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6년8월11일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렸는데, 그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역사의 법은 옛부터
있었다. 당우(唐虞-요순) 적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여러 서책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열국(列國)의 사관이 각기 그 때의 일을 기록하여, 뒤에 편찬 기술하는 자가 상고할
수 있게 되었다.
저 한 고조(漢高祖) 같은 이는 관중(關中)에 들어가면서 소하(蕭何)를 시켜서 진(秦)나라의
문적(文籍)을 거두게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위에 오르자 위징(魏徵)을 명하여 수(隋)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전 세상의 쇠하고 흥한 연고를 거울삼아 뒷 임금의 착하고 악한
것을 본받고 반성하게 함이니, 이른바 나라는 가히 멸망시켜도 역사는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닌가.
공경히 생각하면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처음에 즉시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서
원군(西原君)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를 편찬하게 하시니, 이에 각 왕의 《실
록》과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
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侍中)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채집하여 모아서 편집하여,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에 모방하여
3년만에 37권이 성취되었으나,살펴보건대, 그 역사가 잘못된 것이 꽤 많았으니 범례(凡例)
같은 데에 있어 원종(元宗) 이상은 일이 많이 참람되었다 하여 간간이 추후로 개정한 것이
있었더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어 고전과 서적에 뜻을 두셨으므
로, 이에 우의정 신(臣) 유관(柳觀)과 예문학 대제학 신 변계량과 신 윤회 등에게 명하시어
거듭 교정하고 개정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라 하시니, 영락 21년 11월 28일에 신 관
(觀)이 말씀을 올리기를,‘전조(前朝)에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모두 종(宗)이라 칭한 것은
참람한 일이었으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이 모두 묘호(廟號)였는데, 이제 새 역사에는 혜
왕이라 정왕이라 개칭(改稱)하여 묘호로써 시호(諡號)인 것처럼 만들어 진실을 잃은 것 같
사오니, 실록에 따라 태조는 신성왕(神聖王)이라 하고, 혜종은 의공왕(義恭王)이라 하고,
정종 이하도 모두 본래의 시호를 쓰게 하면 거의 사실(事實)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하겠나
이다.’하였더니, 이 날에 신 회(淮)가 경연(經筵)에 입시하였을 때에 친히 옥음(玉音)을
받자왔으니, 말씀하기를, ‘공자의 《춘추(春秋)》는 남면(南面)하는 권리에 부탁하여 한
임금의 법칙을 이루려고 하였던 까닭으로, 오(吳)·초(楚)에 참람하여 왕이라 한 것을 깎아
서 자(子)라 하고, 성풍(成風)을 봉(풧)으로 장사하게 한 것에는 왕을 말할 때 천왕이라
하지 아니하였으니, 붓으로 깎아내리고 빼앗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서 재정(裁定)하였으나,
좌씨(左氏)가 전(傳)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오나라·초나라와 월나라에 한결같이 왕이라 자칭
(自稱)한 것을 좇아 왕이라고 써서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고, 주자(朱子)의 《통감강목
(通鑑綱目)》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말하기는 《춘추》의 서법(書法)을 본받았다고
하나, 그 분주(分註)에는 참람하고 거짓된 나라이나 도적질하여 표절(剽竊)한 명호(名號)
라도 모두 그 사실대로 좇아 기록하였으니, 어찌 기사(記事)의 범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한다.
이제 붓을 잡은 자가 성인(聖人)의 붓으로 깎는 본뜻을 엿보아 알지 못하였은즉,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쓰면, 칭찬하고 깎아내린 것이 자연히 나타나 족히 후세에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사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추후로 고쳐 그 진실을 잃게 할 수 없을지니, 그 종이라 한 것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가히 실록에 따라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사실을 없애지 말라.
범례를 고친 것은 이것으로 표준을 삼으라.’ 하시니, 신 등이 공경하여 명철하신 명
령을 받고 드디어 원종(元宗)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새 역사와 비교하여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
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 편찬하기를 이미 끝내매,
사적(事跡)이 대강 완전하여 책을 펴면 권(勸)하고 징계(懲戒)하는 것이 분명하게 여기에
있는지라,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자장(司馬子長)이 세상을 초월하는 기개로 석실
(石室)의 글을 뒤져서 《사기(史記)》 1백 30편(篇)을 편찬하였는데, 누를 것은 누르고,
높일 것은 높이고, 버리고 취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반드시 저소손(?少孫)
이 그 빠진 것을 첨부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잘못된 것을 구(救)해 준 뒤에 그 역사
가 완비되었으니, 자장(子長)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되는 자로서 어찌
깎아 바르게 하고 잘못을 고칠 자에게 기대함이 없겠는가.
역사를 짓는 것의 어려움과 교열하고 교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전하의
생각하심이 깊으신 지라, 면대(面對)하여 명령하심은 어의(御意)의 독단(獨斷)에서 나왔
으니, 명백하고 정대(正大)함이 보통 천박한 소견(所見)으로는 그 가[涯]와 끝을 측량하
지 못할 것이라.
삼가 손을 잡아 머리를 조아리고 붓을 들어 글로 써서 책머리에 실어서, 뒤의 군자로서
이것을 읽는 자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자세하게 생각하라.”하였으니, 동지춘추관사(同知
春秋館事)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다.
세종 7년12월7일
경연에 나아가 맹사성(孟思誠)에게 이르기를,“변계량이 연전에 청하기를, ‘《고려사
(高麗史)》를 정도전이 편수(編修)한 전례에 따라, 모든 참의(僭?)한 이름은 모두 고치
고 휘(諱)하여 쓰자.’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도전이 이미 편수한 글에도 기성의
사실은 고치지 않았는데, 고쳐 편수하지 않은 글까지 굳이 추후로 고쳐야 하겠는가. 역
사의 기록은 반드시 바른 대로 써야만 하는 것이니, 어찌 숨겨[諱] 써서 그 일을 민멸
(泯滅)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우의정 유관(柳觀)과 제학(提學) 윤회도 또한 바
른 대로 쓰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찍이 윤회에게 명령하여 서문(序文)을 다시 지으라고 하였더니, 이제
계량이 이렇게 강청하고, 참찬(參贊) 탁신(卓愼)의 논의도 또한 계량과 같으니, 내가
어찌 반드시 말리겠는가. 또 나의 말한 바를 지금의 사관(史官)이 어찌 죄다 쓰지 않
겠는가. 윤회가 지은 서문은 쓰지 않고 우선 계량의 말에 좇도록 하겠다.”하였다.
세종 8년11월20일
수찬색(修撰色)이 계하기를,“고려(高麗)의 법으로서 준수해야 할 것은 모두 《원전
(元典)》에 수록되어 있사오나, 정묘년(丁卯年)에 고친 의관(衣冠) 제도는 실려 있지
아니하여 후세에 고증(考證)할 길이 없사오니, 그 제도를 예조(禮曹)로 하여금
《고려사기(高麗史記)》와 중외(中外)의 문서를 상고하게 하여, 《원전(元典)》 속의
전조 판지(前朝判旨)에 추가하여 기록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10년10월3일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일찍이 진주(晋州) 사람 김화(金禾)가 그 아비를 살해하였
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 낯빛을 변하고는 곧 자책(自責)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하
니, 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청하옵건대 《효행록(孝行錄)》 등
의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항간의 영세민으로 하여금 이를 항상 읽고 외게 하여 점차
(漸次)로 효제와 예의(禮義)의 마당으로 들어오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직 제학(直提學) 설순(첁循)에게 이르기를, “이제 세상 풍속이 박악(薄惡)
하여 심지어는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록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가 아니지만, 그러나 실로 교화하는 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니, 전에 편찬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20여 인의 효행을 더 넣고, 전조
(前朝)와 및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사람으로 효행이 특이(特異)한 자도 또한 모두
수집하여 한 책을 편찬해 이루도록 하되, 집현전(集賢殿)에서 이를 주관하라.”하니,
설순이 대답하기를,“효도는 곧 백행(百行)의 근원입니다. 이제 이 책을 편찬하여 사
람마다 이를 알게 한다면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고려사(高麗史)》로 말
씀하오면 춘추관(春秋館)에 수장되어 있어 관 밖의 사람은 참고하여 살펴볼 수 없사
오니, 청컨대 춘추관으로 하여금 이를 초록(抄錄)해 보내도록 하소서.”하니,즉시 춘
추관에 명하여 이를 초(抄)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