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입센의 중기 작품으로 노르웨이의 전설에서 테마를 따온 드라마입니다.
사냥꾼 '페르 귄트'의 인생 역정을 다룬 5막 38장의 희곡이었습니다.
거짓말쟁이에다 허풍쟁이, 난봉꾼 등등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 정도로
문제적 인간의 특질을 두루 갖춘 페르 귄트라는 몽상가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스칸디나비아의 피요르드와 산간지방에서 출발해서
중국, 아프리카, 지브롤터를 거쳐,
아라비아 사막, 이집트, 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파란만장한 여정이었고
현실과 초현실을 정신없이 넘나드는 한편의 판타지이기도 했습니다.
희곡만 놓고 본다면야 별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무대에 올릴 때 이 변화무쌍하고 광대한 장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특히 4막)
하는 궁금증이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원작자 헨릭 입센의 간곡한 요청으로 운문극 <페르 귄트>에 그리그 선생이 곡을 붙여
<페르 귄트>라는 아름다운 극(부수)음악이 탄생하게 됩니다.
음악없이 희곡 내지는 연극의 형태로만 초연되었을 당시에는 반응이 별로였는데
그리그 선생의 음악과 함께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극장에서 재연되면서
빅 히트!를 쳤다고 합니다.
초연 당시 그리그 선생이 극에 붙인 부수음악은 총 33곡 이었는데
(4막과 5막의 솔베이지의 노래의 중복을 감안하면 32곡)
이후 출판업자의 정리를 통해 23곡으로 확정 출판되었고
이중 그리그 자신이 대표적인 곡들을 뽑아
페르 귄트 제1모음곡(4곡), 페르 귄트 제2모음곡(4곡)으로 선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쉽게 접하는 <페르 귄트 모음곡>입니다.
정선된 23곡의 연주회용 관현악판본에 따른 음반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극의 전개에 따라 배경음악이 깔린 대사까지 포함한 완전한 극음악을 전체(33곡)로 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낙소스에서 4년전 발매한 이 음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리그의 <페르 귄트>를 처음 들었던 건 80년대 후반 테레비를 통해서였습니다.
mbc에서 일요일 밤마다 신간소설을 한편씩 단막극으로 방영한 베스트셀러극장을 통해서였는데
(몇년 전 작고한) 김윤희 선생의 자전적 소설 '잃어버린 너'라는 드라마에서
테마로 깔리는 배경음악을 통해 <페르 귄트>의 Morning 을 처음 들었습니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주인공(아마 노주현?)을 사랑하는 여인이 휠체어에 태워 밀고가는 장면,
고즈넉한 해질 무렵의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던 Morning 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몇년 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던데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그도 잘 모르고, 페르 귄트는 더더욱 알턱이 없던 시절
물어물어 학교 정문앞 레코드가게에서 테잎 하나를 사게 되고
비로소 그리그 선생의 <페르 귄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원작인 입센의 희곡도 읽어보고, 모음곡을 넘어 전곡도 들어온 덕분에
이제는 Morning 외에도 잉그리드의 뒤늦은 탄식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오제의 죽음에 슬퍼도 해보고
솔베이지가 부르는 노래 속에 담긴 평생에 걸친 오랜 기다림과 한없는 그리움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성음 크롬테잎...이십년도 더 된 그때의 테잎입니다.
뒤져서 찾아보니 생각보다는 보관 상태가 양호하군요.
=== 참고자료 : 극과 음악 === (괄호 안의 굵은 글씨체는 영문 곡명)
(제1막)
물려받은 가산을 흥청망청 다 날려버린 아버지(욘 귄트) 덕분에 홀어머니 오세와 단둘이 외딴 오두막에 사는 페르 귄트
어머니 오세가 점찍어두었던 신부감 잉그리드가 돈많은 부자농사꾼의 아들에게 시집가는 날(Prelude - at the farm wedding)
어머니의 만류와 친구들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결혼피로연에 참석하는 페르 귄트(노르웨이의 무곡 Halling 과 Springar)
이 피로연에서 얼마전 이사온 농부의 딸 솔베이지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됩니다.
(제2막)
멍청한 신랑을 따돌리고 초야를 앞둔 신부 잉그리드를 약탈해서 신랑 대신 초야를 치른 페르 귄트는 다음날 아침 잉그리드를 다시 내팽개치고(the Bridenapping. Ingrid's lament)...사람들의 추적을 피해 숲으로 도망친 페르 귄트는 우연히 마주친 숲속의 세 여자와 다시 하룻밤을 보내면서(Peer Gynt and the dairymaids) 환상의 세계로 빠져 드는데...
환상의 세계에서 만난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Peer Gynt and the woman in green)은 산속에만 사는 트롤족의 왕 도브레의 딸로서 페르 귄트를 도브레왕의 궁전으로 유혹하고(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자신과 결혼해서 영원히 트롤족으로 남아달라는 딸의 요청(dance of the Mountain King's daughter)과 왕의 협박을 뿌리치고 그곳을 빠져나와 트롤족들로부터 도망치는 페르 귄트(Peer Gynt chased by the Trolls), 어둠속에서 길을 잃고 숲을 헤매이다가 그림자 유령 보이그를 만나 밤새 시름을 하다가(Peer Gynt and Boyg) 솔베이지가 치는 종소리에 환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제3막)
페르 귄트의 신부 약탈에 대한 재판의 결과로 오세는 오두막의 세간살이마저 다 빼앗기고, 페르 귄트는 숲속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형벌에 처해지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베이지는 부모마저 버리고 숲속 오두막으로 페르 귄트를 찾아 오지만...트롤족들로부터 솔베이지를 보호하기 위해 숲을 벗어나는 페르 귄트...어머니 오세의 죽음을 뒤로 하고(Prelude. Ase's death) 저 멀리 바다를 향해 자기자신이 되기 위한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제4막)
장면이 바뀌어 모로코 남서 해안의 야자숲...노예매매와 중국과의 무역으로 갑부가 된 장년의 페르 귄트...자가용 요트에서 함께 여행하던 손님들에게 요트와 그동안 모은 전재산을 빼앗겨 무일푼이 되고 맙니다...사막을 걷고 오아시스에서 자고 또 걷고 또 자고 그러던 어느날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페르 귄트(Morning mood) 앞에 나타난 도둑과 장물아비(the thief and the fence), 그 둘이 거래하던 모로코 황제의 말과 장신구를 빼앗아 타고 페르 귄트는 모험을 계속 하게 되고...
다시 장면은 바뀌어 아라비아 족장의 천막에서 예언자 행세를 하는 페르 귄트...여자 노예들의 춤(Arabian dance)과 족장의 딸 아니트라의 춤(Anitra's dance)에 젖어 향락을 즐기다가 예언자 노릇에 싫증이 나자 영혼을 불어 넣어주겠다는 말로 아니트라를 꼬셔서(Peer Gynt's Serenade) 또다른 모험길에 접어들지만, 또다시 그동안 모은 재산과 말을 아니트라에게 뻬앗기고 알거지가 되고 맙니다.
한편 숲속의 오두막에 남은 솔베이지는 하염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며 아직도 페르 귄트를 기다리는데(Solveig's song)
어느덧 페르 귄트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둘러보고 있습니다.(Peer Gynt at the Statue of Memnon)
(제5막)
미국에서 금광으로 한 몫 단단히 챙긴 초로의 페르 귄트, 마침내 고향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지만(Peer Gynt's homecoming), 고향을 눈앞에 두고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게 되고(the shipwreck) 페르 귄트는 겨우 목숨을 건져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숲속 오두막에서 아직도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솔베이지(Solveig sings in the hut)를 보고 충격을 받은 페르 귄트는 그제서야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며(night scene) 참회를 하게 되고(whitsun hymn), 솔베이지의 품안에서 그녀가 부르는 자장가를 들으며(Solveig's lullaby) 영원한 안식을 찾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