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노이아 – metanoia
모두가 아는 대로 신약성경은 희랍어 코이네(koine)로 기록 됐다.
코이네 희랍어는 당시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던 통속어로서
그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헬레니즘 세계의 통용어이기도 했다.
로마 제국시대의 라틴어와 지금의 영어처럼 국제어였던 셈이다.
그 희랍어 중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단어이기도 하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심오한 뜻만 제대로 알아도 기독교신앙이 무엇인지 그 기본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신약성경은 극히 일부 오지인들의 방언을 제외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됐다.
어떤 언어의 경우 ’구원’이나 ’은혜’와 같은 종교적 단어가 없기 때문에 번역에 큰
애로를 겪는 경우도 있다.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번역은 어려운 작업이고 언어체계가 다른 말로 희랍어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메티노이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회개’로 번역했고,
가장 가까운 영어번역은 ’repentance’다.
회개(悔改)는,
어떤 잘못에 대해 이를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이다.
같은 뜻으로 참회(懺悔)라는 말을 쓰기도 하며 이는 자기의 잘못에 대해 깊이
뉘우친다는 의미다.
영어 repentance도 후회, 회개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다.
모든 번역성경은 그 번역작업에서 최선을 다했다 해도 원문의 뜻을 온전히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서로의 언어체계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같은 단어라 해도 시대에
따라 그 의미는 큰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메타노이아-metanoia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
그리고 이 단어가 우리말 ’회개’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생긴 신앙내용의 왜곡은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유발할 수도 있다.
사실 회개라는 단어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단순한 뜻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회개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쓰인 중요성은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 서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까지의 400년 간을 ’중간시대’라고 부르며 예언자 없이 지낸
불안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 400년 만에 나타난 예언자, 광야의소리인 요한은 그 첫마디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회개는 기독교신앙의 시작이자 끝이다.
요한은, baptismametanoia라고 외쳤고,
그게 바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경고였다.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 예배 중 모두가 함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통성기도’의 순서가
있어 왔으며 심령부흥회에서는 그 수준이 광란으로까지 치닫는다.
그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손뼉을 치고, 두 팔을 하늘로 뻗으며 소리 높이 자복의
기도를 드린다.
정말 대단한 시간이며 극적인 순간들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집회를 마치고 교회 문 밖으로 나오면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옛사람 그대로다.
개신교 교인들의 이 이중성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메타노이아’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올바로 배우지 못 했기 때문이다.
통성기도 시간의 그 뜨겁고 열열했던 회개의 기도는 정말 자기 잘못에 대한 진심의
뉘우침이며 특히 여자들의 경우 거기에 상당한 카타르시스가 곁들여진다.
희랍어 카타르시스-catharsis는,
비극을 봄으로서 울적해 있던 불안, 긴장감 등이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며
자기가 직면한 고민, 고뇌를 밖으로 표출함으로서 강박관념을 해소시키는 일이다.
말하자면 자기감정의 배설(排泄)인 셈이다.
시집살이의 서러움, 시어머니의 구박에 대한 울분, 남편을 향한 원망, 어려운 집안
살림, 말썽만 피우는 자식들, 그리고 자기만의 설움 등 마음 가득히 담고 있던 고민,
고뇌가 ’통성기도’라는 형식을 통해 눈물까지 흘려가며 배설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카타르시스이며 본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詩學) 6장에서 사용
했던 용어다.
엄격히 말해,
‘회개’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도 가던 길은 그대로 가는 것이다.
또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metanoia의 참뜻은 ’회개’를 포함하는 ’전향(轉向)’이다.
이게 이 단어의 참뜻이다.
전향이 무엇인가,
방향(方向)을 바꾸는 것이다.
동쪽으로 가던 사람이 서쪽으로,
북쪽으로 가던 사람이 남쪽으로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바로 metanoia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그렇게 많은 심령대부흥회와 통성기도의 시간을 가졌었으면서도
우리 사회에서 전혀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metanoia가 왜곡됐기
때문이며 카타르시스만 있었지 전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도 다르지 않게 살게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달라지지 않고는 어떤 영향력도 생기지 않는다.
체포된 남파간첩을 집중적으로 심문, 수사하기 이전에 이 삼 일간, 마음대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게 한다고 한다.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닌한 거의 모두가 스스로 전향(轉向)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자유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것이다.
신념과 기치관의 전향인 셈이다.
예수 믿고 ’회개’했다면 전과는 판이한, 전향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형식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세례’다.
여기에서 메타노이아는 그 적용에서 나뉘어진다.
우선 하위개념(下位槪念)으로서의 메티노이아는, 회개와 카타르시스의 표출, 배설로 끝난다.
바로 이 과정에서 기독교의 미신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복신앙’이다.
이 하위개념은 저학력일수록 그 수용이 쉽고 그만큼 기독교신앙의 본질도 훼손,
변질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이비성직자들이 가세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메타노이아’의 상위 개념은,
그 특징이 이성(理性)을 통한 검증과 확신이다.
‘회개’를 포함하는 ’전향’이 이루어진다.
거듭난 사람이 되고 그 가치관이 바뀐다.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챤이 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에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빌립보서3:5-6.공동.
이 본문을 잘 읽어 보면 청년 사울이 가지고 있던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서의 교만할 정도의 열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는 ’완전한 히브리 사람’인 것이다.
세속적으로 그것은 사울의 큰 자랑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까지의 열망, 그 자체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모든 자랑스러운 조건들을 장애물로 여겼고,
쓰레기, 배설물로 여겨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인 ’바울’이 되었다.
완전한, 완벽한 전향을 한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가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전향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같은 말씀이다.
그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자기의 경우를 설명하면서 ’전향’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metanoia는 전향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로 중대한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바로 이 때에 ’자기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결국엔 딴 것이 되고 만다.
그건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회개’가 사실은 ’전향’이라고 가르쳐야 하고 모두가 전향해야 살 수 있다.
카타르시스만 계속하는 한 ’구원’은 없다.
그건 신앙과는 전혀 다른 자기배설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10-11절. 공동.
완전한 유대인 사울이 바울로 전향 - metanoia한 후,
고백하는 신앙이다.
[원문 - http://blogs.chosun.com/yorowon/2007/04/06/%EB%A9%94%ED%83%80%EB%85%B8%EC%9D%B4%EC%95%84-metanoia/ ]
메타노이아 김석규 목사(속초 순복음교회)
칼뱅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God)이 아니라 잡신(god)을 영화롭게 하며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빗나간 행동을 하고 있다. 이것을 죄(히브리어 h˘atta't, 그리스어hamartia), 타락된 삶이라고 한다. 이 같은 행동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회개다. 단순히 몇 가지 잘못된 태도나 습관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목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다. 삶의 목표와 방향이 잘못되어 있는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낸다는 것은 길 잃은 등산객이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상해 보라. 그의 삶은 최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목표와 푯대를 가져야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지금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다. (렘애3장 40,41)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원문 http://cafe.daum.net/ykim153/7CK0/107?q=%EB%A9%94%ED%83%80%EB%85%B8%EC%9D%B4%EC%9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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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cafe.daum.net/thomashouse/jStS/39?q=%EB%A9%94%ED%83%80%EB%85%B8%EC%9D%B4%EC%95%84 ]
유경환 시/김정식 곡
바람속의 주2.3.mp3
첫댓글 메타노이아..전향..방향을 바꾸다..
방향을 바꾸려고 노력해봅니다.바람속의 주님..♡
중요한 키워드 잘 찾으셨네요.
위 글 올리고 그걸 찾아낸 사람 첨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인데요.
전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