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은 정유년(1597)4월1일(양5월16일) 옥에서 풀려나와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기 위해 남행을 했다. 백의종군길에 오른지 한 달 가까이 된 4월27일(양6월11일) 드디어 충무공은 순천에 도착했다. 그날의 기사는 이러하다: “맑다. 일찍 떠나 [송치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춘)이 사람을 시켜 점심을 보내왔다.] 순천 송원에 이르니 이득종·정선이 와서 기다렸다.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는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 안부를 묻는데, 그 위로하는 말이 매우 간곡했다. 저녁에 순천부사(우치적)가 와서 봤다. 정사준도 와서 원균의 망녕되고 전도된 상황을 많이 말했다.” (참고: 괄호[ ]내의 글은 <李忠武公全書>에 없고 <초서본>에 있는 글. <전서>원문:二十七日丁亥。晴。早發到順天松院。則李得宗,鄭愃來候。夕到鄭元溟家。則元帥知我之至。送軍官權承慶致吊。又問平否。慰辭甚懇。夕。主倅來見。鄭思竣亦來。多言元公悖妄顚倒之狀。)
광화문 동아일보 근처는 조선 시대에 죄인을 다스리는 우포도청이 있던 서린방이다. 나는 시간이 날 때 마다 대체로 하루씩만 걸었고 추운 겨울이나 일기가 나쁜 날에는 걷지 않았다. 순례길을 간다면 쉬지 않고 계속하여 걸어야 할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도 들고 돈도 많이 들고 한 달 가까운 시간도 내기 어렵다.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휴일의 한나절 걷기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걷기는 충무공을 묵상하는 기회가 되고 건강도 증진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걷다보니 1년 만에 겨우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인송, 덕유와 함께 6월6일 밤10시45분 서울발 무궁화 열차를 탔다. 계절은 충무공이 걸은 때와 같은 6월이다. 이번 코스는 백의종군로의 마지막 구간인데 친구들이 동행해 주어 무엇보다도 힘이 났다. 나는 함께 걸어 주겠다던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냈었다. 메일을 미리 보내지 못해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선약으로 참가하지 못하고 잘 다녀오라는 격려를 해 주었던 것이다. 새벽3시5분, 열차는 우리를 구례구역에 내려 주었다. 사업에 바쁜 덕유는 이 열차를 애용하여 지리산 무박 종주를 여러 번 했었다.
“여기서 늘 재첩국으로 해장을 했어. 바로 저 집 한 곳뿐이야.”
“나는 이런 새벽에 뭘 먹어 본 적이 없는데...”
덕유의 권유에 대한 인송의 대답이 흔쾌하지 않았다. 그는 열차에서 4시간20분 동안 앉아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내가 눈가리개와 귀막이를 주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시원한 국물을 맛보더니 인송도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는 것이다. 덕유는 배낭에서 헤드 랜턴을 꺼내더니 모자 위에 썼다.
“난 그런 것 안 가져 왔는데...”
“괜찮아. 내가 뒤에서 걸으면 문제없어”
인송이 헤드랜턴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종대로 걸으니 주위는 캄캄하나 발밑은 어둡지 않았다. 남쪽 하늘에는 보름 지난달이 구름 사이로 간간히 얼굴을 보이고 일행을 반기는 것이다.
도로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지역을 약 30분 정도 걸으니 17번국도 도로표지판을 만났다.
“어둠에서도 알바하지 않고 용케 제 길을 찾았구나.”
“오늘 일진이 좋다.”
“국도에는 인도구분이 없어. 차를 마주 보고 걸어야 안전해.”
일행은 좌측 차로의 갓길을 종대로 걸었다. 구례구역 북쪽에는 섬진강이 동으로 흐른다. 섬진강 남쪽 지류인 황전천을 좌로 끼고 남행하려는 것이 일행의 계획이다.
“5시가 일출이니 조금만 더 가면 세상이 훤해질 거야. 그리고 옛 국도가 남아 있는 곳을 만나면 훨씬 걷기 안전하고 좋아.”
나는 친구들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었다. 박명이 되어 먼 경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17번 국도에는 차량이 증가하여 일행의 순례를 위협하고 있었다. 5시15분경 황학마을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별로 이용하지 않는 정류장이라 자리는 먼지가 뿌옇게 덮여 있었다. 덕유는 비닐을 깔고 앉았지만 인송은 마다하고 갓길에 그냥 앉았다. 덕유의 해드 랜턴은 아직도 빛나고 있었다.
황전면사무소 표지석을 지나 15분쯤 가다가 6시경에 멋진 정자나무를 발견했다.
“아침 식사하기에 명당이다.”
인송은 빵을 내놓고, 덕유는 주먹밥을 3개 꺼내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누라가 지리산 둘레길 간다니까 싸주더군. 이런 자동차길 간다고 했으면 주먹밥은커녕 못 가게 말렸을 거야.”
“야, 이거 정말 맛있다. 별거 다 들어 있네. 뭐지?”
“잣, 호두, 해바라기씨 그런 것들이야.”
“너무 부럽다. 나는 계란 삶아 왔는데...”
“이제부터는 오르막길이다. 옛 국도가 있을 거야. 지도에서 봤거든...”
나는 앞으로의 길이 힘들 것이지만 길은 좋을 것임을 암시했다. 실제로 우리는 옛 국도를 만났다. 도로변에 트럭을 세우고 양수기를 돌리는 농군이 있었다.
“아저씨, 말씀 좀 묻겠는데요. 이런 길이 송치까지 계속 되나요? 저 옆의 국도와 합해져서 터널을 통과해야 되나요?”
“이 길로 가면 터널 통과 안하고 재 넘어 갑니다. 국도를 만나는데 왼쪽에 이 길이 있으니 그 길로 가세요.”
“킾 레프트(Keep left.)하란다.”
7시 경, 오르는 길에 <송치정유소>가 있었다. 더 이상 버스가 다니지 않으므로 쇄락한 모습이다.
“야, 이길 끝내준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다.”
“이런 길이라면 지리산 종주 못지않다.”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7시 50분경에 비로소 송치고개 마루에 올랐다. 거기에는 어느 단체의 수련관이 있었다.
“이런 속도면 오전 중에 순천 들어가겠다.”
당초의 계획은 14시 순천 도착이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훨씬 낙관적이었다.
“자, 이제 내려가자. 여기가 난중일기의 ‘송치’라는 고개임이 분명해. 대동여지도에는 ‘송원치’라고 표시되어 있어.”
나는 지도를 펴서 송치 터널 위를 디귿자 모양으로 돌아내려 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충무공은 이곳을 적어도 세 번 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넘었을 것이고, 백의종군하면서 두 번 넘었다. 충무공은 4월27일 이 고개를 넘어 순천에 도착했으나 원수(권율)를 만나지 못했다. 금부도사가 원수에게 보고하여 권율은 이순신의 도착을 알았다. 권율은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이순신의 모친상을 조문하고 안부도 물었다. 원수는 이순신에게 원기가 회복된 후에 진중에 와도 된다고 허락했다. 원수는 며칠 후 작전상 보성으로 갔기에 충무공은 보름 정도 휴식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구례에 머물고 있던 체찰사를 만나러 5월14일에 길을 떠났다. 그 때의 난중일기 기사는 이러하다: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우치적)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부찰사는 부유(순천 승주군 부암면 창촌리)로 향했다. 정사준, 정사립, 양정언이 와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혼자]길을 떠나 송치 밑에 이르러 말을 쉬게 했다. [나는 바위 위에 누워 한 시간이 넘도록 곤하게 잤다.] 운봉(남원과 함양 사이)의 박롱이 왔다. 저물 무렵 찬수강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건넜다. 구례현에 이르니 현감(이원춘)이 와서 봤다.” (참고: 괄호[ ]내의 글은 <초서본>에 있는 글. <전서>원문:十四日甲辰。晴。朝。府使來見而歸。副使發向富有。鄭思竣,思立,梁廷彦來告陪歸。早食後登程。到松峙底歇馬。雲峯朴巃來到。暮到粲水江。下馬步渡。到求禮。主倅卽來見。)
8시15분경 송치휴게소에 이르러 일행은 이제는 거의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낙관을 하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양말을 벗고 평상에 올라 편히 앉았다. 덕유가 캔 맥주 3개를 사 왔다.
“2천원이면 싼 거야.”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우리가 쉬고 있는 이 휴게소가 바로 이순신이 바위에 누워 한 시간 잠을 잔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6월5일, 나는 대동여지도의 지명을 확인하다가 읽을 수 없는 한자를 보았다. 그래서 검암에게 전화를 했다.
“검암, 내일 청계산 산행하나?”
“응, 가지. 왜?”
“여지도에 모르는 지명이 있어서 물어 보려고.”
다음날 청계산에서 만난 검암은 내가 내민 지도를 보더니 금방 읽어 주었다.
“이 글자는 물 졸졸 흐른다는 뜻의 잔(潺)인데 잔수(潺水)란 지명은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내(川)라는 뜻이야. 그리고 이것은 투구 두(兜)자 인데 도솔(兜率)이라고 쓸 때는 도라 발음해.”
검암은 나의 궁금중을 즉석에서 풀어 주었다.
“나는 아무리해도 그 자의 부수를 모르겠어서 자전을 못 찾겠어. 솔(率)자도 그렇게 써 놓으니 도저히 무슨 자인지 모르겠고...”
난중일기에 보면 충무공이 찬수강(粲水江)에 이르러 말을 내려 걸어서 건넜다는 강이 바로 이 강 아닐까?“
“그럴 거야. 옛 사람들이 그냥 ‘잔잔한 물’ ‘잔수’ 하니까 충무공이 ‘찬수(粲水)’라 기록했을 수도 있고...김정호는 ‘잔수(潺水)’라 기록했을 수도 있고...”
“이제는 내려가는 길만 있으니 다행이다.”
우리는 양말을 벗어 뜨거운 발바닥도 식히고, 세수도 하고 충분히 휴식을 했기에 9시 반 경에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휴게소를 출발하여 한 시간을 걸었는데 인송이 허벅지 통증을 호소했다.
“이온 음료를 좀 마셔보자.”
나는 분말 포카리스웨트를 인송 물통에 넣었다.
“전해질 부족 문제가 아닐 거야. 인송, 그 신발 잘 맞아?”
덕유가 물었다.
“이건 조깅화야. 걷기에 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래 걸으려면 바닥이 두텁고 딱딱한 것이 더 편해.”
“그래서 군용 워카도 그렇게 생겼구나.”
덕유의 전문적 진단에 내가 이렇게 맞장구쳤다.
“무거운 신발이 오히려 장거리에는 좋을 수 있지.”
우리는 나무 그늘에 앉아 쉬었다. 우리는 순천동천을 왼쪽에 두면서 계속 걸었다. 오른쪽 멀리는 17번 국도가 달리고 있었다. 2시간 이상을 힘들게 걷는 중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도 아닌 시골길을 자주 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 말씀 좀 묻겠는데요. 이런 길로 순천까지 갈 수 있나요?”
“네 한 참 가다 보면 자전거 길이 나올 거시요. 그 길로 쭉 가면 시내가 나오요.”
자전거를 쉬고 있던 남자의 대답이었다.
정오 가까이 되어 겨우 동산리에 접어드니 무슨 마트라는 간판이 보였다. 이미 땀을 많이 흘리고 피곤한 상태라 우리는 두말없이 들어갔다. 도시의 24시간 마트가 아닌 시골의 구멍가게였다. 나는 무조건 냉장고의 투명 유리문을 열고 <여수생동동주>를 한 병 꺼내면서 ‘여수가 가깝구나.’라고 생각했다.
“아주머니 이것 얼마예요?”
“1,500원인디.”
우리가 탁자에 앉으니 주인아주머니가 상치와 젓갈을 내 놓았다. 우리는 순식간에 한 병을 마시고 다시 한 병을 꺼냈다. 이번에는 <순천쌀막걸리>다.
“그놈은 쪼까 비싼 놈인디...”
“얼만데요?
“2,000원이라. 여기 사람들은 더 싼 놈을 마시요. 이놈은 1,300원인디.”
이때 농부 한 사람이 들어왔다. 주인은 자동적으로 1,300원짜리 막걸리를 내 놓았다. 농부는 양재기 잔에 술을 따라 단번에 마시고 상치를 젓갈에 찍어 안주를 했다. 우리도 그렇게 안주를 먹으면서 세 번째 병의 마개를 땄다.
“아주머니, 여기 뭐 닭도리탕 같은 것 없나요?”
갈증이 가시니 허기가 찾아왔다.
“여기는 주점이 아니고 그냥 가게야.”
덕유의 주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라면은 끓여드릴 수 있는디요.”
“좋아요. 라면 두개만 끓여주세요.”
“달걀도 너으까요?”
여 주인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를 푸는 듯 했다.
이때 한 중년 여인이 들어 왔는데 농사짓다 온 사람 같았다. 더운 여름철 야외의 농사일은 힘들다. 그들에게 막걸리는 필수 영양제다. 잠시 후 노인 한 사람도 들어와 그 세 사람이 좁은 탁자에 앉았다.
“인송, 허벅지 근육을 풀려면 막걸리를 더 마셔. 알콜이 근육이완제야.”
덕유가 술을 권했다. 옆 테이블의 세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은 데 말은 별로 없었다.
“그 댁이 제일 젊은 것 같애요.”
“나하고 연애하자고요?”
나는 여 주인에게 농담으로 대꾸했다.
“우리는 다 같은 또래예요. 해방둥이.”
“아이고, 이게 웬일이당가? 지와 같아분당께.”
“50대로 밖에 안 보이는데요.”
“아닌께. 무릎이 아파 이따가 병원에 가야 쓴디.”
“그래요? 이리 와 보세요.”
“저분이 의사예요. 가 보세요.”
그녀는 의사라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덕유에게 다가갔다.
덕유는 정식 환자 다루는 방식으로 그녀를 진단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하세요. 진짜 유능한 의사시니까? 서울대학병원에서 근무한 분이예요.”
그녀는 이게 웬 행운인가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옆자리의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네, 농사지으세요?”
“그러제이.”
“연세가 얼마나 되시는데요?”
“야든 둘이제.”
“어유,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그 연세에 아직도 농사를 지으신다고요?”
“그럼 머하나? 근디 아자씨는 어디서 왔소?”
“저희는 구례에서 예까지 걸어서 왔어요. 충무공이 백의종군한 길을 걷는 거예요. 충무공이 여기로 지나가셨을 거예요.”
“여기 순천에 충무공이 말 여덟 필 끌고 갔다 해서 팔마(八馬)라는 데가 있는디.”
여 주인이 끼어들었다.
“그래요? 순천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숨겨진 이야기가 많이 있겠네요.”
“아주머니, 여기 어르신네께 막걸리 한 병 드리세요.”
주인은 덕유가 보낸 막걸리를 마을 사람들에게 따라 주더니 남은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고려 충렬왕 시절 최석은 승평(순천)부사였다. 당시 임기 끝나는 부사는 관례로 말 일곱 필을 받았다. 최석은 말 한필이 낳은 새끼까지 여덟 필의 말을 백성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공덕을 기리는 팔마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정설이다.
12시 반이 지나서 우리는 마트를 나왔다. 송치 휴게소에서 예상한 도착 시간은 이미 지났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6킬로미터 남았다. 평소 걸음이라면 한 시간 반이면 간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형편으로는 2 시간이상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야, 이제 6킬로. 나는 10킬로면 아무 것도 아닌 생각이 들어. 이것이 평소에 10킬로 걷기를 하는 이유야. 늘 걷던 거리잖아. 10킬로는 두 시간이면 걸어.”
정오를 지나 기온은 더 오르고 태양은 불같았다. 시골의 농로는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흐렸던 하늘이 개이고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면서 가열된 시멘트의 열기가 전신에 느껴졌다.
“우산 있지? 양산처럼 쓰고 가자. 난 늘 이렇게 쓰고 다녔어.”
나의 제안에 친구들은 군소리 없이 우산을 펼쳤다. 한낮 시골 길을 우산 쓰고 가는 세 남자를 마을 사람들이 보았다면 참으로 괴상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허벅지 통증을 호소하던 인송의 걸음이 빨라졌다. 인송은 덕유의 뒤를 따라 걸었었는데 어느듯 덕유 옆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빠르게 걷는 것이다.
‘아니, 이게 웬일이지? 막걸리 효과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갔다. 순천동천에는 자전거 도로가 붉은 색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버스정거장에 앉아 쉬었다.
“야, 자전거 도로 만났으니 이제 거의 다 왔나보다.”
“아냐, 아직 한 시간 이상 더 가야해. 힘들지? 버스 타고 가라.”
“미하, 너 누구 염장지르냐? 여기까지 왔는데.. 뭐? 버스 타라고?”
“남들은 ‘다 왔어. 조금만 가면 돼.’ 이렇게 격려하는데 너는 뭐, 그 반대다. 아직 멀었으니 힘들면 버스 타라고?”
그들은 나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마지막 한 시간의 순례가 이어졌다.
우리는 시청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근처의 호프집에 들어갔다.
“양념닭인가요, 그냥 구이인가요?”
“기름만 뺀 걸로 해주세요.”
“미하, 백의종군로 순례를 축하한다! 자. 건배.”
“고맙고 행복하다. 나 혼자 걸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 오늘은 제일 먼 길을 걸었음에도 어느 때보다 힘들지 않았어. 고마워.”
10여분 후에 안주가 나왔다. 우리는 그 사이에 여러 잔을 비웠다.
“경기도 분들 같아요.”
여 종업원이 우리의 말투를 알아 봤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제가 화성에서 왔거든요.”
“인송, 아까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걸었지?”
“내가 열불나는 이야기를 했어. 그랬더니 인송이 내 이야기에 빨려 들어 온 거야.”
“응, 그런 방법도 있구나. 덕유, 자넨 과연 천하의 명의다.”
일행은 근처의 목욕탕에서 100리길 순례의 피로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