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겨울
빈소영 권사
목사님 내외 분과 장로님 부부 12명이 아프리카를 향해 출발했다. 홍콩에서 2시간 체류 후, 남아공 비행기를 갈아타고 13시간 비행한 다음 남아공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했다. 7월22일에 도착했는데 마중 나온 선교사님은 오리털 파카를 입고 나오셨다. 더위를 견디다 온 우리에게 초가을 같아 견디기 알맞은 기후에 겨울 옷이라니 실감이 안 났다. 우리와 정반대라 우리가 낮이면 여기는 밤, 우리가 여름이면 여기는 겨울인 것이다.
풀이 누렇게 마른 것 외에는 꽃이 피고 나뭇잎도 새파랗고 아무리 보아도 겨울이라는 말이 인정이 안되어 어리둥절 했으나 하룻밤 자고 나니 아침이 쌀쌀하여 반팔 옷들을 긴 팔로 바꾸어 입는 것, 이슬이 내려 발들이 촉촉히 젖는 것을 보고 이것이 이곳의 겨울인가보다 했다. 제일 추울 때가 12,13도라 한다.
1년 전,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어려운 모잠비크에 우리 교회에서 초등학교를 건립하여 이번에 개교를 축하하기 위해 선교 여행 차 장도에 오르니 이 학교 학생들에게 줄 월드컵 때 국민 티셔츠 였던 빨강 티셔츠 500벌, 축구공, 문구류 등 이런 짐들이 대단했다. 선교사님이 가져온 차에 싣고 3시간을 달려 스와질랜드의 선교사님 선교센터에 도착했다. 근 하루가 걸려 도착한 우리들은 피곤했지만 선교사님 내외분과 반가운 해후를 하니 피로도 잊고 새로운 하나님이 땅에서 일정이 시작되었다.
어디를 보아도 광활하기만 한 땅. 산이라고는 밋밋한 등허리 같은 곳을 달리면서 여러 색깔의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고 전봇대 같은 선인장이 솟대처럼 서 있고 알로에 꽃이 빨갛고 노랗게 피어 있는 곳. 아프리카인가 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피부색이 아주 검은 사람, 검붉은 사람, 약간 거무스름한 사람, 이곳 스와질랜드는 아프리카에서도 비교적 잘 사는 나라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선교사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매일 새로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물론 선교사님이 이 곳에서 다 개척한 교회인데 신학교 과정을 졸업한 분을 목사 안수를 해서 이곳 원주민 목사님들이 시무하는 교회이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든 성도들이 다 모여 우리들을 반겨주고 예배를 드리는데 짧으면 2시간 반에서 보통 3시간씩 예배를 드리는데 이들은 찬양이 예배 전과 후 약 1시간씩이다. 모두 빙빙 돌아가며 몸으로 찬양하는데 축제 분위기이다. 가는 교회마다 우리 목사님이 설교하시면 선교사님이 때로는 스와질랜드 말로 또는 영어로 또는 아프리카 말로 그곳에 맞는 언어로 통역을 하신다. 어디를 가나 아프리카 인들은 선량하고 느긋하며 순수한 사람들로 보였다.
4일 후 우리가 지은 모잠비크 대조 초등학교 개교일을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짐을 싣고 짐차, 승용차 다섯 대의 차가 출발했다. 모잠비크에 가까워 오자 지금까지 보아온 아프리카 보다 참 비참한 현실들이 보였다. 나무 판대기에 다가 양배추 두서너 통, 오렌지 십여 개를 올려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가 하면 장작 한 더미, 때로는 숯 얼마를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데 그들은 너무 여유롭고 넝마로 주어다 파는 것 같은 상품아래 그들의 삶은 힘들어 보이지 않으니 행복의 지수가 어디 있는 가를 다시 생각케 했다.
모잠비크!
이 곳은 아프리카에 2년 전 대홍수 때 이재민들이 이주해 와 프랑스 인들이 연간 100채의 집을 블록으로 지어 주어 이주해 오는 곳이 대부분이라 했다. 우리가 가는 날이 마침 장날이라 하여 지나가면서 보는 장 풍경이 관광이었다. 그들이 내다파는 상품들은 마치 우리들의 40여년 전의 상품들이나 생필품들과 같았고 장에서 시장기를 면하는 음식도 그랬다.
학교로 들어가는 긴 진입로는 모래 벌판이고 움푹 움푹 파인 비포장도로를 약 40분 정도 들어가니까 학교가 보이는데 원주민들이 근 500명 이상 모여 춤추고 몸찬양으로 그곳 전체의 대축제였다. 학교는 슬라브로 지은 2동의 건물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곳 아프리카에선 잘 지은 좋은 건물에 속한다니 이곳의 실정을 대변해준다. 이 나라 문교부 장관을 비롯한 지방 유지며 지역 주민과 우리 나라에서 온 선교사님들 또 우리나라에서 무역사업으로 와 계시는 분들이 모여 개교 예배를 드렸다.
이 곳에선 영어. 아프리카어로 통역을 하셨다. 그날따라 모래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찬양을 하는데 입안에 모래가 버석거렸다. 그래도 성가대며 그들은 즐거운 축제의 노래를 부르는데 큰 감동이었다. 순수한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시며 이곳 초등학교를 통해 아프리카가 영적 구원을 얻는 땅이 되길 기도했다.
쌍꺼풀 진 새카맣고 속눈썹이 긴 매력적인 선한 눈. 아이들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두 맨발에 런닝, 팬티를 입고서 웃고 있는 저들의 선한 영혼이 한 없이 귀하게 보였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님들이 오셨을 때는 120년 전이고 우리들은 이들보다 더 비참했을 것을 생각하니 선교는 영육의 구원이며 생명이었다. 학교 주변의 원주민이 사는 집을 가 보았다. 흙으로 움막 같은 4평 정도의 집에 흙 바닥에 풀 자리를 깔고 8식구가 살고 있었다.
40만원이면 소를 한 마리 잡는다기에 100만원으로 소, 닭, 과일(이곳은 돼지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함)야채 등으로 축하 음식을 준비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와 그들에게 풍족하지 못한 게 못내 미안했다. 학교 건물은 지었지만 이 나라가 너무 가난하여 학교를 지은 나라에서 그 부속 책걸상, 흑판, 모든 학습자료며 교사 인건비까지 2년간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교사 인건비와 책걸상은 교회에서 선교비로 지원하되 학습자료는 선교 팀으로 갔던 우리들의 헌금으로 보충을 했다. 우리 선교사님이 건립하여 이곳 교회의 목회자를 양육하는 신학교를 갔다.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나 아프리카 인근 국가에서 온 학생들인데도 체격도 좋고 인물로 좋았다. 예배는 수준을 느끼게 하는 예배이며 어디를 가나 몸 찬양이라 우리도 몸 찬양을 따라 하기에 익숙해졌다.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졸업생들이 목회하는 교회도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성공적인 사례들을 볼 때 선교의 보람과 뜻이 있었다. 또 천주교로부터 인수 받은 병원도 가 보았다.
그 나라에 맞는 병원의 수준이 열악하지만 그래도 이 병원을 통해 많은 원주민들이 의료의 혜택을 받고 '코레아 코레아'라고 외치니 장한 일을 하시는 선교사님께 큰 박수를 보냈다.
다음엔 선교 농장을 가 보았다. 차를 얼마나 탔던지 이동할 때 마다 이 나라 크기를 말해주는 듯 지겹기 이전에 이젠 마음의 준비가 된다. 비포장이나 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비옥한 흙, 검붉은 흙이 저들의 얼굴 같았고 정말 탐이 나는 흙이다. 그 주변에는 인가도 없고 허허벌판이었다. 이 농장이 얼마나 큰지 차를 타고도 한 동안 돌아야 하는 5만평이란다. 무엇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 농장 안에는 호수가 있는데 물이 얼마나 맑은지 인가가 없으니 무공해의 물에 물 반, 고기 반이라는데 너무 고요하고 조용한 휴양지였다. 여기에 우리나라 아주까리 나무가 자생으로 나서 자라는데 연한 잎을 보니 너무 반가와 쌈 싸 먹자고 하며 잎을 따왔다.
이곳 농장을 관리하던 미국인이 말라리아에 걸려 본국으로 가고 비어 있으니 선교사님께서 우리 일행 장로님들 노년에 오셔서 휴양 겸 봉사하시고 학교 교육도 하시라면서 권면하시는데 자녀들 결혼이 남았고 한국과 이곳이 너무 멀어 쉽게 결정이 안 되었다.
이곳 선교사님이 고용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거의 외국인들이다. 대조 초등학교, 사임 고등학교(미션스쿨), 신학교, 병원, 각 교회. 무엇보다 어디를 가든 선교사님은 코리아를 대표하여 대단한 선망과 대우를 받고 계시며 참 겸손하고 희생적이시고 윌리엄 은퇴 목사님은 기사로 일하시는데 이곳 아프리카 지리가 밝아서 선교사님께 큰 동역이 되시었다.
새벽 기도회에 두 내외분의 영향력 있는 기도와 하나님께 전 폭으로 맡기는 헌신의 기도와 삶이 이곳 아프리카도 한국의 선교사가 새벽 기도를 교회마다 심고 있으니 머잖아 이 아프리카가 큰 구원의 역사와 함께 경제 부흥도 될 것을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다.
14박15일의 아프리카 일정을 마치고 공항에서 헤어질 때 부모, 자식의 이별 같았으나 뜨거운 기도로 이 선교사역을 돕자며 다짐하고 고국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