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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동(栢子洞)
긴골, 진골, 장곡(長谷) 촌
보현산과 갈천에서 흐르는 물이 합수되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골이 길어서 긴골, 장곡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진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래실, 몰래실, 사곡(沙谷), 세난곡(世亂谷)촌
약 100여 년전 대원군 시대에 고성태라는 천주교인이 박해를 피하여 왔으나 학살당하고 계곡이름을 세란곡이라 하였으며 타인이 모르게 들어온 것이라 하여 몰래실이라 하였으나, 그후 모래실, 사곡으로 변하였다.
잣나무골, 백장, 백자곡 촌
약 500년 전 경주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잣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잣나무골이라고 불렀다
수락동(水洛洞)
무지개, 수락(水洛) 촌
수락동의 중심 마을로 보현 기슭에 있으며 이 마을 뒤에 약수터가 있는데 약 120년 전 이 약수터에 무지개가 뿌리를 박고 뻗쳤다고 한다. 이로부터 수락동을 무지개로 불렀다.
중다리, 중마 촌
수락학교에서 북동방 3km 지점에 위치하여 무계동과 수락동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다리, 중마라고 하게 되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본동리에서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등골, 등곡(燈谷)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마을 앞 산의 모양이 등잔처럼 생겨서 등골 또는 등곡이라 하게 되었다.
당골, 단골, 당곡(堂谷), 단곡(檀谷) 촌
약350년 전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으며 이 마을 입구에 단나무가 많다고 하여 단곡, 당골이라 불렀다 하며 현재도 마을 앞 숲에는 수령 400년 정도의 나무가 서 있다.
무계동(武溪洞)
새산, 간산(間山) 촌
청송군, 포항시, 영천군 3개의 군의 경계가 되는 곳에 위치하는 마을이며 험준한 산 사이에 있으므로 간산 즉 사이산 줄여서 새산이라 칭하게 되었다.
누릿발, 유전(楡田) 촌
보현산 기슭 골짜기의 조그만 마을로 약 500년전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당시에는 느릅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유전이라 하였다. 주민들은 약초 채취와 고추 등의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말방, 두암(斗岩) 촌
약 400년전에 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마을 뒤에 말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말방, 두암이라 불렀다. 아릿마(아랫마)와 웃마(음지뜸)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하는 마을이다.
중뜸 촌
말방과 유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중뜸이라고 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자연부락으로 산채와 약초를 채취하며 고추와 담배농사로 생활을 유지한다.
칠미기 촌
새산 마을의 남쪽에 있으며 보현산의 기슭에 위치하며 마을 앞과 뒷산에 칡덩굴이 온 산을 뒤덮어 마을 이름을 칡목이라 하였는데 칠목이 칠미기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무지개, 물지개, 양지무지개, 무계 촌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마을의 생긴 모습이 마치 무지개같이 생겼다고 하여 무지개라 하였으며, 또한 양지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양지무지개라고도 하였다.
조듬이, 조디미, 조암(鳥岩) 촌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앞산 바위위에 큰 새가 서식하였는데 이 새가 이 마을을 보호하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조디미, 조암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갈천동(武溪洞)
상바산, 상밖산, 상밧산, 상외산(上外山) 촌
동리의 남쪽에 산이 있는 마을이므로 외산(外山)이라 불렀는데 외산의 세 마을 중산정에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상바산, 상외산(上外山)이라 부른다.
중바산, 중밖산, 중밧산, 중외산(中外山) 촌
외산(外山)의 세 마을 중 가운데 있는 마을로서 약초 재배, 고랭지 채소 등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하바산, 하밖산, 하외산(河外山) 촌
외산(外山)의 세 마을 중 가장 아래 있는 마을로서 농경지가 부족하여 약초 재배, 고랭지 채소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갈내, 갈래(葛來), 갈천(葛川) 촌
약 500년전 청주 정씨 설곡포가 산에 공부하러 왔다가 칡넝쿨이 집 안에 들어오는 것 같아서 갈래(葛來)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에 칡이 많아서 갈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보현산의 산록에 있는 마을을 음지갈래(음지마), 산의 맞은편 서쪽에 있는 마을을 양지갈래(양지마)라고 부른다.
사촌동(沙村洞)
벌밭, 벌전(筏田) 촌
약 200년전에 박씨 일가가 입향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이 마을의 형상이 뗏목처럼 생겼으므로 마을 이름을 벌전이라 하였다.
사촌, 원사촌(元沙村), 사기점(沙器店), 사기점촌(沙器店村) 촌
약 250년 전에 강씨 일가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후 사기점을 차렸다 하여 사기점, 사기점촌 또는 사촌이라 하였는데 사촌 동네 중 제일 먼저 개척한 마을이라 하여 원사촌이라 불렀다. 이 마을을 아릿사기점(아릿옷)과 웃사기점(웃옷)으로 나누기도 한다.
오름터, 오름태, 오름티, 오음현(五音峴), 오음동(五音洞) 촌
약 200년 전 곽수의란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부락 앞에 조모봉이라는 봉이 있어 그 봉에서 새끼 까마귀가 어미 까마귀를 그리워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 즈음이라 불렀으나 그 한자가 변하여 현재는 오음이라 부른다.
월정동(月停洞)
달정, 월정(月亭) 촌
약 800여년 전에 경주인 김기순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정월 대보름이면 전 동민이 이 바위에 올라가 달마중을 하였다 하여 월정이라고 불렀다.
불뭇골, 불밋골, 불래동, 불로동(不老洞0 촌
신라시대부터 이곳에 대장간을 설치하여 풀무를 사용하였으므로 불뭇골, 불밋골, 불래동이라고 하였으며 지금은 불로동이라고 부른다. 아릿불로동, 웃불로동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듬, 여암(旅岩) 촌
마을 앞 냇가에 큰 바위가 이어져 있는데 이 바위에서 쉬어가는 나그네가 많다고 하여 여암이라 불리워졌으며 아릿마(아릿여듬)와 웃마(웃여듬)로 나누기도 한다.
사리고개, 싸리고개 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벽지 마을로 이 마을로 들어가는 고갯마루에 옛날부터 싸리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그래서 옛부터 이 마을에는 싸리 꿀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도 동(道洞)
도동, 도리(道理), 도곡, 원도동(元道洞) 촌
약 500년 전 도곡 김한경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그의 호를 도동이라 하였다. 또 도동의 뿌리가 되는 마을을 원도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큰마, 대리(大理) 촌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마을로 신라시대부터 마을이 생겨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마 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문내, 문천(文川) 촌
부락 주변의 계곡이 문(文)자처럼 생겼다는 뜻으로 문천이라 하고 혹은 시냇가의 선비마을이라 하여 문천이라 한다. 또 부락이 개울 가까이에 있어서 냇물 소리가 들리므로 문천(聞川)이라 부르다가 문천(文川)으로 다시 바뀌었다.
쟁골, 재궁(齋宮)골, 재동, 재궁동(齋宮洞) 촌
약 500여 년전에 도동을 개척하였던 도곡 김한경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사후 후손들과 제자들이 제사를 지었던 바 재사를 재궁이라 하며 이 지역을 재궁곡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재동으로 부르고 있다.
모계동(道洞)
고덕(古德) 촌
임진왜란 때 덕망이 높았던 고두곡 선생이 피난을 와서 머물다가 간 곳이라 하여 고덕곡이라 불렀으나 차츰 변하여 고덕으로 바뀌었다.
새뜸, 신당(新堂), 동어동(冬於洞) 촌
옛날 동리 뒷산에 신당이 있어 그 음을 따서 신당이라 불렀다. 또는 사오십 년 전에 마을이 새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 새뜸이라고 한다.
두루골, 두리골, 두동(杜洞) 촌
언제 세워진 절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동리 뒤에 두리사라는 절이 있어 그 이름을 따서 두리골이라 부르다가 두루골로 변한 듯 하다.
두수골, 두수곡(斗水谷) 촌
마을 뒷산 골짜기에 말과 같이 생긴 약수터가 있어서 두수골, 두수곡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인 갈비봉을 중심으로 마을의 형상이 말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모걸, 모거리(慕居理), 모계(慕溪) 촌
약 150년 전에 진성 이씨가 당나무(느티나무) 주위에 큰 문중을 이루어 이퇴계 선생을 추모하면서 거주하였다 하여 모계 또는 모거리라 불리우며 모계가 법정 동명이 되었다.
중말, 중마, 중리(中里) 촌
개척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문천과 두수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마 또는 중리라고 하였다.
천천동(泉川洞)
안가부실(一加扶實), 안가부곡(一加扶谷, 一加富谷) 촌
현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2km 지점에 위치하며 이 마을 남쪽에 보현산에서 갈라져 나온 고모산(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이라 함)이 있는데, 마을이 고모산을 향한 모습이 마치 아들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더욱 섬기며 도와 드리려는 듯하다 하여 가부실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며 주민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가부(加扶)를 가부(加富)로도 썼다 한다.
신가부실(新加扶實, 新加扶室, 新加富實) 촌
이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 1km 지점에 위치하며 이 마을의 안골짜기에 있는 안가부실의 이름을 따서 새로 생긴 가부실이란 뜻으로 신가부실이 되었다. 약 40여년 전에 생긴 마을로 옛날에는 이 곳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하는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거무실, 금곡(琴谷) 촌
옛날 거창 신씨의 은사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거문고 모양 같은 골짜기라 하여 동명을 금곡이라 이름하여 거무실이라 불렀다.
터밭, 기전(基前) 촌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 박송은이라는 사람이 피난을 와서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근처의 밭이 비옥하고 좋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터밭, 기전이다.
샘내, 천천(泉川) 촌
약 400년 전 마을을 개척할 때 당시 주민들이 마을에서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물맛이 좋고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여 샘내, 천천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구산동(九山洞)
거북메, 구산(九山)촌
사방이 산으로 싸인 마을로서 부락의 뒷산의 모습이 거북처럼 생겨서 구산이라 이름하였으나 한자를 바꾸어 써서 현재는 구산(九山)으로 쓰고 있으며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다.
구장터, 장거리, 구장(舊場), 구시장(舊市場) 촌
1940년대 일본인들이 이 곳에 시장을 개설하였으나 광복 이후 시장이 협소하여 현시장으로 옮기게 됨에 따라 시장이 열리던 곳을 구장터라 부르게 되었다.
새터, 신기(新基) 촌
이 마을은 현서면 소재지에서 0.7km 떨어져 있고 독산이라는 마을의 남쪽에 위치하며, 용당골에서 내리는 내(川)로 독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이곳에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새터, 신기라는 이름이 생겼다.
용댕이, 용당(龍塘) 촌
임진왜란 당시 의성김씨 송계공이 입향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마을 대표자의 꿈에 천연 지당에 용이 놀고갓다고 하여 용당이라 불렀고, 마을 안 골짜기를 용당골이라 불렀고, 마을 안 골짜기를 용당골이라 부르고 있다.
독산 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인데 산이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마을의 뒷편에 와서 뚝 끊어져 우뚝 솟아 있다. 이렇게 홀로 솟아 있다고 하여 독산이라 하였다.
화목동(和睦洞)
원화목(元和睦) 촌
원화목을 신라 시대 화목현의 소재지로서 현사가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 역 제도가 있을 때 이 마을이 역촌으로 대외에 알려지면서 화목이라 불리었고 그 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면소재지가 구산동으로 바뀌면서 화목의 뿌리가 된다고 하여 원화목으로 부르게 되었다.
댓골, 태꼴, 죽곡(竹谷) 촌
마을이 개척될 당시부터 마을 안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댓골, 죽곡이라고 하였다고도 하며 또 이 마을의 골짜기가 맺힌데 없이 대나무같이 곧게 뻣혀 있으므로 댓골, 죽곡이라 불렀다.
안댓골, 안태골, 내죽곡(內竹谷) 촌
옛날부터 마을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생하여 댓골 또는 죽곡이라고 하였는데, 댓골의 안쪽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안댓골, 내죽곡이라 이름하고 댓골과 구별하였다.
도트막, 도토막(道土幕) 촌
처음 개척할 당시의 마을은 조그만 산중 벽촌이었으나 마을 가운데로 새로운 도로가 트였다고 하여 도트막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도트막이라 부르고 있다.
덕계동
원덕계, 덕계 촌
마을 어귀에 맑은 시내가 흐르고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두르고 있으며 큰 시내를 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시내가 마을을 이롭게 해 준다고 믿었기에 이 내를 덕계라 하였으며 원덕계는 덕계동의 근원이 된다고 하여 원덕계라 한다.
구석들, 구억들, 구평 촌
고려 말기에 윤씨 9세대가 이 곳에 이주하여 터를 잡아 취락을 이루었다 하여 구평이라 하였으며 현재는 구억들, 구석들이라 부르고 있다.
금숫골, 금수골, 금수곡(禽獸谷, 錦水谷) 촌
깊은 골짜기의 마을로서 경관이 좋고 산자수명하여 금수곡이라 하였으며 또는 이 마을이 산협에 있기 때문에 산짐승이 많아 서식하므로 금수곡이라고 명명하였다 한다.
질번데기, 질번디 촌
이곳이 옛날에는 나무가 없고 풀만 무성한 버덩(번데기)이었으나 현재는 대부분이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원덕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진흙으로 된 번데기(버렁)에 있으므로 질번데기라고 하였다.
두현동(豆峴洞)
곳집들, 고평(庫坪) 촌
약 450년전 함안인 조성경이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으며 해마다 풍년이 들어 집안에 곡식을 둘 곳이 없어 곡물을 저장하는 큰 창고가 들판의 곳곳에 있었으므로 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생초전(生草田) 촌
도로와 떨어졌으며 골이 깊고 입구가 나무로 막혀서 피난처로 적합하여 임진왜란 당시 피난온 동래 정씨가 처음 거주하였다. 그 후 어떤 도승이 이 마을 지나며 녹색 풀이 많아 생초전이라는 동명을 붙였다고 한다.
웃대거리, 안대거리, 소거리(小巨里), 소근리(小斤里), 박은리 촌
임진왜란 때 현일송이란 사람이 피난하러 와서 역마산 아래 협소한 골짜기를 개척하여 소근리라 하였다가 지금은 소거리로 바뀌었다.
아랫대거리, 바깥대거리, 대거리(大巨里), 대근리(大斤里) 촌
조선 선조때 대암공 박성의 3세손이 역마산 산록의 다른 계곡을 개척하여 입주하니 소근리에 비하여 지역이 넓다 하여 대근리라 하였고 지금은 대거리라 부르고 있다.
파재[豆峴], 파성(巴城) 촌
현서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인데 화목, 청송간 국도를 경계로 하여 서편 산 아래 양지 바른 곳에 있는 마을을 양지파재, 동쪽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음지파재라고 한다. 옛날 이 마을로 가는 고개에는 팥을 많이 경작하여 팥재라고 하였는 바 이로 인해 이 마을 이름이 팥재, 파재가 되었다.
여동(如洞), 여우동(如愚洞) 촌
200여년 전 한학자로 덕망이 높았던 조가 개척한 마을이며 조의 호가 여우이었기 때문에 그의 호를 따서 여우동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줄여서 여동이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