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기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난 이육사의 '노정기'를 암송하면서
먼저 눈물이 나도록 가슴이 아린 것을 느낀다
일제 치하에서 어두운 현실을 빗겨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는 열정과 모든 것을 잃은 조국을 위하여
17차례 감옥을 드나들면서 이름도 이육사가 바로 수형자의 번호 264 인것을..
젊은 날 어둡고 춥고 배 고프고 세계와 단절된 빛을 잃은 그가 걸어온 고난의 길을 걸으며
또한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일 저항시의 정점을 이루게 한 시'노정기'
1943년도(?) 43세의 나이에 돌아간 시인
조금만 더 실았으면 그렇에 염원했던 광복을 볼 수 있으련만'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이 시 후기를 쓰는 것이다.
난 이나라가 이정도로 발전하고 빛나는 대한민국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
모두 멀던 가깝던 우리 조상들의 피로 이루어 진 것을 절감하면서
또한 오늘의 내가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시를 읽으며
이 육사의 초상화를 안고 조용히 무릎을 굻고 엎드려 감사를 드린다
눈물을 글썽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