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禧嬪張氏(1659-1701)
1 소개
숙종의 후궁이자 한 때는 정비였다. 그리고 경종의 생모. 조선 역사상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되었던 유일한 여성이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희빈(禧嬪)이란 그녀가 정1품 후궁 '빈'(嬪)으로서 받은 작호를 말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장희빈'보다는 '희빈 장씨'로 불러야 옳다. 그녀의 오빠의 이름이 장희재라서 '희'자 돌림인줄 알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희빈은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공적인 역사기록인 실록에서까지도 ‘그녀의 미모가 빼어나다’고 기술하고 있을 정도다. 아들인 경종이 그녀를 추존했기 때문에 정식 칭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그녀를 기리는 사당의 이름도 대빈궁(大嬪宮)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묘소(대빈묘)는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원'(園)이 아니라 '묘'(墓)다.
2 생애
2.1 집안 배경
역관 장형의 막내딸.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역관 출신으로 사역원 정9품 봉사로 재직하였지만 일찍 은퇴하였다가 그녀가 막 11세가 된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이후 당숙 장현의 슬하에서 자랐다. 형제는 이복오빠인 장희식과 동복오빠인 장희재가 있었고 아홉 살 이상의 동복언니가 한 명 있었다.
할아버지 장응인은 통문관지에 행적이 기록된 뛰어난 역관으로서 생전 최고 관직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무관직)에 이르렀고, 전쟁 중에 무관으로 참전한 바 있으며 시재(詩才)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외할머니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했던 변승업의 당고모로 소설 허생전에도 모델로 등장한 변부자 가문의 딸이었다. 외삼촌 윤정석도 시전의 거부였고, 당숙인 장현은 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 받은 거물 역관으로 무역에도 종사해 국중거부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거기에 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대부분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그녀의 일족이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양반사대부가 명문의 여식은 아니었어도 잘 나가는 외교관-재벌가 가문 따님은 되었단 소리.
흔히 '장씨의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 처갓집 집안의 노비였고 그 당시 조사석과 사통했다더라'는 설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숙종실록 13년 6월 16일 3번째 기사에 적혀있는 기록으로 노론 측의 사관이 '그랬다카더라'라고 적어놓은 것에서 기인하고 후일 소론에 의해 수정된 숙종실록보궐정오 같은 날짜 기사에 '그거 허황된 소리임'이라고 정정했던 기사다. 외삼촌이 시전의 상인이고 장옥정이 사가로 내쳐졌을 때. 옥정의 집 바로 옆에 외삼촌의 집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기기도 하다.
2.2 입궁
그녀의 입궁 시기는 사실 설이 분분하다. 흔히 사극에서는 서인에 맞선 남인의 책략으로 그녀가 입궁했 다고 나오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 그녀가 10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 장형을 잃고 생계가 어려웠던 탓에 궁녀가 되었다는 주장과, 장형이 사망하기 전에 역시 궁녀였던 딸이 있는 장형의 사촌형 장현의 권고를 받아 막내딸인 장씨를 입궁시켰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생부 장형의 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입궁해 성장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숙종실록에도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입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자의대비)의 수발을 드는 궁녀로서 생활하였다.
일부에선 희빈이 의탁하고 있던 당백부 장현이 경신환국에 휘말린 후 가세가 기울자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경신환국 당시 그녀의 나이가 이미 22세였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주장의 근원은 희빈 장씨가 경신환국 당시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궐하였다는 인현왕후의 주장으로 불거진 것, 물론 이때의 입궁은 재입궁 때를 뜻한다. 어쨌거나 그 미모로 인해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승하 하고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니 이때가 1680년경이다.
2.3 출궁에서 재입궁까지
1680년, 남인의 영수 허적이 왕실에서만 쓸 수 있는 유악을 자신의 조부의 시호를 바치는 제사 때 사용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남인을 밀어내고 집권하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가 장옥정을 궁에서 내치게 된다.
경신환국 당시 장현 일가가 복평군 형제와 절친한 사이이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 몰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였던 것으로 비추어 왕의 총애를 받는 그녀의 보복을 견제한 탓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출궁된 직후인 1681년 1월 3일에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3월에 숙종의 모후인 대비 김씨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간택되어 1681년 5월 14일 숙종과 민씨가 가례를 올렸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새 왕비에게 갈 총애를 장옥정이 앗아갈까 염려하여 그녀를 내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보통, 재입궁하기 까지 옥정이 궁핍한 삶을 살았다고 묘사하는 매체가 많지만 옥정이 궁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당백부인 장현이 유배에서 풀려나와 예전처럼 재물을 모으기 시작했고, 일반적으로 이 당시에 한량으로 놀기만 했다고 알려진 그녀의 오빠 장희재는 이미 무과에 급제하여 종 6품 포도부장을 맡고 있었다. 또 그녀의 외삼촌 윤정석은 면포를 팔던 시전상인이었다. 그녀가 이 시기 출궁 궁녀의 법도에 따라 사가에 머무르기만 했겠지만 이런 정황상 오히려 부족함이 없이 유복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이 기간에 그녀가 남인과 접촉하고 그것이 재입궁의 기회가 되었을 공산이 크다.
2.4 후궁에서 왕후로
한편 숙종은 장옥정을 잊지 못했고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고 명성왕후 김씨가 승하하여 3년상을 치룬 이후인 1686년 초에, 옥정을 총애했던 자의대비의 청에 의해 다시 장옥정을 궁으로 복귀시켰다. 이 시기 숙종의 장옥정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깊어서 그녀를 소의로 봉했다가 1689년 그녀가 고대하던 왕자를 낳자 바로 희빈으로 봉했다. 그해, 숙종은 옥정이 낳은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남인에게 권력이 돌아갈 것을 우려한 서인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다.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숙종은 송시열을 귀양 보내고 귀양지에 도착하기 전 사약을 내려 죽인다. 이후 서인들은 남인에게 밀리고 인현왕후는 폐서인되어 궁 밖으로 내쳐진 후,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기사환국)
2.5 왕후에서 후궁으로
이후, 김만중의 손자 김춘택 등을 중심으로 인현왕후 복위운동이 일어나고 인현왕후의 폐서인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은 장희빈의 거친 성격에 실망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는 것이 대중 사이의 기존 인식이었으나 실제로는 권력다툼에 기인 한다. 즉, 숙종은 권세를 잡은 남인의 권력이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1694년,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권력은 남인에서 온건 서인인 소론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갑술환국)
2.6 최 후
장희빈은 다시 왕비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인현왕후가 시름시름 앓자,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으면 자신이 다시 왕비가 될 것이라 믿고 그렇게 되게 하기위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 뒤쪽 별채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1701년, 인현왕후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남인의 재집권을 두려워한 노론의 사주로 숙의 최씨가 취선당의 신당과 인현왕후 저주를 고변하여 결국 같은 해 10월, 목숨을 잃었다. 숙종은 희빈을 왕후의 예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게 했고 장례에 세자 부부 내외도 참가하게 했으며 나중에 희빈의 묘가 터가 안 좋다는 말에 길지를 고심한 끝에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와병 중인 숙종이 직접 택점하기도 하였다.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이 희빈에게 자살하라고 명을 내려 희빈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녀를 자진하게 할 때 숙종이 사약을 내릴지 신하들과 의논하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진했다고 해도 일단 사약을 마신 것은 맞는 듯하다. 숙종실록 27년 10월 8일 11번째 기사참고로 이때 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겠다면서 패악을 부려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강제로 먹였다는 야사가 널리 퍼져 있으나 이와 관련된 기록은 서인과 관련되어서 발견되는데다 정사에서는 그녀가 세자를 위해서 순순히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인들의 악의적인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한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취선당 신당은 사실 인현왕후가 승하하기 2년 전에 세자(후일의 경종)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기원하려던 것이었는데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고 주장. 신하들이 비정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장씨 휘하 나인들에게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나인들은 세자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라고만 말했다고 하며 나중에서야 고문을 못 이긴 나인들이 추가증언으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빌었다고 자백하여 희빈의 처벌이 결정되었다고.
물론 당시 법도로 보아서는 어디까지나 병환 중에 있는 인현왕후가 우선이기 때문에, 희빈 장씨가 아픈 세자를 위해 사사로이 궁 밖으로 나가 절에서 불공을 드렸다든가 치성을 드렸다고 해도 허물이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궁궐 내에 허락도 없이(애초에 허락을 받을 수 있을 일도 아니었지만) 신당을 차려 세자만을 위하여 치성을 드렸다면 예법을 중요시하고 무속신앙을 천대하였던 당시 사회에서 큰 허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인현왕후의 죽음 여부와 무관하게 상전인 인현왕후를 능멸하는 일이라며 트집잡기에는 딱 좋은 정도의 일인 것이다. 이미 조선에서는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 하는 일로 조정대신들이 싹 갈려나가고 몇 십 년이나 당파 싸움으로 이어진 예송논쟁도 있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법도를 어긴 것과 일국의 왕비를 주살한 것은 아주 큰 격차가 있으며 무리해서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였다는 죄목으로 사사(賜死)한 것은 서인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야사에는 그녀가 경종의 고환을 상하게 하며 이씨를 망하게 하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거나 사약을 마실 때 발악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록에는 그 같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닌 듯 하다. 사실 경종은 즉위 1년 후 희빈을 옥산 부대빈으로 추숭했고 높이려 했으나 영조 즉위 이후 집권 노론이 희빈을 대역죄인 취급하였고, 후세에 인현왕후전 같은 야사가 널리 알려지며 악녀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탓에 저런 야사가 널리 알려지게 된 듯하다.
3 평가
대단히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여인으로 영국의 헨리 8세의 총애를 받다 몰락하여 죽은 앤 불린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다. 그녀는 사극에서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인물로 아마 연산군, 정조와 더불어 막상막하일 듯하다.
앤 불린이나 장희빈이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현대에 들어선 당대의 평가만큼이나 악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둘 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편, 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희빈도 앤 불린도, 알고 보면 평가가 상당히 갈린다.
<출전 : 앤하위키 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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