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금융위기"(Asian Financial Crisis)란 1997년 7월에 시작되어 여러 아시아 국가들을 금융위기로 몰아넣었던 시기를 말한다. 이 사건은 금융부문의 여파가 전세계 경제에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를 만들어냈다.
이 위기는 태국이 부동산 부문의 심각한 과잉투자에 직면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한 후, 결국 달러화에 대한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전환시키자, 태국 바트화(Thai baht) 가치가 폭락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태국은 과중한 외채상환 요구를 받아, 이미 바트화 체계가 붕괴하기 전에 사실상 국가부도사태를 맞이했다. 이 위기가 확산되면서,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화폐와 일본의 엔화가 약세를 면치 못했고, 주가 및 여타 자산가치는 평가절하되고, 개인 부채가 가파르게 상승했다.(주1)
하지만 이 위기의 존재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합의되어 하지만, 이 사태를 몰고 온 원인과 영향이 미친 범위 및 결과에 대해선 그다지 많은 연구가 이뤄져있지 않다. 이 위기의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국가는 인도네시아, 한국, 태국이다. 또한 홍콩, 말레이시아, 라오스, 필리핀이 불경기에 허덕였다. 물론 이 지역의 모든 국가들이 내수부진 및 신용도 추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중국, 인도, 대만, 싱가포르, 브루나이, 베트남의 경우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은 편에 속한다.
1993-1996년 사이에 아세안(ASEAN) 내 4대 국가들의 GDP 대비 외채비율이 100~167%에 이르렀다. 이후 최악의 위기가 도래했을 때는 180%까지도 이르렀다. 한국의 경우 이 비율은 13~21% 정도였다가 최대 40%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여타 아시아 신흥공업국(Newly Industrialized Countries: NIC)의 상황은 좀더 나은 편이었다. 오직 태국과 한국만이 수출액 대비 채무상환액 비율(debt service-to-exports)을 높였다.(주2)
비록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 정부들이 외관상 보다 건전한 재정정책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400억 달러를 투입하는 사업을 통해 특히 이 위기의 타격을 강하게 받은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의 통화를 안정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국제경제위기를 방지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는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금융위기 사태로 인도네시아의 루삐아(rupiah)가 폭락하자 물가가 급등했고, 이 사태는 광범위한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1998년 5월 21일 30년간 집권했던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 위기의 여파는 1998년까지도 계속됐다. 필리핀에서는 1998년 경제성장율이 거의 제로에 머물렀다. 대만과 싱가포르만이 상대적으로 이 사태의 직접적 충격에서 빗겨나 있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는데, 특히 싱가포르의 경우 국가규모가 작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있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99년에 이르면 여러 분석가들이 아시아의 경기가 회복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징후를 발견하기 시작했다.(주3)
(주1) Kaufman, GG., Krueger, TH., Hunter, WC. (1999) The Asian Financial Crisis: Origins, Implications and Solutions. Springer, pp.195–196 .
(주2) http://www.adb.org/Documents/Books/Key_Indicators/2003/pdf/rt29.pdf
(주3) Pempel, T. J. (1999) The Politics of the Asian Economic Crisis.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pp.118–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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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아시아경제위기의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은 지역들을 표시한 지도. |
1. 진행상황
1997년까지 개발도상국의 자본 유입량 중 거의 절반 가량이 아시아로 몰려들었다. 특히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고금리를 유지했다. 그 결과 이 지역의 경제는 대규모 현금 유입과 자산가치의 급속한 상승을 경험했다. 이와 동시에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한국은 매년 8-12%의 GDP 성장율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IMF와 "월드뱅크" 같은 금융기구들은 갈채를 보냈고, "아시아경제기적"(Asian economic miracle)의 한 부분으로 알려졌었다.
1994년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아시아 경제기적"이란 개념을 공격하는 논문을 발표했다.(주4) 그는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이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투자(capital investment)의 증가에서 파생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비해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은 약간만 증가하거나 거의 변동이 없었다고 논증했다. 크루그먼은 자본투자가 아니라 총요소생산성 증가만이 장기적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비록 그 자신은 이 논문에서 아시아경제위기 및 그 강도를 예측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지만, 이 사태가 발생한 후 그의 논문이 상당한 선견지명을 보여준 것으로 많은 이들이 평가했다.(인용각주 필요)
"아시아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다. 태국 경제는 "핫머니"(hot money)로 인한 버블을 통해 성장했다. 하지만 버블은 보다 더 큰 규모의 버블을 끊임없이 요청했다. 이러한 현상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도 발생했는데, 특히 이들 나라에서는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는 기존의 문제에 추가해 더욱더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시켰다.(주5) 단기유입자본은 상당히 비싼 것이었고, 종종 신속한 이익실현을 위한 상당한 조건들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들에서 개발자금은 대부분 별다른 통제없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흘러들어갔다. 이러한 자금은 가장 적절한 사용처나 효과적인 운용처가 아니라 권력의 핵심부에 가까운 이들로 흘러들어갔다.(주6)
1990년대 중반의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은 대규모 민간 통화 적자를 안고 채 외채도입을 장려하기 위한 고정환율제도를 실시하여, 금융 및 기업 부문에서 외환위기 가능성에 극도로 노출된 상태였다. 1990년대 중반에 바로 이 두 분야가 처한 경제환경이 변화를 시작했다. 미국 경제가 1990년대 초반의 불황에서 회복세를 보이면서,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의장이 이끌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U.S. Federal Reserve Bank)는 인플레이션 방지를 위해 달러의 이자율을 인상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이 동남아시아에 비해 더 매력적인 투자처로 변했고, 초단기 이율을 통한 핫머니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여러 아시아 국가들이 의존하던 달러화 가치가 올라가면서, 수출이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1996년 봄에 이르면 동남아시아의 수출증가세가 극도로 둔화되면서, 이들 국가의 통화가 약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금융위기의 주된 원인은 과도한 부동산투기(real estate speculation)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중국의 수출증가도 아세안 국가들의 수출감소세에 한몫거들었다고 주장했다.(주7) 중국은 많은 부분들의 수출지향적 개혁을 거친 후, 1990년대에 들어와 특히 아시아의 수출경쟁자들과 효과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경제학자들은 1990년대 초에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이 동시에 빠른 수출증가세를 보였음을 지적하고, 중국의 충격이란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주8)
많은 경제학자들은 "아시아금융위기"가 시장심리나 기술적 문제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채무자-채권자 사이의 관계를 왜곡시킨 잘못된 정책 때문에 발생했다고 믿고 있다. 대규모 신용자금은 극도의 차입경영환경을 조성했고, 자산가치들을 지속불가능한 수준까지 인상시켰다.(주9) 이러한 자산가치는 개인과 기업을 채무불이행 상태로 만들면서,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는 위기 발생 국가들에서 여러 채권자들을 대규모 자금회수에 나서게 만듦으로써, 신용경색(credit crunch)과 추가적인 파산을 발생시켰다. 또한 외국 투자자들의 자금회수가 시작되면서 위기발생 국가들의 외환시장이 영향을 받았고,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 압력에 직면했다. 환율 가치가 붕괴 상태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들 국가들은 투자자들을 더욱 매료시켜 자금이탈을 감소시키기 위한 극도의 고금리 정책을 취했고, 외환시장에도 개입하여 외환보유고를 이용해 적정 환율을 초과하는 과도한 자국 통화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책은 오랜 기간 지속할 수 없었다. 극도의 고금리는 경제의 건강성을 파괴해 이미 허약한 상태에 있던 경제에 심한 충격을 가했고, 중앙은행들은 한정된 외환보유고를 환율방어에 소진시켰다. 자본 이탈 현상이 멈출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결국 이들 정부는 고정환율제도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했다. 그리하여 자국 통화들을 평가절하하게 되자, 신뢰도를 가진 외환 가치가 해당국 내에서 절상되어 더욱 더 많은 파산과 위기가 증폭되었다.
한편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와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이 위기에서 금융시장에 비해 다른 실물경제의 역할에 대해 낮게 평가했다. 제프리 삭스 및 여타 경제학자들은 이 위기의 진행속도가 신속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갑작스런 충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통적인 뱅크런(bank run: 예금인출사태) 현상과 이 위기를 비교하기도 했다. 삭스는 이 위기를 감지한 후 IMF의 충고를 토대로 각국 정부들이 시행한 엄격한 통화관리 및 긴축재정정책을 지적했고, 반면 프레더릭 미스킨(Frederic Mishkin)은 실물경제에서 작은 위험을 부풀려 생각하는 투자자들의 "군중심리"(herd mentality)를 자극한 금융시장 안에서의 "비대칭정보"(asymmetric information)를 지적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위기는 시장심리(market psychology)에 관심을 가진 행동경제학자들(behavioral economists)의 관심을 끌었다.
이 위기에 영향을 준 또다른 갑작스런 충격으로는 1997년 7월 1일 이뤄진 "홍콩 주권의 반환"도 그 가능한 원인 중 하나로 고려되었다. 1990년대에 핫머니가 동남아시아로 유입됐지만, 투자자들은 각국의 경제가 개별적으로 가진 실제적인 펀더멘탈스(fundamentals) 혹은 리스크에 대해서 종종 무시하곤 했다.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투자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아시아를 기피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이 지역의 경제환경을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화가 평가절하되었다.(주10)
한편 아세안 10개국 외교부장관들은 자국 통화들에 대한 조직화된 공격이 아세안 경제를 약화시킨 원인이었다고 믿었다. 마하티르 모하메드(Mahathir Mohamad)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대규모 외환투기"를 통해 말레이시아 경제를 붕괴시켰다며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에게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소로스는 아시아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환율평가절하와 반대로 돈을 걸어 손실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인용각주 필요)] 1997년 7월 25일 말레이시아의 수방자야(Subang Jaya)에서 열린 "제30차 아세안 장관회담"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이 문제와 관련된 아세안의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협력강화를 선언했다.(주11) 바로 이 날 상하이에서는 "동아시아-태평양 중앙은행 총재회의"(Executive Meeting of East Asia Pacific: EMEAP)도 열렸지만, "신규차입협정"(New Arrangement to Borrow)의 효력을 발휘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미 1996년 3월 17일에 일본 교토에서 이와 동일한 회원국들이 참석한 "제3차 APEC 재무장관회의"가 열린 바 있었다. 당시의 공동선언문에 따른 "일반차입협정"(General Agreement to Borrow) 및 "긴급자금지원체계"(Emergency Finance Mechanism)를 통해 2배의 자금을 확보해야 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던 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환율조작(Currency Manipulation) 방지를 위한 능력 확보를 적절한 시기에 성취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 위기가 발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설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들 경제학자들은 통화가치를 성공적으로 조작할 수 있을만큼 시장에 충격을 가할 규모의 단일 투자자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한 이러한 가치조작이 이뤄지기 위해선 동남아시아 통화로부터 대규모 투자자 이탈을 조작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 IMF의 역할
이러한 사태의 범위와 심각성은 긴급한 필요에 따라 외부의 개입을 필요로 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colonialism)라 보기도 했다.(주12) 해당 국가들은 역내의 보다 부유한 국가들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로 통합되어 들어갔고 이에 소요된 자금 역시 수천억 달러 규모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응조치 역시 세계적 차원의 공조가 필요했고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진행됐다. 우선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국가들이 국가부도사태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IMF는 아시아 통화가치 복원, 은행 및 금융제도 부문 등을 거의 미국이나 유럽 수준으로 개혁하기 위한 조건을 강제화시키는 가운데 일련의 긴급구제금융(bailouts)을 투입했다. IMF가 조건으로 내세운 일련의 급격한 경제개혁 조치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원칙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구조개혁 종합정책"(structural adjustment package: SAP)이라 불렸다.
SAP 정책은 정부지출을 줄여 재정적자를 줄이고, 지불불능 상태의 은행과 금융기관들을 청산하며, 이자율을 공격적으로 인상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국가 지불능력(fiscal solvency)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지불불능 회사들에 대한 처벌적 성격을 띠는 동시에 통화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단계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특히 IMF가 지원하는 자본이 특정한 수혜 정파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향후 보다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이론상 사적 이익으로부터 독립된 정부의 금융활동을 수립시킴을 목표로 했다. 지불불능 금융기관들은 문을 닫아야만 했고, 지불불능 부채 규모 역시 명확하게 확정되어야만 했다. 한마디로 말해 IMF가 내건 지원의 조건대로 미국이나 유럽과 완전히 동일한 금융기관들이 설립돼야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금융제도 역시 "투명하게"(transparent) 변해야만 했다. 즉 보다 건전한 금융분야 정책결정을 위해 서구와 마찬가지 수준의 신뢰할만한 금융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주13)
하지만 이 사태에서 IMF가 의도하는 정책목표들과 관련하여, IMF의 역할에 대해 거센 비판도 제기됐다.(주14) 각국이 차례로 위기에 빠져들면서, 미국 달러화 부채를 안고 있던 해당국 사업자들과 정부는, 그들의 수입원이 자국 화폐였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달러화가 더욱 인상된 가치를 보이면서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해갔다. 상황은 점점 더 "라틴아메리카 금융위기"(Latin American debt crisis)와 유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SAP 정책의 효과는 복합적이었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불황기에 있어서 전통적인 케인즈학파(Keynesian)의 대책은 정부지출을 확대하고, 주요 기업들을 지원하며, 이자율을 낮추는 것이었다며, IMF가 추진한 긴축재정 기조를 비판했다. 이들은 경기를 부양하고 불황을 억제시킴으로써 각국 정부들이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면서도 신뢰도를 복원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1년 미국 스스로가 불황에 직면했을 때, 미국 정부가 저금리정책과 정부지출 확대, 세금감면을 통한 팽창정책을 사용했다는 점과,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지난 2008-209 세계금융위기(Global Financial Crisis)에 직면해서도 미국이 동일한 정책을 취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많은 경우 이러한 개혁조치들은 이미 오랜 기간 필요로 했던 것으로, 해당 국가들은 거의 완전하게 정치적, 금융적 재구성을 끝마친 상태이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통화가치 인하와 대규모 파산, 그리고 언젠가 한번쯤은 붐을 일으켰던 경제 분야들의 붕괴를 맛보았다. 그러한 현상들에는 부동산 과열 붕괴, 높은 실업율, 사회적 불안정성 등이 포함된다. 이 위기가 발생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IMF의 개입은 호되게 비판받았다. 이렇게 IMF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일어남으로써, 여러 국가들에서 이 사태를 "IMF 위기"(IMF crisis)라고 부르기도 했다.(주15)
이 사태를 회고하면서, 많은 논평자들은 IMF가 개발도상의 아시아를 "신속절차 자본주의"(fast track capitalism), 즉 자본이동의 제한들을 철폐하여 금융부문의 자유주의화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금융자산투자(portfolio investment)와 은행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고금리를 유지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하여 외환위기 방지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달러화에 대한 고정환율제도를 실시 등이 이러한 조치에 포함된다.(주14)
2.1. IMF와 고금리
일반적으로 각국 통화당국은 이 논란많았던 고금리 해법을 채택하였다. 이 정책의 목표는 자금공급의 여러 요소들을 압박하고, 환투기 억제와 환율 안정, 자국 화폐가치 하락의 방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플레이션(물가인상)을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아시아 경제 붕괴에서 고금리 정책을 취하는 이유에 대해 IMF의 고위 간부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합리화했다. IMF의 수석 부총재(First Deputy Managing Director) 스탠리 피셔(Stanley Fisch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Stanley Fischer,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UCLA 대학, Forum Funds Lecture, 1998-3-20)
해당 정부들이 IMF에 지원요청을 했을 때, 태국과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위험할 정도로 극히 낮은 상태였고, 인도네시아의 루삐아화는 극도로 평가절하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최초의 대응은...... 통화가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해당국들은 자국 통화를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따라서 그 후속조치로서 심지어는 연약한 은행이나 기업을 더욱 나쁜 상황으로 몰고 감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는 고금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저금리와 평가절하를 하지 않았느냐고? 이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상관관계가 있다. 하지만 당시 통하가치 하락 상황에 대해서는 개별 국가적 관점에서든 국제적 관점에서든 대단히 지나치게 하락되어 있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가령 이들 국가들의 많은 기업들이 그러하듯이, 외채부담을 주요하게 짊어진 개별 국가나 개별 기업들의 상황은 일시적인 국내 이자율 인상으로 받는 타격보다 환율 평가절하로 받는 타격이 훨씬 더 큰 상태였다. 따라서 거시경제학적 관점에서... 통화정책의 기조는 통화가치에 대한 확신을 복원시키는 일이었다. |
한편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 총재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사가 최선책을 안다고?"(Doctor Knows Best?), Asiaweek, 1998-7-17, p.46)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대응은, 해당국들이 자국 통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이는 일시적으로 금리를 인상함을 의미했다. 비록 이러한 조치가 기반이 약한 은행이나 기업들을 힘들게 하더라도 하는 수 없었다. |
"아시아경제위기"에 대한 IMF의 고금리 정책 처방은 확실히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평소 금리인상이 1% 이하에서 움직이던 것과 비교해 상당한 폭을 가진 것이었 때문이다. 실제 이 사태가 발생했을 때 악성부채들이 이자율을 60%까지도 끌어올리기도 했는데, 특히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비우량(non-prime) 대출 이자율은 각각 40%와 65%를 기록했다. 이 위기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 각국들에서 기록한 고금리는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IMF가 장려한 세계화 지원과 통화 자유화 상황 하에서 이 지역으로 쇄도한, 파생상품에 대한 외국 자본 --- 부채 및 투자 --- 의 유입을 위해 필요한 환율을 유지와 관련해 IMF가 시도했던 이전의 처방이 이미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태국에서 아시아금융위기가 촉발되자, 유사한 상황에 처해있던 다른 아시아 경제들로 이 위기가 전염병처럼 확산되어 갔다. 환율을 갉아먹는 자본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IMF는 고금리 정책 처방을 내렸다. 이러한 고금리는 환율을 안정시키고, 고평가된 외채의 부담으로 손실에 시달리던 아시아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환차손(exchange losses)은 IMF를 지배하던 선진국들의 은행 및 기관들인 채권자들 입장에서도 결과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악성부채로 작용하면서, 이 지역 기업들의 도산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자신들의 태만으로 파생된 외채 부담으로 인해 막대한 환차손에 시달리던 아시아 기업의 주주 및 소유주들을 자유시장에 내버려두지 않고, IMF는 아시아의 채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고금리라는 정책으로 금융시장에 개입한 것이다. 하지만 달러 빚에 허덕이던 아시아 기업들은 실제 소유구조 때문에, 그러한 고금리를 통해 과거에 이익을 본 적도 없고, 미래에도 이익을 볼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고금리 정책은 병든 아시아 경제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아시아 기업에 투자한 외국인 채권자들을 악성부채에서 구해내기 위한 것이었고, IMF의 고금리 처방 하에서 대량으로 생존기반을 잃게 될 아시아 은행들이나 채무자들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