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1) 희극의 성공
18세기는 온통 희곡으로 열광했다. 볼테르는 비극작가였고 루소는 오페라를 상연하게 했다. 디드로는 새로운 장르인 드라마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마리보와 보마르셰의 희극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마리보와 함께 르사즈는 18세기 전반기에 희극을 지배한다. 작가들은 그 거대한 유산을 서로 나누어 가지면서 몰리에르의 작품에서 폭넓은 영감을 얻는다. 어떤 작가들은 줄거리의 변화에 역점을 둔 희극에 몰두하고 또한 온갖 심리적인 깊이를 돌보지 않는 익살극과 같은 명백히 희극적인 것을 추구한다.
르사즈는 품속 희극을 제안하고 '튀르카레'와 더불어 우리를 부패한 재정가들의 세계로 파고들게 한다. 더욱 독창적인 마리보는 말장난에서 파생되어 이따금 귀에 거슬리는 희극적인 것의 원천을 탐색한다. 18세기 희곡은 화려하고 정신적이며, 개인적인 풍자와 교훈적인 감동의 경향이 있고 재치있는 말과 날카로운 빈정거림의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매우 이지적인 이 희극적인 것은, 보다 다양하고 일반적으로 더욱 익살극적인 몰리에르의 희극이 극장에서 거둔 것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2) 드라마의 일시적인 승리
드라마는 세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라는 면에서는 희극과 비슷하고, 주인공을 위협하는 불행의 중대함과 심각함이라는 면에서는 비극과 비슷하다. 드라마는 관중을 감동시키려 하면서도 교화하려 한다. 그것은 '사생아(Le fils Naturel, 1757)와 '가장(Le Pere de Famille, 1758)과 더불어 디드로가 창안한 일종의 도덕극이다.
이러한 희곡의 혁명은 비극의 쇠퇴에 기인하고 있으며 특히 그 시대의 사회적 윤리는 분위기에 힘입은 바 있다. 도덕은 고결한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감수성과 도덕적 의미는 쉽사리 혼동된다. 볼테르는 연극 장면과 희극배우들이 설교단과 성직자들을 유리하게 대신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디드로는 다음의 견해들을 개진하는데 보마르셰가 이 대부분을 되풀이하게 된다.
- 드라마는 17세기의 귀족적이고 영웅적인 비극과는 대조적으로 '가정적이고 중산계급적인 비극'이다. 드라마는 일상적인 사건들을 취급한다.
- 드라마에서는 사회적 조건들과 가족 관계의 묘사가 중심적이다. 그 묘사가 고전적인 성격 분석을 대신한다.
- 드라마는 귀족 정치의 나쁜 습속과 편견에 대조되는 중산계급의 미덕을 돋보이게 한다.
- 사실적 무대장치를 바탕으로 한 비장한 장면들이 높이 평가된다. 배우의 연기는 표정이 풍부한 몸짓들로 표현된 위대한 감동의 순간들과 산문으로 된 대사를 강조한다. 몇몇 성공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불멸의 작품을 거의 만들어내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연극 미학의 영역에서 드라마가 만들어놓은 돌파구는 중요한 것인데, 그 돌파구가 미래의 연극에 있어 변화의 싹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혁명기 문학
보마르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항용 잊혀진 작가들은 철학자들의, 특히 루소의 정신적인 아들들이다. 사실 그들 작품의 주요한 관심사항은 도덕적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 내에서 인간의 위치와 개인의 자유의 위치, 그리고 인간의 욕구의 위치에 대해 자문한다. 직접적으로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던 이 문학은 그 당시에 주도되던 정치적인 성찰의 격심함을 나타내고 있다. 개인의 행복이라는 유일한 기준과 정치가 맞선다.
1)레트프 드 라 브르톤
풍부하면서도 부당하게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소설 작품을 통하여 레티프는 작품이 '교육적인' 것이 되도록 하려 한다. 더욱 공정한 사회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혁을 그의 '독특한 생각'에서 제안한 이후 그는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독자들을 악에서 벗어나게 하려 한다. '자신을 희생시켜 우리를 가르치기'위해 '우리앞에서 그는 옷을 벗고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1794년 부터 1797년 사이에 '니꼴라씨 또는 폭로된 인간 심정'을 집필한다. 루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소유권을 통해 '모든 악행과 죄악, 그리고 부패의 근원'을 보며 시골풍의 소박한 삶을 권한다.
2)사드
아폴리네르는 '사람들이 여지껏 보아왔음직한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말했고, 분명 폴랑이 '가장 오랜 동안 유폐된 육신'이라고 덧붙인 그는 그 영향력이 아직도 크게 남아있는 작가이다. 18세기의 작가들은 다음의 물음을 스스로 제기했다.신이 존재한다면, 또는적어도 철학과 진보의 계몽이 세상을 밝힐 수 있다면 악의 영속성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루소와 볼테르, 그리고 디드로는 이 물음에 대답했다. 그들의 대답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만 모두가 하나의 지점에서 일치한다. 즉 악은 하나의 악이다. 그래서 악을 근절시켜야 한다. 그럴 경우에만 인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데 사드에 따르면 그 문제는 잘못 제기된 것이다. 즉 프랑스에서는 악인 것이 중국에서는 미덕이다. 그리고 또한 그 반대의 경우가 있는 것이고, 특히 난폭한 것은 폭력으로부터 쾌락을 끌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약함으로부터 괘락을 끌어낸다. 그래서 잔혹함은 착함과 같은 자격으로 천성 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계몽의 교향악 안에서 사드는 불협화의 악보를 연주한다. 그 불협화음의 악보는 신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순간의 쾌락 속에 완전히 탕진된 부조리한 세상을 폭로한다. '새로운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에서 사드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방탕함으로 행복과 융성함을 누리는 쥘리에트와 자신의 미덕 때문에 영락의 길을 걷게 되는 쥐스틴느라는 두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의 체계를 증명한다.
그래서 도덕도 없고 '선한 천성'도 없다. 한쪽에는 선한 것이 다른 쪽에는 악한 것이 있다거나 한쪽에 고통이 다른 쪽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부조리함위에 깔려 있는 비밀을 폭로하면서 사드가 예고했던 것은 19세기라기 보다는 20세기이다.
3)라클로
그는 1772년에 '위험한 관계'를 출판한다. 1815년까지 50여 판이 이어진다. 이 소설은 방탕한 두 사람, 발몽 자작과 메르퇴유 후작부인 사이에 오고간 편지들 모음이다. 방탕한 생활의 규칙인 완전하게 정해진 법칙에 따라 후작부인은 긴 시간을 두고, 발몽으로 하여금 여기서는 그러 그러한 여자들과 약속을 하게 하고 저기서는 또한 깨뜨리도록 하면서 발몽의 모험을 이끌어간다. 한편 자작은 후작부인에게 자신의 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한 사람 또는 나머지 한 사람에 의해 말려든 모든 관계들은 억지 관계들이다. 즉 그 방탕아는 자신을 억누르면서 또한 동요하지도 않는다. 그는 계산하고 억제하며 분석한다. 전쟁에서 대장이 전투를 지휘하듯 그는 타인과의 관계들을 관리한다. 그가 도덕의 토대들을 잠식해 들어가려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부도덕한 이 세계의 유일한 '미덕'은 총명함이다. 그 총명함은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근본을 파헤쳐 보면 가장 고결한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개인들이 전적으로 부도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천성을 벌거벗기려는 이러한 시도에서 라클로는 사드와 다시 만난다.
이 세 작가의 작품들은 오늘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품으로 존속하고 있다. 그들의 작품, 특히 사드의 작품에 대한 반향은 오늘날에 여전히 중요하다. 많은 저자들이 사드에 관해서 끊임없이 쓰고있다.
*몽테스키외*
몽테스키외(Charles de Secondat, Baron de la Brede et de Montesquieu)는 1689년 보르도 근처에서 태어났다. 1714년부터 그는 보르도 의회의 법률고문을 지내다가 2년 뒤 보르도 지방의회 의원이 되었다.
1728년부터 그는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여행한다. 영국에서 그는 영국의 정치제도의 특징에 관해 대단히 경탄하기도 했다. 1721년에 그는 이미 프랑스의 정치상황과 종교실태를 풍자하는 『페르시아 서한』(Lettres persanes)을 익명으로 출판했다. 영국에서 돌아온 뒤인 1794년에는 『로마의 흥망 원인에 관한 고찰』(Consideration sur les causes de la grandeur et de la decadence des Romains)이라는 책을 썼으며 1748년 17년 동안의 연구성과이기도 한 그의 대작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을 출판했다.
그가 죽은 것은 1755년이었다.
*앙드레 셰니에*
1794년 6월 25일, 지금의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앙드레 셰니에Andre Chenier(1762-1794)는 26명의 사람들과 함께 단두대의 칼날 아래 목이 떨어졌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때에 누구도 그들이 한 시인을, 아니 한 위대한 시인을 죽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만큼 한때 혁명가였던 이 사람을 시인으로 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작품도 발표된 것이 없었다.
그가 단두대에서 사라진 지 25년이 지난 1819년 라투슈라는 출판사에서 그의 작품이 간행됨으로써 비로소 그는 갑자기 위대한 시인으로, 특히 사막 같은 18세기 문단에 솟은 유일한 종려나무라고 절찬을 받았다. 특히 당시에 낭만파 시인들은 그들의 선구자라고 환호성을 올렸고, 앙리 드 레니에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롱사르, 위고, 셰니에의 이름을 꼽을 정도였다.
앙드레 셰니에는 176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당시 이곳에 프랑스 영사로 부임해 있던 아버지와 그리스 태생의 아름답고 교양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리스 문화와 문학에 대한 애착과 동경을 가졌다. 그 후 파리로 올라온 뒤에는 사교가이기도 한 어머니가 그녀의 살롱에 많은 문인, 학자, 다비드 같은 유명한 화가를 손님으로 맞이했으므로 젊은 셰니에는 이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정열도 높아졌다. 이때에 그는 그리스 시가를 본뜬 몇 편의 시작을 했다.
그가 25세 때 프랑스 대사관의 서기관으로 런던에 가게 되었는데 이 2년에 걸친 영국 생활은 그에게는 무척 고통스럽고 무료하고 적적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망향의슬픔과 고적한 생활을 달래기 위해 방대한 작품을 계획하고 '헤르메스'와 '아메리카'라는 두 작품을 이 시절 동안에 썼다.
2년이 좀 넘어 1790년 그는 꿈에도 못 잊던 프랑스로 돌아왔다. 때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파도와 불이 소용돌이치는 격동기였다. 젊고 정열에 넘치는 셰니에는 이 와중에 뛰어들어 열렬한 혁명가가 되어 변혁과 자유를 찬양하는 노래와 시를 썼다. 그러나 그는 자유와 동시에 정의와 질서를 사랑하는 온건주의자로서 공포 정치로 치닫는 자코뱅의 과격한 행동을 비판 공격하고 차츰 루이 16세의 옹호파와 협력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혁명파에 의하여 반동파,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고 루이 16세가 처단된 뒤에는 베르사유 교외에 숨어서 지내다가 1794년 3월 파리에서 체포되어 생 라자르 감옥에 수용되었다.
감옥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몰래 12편의 이얌브라는 형식의 풍자시를 써서 자코뱅의 폭정과 독재를 맹렬히 공격한다. 이 원고를 그는 세탁할 속옷 속에 숨겨 자기 아버지에게 보냈다. 감옥에 들어온 지 약 4개월 뒤 인민의 적이라는 죄목으로 그는 단두대 위에서 사라진다. 그가 죽은 지 이틀 뒤에 그의 적이던 로베스피에르도 같은 형장에서 사라졌다. 그는 비록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나 그가 남긴 작품은 그 자체로 보나 그 작품들이 후세에 미친 영향으로 보나 매우 중요하다.
그는 당시의 사회 환경이나 가정 교육으로 보아 자연히 그리스의 고대 문화와 문학에 젖고 심취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 가운데는 헬레니즘의 추미 사상이 가장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그러나 셰니에의 독창적인 점은 고대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차츰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를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과 열정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것을 고대의 형식미와 조화시켜 표현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세기를 넘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까닭은 그가 그 시대의 감각, 감정, 사상,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성실하고 힘차게 표현한 데 있다.
또한 17, 18세기의 프랑스의 시가는 감정이 메마르고 개성이 없어 귀족이나 풍류객들이 즐기는 말의 기교나 언어의 유희에 불과했다. 이 메마른 땅에 셰니에는 마음을 불러들였다. 그의 유명한 말에 "기교는 시구를 만들 뿐 마음만이 시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바로 말의 기교가 아니라 마음의 표현이 시를 이룬다는 새로운 태도로, 앞으로 올 낭만파의 구호가 된다. 한편 그는 문학에서 개성과 마음을 중요시했지만 그가 이어받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가 의미의 이상인 우아와 절도, 형식과 내용의 조화, 조형미와 음악성의 융화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고전성이 또 후의 파르나스의 선구가 된 것이다.
*볼테르*
볼테르(Voltaire)는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프랑스와 마리 아루에(Francois Marie Arouet, 1694∼1778)였다. 그는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한 공증인(公證人)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직접 교육받아온 프랑스와는 1704년 10세의 소년으로서 파리에 있는 예수회파의 루이 르그랑(Louis-le-Grand)대학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주로 문학과 신학공부에 열중했다. 루이 15세 왕의 섭정을 비난하던 프랑스와는 1717년 4월 16일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처음으로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앙리아드』(La Henriade)라는 장편시를 완성했다. 석방되자 그가 쓴 희곡 『외디푸스』(Oedipe)가 무대에 올려져 대성공을 거두면서 문필가로서의 주목과 환대를 받기 시작한다.
1725년 12월 한 사교장에서 볼테르는 어떤 후작에게 불손한 언동을 보임으로써 결국 영국으로 추방된다. 3년 동안 계속되는 그의 영국생활은 그가 학자로서, 또는 사상가로서 성장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32세의 나이로 영국에 도착한 볼테르는 일년내에 영어를 완전히 습득하고 당대의 문예사조를 비롯해서 뉴턴, 로크, 흄, 샤프츠베리, 포프 등의 사상에 정통하게 된다. 그가 이때 쓴 『철학서한』(Letters Philosophiques -일명 영국인에 관한 서한)은 영국인이 누리는 자유에 비교하여 고국의 부패한 귀족들 및 그들과 결탁한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 책 때문에 또다시 바스티유에 투옥될 위험에 처한 그는 샤틀레 백작부인과 함께 로렌지방의 그녀의 성으로 피신한다. 볼테르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15년 동안 문학, 철학, 역사 등에 걸쳐 많은 저서들을 출판했다. 1737년 그는 『메로프』(Merope)라는 희곡을 썼으며 1738년에는 샤틀레 부인으로부터 배운 뉴턴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뉴턴 철학 원론』(Elements de la philosophie de Newton)과 『퓌셀』(Pucelle)이라는 서사 시집을 썼다. 1742년에는 모든 종교의 창시자를 인류의 사기꾼으로 묘사한 희곡 『마호메트』(Mahomet)를, 그리고 1747년에는 철학자 쟈디그를 묘사한 소설집 『쟈디그』(Zadig)를 출판했다. 그러나 샤틀레 부인과의 생활은 1749년 그녀의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나중에 가서 볼테르Voltaire라는 필명을 따온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cois-Marie Arouet(1694-1778)는 1694년에 태어난다. 부르주아 출신인 그는 일찍부터 자신의 재기로 넋을 빼앗았던 대귀족들을 자주 만난다. 그렇지만 단지 재치있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매우 심술궂고 짖궂은 특이한 개성의 전형이었다. 어느 날 자신이 참을성 없게 대꾸했던 한 귀족의 하닝들에게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화가 치민 그는 그 귀족에게 결투하고자 도전한다. 그 새로운 불손함으로 인해 영국으로 망명한다. 프랑스로 돌아온 뒤 <철학 편지>를 비밀리에 출판하는데, 이 저술에서 영국에 위세를 떨치고 있던 정치, 종교, 철학적인 자유에 대해 탄복하여 이야기한다. 그 출판이 원인이 되어 볼테르는 10년을 체류했던 로렌 지방 경계 근처에 있는 시레의 샤틀레 부인 저택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 시기가 지나 볼테르는 파리로 귀환한다. 이제 그는 먼저 파리에서, 그 다음 프러시아의 철학자 왕 프레데릭 2세의 궁전에서 궁신이 된다. 그러나 볼테르는 왕과 불화를 빚어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다. 1759년에는 스위스 국경 가까이 페르네에 성관을 구입한다. 거기서궁정의 삶을 영위한다. 많은 방문객들이 그를 보러 왔다. 그들 중에는 왕자들이 있으며 더러는 왕들도 있었다. 그 작은 페르나 마을은 볼테르의 체류로 큰 발전을 이룬다. 그가 세운 공장들 덕택에 인구는 50명에서 1,200명으로 증가한다. 동시에 그는 집필을 계속한다.
그렇지만 그는 훨씬 더 많은 일을 한다. 재판에 관계되는 일에 관여하며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옹호했다. 칼라 사건은 가장 유명하다. 그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자기 아들의 자살 이후에 법정은 칼빈주의자인 칼라를 아들에 대한 살인자로 잘못 고소를 하였다.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의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칼라는 사형에 처해진다. 볼테르는 그리하여 그의 미망인과 아들 둘을 데려온다. 그는 이후 칼라라는 이름의 명예를 회복해준다. 볼테르가 1778년에 죽었을 때 그의 명성은 대단했다.볼테르의 작품은 실로 방대하다. 그의 철학적(<철학 편지>), 역사적(<루이 14세의 세기>)인 글들 외에도 시, 비극 <자이르>, 철학적 콩트인 <캉디드>를 집필했다.<캉디드>에서 볼테르에 의하면 신은 가능한 세계 중에서 가장 나은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낙관주의를 비웃는다. 주인공 캉디드(순진함)는 연이어 발생하는 무수한 불행들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믿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장 자크 루소*
쟝 쟈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1712년 6월 28일 스위스의 쥬네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쟈크 루소는 시계 수리공이었다. "나의 탄생은 수 많은 내 불행가운데 최초의 것이었다."고 그가 회고하듯이 그의 어머니 쉬잔느(Susanne)는 그를 낳은지 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어린 루소는 두 사람의 숙모와 함께 살게 되었고, 아버지도 감상적이고 여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은 그의 성격을 여성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와 형이 가출하여 13세되던 해 금속가동 공장에서 도제 수업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굴절되기 시작한다. 그를 가르치는 마이스터(우두머리) 마스롱의 횡포와 지나친 속박에 대해 그는 반항하기 시작했고,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마침내는 도둑질까지 하게 되었다.
16세가 되던 해 봄, 탈출하여 3년 동안 여러 지방으로 떠돌아 다녔다. 1731년 10월, 샹베리 마을로 돌아와 바랑 부인에게 정착했다. 루소는 이때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를 잃은 루소가 찾아온 사람은 모성애를 느낄 만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10세 연상의 여인과의 사랑은 근친상간과도 같이 느낀 그녀와의 관계는 결국 그에게 평생 동안 치유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外傷)이 되고 말았다. 그는 평생 동안 여러명과 연애했으나, 진정한 사랑이나 결혼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루소는 1735년 23세가 되던 해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자신의 목숨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른바 <자기교육>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1741년 리용에 살고 있는 마블리(Mably)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어 그들의 소개로 파리의 백과전서파들과 교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742년 파리에서 음악교사로서 힘겨운 생활을 했으며, 그 이듬해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 몽테뉴의 비서가 되었다. 그러나 대사와의 잦은 충돌로 인해 일년만에 면직되고 이때부터 테레즈와 동거하기 시작하여 5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모두 고아원 문 앞에 버렸다. 이 일은 루소를 평생 동안 죄의식 속에서 고통받게 할 만큼 그의 삶에 가장 큰 멍에였다. 1749년에는 디드로의 요청에 따라 『백과전서』의 <음악>에 관한 항목들을 집필했다. 1750년은 학술원에서 그의 논문 『학문예술론』이 당선되었고, 1758년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출판했다. 1755년 그는 『백과전서』에 정치 경제에 관한 항목들을 썼으며 1758년 이것들을 『정치경제론』(Discours sur l'economie politique)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백과전서파들과는 완전히 결별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유재산 제도에 대한 루소의 공격에 대해 일종의 거지철학이라고 볼테르가 비판한 것이 결렬의 첫번째 계기였다. 애정소설인 『신엘르와즈』(Julie, ou la nouvelle Heloise)를 시작으로 『에밀, 혹은 교육에 관하여』(Emil ou de l'education)와 『사회계약론』(Contract Social)이 1761년 여름 완성되었다. 그런데 『에밀』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이 책을 소각하고 루소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8년 동안 악보베끼는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후 루소는 외부세계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더 이상 갖지 않은채 생을 마감했다
*디드로*
Diderot는 Champagne 지방의 Langre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학업을 마친 후 자유롭게 여러 해 동안 방랑생활을 한다. 선천적으로 두뇌회전이 빠르고,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그는 또한 지식의 욕망과 글쓰는 정열이 많았던 사람이다. 방랑생활을 하는 동안, 생계유지를 위해 가정교사, 번역, 서점점원, 다른 사람의 연설문 작성 등의 일을 하면서도, 그는 지시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문학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32세에 「Encyclopedie」의 출판 책임을 맡아 그 후 26년 동안 이 거대한 계획을 위해 헌신적인 일을 한다. 그는 철학적인 단상·시론·대화 등 여러 가지 형식의 많은 철학논문을 쓰고 자연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으로 무신론을 주장하거나 자연을 속박하고 정당한 쾌락을 금지하는 기독교 도덕을 비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을 배반할 수도 없고, 자연 밖에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한 그는 루소와는 달리, 사회제도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의 개선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은 「Jacque Le Fataliste」(1737)와 「Le Neveu de Rameau」(1762) 이다. 서정적이고, 사실주의적인 그의 소설은 그의 철학과 조화를 잘 이루면서 새로운 소설기법을 담고 있어, 현대소설의 선구적인 위치에서 평가되기도 한다
디드로(Denis Diderot)는 1713년 랑그르(Langres)에서 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주로 과학과 예술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보다도 그가 크게 영향받은 것은 볼테르를 비롯한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이 그렇듯이 영국의 계몽사상이었다. 그는 여러 편의 영국 사상서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는데 그 가운데는 스탠얀(Stanyan)의 『그리스사』, 제임스(James)의 『의학사전』을 비롯해서 샤프츠베리(Shaftesbury)의 『덕과 공적에 관한 탐구』(Inquiry concerning Virtue and Merit)에다 자신의 주석을 첨가해 출판한 것도 있다.
1746년에 그는 프랑스가 아닌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출판한 첫 번째 저서 『철학적 사색』(Pensees philosophiques)을 통해 자유주의적인 자신의 사상을 대담하게 발표함으로써 주목과 비판을 함께 받기 시작했다. 1749년에는 『맹인에 관한 편지-눈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하여』(Lettre sur les aveugles a l'usage de ceux qui voient)를 런던에서 출판했다. 그의 무신론에 근거하여 유신론자들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표현하고 있는 이 책은 성주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분노를 사게 되고, 그 때문에 그는 결국 벵센느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자신의 투옥을 소크라테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가지고 들어가 6개월의 감방생활 동안 이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그는 『백과전서』의 집필에 더욱 몰두하여 1751년, 『백과전서』(Encyclopedia) 제1권을 출판한다.
1754년에는 『자연의 해석에 관한 사색』(Pensee sur l'nterpretation de la nature)을 출판하였고 1769년에는 『달랑베르와 디드로의 대화』(Entretien entre d'Alembert et Diderot)와 『달랑베르의 꿈』(Le reve de d'Alembert)을 썼지만 이것들은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다. 이것 이외에도 그는 『물질과 운동에 관한 철학적 제원리』, 『엘베티우스의 저서 『인간론』에대한 체계적 반박』, 『생리학 요강』등을 비롯해서 당시 프랑스 사회를 풍자하는 몇 편의 소설을 남기기도 했다.
디드로는 그의 놀라운 학문활동과 업적에 대한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프랑스에서는 평생 동안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중 1773년 러시아의 카타리나 여왕의 초청으로 6개월 간 그곳에 머물면서 여왕과 빈번하게 철학 토론을 벌였다. 사실상 디드로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문화적 제휴와 발전에 많은 역할을 했다. 그는 러시아 예술원의 명예회원으로도 선출되어 러시아의 조형예술을 높이 평가했으나 파리로 다시 돌아와 1784년 71세로 눈을 감는다.
*보 마르셰*
1732년 교양있는 시계방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보마르셰 Beaumarchais(1732-1799)는 먼저 그의 아버지의 직업을 배운다. 일찍이 궁정에 소개되어, 왕의 딸들에게 하프 연주를 가르친다. 그는 왕의 비서관직을 매입함으로써 귀족이 되며 어느 대 재정가와 협력한다. 재정가가 죽자 보마르셰는 그가 자신에게 진 빚을 요구한다. 그는 상속자와의 소송에서 패하였으나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얼마 후에 보마르셰는 비밀 요원으로 정부의 공무원이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유명한 희극들을 집필한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 등이 그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검열로 인하여 6년간 공연 정지를 당해 1784년에 가서야 무대에 올려진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그는 용의자로 몰려 얼마동안 외국으로 망명했다. 1799년 파리에서 사망한다.
<피가로의 결혼> : 보마르셰는 무엇보다도 그의 두 희극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으로 알려진다. 첫 희극에서 피가로는 알마비나 백작이 한 처녀를 정복하는 일을 도와준다, 두 번째 희극에서는 백작이 피가로의 미래의 아내에게 구애한다. 파기로는 영리하고 풍부한 재치를 가진 무뢰한이다. 그는 야망을 품고 있으나 그의 출신의 열등함으로 장애에 부딪친다. 피가로는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수고스럽게도 태어났던' 귀족들에 대하여 앙심을 품는다. 귀족과 검열에 대한 그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피가로는 소 부르주아지의 대변인이 되며 대혁명을 예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