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그림을 그려낸 砂曲墨緣展
(砂曲 李崇浩가 사랑하는 사람들)
晴峯 郭魯然(한국서가협회 이사)
-글을 쓰면서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어제가 있었듯 내일을 위해 오늘도 소중하고 작은 변화에도 적응하며 내일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하고 예측한 목표나 가치에 도달하려고 진력해 왔던 것은 설명이 필요가 없다.
모든 예술도 그렇게 진화되어 시대의 흐름에 꿰맞춰지거나 순응하였다. 그런데 文房四友를 매개로한 書藝를 지난날에 빛난 書藝術을 그리워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 같이 보통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렇게 된 것에는 서예인 모두의 책임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모든 藝術이나 學文이 그러하듯 시작할 단계에는 정해진 기준이나 法則을 충실히 하여야만 진화된 새로운 수
준이나 경지를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은 옛 先賢의 것을 열심히 보고 그려내는 노력이 없이는 기본을 構築할 수 없기 때문에 개성있는 서예가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서예가 業이다” 또는 “서예가 業은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시장에 가서는 그곳의 전시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서예수준을 갸름하게 된다. 어는 게으른 붓글쟁이가 인사동 전시장에서 게으른 자신을 깨우게 하는 墨展인 砂曲墨緣展을 만났다.
-贊助作品의 팽팽한 線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니 맞은편 정면에 대작 “道”가 보인다. 사곡 이숭호 선생이 찬조출품한 걸작품이다. 사곡의 “道”에는 그의 철학을 심어둔 것일까? 老子의 가르침을 文字藝術로 전사하였다.
대강의 뜻을 보면 “道는 텅 비어있고(沖), 써도써도 마르지 않고, 그윽하며(淵) 만물의 으뜸(宗)이다. 또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얽힘이 풀리며, 빛이고 조화를 이루고 티끌도 고르게 한다. 그리고 아주 맑아 그윽하다(湛). 그런데 道의 출생은 어디(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상제(하느님)보다 앞서는 것 같다” 정도다.
원문 42字를 草書로 脇書하고 “道”字의 획線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듯 刻字하였다. 線이 굳세고 무성하다기 받침線은 리본체조 무용수의 아름답고 유연한 변화가 가져오는 생동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沖과 盈은 通하는 것이다. 沖이니 盈이니 하는 것은 곧 우주전체라 해도 될 것이다. 노자의 無爲無不爲(하는 것도 없지만 하지 않는 것도 없다.)의 자세를 취하는 작가는 문하생을 가르치고 함께 연구해 가는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라서 인지 발걸음이 쉬이 옮겨지지 않았다.
-臨書는 평생의 글감이다.
모든 사물에는 객관적인 標準이 있기 마련이다. 객관적 사실을 존중하고 정확한 위치에서 출발하여 만들어진 결과는 완전한 수준에 도달하게 만드는 잣대가 된다. 펼쳐진 작품들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깨닫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거대한 臨書 작품이 압권이었다.
臨書는 말 그대로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를 보고 비슷하게 쓰는 것이다. 임서의 주된 목적은 붓글 쓰는 방법을 터득하고 기본을 충실히 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서예가는 평생 동안 임서를 꾸준하게 한다. 사실은 게을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술은 끊임없는 모방의 단계를 거치면서 자기만의 새로운 창작품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溫故知新이니 法古創新이니 하는 것이다.
임서작이 많았다. 愚巖을 비롯한 분들의 禮記碑, 一慧 외의 集子聖敎書, 楷書의 육조체를 임서한 靑雲과 그의 書友들, 娜玄과 그의 글동무들이 만든 篆書들은 모두 대작으로 法帖의 첫字부터 끝字까지 忍苦의 시간을 쏟았으니 여름이 더울리 없었을 것이고 가을의 단풍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정말 수고하셨다. 砂曲이 문하생에게 혹독한 과정을 經營하고 있음은 분명한가 보다. 임서 작품에서 공통된 점은 筋骨(골격과 힘줄)이 확연하게 정돈되어 향후 살(肉)을 붙이면 서예의 완성에 이를 것이다.
-다양성이 格을 높인다.
東江 趙守鎬교수는 “書라는 것은 이런 글씨가 명작이고 이런 글씨가 실패작이라고 정해진 형태도 없고, 이런 筆法이 좋다고 하는 절대적인 필법도 없다. 즉 글씨가 좋고 나쁨을 재는 절대적인 기준도 잣대도 없다는 것이다. 글씨가 좋고 나쁨을 정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 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행하게도 당신의 눈이 의외로 어둡고 밝지 않다는 점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라 하였다. 어디까지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이라고 본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개성
이 다르고 사는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創作하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鑑賞하거나 評할 때에도 그 양태는 다양한 것이라고 본다. 東江이 “당신의 눈---”이라고 指摘한 것은 일부 공감이 가기도 하나 多樣性은 個性이기 때문에 작가들 개인의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곡전에도 여러 樣態의 작품을 걸었다. 예서류 20여점, 전서류 20여점, 행초류 17여점, 전·서각류 12여점 기타 해서·한글·문인화 등 전체 87여종이 5층 전시공간을 가득 메웠고 많은 同學徒들과 知人들의 관심이 컸다는 것은 축하 盆의 개수에서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형식을 중시하는 작품이 다수를 이루고는 있었지만 고민을 많이 하여 선보인 작품도 많았다. 작품도 종이(紙)를 비롯하여 나무(木), 흙(瓷器), 종이와 아교, 돌(石) 등에 魂을 담아 표현함으로서 전시 작품이 다양하였고 그래서 볼거리가 많았다.
필력이 좋은 것은 多骨하다 하여 글씨를 쓰는 데는 順逆이 있고 向背가 있으며 또한 중국의 蘇軾(蘇東坡)은 “서예를 보면 그 위인이 어떤가를 알게 된다(觀其書 有以得其爲人).”고 했다. 이는 곧 人品과 書品을 묶어 말한 것으로 서예가의 인품과 氣槪가 서예작품의 藝術品格에 연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香泉 故恩 裕庭 心鄕의 刻이 다르고, 賢岩은 “志於道據於德 依於仁游於藝”를돌에 새겨 군자가 갖추어야할 德目을 萬代에 전하여 벼리로 삼고자 하였고, 紫巖의 天地無極은 沖과 같은 格이며, 小靑 琴亭 民齋의 印은 단정하여 보는 이의 마음이 평안하게하고, 心鄕의 조각돌을 받치고 있는 양각의
오돌톡한 문자와 六曲屛은 개인적으로 간직하고픈 충동까지 생겼으니 사곡전 서우들에게 감사의 맘이 생긴다. 翰兀의 153개 刻이 품어내는 돌가루가 책상을 덮었으니 杏林書學會員들의 노력이 우뚝하다. 그 외에도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각자가 서사한 書, 그려낸 畵, 새겨낸 刻의 형상에서 사곡의 보살핌이 고르고 깊이 묻어있고 그들이 연출한 點하나 線한줄 칼痕迹 한 점 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중국의 송나라 錢惟治는 “마음이 손을 지배하고 손은 붓을 지배하고 법은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글씨는 마음을 그려내는 것이다. 마음이 바르면 글씨는 바르게 되기 마련이다. 마음과 글씨가 제대로 그려지고 펼쳐질 때에 그 속에서 규범이 만들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서예술을 생활 속에서 찾아야
서예술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고민을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는데, 곧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회장 紫巖이 인사말에서 創立展이라고 했으니 더더욱 苦惱하고 망설이고
可否의 문턱을 수없이 나들락 했을 것이다. 서예를 배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마음 깊숙한 곳에 道義가 있어야 하며 또한 聖哲의 학문으로 넓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서예가 所重해지고 생의 測度가 바르게 되고 활기가 充滿할 것이다.
사곡전의 특징이라면 첫째, 임서의 중요성을 부각하였고, 둘째 먹을 갈고 칼을 갈아서 시작한 운필요령이나 칼끝 놀림이 제각각 달리한 개성 넘치는 작품이 전시되었다는 점이며, 셋째 사곡이 지향하는 정직한 기본을 벗어나지 않고 정성과 노력으로 바른 작품을 만든 實踐精神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서예는 쉬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쉽다고 보면 게으르게 되어 마음이 解弛해지고, 어렵다고 보면 抛棄하고 그만두겠다는 마음이 생겨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서예는 끝없는 노력과 연구를 바탕으로 한 기다림의 예술이고 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어찌 좋은 점만 있을까! 사곡전에 선보인 임서작은 그간 배운 것을 총 복습한다는 측면이 있어 제외하고 창작품의 경우 작품의 구도나 형태만을 관람하려고 전시장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작품 속에 담긴 글과 그림의 내용이나 작가가 추구하는 哲學같은 것을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하는가도 느끼기 위해 찾는 다는 점을 看過할 수 없는 것이다.
어려운 한자는 토와 훈을 달고 글의 내용을 現示하였드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고 서예술이 문자를 붓으로 전사하는 것이므로 ‘변형하여 창작한 글자, 어려운 초서자, 대·소전과 金文의 전서자 등’은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것이거늘 일반인이나 서예를 좋아하는 동호인들이 그냥 스쳐가게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월간서예 崔光烈사장이 예전에 “서예작품을 보고 가슴이 찡하고, 서예작품을 보고 고개가 끄덕여지고, 서예작품을 보고 자신도 도전해 보고 싶고, 서예작품을 보고 서예가가 존경스러워 보이게 하는데도 문장의 선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사곡서단이 씸플하면서도 쉬운 글자, 우리글자과 중국문자와의 혼용된 글감으로 생활서예, 쉬운 서예술, 친근감이 가고 호기심
이 발동할 수 있는 작품으로 진화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맺으며
王羲之는 晩年에 가서 書가 좋아 졌다고 한다. 그러니 쉬지 말고 배움에 공을 들인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사곡서단의 건강한 발전과 참신한 규범(法)이 이룩되기를 바램(禱)한다.
끝으로 愚巖선생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성경구를 휘호하였다. 이 福音말씀이 傳하는 의미를 생각하며 사곡서단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