범으로 비위생적인 사육환경을 꼽는다. 실제로 가축들은 비좁고 더러운 축사에 갇혀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갖가지 질병에 감염되고, 또 이를 막기 위해 온갖 항생제가 남용된다. 그리고 이것은 육식문화를 타고 인간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어 인체의 항생제 내성을 초래한다.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배경에는 기업화된 축산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 산업화된 농장에서 동물들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마치 공산품처럼 취급받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행위를 정당화 하는 것이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는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관이다. 동물의 권리를 주창하는 톰 레건은 동물과 관련된 갖가지 비극의 원천은 생명을 가진 동물을 돈을 위해 임의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보는 것’라고 지적했다. 초국적 자본은 경제적 이윤만을 추구하는 괴기스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도구적 가치론은 그런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변론하고, 식량과 자원이라는 가면을 씌워 도덕적 결함을 은폐한다.
문제는 불살생을 제1의 실천윤리로 삼고 있는 불자들마저 이 같은 담론을 수용하고 동물을 자원의 문제로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가치관과 식생활 습관의 본질적 전환 없이는 작금의 문제는 앞으로도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모든 비극을 탄생시킨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식육문화 그 자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식육문화가 온존하는 이상 잔인한 사육과 끔찍한 도축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매년 우리나라에서 도축되는 가축의 숫자만 봐도 명백해 진다. 한국에서만 매년 약 61만 두의 소와 약 1,400만두의 돼지, 그리고 약 7천 만수의 닭이 도축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약 230억 마리의 가축이 사육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가축의 비극은 동물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포식자인 인간 역시 이 같은 문화에 의해 고통 받는 것이 인과응보의 이치다. 식탁을 통해 타자와 연기적 관계를 형성하는 이상 동물들의 고통은 그대로 인간의 문제로 전이된다. 광우병은 물론 각종 성장호르몬과 항생제로 인해 인간 역시 갖가지 질병과 비만으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측면으로까지 확장된다. 문화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은 고기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공격과 성욕’의 상징으로 여겨왔다고 지적한다. 식육문화는 전쟁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성격을 공격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소련의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폭력범죄자의 87%가 가축을 학대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고기를 먹으면 자비의 종자가 끊어져 중생들이 도망간다.”는 [범망경]의 말씀과 “고기를 먹으면 색력(色力)을 일으킨다.”는 [능가경]의 말씀은 설득력 있는 과학적 근거가 확보되는 셈이다. 결국 식육을 통해 얻어지는 에너지는 공격성이나 성욕과 같은 부정한 에너지로 표출되고, 그로 인해 인간 스스로도 고통 받게 된다는 것이다.
3. 윤회와 생명의 순환
불교윤리를 떠받치는 또 다른 축은 윤회사상이다. 자비와 불살생의 윤리는 윤회사상과 결합함으로써 윤리적 실천의 영역은 전생과 내생으로 시공이 확장된다. [능가경]은 윤회설에 근거하여 모든 중생은 윤회를 통해 부모자식의 관계를 반복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식육은 자신의 부모와 가족을 잡아먹는 동족포식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범망경]은 모든 생명은 윤회를 통해 종(種)을 교차하여 태어남으로 인간과 동물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모든 생명은 한 가족으로 인식되며, 삼계 육도의 중생세간은 한 집안이 된다. 그리고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을 자비롭게 보살피는 어버이[四生慈父]로 표현된다.
이처럼 불교는 뭇 생명의 종교임을 공언하는 만큼 자비와 불살생의 문제 역시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 모든 생명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윤리가 된다. 따라서 불교적 신념을 받아들이는 이상 식육은 정당화될 수 없다. 불자라면 핍박받는 생명에 대해 무한한 자비심을 가져야 하며, 자비행은 불자의 당위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식육이 살생의 비극에 근거해 있다면 지양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한 점의 고기를 줄이면 그 만큼의 생명이 살 수 있으며, 한 끼를 채식하면 그 만큼의 생명을 방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자라고 자부하는 이상 안전한 고기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식육문화 자체를 반성하고 채식과 같은 대안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오랜 식습관을 단번에 바꾸기 어렵다면 점진적으로 바꿔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처음에는 고기 안 먹는 날을 정해 일주일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번 채식하는 날로 정해서 실천하는 방안이 있다. 다음 단계는 채식을 위주로 하되, 고기 먹는 날을 정해서 일주일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번만 먹도록 한다. 필자는 두 번째 방법을 통해 식육을 줄여가고 있다. 또 회식이나 모임에서 최대한 육식메뉴를 피하는 것도 식육문화를 줄이는 방법이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삼겹살이나 갈비찜 같이 육류메뉴를 회피함으로써 적극적 육류소비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의 연기성을 자각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들의 밥상 위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불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오늘부터 밥상 위에서 자비를 실천할 일이다. 이 같은 실천이야말로 광우병 파동을 겪으면서 불자들이 보여줄 수 있는 성숙한 자각이자 대안적 삶에 대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월간 붓다 2008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