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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
SHORT STORY
사마산
이 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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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산이 녹음의 향기를 물고 길게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은 말의 형상처럼.
사마산은 나의 고향 마을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마을 앞으로 논이 펼쳐져 있고, 개울이 있고, 그 개울을 건너면 동서방향에 사마산이, 북남쪽에는 미굴산이 자리하고 있다. 일 년 내내 물줄기가 끊이지 않는 개울은 공주군과 청양군을 경계 지으며 사마산 아래로 흘러 금강과 합류하고 있다. 그곳에는 선조적 왕이 전투를 하다 사망했다는 왕둠벙, 그리고 왕이 타던 말이 묻혀 있다는 사마산이 뜸금 없는 전설을 간직한 채 분지형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산등성이를 일궈 경작한 곡물과 논에서 나는 쌀이 수입의 전부였던 내 고향은 노름과 쌈박질이 일년 내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러한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나의 초등학교 선․후배들은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또는 공장으로 조기취업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식들을 도시의 산동네로 밀어낸 그들의 아버지의 술내 나는 입을 통해 자랑의 대상이 되곤 했다.
아마도 사마산이 호오돈의 「큰바위의 얼굴」에 나오는 바위나, 이외수의 「장수하늘소」에서의 장암산과 같은 정기 어린 산이었더라면 나는 벌써 말단 공무원이 아닌 행정자치부 장관이라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고장에서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고향 사람들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선․후배들의 부러움 또는 시기로 인해 나는 항상 대화의 상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이럴 때 사마산은 나의 의지를 보듬어주기에 적절했다. ‘큰 바위의 얼굴’에 등장하는 소년 주인공처럼 나도 유명인이 되어 낙후된 고향마을을 일신시키고 싶었다. 그러기에 군부독재를 자산으로 한 새마을 운동과 각종 부역사업도, 멸공이나 간첩신고를 권고하는 글들이 우리 집 사랑채 벽에 벌겋게 달궈져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아무튼 긍정과 부정을 공유한 나의 고향 마을은 자유와 민주, 그리고 희생의 요구에도 동요 없이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좋았다. 유년의 기억들을 더듬을 수 있는 매체들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고향은 언제나 나를 동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특히 사마산 밑의 왕둠벙은 전설이 주는 신비성과 두려움을 잊고 알몸으로 물놀이를 하던 곳이라 그런지 마을 초입에 들랑거릴 때면 눈길이 더 가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마을 뒷산의 무덤가에 앉아, 한 결 작은 치수로 신을 바꿔 신고 마을을 굽어보는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을 준다.
유년시절, 왕둠벙에서 물놀이를 하다 말의 요동치는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 달려 나왔던 예전의 감각을 되살려 낸 것은 재석의 부음 소식이었다.
“그 자식 죽어 버렸다”
전화 줄을 달구는 재석 어머니의 음성은 갈대의 소음처럼 버석거리고 있었다. 회갈색 전화기를 급하게 떨궈 버린 나는 경망한 행동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화기를 놓기 전 나는 바리톤의 음성으로 최소한의 동정심을 표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내력이나마 간단히 묻는 예의정도는 표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었다고 합리화하며 이내 돌아서고 있었다. 재석은 이미 오래 전에 멀어진 살붙이임을 그녀의 음성이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생각해 낸 재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빛바랜 책 속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찾을 때만 해도 나의 마음은 설레고 있었다. 노량진에서의 재수시절에 사용하던 수학 정석에서 발견해 낸 재석의 전화번호는 의미를 잃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요단강행 특급열차의 좌석번호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검게 채색된 구름이 사마산을 넘어 갈 때, 거대한 형체의 떨림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사마산이 일어나 나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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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후줄근하게 내리고 있었다. 사흘째 이어지는 칙칙한 날씨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은 그렇게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군부독재를 외치는 소음과 최루탄이 대자보에 씻기어 바람을 타고 요동치며 날아올랐다. 안양역에서 전경에게 보여주었던 책가방은 오늘도 어김없이 남영역에서 다시 보여주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것은 나의 치부를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저항하거나 이의를 달지 않았다. 사마산을 바라보며 자란 나의 의식의 저변에는 국민의 안녕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모든 행동을 취할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재수학원은 남영역사를 빠져나와 우회전하면 창고건물을 개조해 만든 가건물로 도로와 인접해 있었다. 도로 건너에는 세종학원이 있어 우리를 어서 오라 유혹하는 플래카드가 일 년 내내 걸려 있곤 했다.
광주에서의 대혼란으로 그 날도 전경과 대학생 간의 격렬한 투석전과 몸싸움이 이어지고, 우리는 최루탄의 냄새를 견디지 못해 학원수업을 중단해야 했다.
투덜거리는 나의 어깨를 감싸며 이끄는 재석을 따라 학원을 나설 때는 이미 데모의 행렬이 서울역으로 몰려간 후였다. 찢겨진 호외에는 광주의 참상이 전두환의 초상과 함께 겹쳐져 일그러진 형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귀가하는 시민대열을 따라 삼각지를 지나 영등포역을 지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자유와 민주의 구호에 역행하여 한강교를 향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강교 너머 흑석동과 한남동 대학가에서 몰려왔을 체취가 거리 여기저기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상 - 늠의 자식들!”
나는 재석이 뱉어 낸 저주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묻지는 않았다. 그것은 군부독재자일 수도 있고, 오늘의 수업을 훼방한 시위군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위대열에 미친 듯이 합류하곤 했던 지난날의 행적으로 보아서는 그 대상이 대열을 이루었던 주체와는 관련이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수업을 방해한 주체들에 거부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나였다.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육남매의 장남으로 명문대학, 그것도 법정대학 법학과에 반드시 진학해야 한다는 삶의 멍에는 늘 나의 사회적 감각을 무디게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교수의 아들이며 막내였던 재석과는 모든 면에서 어울리기 힘든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둘이는 항상 붙어 다녔다. 우리는 서로 타자들과 쉽게 타협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로서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빛바랜 힘없는 바람들이 썩은 강물과 함께 한강대교를 스쳐가고 있었다. 한강대교 직전에서 왼쪽으로 한참을 걸어 온 우리는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웅웅 거리는 자동차 소음을 제외하곤 제법 봄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쓸만한 쉼터였다. 우리는 잡스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사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정말 왜 사는 지 모르겠다”
“왜 사는 지 모른다구?”
나는 문득 키 작은 코스모스라는 소설에서 어느 아가씨가 중년의 남자에게 던진 물음을 떠올렸다.
“어느 소설에는 왜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는 거라고 쓰여 있더군.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출세하려고 살고 있다. 출세가 제일이냐고 묻겠지. 아마도 교수의 아들인 네 놈은 아마 농군의 아들인 내 심정을 모를 거다.”
재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소주를 담은 종이컵이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도우려 지게를 지고 논에 나간 적이 있지, 바로 오늘 같이 비가 온 직후였어. 소에게 줄 풀을 베어 지게에 얹었지. 그리고 뒤뚱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지나가던 자가용이 튀긴 흙탕물을 뒤집어썼어. 그때 내가 달아나는 운전수 놈에게 뭐라고 외쳤는지 아냐! 앞으로 너보다는 나은 놈이 되리라고 외친 적이 있어. 아니 발악을 했었지.”
“그래서 출세를 하겠다는 게군. 출세라 …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권력을 지향하던 니체가 또 아들을 보내셨군. 니체가 말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아니? 스위스와 이태리의 싸구려 여인숙을 전전하며 정신병과 동거하며 지냈어. 결혼도 안하구 말이야. 권력의 귀소란 싸구려 하숙집이지…”
“싸구려 하숙집?”
우리는 동시에 큰 소리로 웃어댔다. 오징어를 씹으면서도 재석은 평소의 습관대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라울의 법칙, 보일의 법칙, 러더퍼드의 원자모델을 아무리 외워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그러나 독재 권력은 행동하는 몸짓이 있는 한 변하기 마련이지. 강물이 흐르는 것은 밀어내는 무언의 힘이 있기 때문이야. 그 무언의 힘은 민중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거고.”
“아궁이에 불을 때기 위해 나무를 한 것도, 조상에 제를 올리기 위해 동동주를 담근 것도 죄가 되어, 면서기만 나타나면 산으로 도망가야 했던 치욕을 맛보지 못한 자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지. 나는 박정희 정권 때 아버지 대신 신작로 보수공사와 사방공사에 나간 적도 있지. 그때 나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어. 조국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 월남전 참전도 불가피한 것이고 부역도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다만 나는 부역의 현장에서 아버지는 삽질을 해야 하며, 공사감독관은 뒷짐을 지고 있어도 되는 건지만을 생각했을 뿐이지. 그러한 생각은 대상의 크기와 높이만 변했을 뿐, 지금도 변함이 없어”
“못 말리는 촌놈이군 …”
오늘도 재석과 나는 서로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의 차이를 확인하며 도로로 기어올랐다. 도로는 여전히 혼잡했다. 불만과 허기진 음성들이 엉켜 거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역전으로 가야겠다. 돈 좀 있냐?”
“돈?”
“세상을 뒤엎는 대열에 기부금 좀 내란 말이다! 대열에서 이탈되었을 때의 우울함을 맛보지 않은 놈들은 대열의 가치를 모르지. 이제 나도 살아있음을 느껴야겠다.”
무려 오 만원을 내 지갑에서 강탈해 간 재석은 다시 자유와 민주의 광장으로 분주하게 내닫고 있었다. 날품을 팔아 보낸 아버지의 손때 묻은 돈이었다. 나는 투덜대며 반대 방향에 위치한 안양의 골방을 향하여 걸었다. 그러나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유롭게 수음을 즐길 수 있는 밀폐의 공간들이 가슴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재석이 학원에 나타난 것은 목요일 오후였다. 그 동안 재석은 연락 두절인 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의 눈 밑에 자리한 푸른 멍 자국이 그리 편치 않았던 시간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형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두서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연방 혜진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내심을 알고 있는 나는 모른 체 했다. 그리고 어제가 재석이 칠판을 지우는 당번 일이었으며, 칠판을 지우는 일을 혜진이 대신해 주었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혜진이 재석의 칠판 닦는 일을 도와준 것은 어제만이 아니었다. 한 달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단지 지저분한 칠판을 닦는 착한 여학생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재석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 수 있었다. 나는 재석이 그녀를 알기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안양에서 전철을 이용해 통학하던 나는 수원에서 승차한 그녀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력이 몹시 나빠 측면에서 보면 눈이 이중으로 겹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순수한 이미지의 꽤 괜찮은 여자였다. 그녀의 재석에 대한 관심과는 달리 그는 여자에 별반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육체파형의 여학생을 향해 보기 드문 몸매를 지녔다고 극찬했던 것을 제외하고, 그는 여자보다 정치에 대한 담론에 더 열을 올렸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재석이 그녀에게 향하는 시선의 빈도가 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내로서의 본능이라기보다 무언가 외로움을 공유할 대상을 찾으려는 동물적 감각이 느껴졌다. 화장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녀를 아니꼽게 보던 남학생과 다툼이 있던 다음날부터 재석의 그녀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듯 했다. 그것은 어제 저녁에도 발견되었다. 세종학원 옆을 지나가던 그가 갑자기 “수원도 시골이지?”하는 물음을 던져왔기 때문이다. 그 물음 속에는 봉천동에 사는 자기 집과의 비교를 통해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나는 수원이 신흥도시이며 아직도 많은 지역이 낙후되어 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재석을 위로할 수 있었다.
수업을 알리는 비발디의 사계음과 함께 그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강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지리강사의 강의가 시작되었고 그가 사바나 기후의 특성에 대해 열을 올리려는 순간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날카로운 여학생의 목소리와 분노한 사내의 음성이 얽히는 소리였다. 강의의 중단과 함께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뛰어 나왔다. 나도 그들에 끼여 후문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 이르렀을 때 사건은 이미 종결되어 있었다. 사건의 중심에 재석이 위치하고 있음을 안 것은 거친 호흡과 함께 가방을 가지러온 재석을 만난 후였다. 혜진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 또 다른 남학생과의 말다툼에 재석이 끼어들어 주먹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담임선생의 호출과 동시에 우리는 “씨발!” 소리를 내며 영어와 수학을 결강하고 학원 뒷담을 넘었다. 그리고 봉천동행 55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재석은 도중에 하차하여 그의 집으로 가는 대신 음습한 골목을 따라 산동네로 향했다. 단독주택이라기보다는 단독형태의 다가구 주택단지란 용어가 어울릴 만큼 많은 수의 생명들이 닥지닥지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의 다리 사이에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들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빽빽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홀아비 냄새와 값싼 화장품냄새가 섞인 야릇한 공기가 숨통을 조여 왔다. 초여름의 훈풍으로 솟아오른 땀방울이 속옷으로 스며들어 간지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곳에는 민주와 비민주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광주의 전운과는 무관하게 외부와 차단된 생명들이 곱게 모여 있었다. 마을의 산등 너머에는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움막이 허물어지고 잡초가 무성한 것이 어느 부동산 투기꾼 명의의 땅이 상당수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재석은 능숙한 솜씨로 소주병 하나를 거꾸로 들어 다른 소주병 마개를 벗겨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종전의 행동과는 달리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재석보다 먼저 나는 소주병을 목젖으로 밀어 넣었다. 알코올의 차가움이 창자전체로 스며듬을 느꼈다. 그제서야 재석은 결강을 하며 똥씹은 얼굴로 뒤따라온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우리는 두어 잔의 소주를 더 마신 후 평상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재석은 두서없이 아침에 일어났던 일을 들려주며 두어 번 더 흥분했다. 지난주에 한강대교 밑에서 헤어진 후 그를 못 만난 것은 그가 수사기관에 구금되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서 돈을 가지고 가는 이유는 우선 내 돈이 순수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들녘에서 거두어들인 돈에서 그는 자유를 경험한다는 멋진 말도 했다. 그는 시위대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땅을 일궈 수확한 돈으로 무엇인가를 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날도 시위에 지친 학생들에게 컵라면을 사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학생회 간부들이었고 공교롭게도 그 장면을 수사기관원이 목격한 모양이었다. 재석은 구금기간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목사인 듯한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고통 어린 신음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고만 이야기했다. 그는 무척 수치감을 느끼고 있었다.
재석이 수척한 몸으로 귀가했을 때 집은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압수수색영장을 든 형사들의 가택수색과 광고업을 하는 형의 사무실에 경고성 전화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부 기자였던 누나는 이미 편집부에 전속되어 깨알 같은 활자들을 교정하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컵라면의 후유증이 이렇게 신속하게 다가올지는 예견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오늘 아침 형의 주먹이 그를 강타한 것이었다. 학원의 대열에 섞여 외로움을 떨치려 했던 재석은 수업 직전 들른 화장실에서 흡연을 하고 있는 혜진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혜진과 언쟁하고 있는 맞은편에서 그를 취조했던 담당형사와 조우하고 그의 뺨을 내갈겼다는 것이다. 형사와의 조우를 통해 갑자기 떠오른 취조과정에서의 모멸감과 적대감, 그리고 담배연기를 통해 연상된 최루탄 매음…. 이러한 것들이 그의 감정을 폭파시켰을 것이다.
그는 맞은 편 산등성이에 달라붙은 집들을 가리켰다. 그 집들 중의 하나가 자기의 집이라 했다. 화학공학과 교수였던 그의 아버지가 십여 년 전 간경화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그가 거기 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년 시절의 풍족한 생활과는 대조적인 현재의 삶 속에서 그가 대열에 합류함으로써만이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추측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재석은 또 다른 연락처를 남기고 떠나갔다.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또 혼자 남았다. 그런 행동을 곧 잘하는 재석을 따라나선 내 자신이 한심했다.
멀리 백색으로 빛나는 인수봉의 암벽을 누군가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인수봉은 사마산과 같이 우람한 형상이 아닌 해골형의 바위로 여기저기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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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대청봉에 첫 눈이 내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입시는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참으로 지루한 터널을 통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들어 수강생들이 흩어지는 학원가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재석과 나도 단과학원으로 옮겨 수강을 했다. 안양 우체국 뒤편에 있는 독서실에서 암기과목을 공부하고, 여분의 시간을 활용하여 국영수 단과반을 수강했다. 악바리처럼 대드는 내 성적과 재석의 성적은 항상 엇비슷했다. 나는 이러한 이유를 교수와 농부의 혈통이라는 출신성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군사정권이 사회 전반을 장악해감에 따라 광주 항쟁은 신문지의 지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시위군중의 외침과 미미하나마 언론에서의 비판성 기사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발 빠른 문화공보부의 언론통폐합 정책입안과 함께 교육부에서도 자칭 혁신적이라는 대입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정책의 근간은 한 마디로, 대학의 문호를 개방하여 쉽게 입학하고 어렵게 졸업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정원의 130%를 선발하여 졸업까지 30%를 자동 탈락시킨다는 것, 그리고 지원자가 원하는 세 곳의 대학을 선택하여 입학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입시창구는 대혼란이었다. 제 몸 추스르기에 분주했던 나는 재석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대입학력고사 성적표를 받은 나는 허둥대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원서를 여러 대학에 내는 것은 자유지만 면접일이 같기 때문에 선택은 결과적으로 한 곳만 택할 수 있었다.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점수를 획득한 나는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삼수에 대한 부담감으로 나는 결국 지방대학을 선택했다. 학과의 선택은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여 법학과를 선택했다.
면접일 전날, 나는 여인숙에 거처를 정했다. 머리 위로 경부철도가 지나가는 희한한 집이었다. 좁은 방에 틀어 앉아 소주병을 마주하던 나는 재석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일어났다. 나는 여인숙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을 뒤돌아보는 촌극을 연출한 후 공중전화 부스를 찾았다. 재석은 예상했던 대로 집에 없었다. 그러나 재석이 어느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기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학과 선택의 동기에 대해 묻는 젊은 교수의 질문에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했을 때 나는 분위기가 반전됨을 직감하며 통쾌함을 느꼈다. 또한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할 것이냐는 질문에 검게 드리워지는 사마산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의 상판대기를 후려치고 싶은 분노를 지그시 입에 문 채 숨을 고르며 시간을 메꿨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가 있기까지 참으로 무료한 시간들이 지나갔다.
삼청교육대 재소자들의 문신이 연방 TV 화면에 부각되었다. 소요기사가 연일 머릿기사로 올랐다. 기사의 내용은 다름에도 쇠파이프가 정경의 방패를 파손하는 장면은 연일 중첩되어 지나갔다. 그럼에도 근엄한 머리형상을 한 대통령의 증명사진이 클로즈업됐고 많은 이들을 괴롭혔다. 내가 지원한 대학의 정문과 후문에도 전경들이 진을 쳤고, 서울 소재대학의 여학생협의회가 얌전한 남학생 주축의 총학에 가위를 선물로 전했다는 풍문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수능시험 결과발표가 있기 전날, 나는 뜻밖에도 재석의 전화를 받았다. 약간의 의식의 변화를 짐작하게 할 뿐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니체의 후예다운 선택을 했군. 십년 후 청와대에 가 있을랑가 몰라? 그간의 노력으로 보면 자네는 수석 아니면 차석이야. 다만 점수가 반역을 한거지! 나에 대해 무척 궁금하지 않나? 나는 이미 학교는 결정되어 있어.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한없이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야 알았어. 또한 그것은 네가 지향하는 권력만큼이나 매력이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 아버지가 재직하고 계셨던 학교에 가 계실 거다. 10년 전 아버지의 후광이 지금도 통할 수 있다니 참 신통하단 말이야! 미달되는 학과만 있으면 나는 교직원 자녀로서 그 학과에 자동으로 지원하게 되는 셈이지. 나는 태어나 어머니의 극성에 처음으로 탄복했어. 그리고 효자가 되기로 했지. 왜냐구? 학생이 데모하다 잡히면 훈방조치 되지만 일반인은 쇠고랑을 차거든. 완벽한 논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틈새를 공략하기로 한 셈이지.”
약간은 흥분된 말투였다. 재석은 오늘도 자기말만 다 쏟아내고 수화기를 끊었다. 나는 또 당한 꼴이 되었다. 그는 늘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재석이 싫지 않았다. 보수적인 내 사고와는 다르게 진보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그와의 사이에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공유부문이 관계를 지속시키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학과사무실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이미 예상했던 합격이었다. 내 성적이 재석의 말과 같이 뛰어났기보다는 새로운 입시정책의 수혜자였다. 경쟁률과 합격선을 예견할 수 없었던 지원자들은 대거 하향지원을 했고 그에 따라 이른바 인기학과들은 대거 미달사태를 빚었다. 전국의 의대, 법정대, 경상대 등은 예외 없는 미달사태가 나타났다. 반면에 사회과학대, 인문대 등은 사상 초유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이에 따라 각 언론사들은 일면 머릿기사로 이를 대서특필 보도를 하며 난리를 떨었다.
왕마가 죽어서인지 이 고장에서는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다고 탄식하던 마을 주민들은 나의 법학과 합격소식에 잔치를 주문했고, 우리 집은 한 달치 식량을 하루 동안에 다 쏟아 부었다. 내용과는 무관하게 촌민들에게 법대는 역시 출세가 보장된 최고의 상품이었으며 어느덧 그들의 입에서 판․검사 용어가 넘나들고 있었다.
80년대 초의 봄과 겨울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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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방종의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나도 여학생의 엉덩이를 유심히 바라볼 수 있는 촌티 벗은 사내가 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재석 역시 법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아버지의 후광과 어머니의 극성도 있었지만, 그도 새로운 입시정책의 수혜자가 된 것이다.
입대와 복학이라는 시간차 속에서 우리는 엇갈리는 삶의 수순을 밟아 나갔다. 재석이 나보다 일 년 먼저 입대를 했던 관계로 전화통화를 제외한 실질적인 만남은 두 번에 그쳤다. 그가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휴가를 나왔을 때와 내가 이등병을 달고 휴가를 나왔을 때이다. 재석과 내가 대입합격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재석은 혜진이 같은 대학에 입학했노라는 말을 했다. 합격통지서를 교부받던 날 사회과학대에서 나오는 그를 만나 인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묘한 인연의 끈을 예감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독하게 행동했다. 꼭 필요한 모임이 아니고는 참석하지 않았다. 동기들과 행동하기보다는 복학생을 따라 다니며 그들 틈새에서 혜택을 누리고자 했다. 그들의 무디어진 감각을 내가 대행하는 대신 그들의 노련함과 복학생으로서의 특권들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삼학년 때 입실할 수 있는 고시원을 이학년 때 들어갈 수 있었다. 학기 중에는 고시원에, 방학 때에는 계룡산 암자에 틀어 박혔다. 그러나 그 암자도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겨울방학 직전 암자가 철거되었다. 무속신앙의 집결지인 계룡산 소재의 암자가 불순분자들의 은신처가 되고 있다는 정보에 의한 정권의 행정집행이었다. 물론 명분은 건전한 정서에 반하는 사이비 종교의 척결과 국립공원 내의 불법건축물을 정화한다는 명분이었다. 계룡산에서 보기 좋게 쫓겨난 나는 생전 처음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기까지 했다.
83년 겨울, 나는 사법고시에 대든 첫 번째 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하고 입대를 결심했다. 그때 재석은 ‘사회사상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다 지도교수와 학생처장의 간곡한 권유로 입대한 후였다. 구속과 입대라는 양자택일의 선상에서 재석에게 입대는 비교적 손쉬운 선택이 될 수 있었다. 급진주의 사상을 학습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하나 둘씩 흩어지고 있었다. 재석 또한 입학과정의 약점으로 인해 아버지의 친구에게 누가 될 수 있다는 주변의 권고로 입대를 결심한 것이었다.
개성이 말살된 군에서의 모든 것은 생각과는 달리 편안함을 주었다.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뛰라면 뛰면 그만이었다. 이상과 이하를 요구하지 않는 별난 집단이었다. 중공민항기가 불시착하여 온 세상이 난리를 피워도 정해준 장소에 가서 경계근무를 서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한미 연합사령관이 전시상황임을 선포하여 내 무덤이 될 수도 있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기어든 참호에서, 후에 이것이 훈련이었음을 알았을 때도 나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머리 속에 갈무리된 영어단어나 법률용어를 잊지 않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런 나에게 국방부는 표창까지 주었다. 청와대를 급습하려했던 김신조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신문기자들이 서울에 대한 첫인상을 물었을 때 그가 답한 ‘넘치고, 넘치고, 넘친다’라는 내용은 극찬되었다. 전략과 전술뿐만 아니라 대화에서도 승리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발상은 전군에 이념무장 및 발표력 증진책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념무장에 대한 ‘5분 발표’가 점호시마다 실행되었다. 소대, 대대, 그리고 연대를 대표한 나의 발표력은 군대가 결코 개성이 말살된 곳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마도 표창장과 함께 주어진 일주일 동안의 맛깔 나는 휴가가 또 나를 합리화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죄수복 같던 제복을 벗어 던지고 복학을 했을 때 정권은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카키색 군복은 그대로 대물림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혜진으로부터 재석이 수감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4.19 기념행사가 있은 직후였다. 혜진과 대화를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의 끈이 또 다른 인연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같은 전철을 타고 학원을 다닐 때도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한 이미지는 단지 학원강사의 질문에 조리 있게 답하던 그녀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던.
나는 재석에 관하여 걱정하는 혜진의 음성에 다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재석을 석방시킬만한 권력이 없었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울타리는 없었다. 권력이라곤 면사무소에서 서기로 근무하고 있는 중학 동창과 파출소 순경으로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 있을 뿐이었다. 나와 재석은 권력의 그늘을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그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또 니체를 떠올렸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니힐리즘의 잔재를 일소하고 현실을 초극하는 방법은 역시 권력을 추종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권력이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힘임을 체감하게 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석방된 재석을 만나기 위해 갈월동 일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남영동 일대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우리들이 다니던 학원은 이삿짐 센터로 바뀌어 있었다. 입시정책의 실패에 따른 제도의 변화로 학원은 성남시로 이주하여 기숙사 학원으로 명칭을 바꿔 운영된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문교부장관은 여전히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후광이 얼마나 강했던지 얼마 후 주일대사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남영역 앞의 단과학원과 주변의 종합학원들은 예전의 모습처럼 칙칙하게 서 있었다.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갈월동 일대를 돌아보며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최루탄과 학원 수강증, 호외와 칼국수, 생맥주와 광주의 혼란이 뒤엉켰다. 기억의 강물이 혼탁하게 흐르다 단과학원 건물에 잠시 머물곤 이내 끊겼다.
용산에서, 재석과 나는 기억의 강물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선린상고 진입로에 위치한 치킨 집 역시 예전과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수십 개의 똥집과 닭발이 나의 혈관을 메꾸게 한 곳이었다. 재석은 구석진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약간은 수척한 모습이었다. 조금은 늙어도 보였다. 가슴 속에 사상이 흐르고, 사랑을 느낄 때, 혁명가는 고뇌한다는 말을 했던 재석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던게 나았었네’라고 친구에게 되뇌였다는 어느 혁명가의 목소리가 울려 지나가고 있었다.
“나보고 빨갱이 새끼라고 하더군. 그래서 나도 그러는 당신은 일본 순사냐고 했더니 나를 개 패듯이 두들기더군. 몽둥이로 발톱을 짓이기어 패랭이꽃이 피었어. 태어나서 그렇게 맞아 보기는 처음이었지.
묘하게도, 모래성을 쌓아 놓고 개미를 잡아 놀던 어렸을 때가 생각나더군. 개미가 모래성을 넘어 가려는 순간 나는 개미를 다시 잡아 성안에 가두곤 했었지. 그것을 반복하기를 수십 번, 개미를 감시하던 나나 탈출을 시도하던 개미나 모두 지치곤 했지. 그래서 나는 다시 모래성 위로 기어오르는 개미를 잡아 땅에 패대기쳤었지. 그래도 개미는 움직이더군. 그래서 땅 속에 아예 묻어 버렸었지. 그리고 발로 뭉갰었어. 아마 그 개미는 죽었을 테지.
그랬었어. 나는 어느새 개미가 되어 있었어. 쌓아 놓은 모래성을 넘으려는 나를 누군가가 자꾸 패대기쳤지. 개미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죽기 직전 내가 살아 나왔다는 거지.”
재석의 음성에는 권력에 질식된 생명체의 비애가 묻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술을 거나하게 들었다. 그 날만이라도 세상을 잊고 싶었다. 술이 달착지근하게 미각을 돋구어댔다. 재석은 혁명의 선두에 서거나 체제 전복적이리만큼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 항상, 참모형의 지적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도 그러했다.
재석이 복학하고 쓴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현상’이라는 논문은 지도교수가 극찬하리만큼 깊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논문을 총학생회 선전부장이 부분 발췌하여 대자보화 한 것이 화근이었다. 즉,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현 사회에서도 정당화되며, 현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로의 이행을 지향해야 한다는 논조로 바뀌어 있었다. 학원을 사찰하던 형사는 곧바로 보고서를 작성했고, 재석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차용한 것만으로도 이미 이적행위자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내용이 결코 불온성의 내용물이 아님을 지도교수가 변호해도 그들에게는 내용 자체가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다. 상부에 한 건이라도 더 보고함으로써 상사의 주목과 신임, 그리고 승진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희미한 전등 하나, 여기저기 널려있는 몽둥이와 포승줄 … 자네, TV나 영화에서 많이 보지 않았나?”
묵묵히 듣고만 있는 나의 얼굴 위로 비장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날카로움은 없었다.
“내가 그 배역을 맡고 있었단 말일세. 드라마에서 본 똑같은 배역이었어. 정말 똑같았어.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너무 빨리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것이겠지. 나는 비밀 아닌 비밀들은 일지감치 털어놓아 형사들을 안심시켜 놓지. 이를테면 마르크스이론의 학습장에 참석한 명단 정도를 까발리는 것이지. 그들은 기껏해야 아마추어들이니 추궁을 당하며 뺨이나 실컷 얻어맞고 서약서 정도나 쓰고 나오겠지. 문제는 배후에 결성되어 있는 연합공동체의 계보나 집결장소를 말하지 않는 일인데 그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 악다구니를 쓰는 형사에게 한 대 두 대 맞다보면 나도 저절로 악다구니가 생기거든. 아마도 미전향장기수들이 이십 년 또는 그 이상을 지탱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반항의 힘이 생겨났기 때문일 걸세.
아무튼 죽싸게 얻어맞았지. 그런데, 꼼짝하지 않는 나를 철창 속에 며칠동안 가두어두었던 그들에게서 약간의 변화가 있음을 직감했지. 그들은 나 때문에 아주 골치 아파하고 있었어.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나를 너무 두들겨서 걱정하고 있는지 알았지. 순진한 생각이었어. 그들은 나의 상처 부위를 치료해주고 찜질 맛사지까지 해 주더군. 겁이 났어.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사귀어온 가족처럼 느껴지며 고맙기까지 하더군. 인간의 간사함이란…
그들이 나한테 협상을 해 왔지.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것이야. 이유를 모르는 나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어. 나는 서둘러 인주를 엄지에 발라 힘껏 눌러주고 그 곳을 빠져 나왔네.
재석의 쾡한 눈이 허공을 문질렀다. 악몽 뒤, 편안하게 꿈 속 이야기를 한 듯 긴 호흡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그가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혜진이의 덕분이었지. 자네에게 자세히 이야기는 안했지만 혜진과 나는 캠퍼스 커플이 되었네.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라는 말도 들었지. 내가 좀 털털하지 않나?”
나는 침을 꿀꺽 삼켰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상학습에 필요한 이론서를 찾다보니 사회학과인 혜진과 자연스레 이어지더군. 사회주의에 대한 내 편협한 이론을 전개하다 보니 충돌이 잦았지. 그것이 둘 사이의 인연의 끈을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된 셈이지. 그러나 그녀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여자였어. 절대로 모래성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지. 이번에 알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수원에서 경찰간부로 재직하고 있었어. 자네가 항상 나에게 이야기했던 출신성분의 의미배경이 적중된 셈이지. 그 분의 배려로 나는 목숨을 건졌지. 다른 권력의 그늘을 찾지 못한 나와 혜진에게 단호한 전제조건이 주어졌지. 다시는 서로가 만나지 말라는 … ”
재석은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혜진은 아버지가 지어놓은 모래성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성안에서 오늘도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야릇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가슴 저리게 아파 오는 고통을 이기려는 듯 재석은 과음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 편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력이 가까이 있었음에도 이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재석이 권력을 지향하는 나를 더 이상 비웃지 않을 듯도 싶었다. 이번에도 재석은 자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권력과 권력의 틈새에서 보기 좋게 빠져나온 셈이었다. 억세게 운 좋은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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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을 만났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약간은 낯설은 뜻밖의 만남이었다. 성남에서였다. 대전지검에 근무하던 나는 업무와 관련하여 출장을 자주 나갔다. 나는 고향사람들이 학수고대하던 판․검사가 되기는커녕 그들의 시중을 드는 하위직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다섯 번의 낙방 끝에 선택한 최후의 무덤이었다.
수없이 반복되는 국정감사와, 감사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서서히 제도의 시녀가 되고 있었다. 공무원 복무지침과 규정집을 반복하여 읽는 동안 군사정부가 문민정부로 바뀌었다. 보통의 정부가 비통의 정부가 된 것처럼 개혁의 정부가 개악의 정부가 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때에도 나는 사건 브로커들과 소송중인 학교 동기들, 그리고 판․검사처럼 환대해 주는 고향사람들을 통해 권력의 맨 끝에서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어릴 적 흙탕물을 튕기고 달아나던 자가용 운전사의, 전대의 뻔뻔한 권력의 시녀들을 내가 닮아 가고 있는 꼴이었다. 그럴 즈음 혜진을 보았다. 수원시청 감사과장의 자혼 연회장에 그녀가 아줌마가 되어 서 있었다. 그때서야 그녀가 수원에 살았었음을 상기했다.
흰 가운을 입고 요리대 앞에 서 있는 혜진은 평범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도수 높은 안경을 걸쳐 눈이 이중으로 보였다. 그 돋보기 속에서 담배와 모래성을 떠올렸다.
나는 한 시청직원을 통해 그녀에 관한 몇 가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재석과 혜진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살림을 차렸다는 것, 그리고 생계를 위해 시작한 포장마차가 오늘에 이르러 뷔페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남편은 오수처리장 설치와 관련한 시위 주도혐의로 수배중이라는 것 등등이었다.
나는 혜진이 나를 발견할세라 황급히 그 곳을 빠져 나왔다. 학원시절, 열차 안에서 또는 강의실에서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 이유가 부끄럽게도 권력의 맨 뒷좌석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내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였음을 안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재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가 실제 죽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들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어머니로서의 탄식인지를 놓고 나는 해석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 아홉 시 뉴스에 환경연합단체회원들 틈에 끼여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옷은 여전히 청바지에 점퍼차림이었다. 이십 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청바지를 입고 요리대 앞에 서 있던 혜진의 모습도 떠올랐다. 부창부수일까?
나는 권력의 뒷줄에서 앞줄을 넘겨보고, 재석은 권력의 담 밖에서 오만한 권력과 부조리를 깨부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이 권력을 지향하든, 부조리한 사회 개혁을 지향하든 그것은 각자의 삶의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틈새란 무엇일까?
나는 한강 둑 밑에서 재석과 이십여 년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사마산이 또 한번 움찔했다. 나는 무서워 방으로 기어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