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연원(淵源)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옛적 부터
한국 최고(韓國 最古:가장 오래된)의 성씨(姓氏)로 알려져 왔다.
즉,그 원류(源流)를 살펴보면 고대 기자조선(古代 箕子朝鮮)이래
마한 왕국(馬韓 王國)을 거처 신라 말기(新羅 末期)에
한지원(韓智原)의 아들 四兄弟분이 있는데,
셋째 아들 휘 란(諱 蘭)이 淸州 韓氏의 시조(始祖)이다.
(註:蔓(만),簡(간),英(영) 세분은 居中國으로 되어 있음)
청주한씨는 삼한시대부터 세력있는 씨족이라
원래 은나라 태사인 箕子이후 역사가 1311년이며,
마한말 8세 원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으니 첫째 우평과 둘째 우량,
셋째 우성이라 마한이 백제에 멸망하고 흡수되니
우량은 신라로 귀화하여 탈해 왕조에 벼슬하면서부터
청주(상당) 한씨라 칭하게 되었으니
이후 이십구대가 지나 諱(휘) 邦亨(방형)이란 분이 계셔
벼슬은 신라 시중이며 헌강왕 때에 황간 지장산 아래로 이주하시어
諱 光宗(광종), 후대로 智原(지원)이란 자손을 두셨으니
학행이 뛰어나 벼슬은 증시중이니
그 후대로 蔓(만), 簡(간), 蘭(란), 英(영)의 네 아들을 두셨는데
그 중 셋째인 諱 蘭(란)이 즉 태사공이라.
淸州韓氏(청주한씨)의 始祖(시조)이신 韓蘭(한란)으로,
馬韓 元王(마한 원왕)의 次男(차남)이신
友諒(우량) 왕자로부터 32세 후손이시며,
太祖 王建(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開國功臣高麗三重大匡太尉(개국공신 고려 삼중대광 태위)에
오르신 분이다.
시조 한란 韓蘭 (태위공,태사공)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려고 그의 집앞을 지날 때
칼을 차고 나가 종군하여 삼한통합의 공을 세우고
삼중대광 문하태위가 되고 개국벽상공신에 서훈 되었다.
'한씨세보'에 의하면 한란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며
한씨는 기자의 31세손 준왕(고조선의 마지막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금마(현 익산)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이라 하며, 위만에게 억류된 왕자 및 친족이 성을
한이라고 한것으로 보아 준왕 이전에 한씨로 하였다고 한다.
마한 말기의 원왕에게 세형제가 있었는데 마한이 망하자
첫째 우평은 고구려에서 태원 선우씨,
둘째 우성은 백제에서 행주 기씨,
셋째 우경은 신라에서 청주 한씨가 되었다고 한다.
우경의 31세손인 한지원에게는
한만, 한간, 한란, 한영 네 형제가 있었는데
세째 한란이 청주한씨의 시조가 된다.
淸州韓氏(청주한씨)의 始祖(시조)이신 太尉公 韓蘭(한란)의 13世孫
襄節公 確(양절공 확) (평해공 탁(平海公:倬 )의 祖父)
한확의 묘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팔당호를 따라 지나가면 좌측 산기슭에 비각, 묘소가 보인다.
비각 안에는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크고 웅장한 신도비가 천정까지 닿아 있다.
이 신도비는 중국에서 코끼리가 싣고 온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신도비 머리 부분의 이수에 꿈틀거리는 두 마리의 용은 생동감이 넘친다.
만들어진 초기에는 낮 밤을 가리지 않고 하얗게 빛나는 신도비를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를 오른쪽으로 끼고 조금 더 올라가면 묘역이 보인다.
묘역은 계단을 쌓아 두 단으로 나누었고, 장명등,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묘비 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석물들이 시간차를 보이고 있어,
오랜 시간동안 꾸준하게 관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더욱 화려해지는 여느 사대부의 묘역이나
석물에 비해 볼때 아기자기 하고 검소하기까지 하다.
◇ 슬픈 가족사
한확은 양촌 권근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이며, 조선초 세조 즉위에 공이 있으며,
청주 한씨를 왕비족으로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명나라와 조선을 오가는 외교관으로서 그 명망을 드높혔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영화 이면에는 슬픈 가족사가 있다.
어쩌면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의 주변에 있었던 국가들이 겪었던 아픔이었다.
공녀 또는 진헌녀로 불리우는 여성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고구려 장수왕때 북위에서 헌문제의 육궁이 미비하다 하여
종실녀를 제녀로 보낼 것을 요구한 것이나,
고려시대 원 제국시기에 수많은 공녀가 그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조선에까지 이어졌다.
기록된 숫자로만 보아도 고려 공녀 170명, 조선 146명이라 한다.
고려 말 몽골족만을 몽골제국의 황후로 맞이한다는 원칙을 깨고
원순제의 제1황후가 되었던 기황후의 존재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이다.
또한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여말에 적극적으로 원(元) 왕실로 딸을 시집보낸 경우도 있다.
고려인들의 경우는 학문적 소양도 있고 아름다워서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도
일종의 유행처럼 고려 부인을 얻어야만 명문가로 인정받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 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녀들은 역사상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공녀로 갔던 여자들이 궁궐에서 궁인이나 차를 나르는 역할을 하면서 비참한 세월을 보냈다.
한확은 여전히 고려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여운이 남아 있던 시기인 1402년에 태어났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3대왕인 성조 영락제는
조선에 수차에 걸쳐 진헌녀를 요청하였다.
한확의 누이는 3차 요청에 선발되어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으로 가게 된다.
후궁으로는 1417년(태종 17)에 1차 진헌녀로 보내진 권현비와 황씨 등이 있었다.
권현비가 영락제의 총애를 받자 다른 비의 질투와 시기가 많았다고 한다.
권현비가 일찍 죽자 독살사건으로 번져 같이 진헌녀로 갔던 비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때 한확의 누이 한현비는 사건을 피해갔으나, 영락제가 북정과정에서 사망하자 순장된다.
가족사의 두 번째 시련은
한영정의 막내딸이자 누이동생이 다시 한번 진헌녀 뽑혀 명나라 궁인으로 가게 된 것이다.
얼굴이 아름답다 하여 뽑혀 가게 되었다.
병이 나자 오라비 확이 약을 지어주니 먹지 않고
“누이 하나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해 약을 쓰려 하오”라면서
약을 먹지 않았다 한다.
또 모아 두었던 재물은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고 침구는 모두 찢어 버렸다고 한다.
고려말 유학자 이곡은 공녀 반대 상소문에서
“공녀로 선발되면 혹은 우물에 빠져 죽거나 목매 죽고
피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 많았다”고 하니
당시 공녀나 진헌녀로 징발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참혹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아버지 영정이 일찍 죽어 오라비인 한확의 손에 컸다.
선종 선덕제의 궁인으로 명나라 헌종 황제를 양육하여
그 공으로 공신부인으로 책봉되었다.
언니가 순장된 것에 비해 막내 여동생은 천수를 누렸다.
어릴적 명나라로 보내진 누이에 대한 애절함보다,
직접 키워 기른 막내 여동생에 대한 슬픔이 더 했으리라.
조선 땅 어느 부모가 공녀나 진헌녀로 보내는 것에 찬성했겠는가.
◇ 한확의 일생
한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자유, 호는 간이재이다.
아버지는 지순창군사 영정이며, 어머니는 김영렬의 딸이다.
덕종의 비 인수왕후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이다.
1417년(태종 17) 누이가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으로 선발되자 진헌부사로 수행하였으며,
누이가 여비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을 제수받았다.
세종이 즉위했을 때는 명나라의 책봉사가 되어 부사인 홍로시승 유천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4년(세종 6) 영락제가 북정 중 죽자 여비도 자결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 선덕제의 후궁으로 간선하였다.
1429년 조종생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 지중추원부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한성부사,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 함길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를 겸하였다.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해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철도사까지 겸임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찬성이 된 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에 봉해졌다가,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1등에 올라 서원부원군에 다시 봉해졌다.
이어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칠가령에 이르러 병을 얻어
가사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하포에 이르러 죽었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했지만,
넓은 도량과 온순하면서도 대범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이다.
◇명문가로 부상한 청주 한씨
청주 한씨 가문이 성장하게 된 것은 한명회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한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한확에 의해서이다.
한확은 명나라와 조선에 모두 사돈을 맺는 특별한 혼인관계를 형성하였다.
두 누이를 명나라 황실의 궁인으로 들여보냈고,
딸이 세조의 며느리가 되어 인수대비가 됨으로써 당대의 어느 집안보다도 위세가 대단했다.
한확 본인도 영락제가 사위로 삼고자 할 만큼 총애했다.
인수대비의 아들이 왕이 됨으로써 외조부로서 확고한 지위를 마련하였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의 정치적 행보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딸이 후일 인수대비로 수양대군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난이 성공하자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설득하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그는 찬탈이 아닌 양위라는 명분을 내세워 명을 설득하고 귀국하다 병들어 죽었다.
한확 집안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실제로 조선 왕실 계보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양대군의 즉위 과정의 개입이나,
예종 사후 요절하자 예종의 아들을 제치고 원 적자 계열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한명회 이후 형성된 청주 한씨의 막강한 배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수대비로 잘 알려진 한확의 딸은 성종대에도 정치적으로 많은 활약을 한다.
학식이 깊고 여장부로서 대범함을 가졌다고 한다.
그녀는 성종비인 폐비윤씨 사건을 도모하여
손자인 연산군에 의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능은 남편인 의경세자의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어
그 지위가 높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이 왕의 자리라고 할 때, 자리가 바뀐 왕릉은 경릉이 유일하다.
그러나 남편은 세자로 죽었지만,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왕대비의 지위까지 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누이의 눈물과 바꾼 정치적 성공
고려초 건국에 공이 있었던 청주한씨는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고려 명인(名人)에 14명이나 포함되었으며,
조선에서도 왕비 6명, 정승 13명, 부마 4명, 공신 24명, 대제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학자,
문필, 서예가를 배출하였다.
현대에도 그 명맥을 이어 연속으로 3명의 한씨가 총리에 취임되는 진기록을 내면서
청주한씨들의 위세를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공의 밑바닥에는 권력의 추악함이 깔려 있다.
자의이건 타의이건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서 누이를 명나라에 진헌녀로 보내고,
그를 바탕으로 조선사회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던 것이며,
그의 딸 인수대비도 아버지와 가문의 힘을 빌어 조선 왕실을 장악하지 않았던가.
정치란 그런 것인가 보다.
한확의 경력은 화려하다.
누이와 누이동생을 모두 공녀도 들여보낸 오라비가 정말 행복했을까.
게다가 자신의 위를 강력하게 뒷받침 해준 딸 인수대비도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었으니,
오라비로서 아버지로서는 실패한 가장이다.
한확의 정치적 행보에는 이러한 슬픈 가족사가 바탕이 깔려 있다.
한확은 보다 강력한 조선과 조선의 군왕이 나타나길 기다렸을 것이다.
이 땅의 어린 소녀들을 이국땅에 진헌녀로 보내는 아픔이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위해 중국에 씨받이로,
가정부로 팔려 나가는 북한의 어린 처녀들은 현대판 또 다른 공녀이며 유이민이다.
한확의 꿈은 아직도 꿈 중인가. 50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서는 안 되겠다.
/류현희 경기문화연구소 연구원
襄節公 確(양절공 확) (평해공 탁(平海公:倬 )의 祖父)
조선 정종 2년~ 세조2년(1400~1456)
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 大匡補國崇錄大夫 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事 西原府院君 贈諡襄節韓公(諱 確)
(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
영경연사 서원부원군 증 양절한공휘 확)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증 영의정 순창공(淳昌公:永)의 아들로
증 판서 녹사공 녕(錄事公:寧)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義城 金氏)는
의성군(義城君)인 양소공 영렬(義昭公:英烈) 의 따님이다.
태종 18년(1418)공의 나이 19살 때
명황제의 소명(召命)을 받고 명나라에 들어가
봉의대부 광록시소경(奉議大夫 光錄寺少卿)에 제수되었다.
때마침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게 되자
명조(明朝:명나라 조정)에서 이를 책봉(冊封)하는
명 황제의 정사(正使) 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니
온나라가 공의 풍채(風采:인품)를 선망(羨望:부러워함) 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7년(1435) 자헌대부 중추원부사,
동왕 21년 한성부사, 경기도관찰사, 정헌대부중추원사,
동왕 22년 병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동왕 25년 동지중추원사, 한성부판윤,
동왕 26년 다시 병조판서 겸 지중추원사,
동왕 27년 이조판서,
동왕 28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평안도 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여 문무관직을 통할(統轄)하였다.
동왕 32년 문종이 즉위하자 판중추원사로 소환(召還)되었고
문종 2년(1452)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단종 원년(1453)정란공신(靖難功臣)으로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탁승(擢昇:발탁하여 승진시킴)되었으며
세조 즉위 초에 좌의정에 승진, 좌익(左翼)공신 호를 내리고
서성부원군을 서원부원군으로 개봉 (改封)하였다.
세조 원년(1455)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북경(北京:명나라 수도)에 들어가 사명 (使命)을 완수하고
동왕 2년 환국 도중 단주 사하역(湍州 沙河驛)에서
원로 피로(遠路 疲勞)에 의한 병환으로
여사(旅舍)에서 별세(別世)하였다.
세조는 3일간의 조례(朝禮)를 철폐하여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며
부의(賻儀)를 하사 하고 예관을 파견하여
영구(靈柩:시체를 넣은 관)를 맞이하도록 하고
당시 도승지(忠成公 韓明澮)에게 하명하여
호상일체(護喪一切)를 관장케 하여 예장(禮葬)하고
시호를 양절(襄節)이라 내렸다.
그 뒤 부조지전(不조之典)의 특전을 내리고
성종 원년(1470)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동왕 2년 선세자를 덕종대왕(德宗大王)으로
세자빈 한씨(韓 氏)를 소혜왕후(昭惠王后)로
추존(追尊:사후에 존호를 올림)함에 따라
공은 왕비의 아버지이므로 국구(國舅)로 추봉(追封)되었다.
배위는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니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문양공 여방(文良公:汝方)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 6녀를 낳으시고 장남은 공안공(恭安公:致仁)이요.
차남은 장도공(章悼公:致義)이며,
3남은 장간공(莊簡公:致禮)이다.
1녀는 첨지중추부사공 이계녕(李繼寧),
2녀는 계양군 증(桂陽君 增),
3녀는 현령공 김자완(縣令公:金自琓),
4녀는 동지중추부사공 최 정(崔 정),
5녀는 사직공 권집(司直公:權輯)에게 각각 출가하고
6녀는 덕종대왕비인 소혜왕후(昭惠王后)이시다.
부실(副室)에서 6남을 낳으니
장남 은 사직공 류산(榴山),
2남은 어모장군공 유산(柚山)이고
3남은 어모장군공 감산(柑山)이며
4남은 시산(枾山),
5남은 이산(梨山),
6남은 사과공 도산(桃山)이다.
모두 명나라에서 성장(成長)하다가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까지 올랐으나 다시 명나라에 돌아가
그 후손들이 중국에 살고 있다고 전하여 온다.
位置:南楊州市 鳥安面 陵內里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증 남양부부인 홍씨(贈 南陽府夫人 洪氏)
(평해공 탁(平海公:倬)의 祖母)
태종 4년(1404) ~세종 32년(1450))
부인(夫人)은 양절공(襄節公:韓 確)의 배위(配位)이다.
성(姓)은 남양 홍씨(南陽 洪 氏)이니
명성(名聲)이 높은 가문(家門)이다.
고려조 때부터 대대(代代)로 공경 재상 (公卿 宰相:고위 고관과
제왕을 도와 정무를 총리하는 대신)이 이어져 왔고
도덕(道德) 과 문장(文章)이 당대(當代)에 제일 높았던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堤學)문양공 여방(文良公 汝方)의 따님으로
조선조 개국공신(朝鮮 開國功臣)이요
남양군(南陽君)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堤學)
문경공 길민(文景公:吉旼)의 손녀이며
부윤공(漢陽府尹:鄭符)의 외손녀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자질(資質)이 범인(凡人)들과는 특이(特異)하고
어려서부터 안색(顔色)이 온화(溫和)하고 기품(氣品)이 유순(柔順)하며
장성(長成)해서는 언어(言語)가 과묵(寡默:침착하고 말이 적음)하고
행동이 근엄(謹嚴:조심스럽고 엄숙함)하며
부모에게 혼정신성(昏定晨省: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여쭈어 살핌)과
동온하정(冬溫夏정:겨울에는 따뭇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말)
하는 효도(孝道)에 태만함이 없었으며
스승의 교훈(敎訓)을 받지 않고도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예절(禮節)에 어긋남 이 없었으므로
문양공이 사랑하고 귀중(貴重)하게 여기더니 양절공의 배위가 되었다.
오한(吾韓)에 오시어 공순(恭順)하고
근검(勤儉:부지런하고 알뜰함)하게 처신(處身)하고
구고(舅姑: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기며
제사(祭祀)를 받드는데 존경(尊敬)과 정성(精誠)을 극진(極盡)히 하고
친척간에 화목하며 노비(奴婢)를 은애(恩愛)로 써 거느리고
자녀(子女)들로 하여금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겸비(兼備)한
인품(人品)으로 성장(成長)하도록 교훈(敎訓)하였다.
양절공께서 소시(少時)에 명나라 조정(朝廷)에서
광록시소경(光錄寺少卿)이란 벼슬을 받아 황제(皇帝)의 부름을 받고
여러 차례 에 걸쳐 명나라 서울에서 체류(滯留:머물러 있음)한 바
있었으나 가정사(家庭事)에 구애(拘애:거리낌)됨 없이 지낸 것은
부인께서 내조(內助)의 임무(任務)로 제반가사 (諸般家事)를
능숙(能熟)하게 처리(處理)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양절공이 대단히 애경(愛敬)하였다.
불행하게도 미미(微微.*작은 모양)한 병환(病愚)으로 인하여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47세이다.
성종 2년(1471)선세자(先世子)를 덕종대왕(德宗大王)으로
세자빈 한씨(韓氏)를 소혜왕후(昭惠王后)로 추존(追尊)함에 따라
왕비의 어머니가 되므로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으로 추봉(追封)하고
남양군을 남양부(南陽府)로 승격(昇格)시켰다.
슬하에3남6녀를 생육(生育)하였다.
연산군 3년(1497)3월 16일 판돈녕부사 서릉군(西陵君 諱 致禮)께서
인수대비(人粹大妃)의 명(命)을 받들어
임사홍(任士洪)으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짓고
병서(竝書)토록하여 같은 해 6월에 세웠다.
우리나라 여성(女性)의 신도비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묘 :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
淸州韓氏(청주한씨)의 始祖(시조)이신 太尉公 韓蘭(한란)의 14世孫
章悼公 致 義 (장도공 치 의) (평해공 탁(平海公 :倬) 의 父)
純城佐理功臣 資憲大夫 兵曹判書 淸陽君 贈諡章悼韓公(諱 致義)
(순성좌리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청양군 증시 장도한공)휘 치의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의지(誼之),
양절공 : 탁 (襄節公:確)의 둘째 아들로
순창공 : 영 (淳昌公:永)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모친 남양부부인 홍씨는 대제학 문양공 여방(文良公:汝方)의 따님,
단종 3년(1455)음보로 사정 겸 녹사(司正 兼 錄事)가 되었고
이듬해 생원시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9년(1463)안동대도호부사가 되어
남방(南方)제일의 치적(治績:정치상의 공적)을 세웠으며
다시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1년(1470)부호군 겸 오위장, 동지중추부사,
한성부 좌윤을 역임하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공조참판에 배명되고 순성좌리공신에 녹훈되고,
청양군(淸陽君)에 봉해 졌으며 동왕3년 병조판서에 배명되었다.
그러나 신병(身病)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떠나
사택(私宅)에서 치료 중 성종께서 의약을 하사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께서는 좋은 약 과 음식,
또 기도 등 여러가지로 치료방법을 다 하였으나
모두가 무효로 돌아가고 향년 34에 졸하니
조정에서는 2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시호를 장도(章悼)라 내리며
부조묘 (不조廟)의 특전을 내렸다.
배위는 정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와 합부이며,
군사공 항전(郡事公 桓全)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생하니
장남은 청원군 위(淸原君:偉)지중추부사요
차남은 평해공 탁(平海公:倬)이다.
位置:軍浦市 山本洞 : 군포시 산본동
淸州韓氏(청주한씨)의 始祖(시조)이신 太尉公 韓蘭(한란)의 15世孫
平海公 諱 倬
司憲府監察, 郡守
通政大夫
本觀 淸州
字
號 평해(平海)
配 淑夫人 咸平李氏
이의동 평해공(平海公)파의 입향조.
청주한씨의 시조는 한 난 (韓 蘭)으로
고려 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오른 인물.
한 탁 (韓 倬)은 한 난 (韓 蘭)의 15세손으로
조선 성종의 외삼촌이며 사헌부 감찰 및 금산, 아산, 양주, 평해 4군의
군수를 역임한 청주 한씨 평해공의 묘소를 500여년 전에 하동 산12 번지에
모시고 약 160년 전부터 선조의 후손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으며
한탁(韓 倬)을 파조로 그의 후손은 평해공파(平海公派)로 불린다
한탁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1子 司直公 守貞 (수정) 配位 淑夫人 順興安氏
折衝將軍兼知中樞府事副司直
2子 守性 (수성)
3子 守溫 (수온)
4子 守良 (수량)이다.
長孫 將軍公 副使公 禮文官 ? (이) 이다.
<平海公 諱 倬과 配位 淑夫人 咸平李氏 묘역, 영통구 하동 산 12번지>
淸州韓氏(청주한씨)의 始祖(시조)이신 太尉公 韓蘭(한란)의 15世孫
司直公 諱 守貞 (사직공 휘 수정)
折衝將軍兼知中樞府事副司直 (절충장군겸지중추부사부사직)
<司直公 諱 守貞 配位 淑夫人 順興安氏 묘역, 영통구 하동 산 12번지>
묘역 전경 위성사진
위 이의동의 청주한씨 묘역들은 광교신도시 개발에 포함되어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로 이전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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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주 한씨의 내력을 자세하게도, 사진도 찍어 올리시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산의실 기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