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W원장은 인구 3천 명 정도인 농촌지역 면소재지에서 20병상 규모의 작은 내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의원에는 폐렴이나 장염 등으로 2-3일 정도 입원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암으로 대도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와 이 의원에 입원하여 근근이 연명하는 환자도 있다.
72세의 L할머니 역시 그런 환자 중의 한 명이다. L할머니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인근 도시의 큰 병원에서 개복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암세포가 복강 내로 전이가 되어있어 더 이상의 수술을 포기하고 이 의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W원장은 특별한 치료를하지 못하고 간단한 수액 공급과 통증 조절, 하제 투여 등으로 대증요법을 하고 있었는데 L할머니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의식이 혼미하고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하게 되었다. L할머니의 큰아들은 W원장을 찾아와 이미 가족들끼리 다 상의가 끝났고, 장례 절차도 준비되었다며 그냥 이 상태에서 집으로 모셔갔으면 한다고 요청하였다. W원장은 지금모셔 가면 곧 돌아가실 텐데 그럴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이곳에서 더 이상 치료해 드릴것은 없지만 원한다면 다시 큰 병원 응급실로라도 모셔가게 해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큰아들은 이미 가망이 없는 건 모두가 알고 있고 병원에서 가시느니 집에서 편하게 돌아가시는 편이 낫겠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윤리적 고찰>
위 사례가 환자의 퇴원 조치가 환자의 사망으로 이어졌다면, 이것은 비자의적인 소극적 안락사의 형태에 해당한다.
안락사(euthanasia)는 ‘좋은 죽음’이나 ‘편안한 죽음’이라는 어원상의 이해보다는 “죽음을 앞당김”(hastento death)으로 이해하는 편이 의료현장에서 벌어지거나 벌어질 수 있는 안락사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길 의사를 표현하고 있느냐에 따라 자의적(또는 자발적)(voluntary), 비자의적(non-voluntary), 반자의적(involuntary) 안락사로 분류할수 있다. 반자의적인 경우는 죽음을 앞당기고자 하는 의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즉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에 반하여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므로 논의할 만한 가치도 없는 명백히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위이다. 비자의적 안락사는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식물인간이나 영아 등 환자 자신의 의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죽음을 앞당길 경우 비자의적 안락사라 하겠다. 위 사례의 경우도, 만약 환자
가 평소 자신의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면, 환자의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내려지는 안락사는 비자의적인 안락사에 해당된다. 반면 환자 자신의 의사에 따라 죽음을 앞당기고자 하는 경우는 자의적인 안락사에 해당된다.
안락사는 죽음을 앞당기는 방법에 따라 적극적(active) 안락사와 소극적(passive) 안락사로 구분된다. 위의 경우처럼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 빤히 예견되는 데도 불구하고 퇴원을 요청하는 것은 치료거부를 통해 죽음을 앞당기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진행 중인 치료를 중단(withdraw)하거나 통상적 치료를 시행하지 않음(withhold)으로써 죽음을 앞당기는 것을 소극적 안락사라고 한다. 반면 적극적 안락사는 치료와는 상관없이 극약투여와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직접적으로 야기하는 경우이다. 흔히 전자를 ‘죽게 내버려둠’(letting die) 후자를 ‘죽게 함’(killing)으로 구분하여 왔다.
따라서 안락사는 총 여섯 가지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 중 윤리적으로 의미 있는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의적인 적극적 안락사, 자의적인 소극적 안락사, 비자의적인 적극적 안락사, 비자의적인 소극적 안락사이다. 이들 안락사의 형태 중 자의적인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는 유럽 몇몇 국가들에 불과하며 미국에서는 현재 법률적 허용을 요구하는 움직임은 있으나 법적으로 허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리학자 및 법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뜨겁게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미국은 오레곤(Oregon) 주에서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을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비자의적 안락사의 경우에는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데, 환자의 의사를 알 수 없어 대리판단에 의해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이 무엇인지 고려하여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 판단을 누가하느냐 역시 쉽지 않은 문제이다. 따라서 자의적인 적극적 안락사의 논쟁보다 비자의적인 안락사의 논쟁은, 그것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더 복잡하고 어렵게 전개되고 있다.
제임스 레이첼스(James Rachels)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의 구분이 윤리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펴 왔다. 그러나 의도를 배제한 소극적 안락사와 적극적 안락사의 구분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존 애라스(John D. Arras)는 자의적인 적극적 안락사의 윤리적 정당성과 법률적 시행의 정당성을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안락사 자체의 윤리적 검토는 별도의 긴 논의를 필요로 할 것이기에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하고 다시 원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위 사례는 비자의적인 소극적 안락사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핵심적인 문제는 치료거부, 좀더 정확하게는 응급실로의 후송 거부가 윤리적으로정당화될 수 있는 상황이냐는 것이다. 큰 아들을 포함한 가족은 “집에서 편하게 돌아가시는 편이 낫겠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과연 환자 L할머니에게도 최선의 이익이 되는 결정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대리판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환자의 편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즉 만약 환자가 이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내려야하는 결정은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결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결정은 쉽지 않다. 더욱이 위 사례에서는 더욱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환자의 상태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암세포가 복강 내로 전이되어 더 이상의 수술을 포기하고 현재 대증요법만을 받아오던 L할머니는 “의식이 혼미하고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담당 의사 W원장은 큰 병원 응급실로 옮겨갈 것을 권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응급실에 가면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될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응급실에 가지 않는다면 당장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얼마만큼의 통증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그러나 W원장이 응급실로 옮겨갈 것을 권고한 것은 최소한 큰 병원에서의 진료가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항상 가능한 모든 치료를 받는 것이 환자에게 최선의 방법은 아닐 수 있다. 검사나 치료가 의료적으로도 별 이득이 없고, 결국 환자를 더 힘들게만 한다고 판단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환자는 의사와 함께 최종판단을 내릴 수있다. 그러나 위 사례에서처럼 환자가 의식이 혼미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때에는 환자의 보호자가 의사와 함께 최종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 상황에서 응급실로 옮겨가는 것 자체는 환자에게 큰 해악을 끼치는 일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일단 환자는 응급실로 옮겨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L할머니가 응급실로 옮겨진 후, 어떤 부가적인 치료나 처지를 요구하는지에 따라 그 때 다시 환자 가족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치료가 통상적이고 큰 고통이나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어 보인다. 만약 죽음의 길에 들어선 환자가 스스로 사소한 진료 거부를 통해 죽음을 앞당기고자 할 경우 이것도 자의적인 소극적 안락사의 형태에 속한다.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는 판단이 자율적인 판단이었다면 이러한 치료거부를 법률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지만, 이 경우에도 의사는 치료거부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환자가 신중히 생각해 보도록 권고해야 한다.
L할머니가 응급실로 옮겨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는 이유는 만약 L할머니가 응급조치 후 다시 의식이 또렷해져 스스로 자신의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이후 전개될 상황에 대해서도 자신의 뜻을 가족들에게 알릴 수 있다면, 이것은 환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좋은 상황이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도래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단지 위와 같이 설명된 상황 하에서 L할머니를 집으로 모시는 것은 환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명백히 죽음을 앞당기고자 하는 것이며, 이 결정이 환자에게 유익한 결정인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응급실로 옮겨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점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W원장의 입장에서도 가족들의 권고거부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W원장은 환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환자의 죽음이 빤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방치했다고 할 수 있어 W원장에게도 윤리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W원장은 자신의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다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W원장의 “이곳에서 더 이상 치료해 드릴 것이 없다”는 말을 큰 아들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W원장은 응급실로 옮겨갈 경우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설명하고, 응급실로의 이송을 거부하는 큰 아들에게 자신이 이송을 권고하는 이유를 설명했어야 한다. 다시 말해 W원장은 자신이 내린 판단이 환자를 위한 최선의 판단이었다면, 그 판단을 L할머니의 큰 아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큰 아들의 뜻을 따르는 것은 환자의 입장에서 최대의 노력을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
<법률적 고찰>
의사의 치료행위에 대해서 환자는 자기결정권에 따라 치료를 받을 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환자의 퇴원 요청도 기본적으로 자기결정권의 행사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자기결정권도 결정권 행사가 ① 공서양속 위반인 경우, ② 의사의 진료방침과 충돌하는 경우, ③ 환자의 정보 제공요구가 환자의 치료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경우, ④ 법정대리인의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환자 본인에게 불이익한 경우에는 행사의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자기결정권은 본래 환자가 직접 행사하여야 하는 권리이나 미성년자, 정신질환자, 사고 후 의식불명인 환자 또는 비교적 오랜 기간 질병이 진행되거나 약물을 투여 받아 의식이 약화된 환자의 경우에는법정대리인이나 가까운 친족 등이 본인을 대리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할수 있다.
사례에서 L할머니는 의식이 혼미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이 L할머니의 자기결정권을 대리행사한 점에는 위법이 없다. 그러나 환자에게 불리한 결정으로 환자가 퇴원할 경우 환자의 사망이 쉽게 예견될 수 있는 경우라면, 이때는 자기결정권의 제한사유가 되는지 여부를 별도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대법원은 ‘보호자의 강청에 따라 치료를 요하는 환자에 대하여 치료중단 및 퇴원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담당 전문의와 주치의에게 살인방조죄가 성립한다.’고 하여 의사의 살인방조죄를 인정하고 있다.(이른바 보라매사건 대법원 2004.6.24.선고 2002도995 판결 등)
그런데 이 사례에서 W원장이 하고 있던 시술은 대증요법이었다. 법적인 핵심은 이 대증요법의 중단이 L할머니의 죽음을 초래하였는지 여부에 있다. 만일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 위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따라 W원장과 L할머니의 아들은 법적인 책임을 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는 환자의 적법한 자기결정권의 행사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