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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와서
답사일 : 2004년 6월 20일
답사지 : 울산일원 (천전리와 대곡리 암각화, 간월사지, 망해사지,
청송사지)
답사를 하루 앞둔 날부터 계속되는 태풍과 폭우라는 뉴스에 긴장감이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한 일정이라 강행하기로 하고
아침이면 멈추어 있을 좋은 날을 기대했다. 다행히 조용한 아침이 얼마나 반가운지 가벼운 마음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언양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경주방향 31번 국도를 달리니 천전리각석 안내판이 보였다. 여느 문화유적답사지와 다른 것은 초입의 삭막함이 도심의 공업도시
부근임을 실감케했다. 개인적으로는 말로만 듣던 암각화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었는데 초입의 모습에 역시나 하며 실망스런 마음이 한 구석에 있었다.
그런데 길을 조금 들어서니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낮은 산들에는 운무가 머물고 불어난 계곡의 황토빛 흐름과 내리는 보슬비가
운치를 더해주었다. 삭막함 뒤에 숨겨진 보석이었다. 아름다움을 만끽해서 좋았지만 정작 봐야 할 목적물은 계곡 건너에 있으니 건널 수 없이 불어난
물이 야속했다.
멀리 철책속에 있는 천전리 암각화 국보147호
내를 건너지 못한 아쉬움으로 돌아서 가는 길
멀리서 그리움으로 남겨놓고 냇물앞에 세워진 안내도를 보며
설명을 들었다.
두동면 천전리 각석은 대곡천 상류에 위치한 높이 2.7m, 너비 9.5m 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그림(암각화)이다.
1970년대 말 문명대교수를 중심으로 한 동국대학교 불적조사단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이 주변에 반고사라는 절에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반고사를 찾으러 와서 이곳을 발견하였다. 이후 가치가 인정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은 선사시대 부터 통일신라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쳐있는 특색이 있다. 여기에 사용된 기법은 면쪼으기기, 새기기, 칠하기등이다. 상하를 나누어 위쪽은 주로 면쪼으기로 사슴, 물고기,
새, 뱀, 인물, 그리고 기하학적 문양으로 마름모꼴과 우렁문양등이 많았다. 비와 태양을 상징하는 기하학적 문양은 농사의 풍년을 비는 신석기에서
청동기시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래부분은 선으로 새긴 그림과 글씨가 있었다. 좌측 하단부분에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가는 듯한 기마행렬도가
문물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해 주는 것과 신라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 곳이 화랑이 무예를 익히던 수련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가운데 하단에 한장 분량으로 보이는 한문글은 통일 신라의 명문이라한다. 여러 시대가 한 곳에 나타나는 이런 암각화는 보기 드물 것 같다.
다행히도 이 암벽은 15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풍화작용을 덜 받아 보존이 잘 되어 있다한다.
우리가 서 있는 쪽 그러니 암각화
맞은편 너른 바위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널려있다했다. 물론 이것도 물에 잠겨서 보지못했다. 그러나 수 억년전의 공룡시대 부터 선사시대를 지나
통일신라의 모습까지 수없는 세월을 한 곳에서 느끼는 감흥은 매우컸다.
천전리 암각화 안내도
천전리 암각화 안내도 상세도 좌
천전리 암각화 안내도 상세도 중간
천전리 암각화 안내도 상세도 우
다시 길을 돌려 역방향으로 향했다. 대곡천 중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를 가기 위해서였다. 낮은 등성이에 가지런한 고추밭을 지나며 홍법사 어린이 법회에서 어린 친구들이 텃밭가꾸기 시간에 고추밭에 김매던 생각이
났다. 풀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던 놈들이 친구들의 손 놀림에 금새 말쑥하게 제 모습 드러낼 때 우리 마음도 가꾸지 않으면 이렇게 잡초만
무성하리라 생각했었다.
산길로 접어드니 제법 넓게 도로 포장공사가 한창이었다. 다시 좁아지며 숲이 우거진 높다란 길 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물에 잠긴 밑부분은 암반이 병풍처럼 펼쳐져있고 그 위에는 초록물 흠뻑 담은 산들이 이어졌다. 상류의 풍광보다 더 아름다운
계곡이었다. 정몽주의 유배지이기도 하며 조선의 시인, 묵객들이 머물던 곳이라 하니 풍경의 아름다움이 짐작 갈 것이다. 이 곳에 아무 유적이
없다해도 드라이브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주차를 하고 내렸을 때 탄성이 이어졌다.
반구대(盤龜臺) 앞을 지나
S자로 산을 돌아 굽이쳐 흐르는 황토물이 역동적이었다. 가까이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그림같은 풍경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이대로 사진에
다 담아 보려 애썼지만 실력에 무리였다.
반구대란 이름은 산등성이 거북모양을 닮아 이름붙여진 것이란다. 여기는 시대적으로 많이
뒤떨어 지는 곳으로 주로 한문으로 된 이름들이 있다고했다. 상류인 천전리 암각화와 하류의 반구대암각화의 중간지역인 이곳에 선사시대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 의문이다. 여기가 끝인 줄 알았던 암각화(岩刻畵)는 2Km 하류쪽에 또 있었다. 그러니 이 지역에 암각화가 세 곳에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물줄기는 답사지인 암각화를 보며 막연히 느끼는 선사시대부터라는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 주려는 듯 힘차게 흘렀다.
오늘은 더욱 더 시간속으로 여행이다.
운무 드리운 반구대를 굽이쳐 흐르는 계곡 물
다시 더 하류쪽으로 내려가 넓은 터에 차를 세우고 잠시 간식을
먹었다. 말차를 준비한 보살님, 작은 반석위에 다구를 놓고 열심히 저었다. 형식은 벗어났지만 그래서 더 맛있게 차를 마셨다.
여기서 다시 0.7Km라는 방향 표시를 보고 산길을 걸었다. 간식을 먹으며 친구가 된 개 한마리가 동행을 했다. 교수님뒤를
누구보다 열심히 따라가는 못난이 개도 정답다. 비온 뒤의 향기로운 풀 내음을 맡으며 산길을 걷다보니 새로운 물줄기가 합쳐졌다. 정말 물이 많고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산길을 벗어나니 커다란 내가 우리 앞에 있다. 산길끝에서 만난 내를 보며 또 건널 수 없다는 아쉬움이 이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과를 즐기기 위해서 준비하는 보살님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에 동행하는 못난이 개
반구대암각화 가는 중간쯤에서 만나는 물길
넓직한 안내도를 보며 이 곳 안내인의 설명을 들었다. 여기
암각화에는 눈에 띄게 고래가 많았다. 여러 종류의 고래가 표현되었고 물뿜는 고래, 작살맞은 고래, 배분되어 있는 고래등 표현도 다양하였다. 이
좁은 내에 고래가 있었을까 했더니 인근의 울산 장생포가 포경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2005년 제57차 국제포경위원회 총회가 울산에서
열린다하니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고래가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면을 파내는 면쪼으기, 선으로만 표현한 선쪼으기 기법으로
200여점의 그림이 있다하니 놀라운 일이다. 그림의 내용은 바다짐승으로는 고래, 물개, 거북이등이 있고 , 뭍짐승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등이 있고, 사람의 여러모습을 볼 수 있으며, 도구로는 배, 울타리, 그물, 작살, 방패 등을 볼 수 있다. 그물에 걸린 동물의 표현이나
울타리안에 갇힌 동물의 모습도 특이했다. 좌측위의 서 있는 사람의 남근상을 표현한 것이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이런 그림이 생기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엇갈린 견해가 많다하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과 종교적 제의장소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있다한다. 또한 어느 시대의 것인지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청동기나 철기초기의 것으로 추측한다.
내 건너 중간에 약간 밝게 보이는 부분 반구대 암각화 국보285호
반구대 암각화 안내도
이 반구대는 거의 접근하기는 어려운 곳이다. 울산의 공업용수를
위해 대곡천 하류에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이곳은 거의 물에 잠겨 있어 건널 방법이 없다. 계절중에 아주 물이 마른 시기에 잘 맞추어야 가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곳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간은 대략 3시20분 정도라 한다. 나머지 시간은 그늘이 져 잘 보이지 않는다 하니 많은
공을 들여야 한번 볼 수 있는 곳이다.
시야의 끝 부분의 바위위에 백로 몇마리가 산수화의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렇게라도 우리
일행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 싶었을 것이다.
언양 작천정 맑은 계곡을 따르니 어느새 햇살이 나뭇잎위에서 하늘거린다.
등업온천가는 길로 들어서니 멀리 신불산이 높다랐게 있고 산봉우리에는 몇 조각 구름이 아직 남아있었다. 폭우라는 말을 빼앗긴게 못내 아쉬운가
보다.
길 밑에는 간월사터(澗月寺地)의 흔적이 울타리 안에 있었다. 진덕여왕(647~654)년에 세워진 절이다. 임진왜란에
폐사지가 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와 두기의 탑과 석불좌상만이 이 절터를 지키고 있었다. 석탑은 주요 부자재 몇개만 남아 있던 것으로 복원했는데
완벽한 복원에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1층 탑신부 사면에는 금강역사와 문이 새겨져 있고 문고리가 두개씩 있었는데 1기의 탑은 같은
양식이면서 문고리가 생략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탑을 장식탑이라 하며 통일신라 불교미술 연구에 도움이 된단다.
간월사지 3층석탑의 금강역사상과 문
탑보다 약간 밑의 법당안에 석조불상이 모셔져있었다. 얼굴은 신라불상의
원만한 상호를 가졌지만 대부분의 표현이 둔해 생동감은 떨어져 보였다. 기단은 4단으로 안상, 사자상. 연꽃으로 장식된 좌대위에 모셔져있는데
4단의 기단은 다른 부재를 모아 복원한 흔적이 보였다. 울산지역의 불상으로는 유일한 보물이라하니 더 가치있는 불상이다. 그런데 석불은 원래
바깥에 있는 것인데 보호를 위해 법당을 지어 모신것 같다.
간월사지 석불좌상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것을 뜻하는 간(澗)자라는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니
간월(澗月)이라는 이름이 아름답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신불산앞 흐르는 계곡물에, 넓은 들판에 들풀의 줄기에, 무수한 나뭇잎에 고고히 내려앉아
반짝였을 달빛이 충분히 상상되었다. 그런데 현실은 온천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온통 숙박업소 뿐 이니 밤이면 간월이 아니라 네온싸인의 현란함이
간월을 빼앗은 자리가 되었다.
다시 울산으로 향했다. 무거동 신복로터리에서 7번국도를 따라 웅천 방면으로 내려가며 망해사지로
향했다. 답사중에 이런 시내를 관통하는 것도 색달랐다. 2기의 부도를 보기위해서였다.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때(875~886) 동해
용왕을 위해 세운절이라 했다. 헌강왕이 나들이를 갔을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자 그 이유를 물었더니 동해 용왕의 소행이라 일렀다.
헌강왕은 이 용을 위해 절을 지어 주니 용은 감사의 인사를 하며 아들 처용을 헌강왕에게 보냈다. 그후 신라 사람들은 역신을 쫓는 방편으로 처용의
초상화를 그려 문에 붙이는 풍속이 생겨났다고 한다.
제법 큰 부도가 동, 서에 있는데 동쪽의 부도는 일제시대 도굴꾼에 의해 파괴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라 했다. 옥개석의 심한 훼손을 볼 수 있다. 이 부도에는 지대석위에 안상으로 문양을 넣고 그위에는 넓직한 연꽃을 복련으로
새기고 그 둘레에 귀꽃을 만들어 놓았으며 상대석에는 이중의 앙련으로 새겨져 있었다. 기단부는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을 따랐으며 탑신에는 문을
아치모양을 새겨서 창문의 형태로 표현한 것이 특이했으며 지붕부분은 간결하게 처리되어있었다. 역시 통일신라의 부도답게 간결하지만 우아함과 단아함을
잃지않았다.
부도탑옆에는 그루터기 하나가 나이테를 보여 주며 있었다. 우리의 답사도 한해, 두해 나이를 먹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망해사지 동서부도 보물 제173호.
부도옆 그루터기
문수초등학교 팻말을 찾아 들어가니 작은 마을에 넓은 마당만 남은 청송사터에 3층석탑이
있었다. 금방 눈에 들어왔을 때는 규모나 모양이 지난번에 본 황복사지 석탑과 비슷해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1층의 탑신부가 길고 2, 3층의
탑신부가 급격히 짧은 형태였다.
청송사지 3층석탑 보물382호
밭길을 지나 얕은 언덕같은 산길을 오르니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과
개망초 무리속에 범종을 닮은 3기의 부도가 있었다. 지대석, 기대석, 연좌대 위에 석종 모양이 얹혀있었는데 좌측의 부도가 가장크고 가장
아름다웠다. 신라의 팔각원당형이 부도탑의 기본양식이라면 석종형 부도는 보통 고려말에서 조선시대의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새긴 문양과는 상관없이 세월따라 피어난 마른 돌이끼들이 당초무늬를 만들어 아름다움을 더해 놓은 것이다. 좌측 부도는 기대석의 남북방면에는
인왕상을, 동서방면에는 연꽃무늬를 돋을새김 해 놓았다. 인왕상의 모습은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이 기대석 위에
복련을 새기고 그 위에 앙련을 새겨 연화대를 만들어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의 밑부분에는 산스크리트어가 돌려 새겨져 있었고 맨 윗부분은 연꽃
봉우리를 나타내고 그 밑에 연꽃문양으로 장식해 놓았다. 중간의 부도에는 서응당 진흡대사(瑞應堂 眞洽大師)라는 글이 있으나 어느 스님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측의 부도는 제일 작고 모든 것이 간결했으며 흩어진 모습이었다.
오늘 답사는 가까이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많은
날이었지만 이 3기의 아름다운 부도에서 모든 위로가 되었다
청송사지 부도 3기중 좌측부도
좌측 부도 지대석의 인왕상
우리는 근교의 답사로 일찍 마무리가 되었다. 그래서 덤으로 일정에 없었지만 오는
길목을 우회해서 울산에서 이름난 어느 절로 향했다. 산 중턱의 댐을 지나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며 하늘위에 펼쳐지는 풍경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올랐다.
정상에 주차를 하고 향하던 발걸음에 아뿔사!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우리를 당혹케했다.첫번째 반기는 곳은 냄새나는 화장실,
맑은 산바람은 어느새 암모니아 냄새로 변하여 숨을 멈추게하고, 공양간을 지나야 법당이 나오는 통로, 주위에 어울리지 않는 불사의 흔적들,
여기저기 모셔져있는 불상들앞에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보다 어지러운 배치에 기대에 차 올랐던 마음에 현기증이 났다.
냄새나지만
친환경적인 화장실이 정겹게 느껴졌던 실상사 해우소가 그립고, 입구에서 무심히 반기던 무위사의 흰개가 그립고, 작고 낮은 집들이 주위의 풍광에
어울리게 지어져 소박하지만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던 독락당이 그리웠다.
덤으로 들린 곳에서 덤으로 배운다. 자연을 거스러지않는
건축의 미학을, 눈앞에 급급함보다 먼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수 천년전의 유적을 보고있는 우리들, 앞으로 천년 이천년
뒤의 후손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선물은 문화유산 아니겠는가!
자연은 인간만이 누려야하는 특권이 아니다.부처님의 연기관은 모든
만물이 인연화합에 의해 생긴다고 하셨다. 물질만능주의의 현실앞에 불교계에서 앞장서서 부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 결국 자연 친화적인 상생의
길이다.
비온 뒤의 열기와 습기에 힘들었지만 즐겁게 운전해 주시는 유거사님, 모든 사람 편하게 설명하시는 박교수님, 늘 한 보따리
웃음을 선사하는 보살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해남으로 떠날 다음 달 답사가 벌써 기대됩니다.
명상음악 : "산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