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동의 유래
거제동(巨堤洞) : 오늘날의 거제동(巨堤洞)은 조선시대 서면에 속하며 동리명은 거벌리라 하였다.『동래부지(1740)』에는 "거벌리가 동래부에서 5리 떨어져 있다"라 하였으며,『동래부읍지(1832)』에는 동래부에서 6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벌(居伐)은 거벌(巨伐)로도 표기되어 큰벌을 뜻하는 원야(原野)를 의미한다. 이 원야는 오늘날 거제동과 연산동 일대에 펼쳐있는 넓은 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지역이 바로 거벌리였다. 한편, 거제리에 있었던 옛 전차정류소 지역과 그 인근을 "홰바지"라 불렀다. 홰바지는 해받이라고 불리는데 ''동래부에서 부산으로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면 하루해가 걸리는 지점이라는 설과 옛날 부산에는 5일마다 열리는 부산장(현 부산진시장)은 4일과 9일에 열리는데 매우 성시를 이루어 영남에서는 대구장 다음으로 가는 큰 장시(場市)였다. 동래에서 부산장에 가 물품을 매매하고 나면 해가 지므로 동래나 그 인근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싸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모두 보행(步行)이어서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이곳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거벌리에 일제시대 범어천·온천천·서천 등의 이름을 가지면서 동래로 흘러내려 오는 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아 온천천을 수영천과 합류케 했다. 그렇게 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고 난 뒤부터 거제리란 이름이 생겨났다. 거제동은 1957년 구제 실시로 동래구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7월 시 조례에 의해 거제1,2,3동으로 분동되었다. 1979년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시 조례로 거제3동을 거제3,4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대조리, 거벌리, 남문구 마을이 있었으며, 광무 3년 (1899)에는 대조리는 대제리로, 거벌리는 거평리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대제리와 거평리의 "거"와 "제"를 합하여 거제리(巨堤里)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문구 : 옛날 동래읍성의 남문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써 남문은 사람과 우마가 출입하는 주문이기에 이 지역은 요지라 할 수 있으며, 현재 부산교육대학교 주변 일대를 일컫는다.
십자산 : 이사벨여중·고교의 해발 46m 뒷산 꼭대기에 개신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또 십자산의 모양이 황새알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황새알이라고도 한다.
덕석언덕 : 지금의 부산교육대학교와 거학초등학교 일대에 금잔디가 덕석을 깔아 놓은 듯 넓게 깔려 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거평당산(할아버지 당산): 현재 거제동 800번지에 위치한 당산으로 250여년 된 소나무와 작은 당집이 있으며, 매년 음력 정월보름 날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도둑골 : 현재 부산종합운동장 쪽에서 초읍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길목으로 옛날에 도둑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
하마정 : 하마정(下馬亭)에 있는 하마비(下馬碑)는 조선 태종 13년(1413)에 최초로 종묘(宗廟)와 궐문 앞에 표목(標木)을 세웠는데 뒷날 비석을 세우게 되어 하마비라 하게 되었다. 이 하마비는 대개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져 선열에 대한 숭앙의 표시로, 가던 말에서 내려 지나가는 곳을 말함. 하마정은 오늘날의 동해남부선 거제역에서 간선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린 굴다리쯤에 있었다. 양정동의 화지산에는 동래 정씨의 시조인 정문도 공의 묘지가 있다. 이곳을 정묘라 하는데 그 정묘를 세인들은 숭앙하였다. 그래서 정묘가 있는 그 앞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정묘에 예를 표하기 위하여 말에서 내렸다. 그래서 하마정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개구리산 : 지금의 거제초등학교 남서쪽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으로 개구리가 움츠리고 있는 듯한 낮은 산이었든지 아니면 개구리가 많이 서식했던 산이어서 붙여진 산명일 것으로 추측된다.
홰바지 : 홰바지는 연제구 거제리에 있었던 옛 전차정류소(지금의 거제현대APT 부근) 부근을 "홰바지"라 불러 왔다. 옛날 부산진시장은 음력으로 4·9일에 성시를 이루며 영남에서도 대구시장에 다음가는 큰 시장이었다. 그때 쯤은 상인들이 석양까지 물품을 매매하고 나면 해가 진다.그 때부터 동래나 그 인근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싸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지금과 같이 자동차가 없었던 시대이므로 걸어서 집에 돌아 오게되자 그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이곳까지 마중 나오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일설에는 관(官)에서 유사시에 동래부 관원(官員)이 이곳까지 횃불을 들고 마중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런 연유로 "홰맞이"라 부르던 것이 점차 음이 변하여 "홰바지"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천막과 콘세트 막사가 있는 곳이 현 부산시청 자리, 오른 쪽 움푹 들어간 곳이 만덕고개이고, 그 왼쪽으로 사직동, 쇠미산 밑에 사직운동장 자리, 안동네, 거제리 쪽 개구리산, 철도관사 터가 보인다.
▲ 1950. 8. 18. 거제리 포로수용소 전경ⓒ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부산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시 7월 24일 부산 거제리에 포로수용소(지금의 부산광역시청, 경찰청이 자리잡고 있는 자리)를 설치하였다. 이 시설은 유엔군사령부 관할 하에 미 제8군사령부가 운영하였다. 이 시설은 7월 26일부로 "주한 미8군사령부 제1포로수용소(Camp EUSAK No1)"라 명명되었으며, 통상 "제1포로수용소(POW Enclosure)"라고 불리어졌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고 아군의 반격으로 붙잡히는 포로의 엄청난 증가로 8월의 2,000명에서, 9월에는 11,000명에 육박하였다. 계속 증가하는 포로의 관리를 위해 9월에 "인천 임시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0월 2일 서울 마포형무소에도 포로수집소가 설치되었으나, 이들 임시 포로수용소, 포로수집소를 거친 포로들은 전부 부산 포로수용소로 집결되었다. 9월 하순부터는 포로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자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는 철조망이 더 많이 설치되면서 "제2, 제3, 제4, 제5, 제6포로수용소"까지 증설되었다.
1950년 10월말까지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붙잡힌 포로의 계속적인 증가로 그 숫자가 117,000여명에 육박하였다. 이러한 포로의 증가는 수용 및 관리 능력을 초과하게 되었고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미군 제8군사령부에서는 제2군수사령부(2nd Logistical Command)를 창설하여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력과 장비를 보충하고 병참문제를 해결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한국군은 1950년 10월 25일 이를 지원할 제31, 32, 33 포로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계속되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인해 포로들의 지속적인 증가와 10월 25일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으로 중공군 포로까지 늘어나자 포로들의 수용과 관리를 위해 10월 28일에는 평양에 2개의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으며, 향후 안정적인 포로들의 수용과 관리를 위해 11월 27일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설치가 확정되었고, 12월 4일 5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인천 포로수용소를 확장하였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가 제6포로수용소까지 확장하였으나 계속 늘어나는 포로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2월 중순경에는 "수영 대밭 제1, 제2, 제3포로수용소"와 "가야 제1, 제2, 제3포로수용소"를 증설하게 되었다. 이들 포로수용소는 포로들의 수용인원을 늘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의 지소인 셈이다.
1951년 2월초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설치공사를 시작하여 2월말 경에는 거의 마무리와 함께,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을 이송하기 시작하여 50,000여명이 옮겨졌다. 3월 1일에는 주요 본부 및 경비대대 등 관련부대가 거제도로 이동되었으며, 나머지 포로의 이동이 계속되어 3월말까지 이송된 포로의 숫자는 약 100,000명에 이르렀다. 6월말 경에는 육지 포로들의 이송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수용 인원이 140,000명이 넘어서게 되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의 대부분이 거제도로 옮겨지게 되자, 부산의 "제1포로수용소"라는 명칭도 거제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부산의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보조적인 위치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 후에도 전방에서 붙잡힌 포로가 부산으로 모이고, 그 인원이 다시 거제도로 이송되는 과정이 계속되었다.
총동창회홈페이지 박명규(22기)선배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