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변의 풍물소개(1) - 안변면 편
石浪에서 詩心을 달래던 과수원 마을 – 평산신씨의 후손 신동파 선수 -
학성지(鶴城)의 서문에 볼라치면 “황룡산 꼭대기에 오압연(烏鴨淵)이 있는데 그 밑에서부터 한 산맥이 동북쪽을 향하여 뻗어내려 비운령(飛雲嶺)과 두문령(斗門嶺)을 이루었다. 이로부터 원맥이 서쪽으로 향해서 뻗어내려 소현령(小峴嶺)이 되고 거기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망경봉(望京峰)이 되었고, 다시 아름다운 흙과 산이 뻗어내려 등주(登州) 학성산(鶴城山)이 되었다. 곧게 뻗은 낮은 머리에 태산현(泰山峴)을 만들고 조금 들어와 목이 있는 부위에서 솟구쳐 일어나 영(營)의 뒷산인 사슬봉(士瑟峰)을 이루었으니 곧 세청사(世淸社) 1·2·3리가 되고 여기가 읍의 원터이며 산아래로 관아의 각 청이 있으며...”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안변읍 5개리는 당시 영춘사(永春社) 1·2·3리라 불렀고, 지금의 옥리(玉里) 일대가 세청사 1·2·3리로서 당시의 부중(府中)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읍내 아래쪽은 남천강에 제방이 축조되기 이전에는 홍수 때 물이 들었기 때문에 높은 지대인 영춘리에서 옥리 쪽에 걸쳐 읍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청사(世淸)의 ‘社’는 지금의 면이나 리에 해당하는 명칭이지만 '세청' 의 발음이 어째서 '시청'으로 변했는지는 얼른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옛적의 안변사람들 사이에서는 '세간→시간' '세간살이→시간살이' 세상천지→시상천지' '원 세상에→원, 시상에... 따위와 같이 '세'를 '시'로 발음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건 어쨌거나 옥리의 뒷산이 사슬봉(瑟峰)이고 그 위로 망경봉(望京峰)이솟아 있으며 성성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는 기록들은 참으로 흥미롭다. 아무튼 향교나 옥동서원이 옥리에 세워진 사실만으로도 옛적의 읍내였음이 뒷받침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옥동이나 옥리는 명칭이 '세청'을 대신하게 된 내력은 다소 아리송하다. 부중(府中)이었으니까 관아에 딸린 감옥이 어딘가에 있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되거니와, 그래서 옥동(獄洞), 옥골이라 불렸던 것인데, 민심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獄’을 ‘玉’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옥리는 안변읍 홍문리의 동쪽에 인접해 있으며 비운령 아래 '사기막' 쪽에서 흘러내리는 동대천의 맑은 시냇물을 앞에 끼고 있다. 동네를 벗어난 상류 쪽에 '동네고방'이라 불리는 널찍한 소가 있어서 여름철이면 읍내에서 원정한 소년들까지 몰려 미역을 감느라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또 그 어름에서 북쪽 산기슭으로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 '옥골'이라 불리는 소풍터가 있다. 경치가 빼어나고 더위를 식히기에도 안성맞춤이어서 천렵 꾼이나 소풍객들이 많이 모였으며, 음력 9월 9일이면 소를 잡아 산천제를 지내기도 했다.
향교는 읍쪽 가까이에 있는 낡은 목조건물이고 둘레에 늙은 은행나무가 있어서 가을에 노랗게 단풍이 들면 향교 구경도 겸해서 그 낙엽을 줍느라고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그러면 그 아래쪽에 날아갈듯이 지어놓은 申澤環씨네 2층 양옥집도 당시로서는 꽤나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옥리에는 넓은 들이 없으므로 논농사 보다는 밭농사가 많았다. 약 120여 가구가 모여 살았으며 江陵 金氏가 과반수였고 申氏, 崔氏, 白氏, 全氏, 黃氏 등이 섞이어 살았다.
동대천 계곡물이 옥리 앞을 벗어나 안변읍 남쪽으로 접어들면서 여울을 이룬다. 이 여울목을 석랑(石浪)이라 부르고, 학성리 앞에서 뚝을 넘어 여울에 걸린 50m 가량의 다리를 건너면 이른바 '과남골'이라 불리는 과남리(果南里) 부락이 펼쳐진다.
이 과남리 부락은 안변읍의 동남방에 솟아있는 황룡산 지봉인 三峰이 마치 치맛자락처럼 펼쳐놓은 지맥의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서 형성된 마을인데, 동대천의 흐름을 따라 윗과남골, 아랫과남골, '영뚜르'의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뚜르'는 동대천 물줄기가 남대천 본류와 합치는 지점의 남쪽 강기슭에 마치 벙거지 모양으로 우뚝 솟은 법수산(法水山) 밑으로 펼쳐진 들판을 일컫는다. '들(뜰)'을 함경도 사투리로 '뚜르'라고 한다. '영뚜르'는 '영들’, ‘안뚜르’는 '안들' 즉 안변평야, 그리고 '개뚜르'는 '들'을 지칭하는 말임을 알 수가 있다. 어쨌거나 '영뚜르' 마을은 남천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전개되는 美峴里와 新茅面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부락으로서 얼핏 과남리와는 별개의 부락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행정단위로 되어있는 마을이다.
이 '영뚜르'와 아랫과남골 사이를 가르면서 안학수리조합의 봇도랑이 흐른다. 石浪의 물은 너무 얕고 또 남천강 물은 너무 멀기 때문에 여름철이면 동네 조무라기들이 이 봇도랑에서 미역을 감으면서 헤엄치는 법을 익혔다.
이 봇도랑 물이 흘러 동대천과 마주쳐서는 그 강바닥의 땅밑 수로를 빠져나가 영춘리의 제방 밑에서 솟아올라 다시 봇도랑을 따라 흘러 나간다.
과남리의 남쪽에 있는 앞산에는 옛적부터 밤나무가 많았다. 밤꽃이 필 무렵이면 온산이 하얗게 물들면서 진한 향기를 풍겼으며 가을에는 밤 수확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과남리의 주산물은 역시 사과였다. 온 동네가 사과밭 속에 파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사이 사이로 복숭아 과수원도 끼여 있어서 춘 3월부터는 복사꽃을 필두로 온갖 과수나무 꽃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과남리 근처에서는 삼봉을 향해서 오를 수 있는 계곡이 여러 개 있다. 여름철에 그 계곡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하얀 바윗돌들이 얽히어 혹은 반석을 이루고 혹은 병풍을 이루면서 맑은 계곡물과 어우러진 명당자리들을 만날 수 있다. 인적이 없어 사람 때가 묻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선경(仙鏡)이라 할밖에는 없다.
동대천 물줄기가 여울진 석랑(石浪)도 과남리의 명물이다. 꽃이 피고 비가 오거나 꽃이 지고 눈이 내리거나 그 기슭의 오솔길은 시심(詩心)을 달래면서 사랑을 키우는 산책길이기도 했다. 자갈밭을 흐르는 여울물 소리에 섞이어 앞산의 뻐꾸기 소리와 때로는 누군가 멀리서 부르는 소야곡의 선율이 썩 잘 어울리는 과남리의 石浪이었다.
과남리에는 여러 성씨들이 어울려 살았는데 그중에서도 아랫과남골에는 平山 申氏가 많았다. 일제 때 군수를 지냈다 하여 '申군수네'로 불리던 집안이었는데 해방 후에는 대부분 남한으로 이주했으며 유명한 농구선수였던 申東坡도 그 후손 중 일원이다. 예비역 육군 소장 金國桂와 여류조각가인 김윤신도 이 마을 출신임을 부기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