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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가을 노랫소리
김명녕
풀잎에 이슬이 맺혀서 가을기운이 완연하다는 백로가 되니까,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가 한풀 꺾여서 새벽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그렇지만 달리는 몸에서는 여름처럼 땀이 줄줄 흐른다. 비가 오려고 후텁지근한 날이면, 지나새나 들판에서 고운 소리로 아리아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메들리(medley)를 이어가던 개구리의 여름노래 합창연주 프로그램은 끝나고, 풀벌레의 가을노래 연주가 한창이다. 곳곳마다 마띠네1)를 연주하는 귀뚜라미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서늘한 바람결에 가득 실리고, 자드락길 푸나무서리에서는 온갖 풀벌레의 달콤한 사랑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여울목을 흐르며 재잘거리는 시냇물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햇볕 따가운 오후에 말매미가 초가을 노래를 뽑던 메숲진 골에서, 사위어 가는 별빛을 아쉬워하며 접동새가 가을노래를 부른다. 접동새가 부르는 노래는 알을 낳는 4월에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2)든, 초여름에 새끼 어르며 부르는 자장가든, 초가을에 먼 남쪽으로 떠나려고 부르는 이별가든, 노래마다 애잔해서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다.
온갖 자연의 소리에 에워싸여 달리니까, 오늘 저녁에 충남성악선교대학 신입생 환영 음악회에 출연하려고 몇 달 동안 소리벗들과 연습한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출연자마다 자신의 능력과 취향에 맞춰서 곡을 고르고, 작사와 작곡의 배경을 조사하고, 꿈에서도 악보를 떠올릴 만큼 외우고, 역복식(逆腹式) 호흡으로 발성하는 벨칸토 창법(唱法)을 익히면서 여름더위를 사냥하며 지냈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리로 가슴이 흐뭇하도록 연주하기란 쉽지 않아서 노래를 부른 뒤에 성에 찬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는 둘레에서 개울물․매미․개구리․풀벌레 등이 내는 자연의 소리를 늘 들으며 지내건만, 자연스러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니까 여러 사람 앞에서 연주하기가 쑥스럽다. 산길이나 고샅길을 달려가면서 접동새․수탉․개․염소 등의 부드러운 마주울림 소리를 자주 들으면서도, 높은 음을 ‘가장 강하게’ 연주하려면 고함지르듯 내게 된다. 타고난 소리 빛깔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발성원리를 잘 터득하면 고운 소리를 낼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몸 풀 여인이 삼가고 조심하며 때를 기다리듯, 모든 출연자들이 조용히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나도 그 속에 끼어 검은 턱시도(tuxedo)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커머번드(cummerbund)3)를 단정하게 두르고, 너볏한4) 몸가짐으로 앉아 있다.
모처럼 만난 사람끼리 나누는 온갖 이야기로 공연장은 도떼기시장처럼 시끌시끌하다. 한복으로 우아하게 치장한 첫 번째 출연자에게 보내는 격려박수가 수런거리던 소리를 쥐죽은듯이 잠재운다. 장모인 김말봉 여사가 사위집에 놀러가서 자신이 지은 시를 읊고, 사위인 금수현 작곡자가 즉석에서 곡을 붙여 애창가곡이 된 ‘그네’의 전주곡이 흐른다. 출연자는 “지명(知命)5)이
되었지만,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며느리 노릇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살다가 늦깎이로 노래 배워서 무대에 서려니까 자꾸 떨려요.”라고 말하곤 하였다. 아마추어 연주자가 무대에 서면 잔뜩 긴장하거나 지레 주눅 들기 쉽다. 적당한 긴장은 보약이지만, 지나친 긴장은 독약이라서 수없이 외운 가사를 잊어버리거나 박자를 놓쳐서, 기껏 갈고 닦은 알량한 재주도 발휘하지 못하고 애쓴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평소에 연습할 때 미소 띠던 여유와 웃음은 간데온데없고, 긴장하는 낌새를 뚜렷이 보이면서 첫 번째 출연자가 무대에 오른다. 수줍은 새색시가 거센 여울물에 놓인 징검돌을 한발 한발 디디며 건너듯 피아노 반주에 맞춰 조심스럽게 연주하는데, 듣는 내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그러나 약간 떨리듯이 부른 목소리가 단오명절날 곱게 차려 입은 처녀가 부끄러워서 볼그레해진 얼굴로 그네 타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잘 나타내어서 노래가 끝난 뒤 박수갈채가 길게 이어진다. 이어서 내 차례이다. 채 멎지 않은 공기의 떨림에 몸을 싣고, 이태리 가곡인 ‘금단의 노래(Musica Proibita)’를 연주하려고 준비한다.
피아노의 전주곡이 흐르는 동안, 청중석에 앉은 아내와 눈인사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부엌에서 반찬준비하며 도마질하던 칼장단에 맞춰 노래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지, 아내의 얼굴에 잔잔하게 웃음이 흐른다. 작곡자가 곡에 붙인 대로 ‘말하듯이’ 노래를 시작하여, 점점 느리게 감정도 나타내고, 열광적이거나 발랄하게 음도 처리하고, 생기를 가지고 빠르게 부르기도 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큰 소리로 열렬히 마지막 부분을 부르니까, 여름내 공연준비로 바쁘게 보낸 땀방울이 큰 박수로 열매를 맺어 되돌아온다. 그러나 소리세상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나와 노래 사이에 드팀새6)가 더 커져서, 고운 목소리로 연주하는 세상은 아득히 먼 곳에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성악프로그램이 끝난 뒤, 코이노니아7) 시간에 소리로 맺어진 선후배가 한자리에 앉아 박장대
소(拍掌大笑)하며 군음식에다가 사랑을 버무려서 함께 나누어 먹는다. 이 시간은 내가 노래를 통해 얻는 또 다른 생활의 단맛이요, 행복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웰빙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생활에 관련된 요소마다 웰빙이 약방에 감초처럼 끼어들고 있다. 집이든․입을 거리든․먹을거리든․건강보조기구든 가리지 않고 웰빙이 들어가서 마구 휘저으니까, 무엇이 참다운 웰빙인지 헷갈린다. 나는 하잘것없는 솜씨지만 즐겁게 노래하고, 기록은 보잘것없지만 기분 좋게 달리고, 살면서 겪고 느끼는 바를 기꺼이 글로 지으면서 흐뭇하게 지낸다. 돈도 거의 들지 않으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런 활동이 슬기로운 웰빙의 수단이 아니랴!
1) 마띠네(matinée) : 아침의 노래. 마티나타(mattinata).
2) 세레나데(serenade) : 밤에 애인의 집 창 밑에서 남자가 부르거나 연주하는 사랑의 노래.
3) 커머번드(cummerbund) : 허리띠((턱시도를 입을 때 조끼 대신 두름)).
4) 너볏하다 : [됨됨이나 태도가] 번듯하고 의젓하다.
5) 지명(知命)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의 ‘五十而知天命’에서] 나이 ‘쉰 살’을 뜻하는 말.
6) 드팀새 : 밀거나 비켜나가거나 하여 약간 틈이 생긴 정도나 기미.
7) 코이노니아 : [헬라어] 나눔. 교제. 사교.
마음도 청춘, 몸도 청춘
김명녕
마라톤대회에서 출발하기에 앞서 준비운동으로 종합운동장 트랙을 가볍게 달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반가운 목소리가 발길을 세운다. 몇 년 전에 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함께 길을 달리면서 말을 주고받다가, 동갑내기에다가 공기업체 사장에다가 달리기 기록마저 엇비슷해서 이내 가까워진 길벗이다.
“김 교수, 반갑습니다.” “예. 양 박사, 더 젊어졌구려. 번호판 빛깔을 보니 풀코스 선수이시네. 춘천대회에서는 못 만나겠구려.” “아니, 감초 없는 약방도 있소? 그날도 달리렵니다.” “뭐요? 2주일 뒤에 풀코스를 또 달려요? 양 박사는 정말 젊구려. 60대가 되면 대회마다 자웅을 겨루느라 꽤나 티격태격하겠네그려.” “그럴 리가? 그 때는 김 교수께 양보하려네.” “아니야, 양 박사는 나보다 풀코스를 자주 달리고 있으니까 이미 나를 이기고 있어. 나도 열심히 달릴 테니, 양 박사도 즐겁게 달리고 좋은 기록 세우시구려.” “나는 끝까지 달리기만 할 테니 그리 아시게. 가까운 날 만나서 정담이나 나누세. 즐겁게 달리세요.”
사회자가 말하는 대로 출발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몸을 가볍게 두드리거나 주무르면서 길벗들과 노닥거린다. 평소에 함께 연습하며 즐겁게 지내는 회원이 둘레에 많으므로, 심심풀이 말로 풍년이 든다. 풀코스 종목에서 눈 떼고 하프코스에 눈독 들이는 것이 이상야릇하다는 둥, 풀코스에 선수 한 명이 모자라서 휑뎅그렁하게 보인다는 둥, 말도 많고 탈도 많다. 10㎞종목에서 몇 번 달린 뒤 자신감을 얻고, 하프코스 종목에 처음 참가하는 늦깎이 새내기 회원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 “송 선생님, 무리하게 달리지 마세요. 마라톤은 결승선을 넘으면 누구나 챔피언이니까 최선을 다해서 달리세요.” “회장님,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결승선을 넘겠습니다. 회장님도 연세를 생각해서 천천히 달리세요.”
참가선수가 다함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로 달려갈 기세로 소리치고 출발한다. 몸에 닿는 바람이 시원하다. 백제대교 가까운 지점에서 1차 반환점을 돌고 정지산 터널을 빠져나와 한동안 내리막길을 달린 뒤, 다시 길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짧은 보폭으로 발을 재게 떼며 달린다. 갑자기 낯선 젊은 길벗이 양쪽으로 따라 달리면서 말을 건넨다.
“혹시 오버페이스 아니에요? 뒤에서 보니까 다른 선수보다 유난히 빨리 달려서 따라왔어요. 이 종목은 10㎞가 아니고 하프입니다. 완주하려면 천천히 달리세요.” “염려해 주어서 고마워요. 평소에 연습할 때 오르막에서 종종걸음 치듯 달려서 그래요. 판판한 길에서는 남보다 빨리 달리라고 종주먹을 질러도 빨리 못 달려요.” “요즈음 마라톤대회에서 목숨까지 잃는 끔찍스런 사고가 자주 발생해서 말씀드립니다. 선생님을 따라 달리면 젊은 우리도 숨이 턱에 닿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묵은 소나무에 관솔이 많이 박히듯이, 달리기 경력이 많아서 몸의 변화도 잘 알고 길에 따라 달리는 주법도 잘 알고 있어요. 오르막길이라 저도 숨이 가쁩니다만, 별로 힘들지 않아요. 사고는 나이 많은 사람만 당하는 것이 아니니, 젊은 길벗네도 조심하세요. 아무튼 고맙고, 만나서 반가워요.” “지금처럼 달리면 좋은 기록 세우겠지요? 즐겁게 달리세요.”
강물에 부딪친 햇빛이 물결에 부서져서 반짝거린다. 가을빛이 스며드는 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길가에서 응원하는 주민들이 흥겹게 북, 꽹과리 및 장구를 두드린다. 강변에 늘어선 갈대 이삭과 코스모스 꽃이 바람결에 한드랑거리면서 가을을 노래한다. 날씨도, 분위기도 달리기에는 그만이다.
13㎞지점에 마련된 2차 반환지점에 드리운 산 그림자와 산들바람이 몸에 흐르는 땀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바람을 등지고 달리다가 반환점을 돌면서 안고 달리니까, 마음까지 시원하여 달릴 맛이 새로 인다. 노란 중앙선 건너편에 반환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선수가 수없이 많다. 회원을 만날 때마다 “파이팅!”과 “힘내세요!”로 격려하며 지나친다.
16㎞지점쯤에 있는 약 800미터 구간의 오르막길에 닿으니까 작년에 이 대회에서 풀코스종목을 달리던 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이 언덕을 허덕거리면서 올라갔는데 오늘은 아무 탈 없이 달린다.
결승선에서 기다리던 아내가 반갑게 맞이한다. “수고했어요. 더웠지요? 더위에 지쳐서 들어오는 사람이 많은데 당신은 웃으면서 들어오네요.” “덥지만 상쾌한 기분으로 달렸어요.” “소방호스(消防 hose)로 뿌리는 물에 땀이라도 씻어요. 아주 개운할 거예요.”
호스를 타고 흩뿌려지는 물보라에 땀도 닦고 마음에 남아 있는 때도 씻어버린다. 영롱한 물방울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맑은 햇빛이 일곱 빛깔 무지개로 나타나서 빙긋이 웃으며 이마 위에 걸친다. 무지개의 미소에 먼 길을 달려와서 지친 몸이 스르르 풀린다.
마라톤대회에 참가해서 21.0975㎞를 달린 기록은 1997년 9월 7일에 전국사회인마라톤대회에서 50대전반의 연령에서 1위를 하였고, 1999년 5월 30일 한일친선단축마라톤대회에서 1시간 16분 15초에 완주하여 전체 1위는 물론 개인최고 기록을 세웠다. 개최장소는 다르지만 동아마라톤대회에서는 제68회 국제마라톤대회(1997-03-16)에서 난생 처음 하프를 달려서 1시간 33분 07초에 완주하였고, 8년이 지나간 오늘 백제큰길마라톤대회에서 1시간 37분 42초(50대 4등)에 결승선을 넘었다. 8년의 세월이 흘러서 나이는 50대 초반에서 후반으로 훌쩍 건너뛰었지만, 21.0975㎞는 그대로 부담 없이 달릴 수 있고, 기록도 50대에서 매우 좋고, 개인기록도 크게 나빠지지 않아서 흐뭇하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은 마음에는 있지만 불가능할 때 쓰는 ‘건너다보니 절터’ 또는 ‘그림의 떡’이 갖는 뜻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되면, 실의(失意)에 빠지거나 체념(諦念)하면서 살기 쉽다. 마음이 청춘이면 몸도 청춘이 되도록 가꾸어야 의욕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나이는 50대 후반이지만, 새벽달리기로 한창나이 못지않은 체력을 기르고, 이따금 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길벗들과 어울려서 동심(童心)으로 지내니, 즐거운 마음에 어깨춤이 절로 난다.
* 김명녕
충주 출생, 공학박사, 한밭대 교수, 수필집『달리면서 만나는 세상』,『달릴수록 넓어지는
세상』, 인터넷 문학상(문학사랑), 한국농촌문학상 대상(농림부장관) 수상
주례가 축가까지
이 시 웅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금산에 사는 김 선배님의 아들인데 부탁이 있어서 내 연구실을 방문하겠다고 해서 흔쾌히 승낙한다. 연구실 문이 열리고 청춘남녀 두 사람이 바구니 선물을 들고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저는 김 아무개의 아들입니다.”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 합시다.”
“저희가 다음달에 결혼하는데 교수님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말해보세요.”
“주례를 서주시기바랍니다.”
“아버님하고 친한 선후배 사이이니까 마땅히 해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어려운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인데요?”
“주례에다가 축가까지 부탁드립니다.”
“축가요? 결혼 축가는 일반적으로 신부․신랑의 친구나 후배들이 부르게 되는데 주례할 나에게 축가를 부르라고요?”
“예! 저희도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축가나 주례는 신랑․신부가 가장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분에게 부탁한다하여 교수님께 특별하게 부탁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뵙고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합니다. 교수님께서는 노래를 잘 부르시므로 제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주신다면 제 평생의 큰 영광이겠습니다. 간청하오니 승낙해 주십시오.”
“우리나라에서 주례가 축가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못 들어 봤는데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결혼식은 중요한 예식이고 주례는 결혼식을 엄숙하게 이끌어야 하므로 문제가 되지요. 나는 미국에서 주례가 축가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흔한 경우가 아니라고 말하더군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 신중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디 한번 생각해 봅시다.”
“…….”
며칠 동안 고민하며 궁리해보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주례가 축가를 부른다면, 결혼식 하객들로부터 비난받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한 편으로 주례가 시민회관에서 독창회까지 개최한 사람이므로 멋지게 축가를 부르면 오히려 결혼식의 이벤트가 되어 하객의 인식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고민 끝에 예비 신랑․신부에게 전화한다.
“김 군! 심사숙고하여 말하는데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 신랑․신부 양가 부모님의 동의를 받으세요! 네 분의 도장이 찍힌 동의서를 가져오면 승낙하겠습니다. 결혼식은 신랑․신부․주례만 모여서 치르는 예식이 아니거든요.”
“교수님! 감사합니다. 당장 동의를 구하겠습니다.”
다음날 신랑․신부가 내게 양가 부모님의 동의서를 내놓는다. 나는 신랑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김 선배님, 저 이교수인데요. 자제 결혼식 때 제가 주례하면서 축가를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이교수가 노래를 잘 부르니까 축가까지 부르면 큰 영광이지요. 주례가 축가도 부르면 금상첨화지요.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모두 좋아할 겁니다. 주례에다가 축가까지 부탁드립니다.”
너무도 놀랍다. 김 선배님은 고루하고 구학문만 숭상하는 분이라서 반대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원하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하다.
이윽고 결혼식이 거행된다. 사회자가 ‘축가가 있겠습니다.’라고 안내한 뒤 내가 “오늘의 축가는 주례인 제가 부릅니다.”라고 말하니 갑자기 하객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이어서 ‘축가를 부르게 된 배경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신랑․신부께서 제가 노래를 많이 익힌 것을 알고 주례도 맡고 축가도 부르기를 간청하여 양가 부모님의 동의를 받으면 부르겠다고 했더니 동의하셔서 이렇게 축가를 부르게 되었음을 밝힙니다.”라고 말하고 현재명의 ‘희망의 나라로’를 열창하니까 큰 박수로 화답한다. 엄숙해야 할 결혼예식장이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바뀐다.
이 신혼부부는 오디오 메니어로서 문화동에서 재즈 음악동호인들을 위한 커피전문점을 경영한다. 아버지는 교육위원과 개발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어머니는 의사로 근무하는 집안에서 아들내외가 커피전문점을 자랑스럽고 떳떳한 마음으로 경영하고 있으니, ‘젊은 세대는 무슨 일이든 자신이 주인공 되어 즐겁고 보람 있게 사는 세상 만들기를 자신 있게 추구한다.’라고 생각하며 격세지감 속에서도 자유, 창조, 행복 같은 것을 만져본다.
한샘의 가슴 속에 날고 있는 한샘기
한샘이는 이마에서 주르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친다. 골프공을 송곳으로 뚫어서 구멍을 낸 다음 니퍼로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기니까 골프공을 이루고 있는 생 고무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실마리를 찾아 잡아당기니 거미의 꽁무니에서 거미줄이 나오듯 가는 생 고무줄이 끝없이 술술 풀려나온다. ‘그것 참 신기하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네. 공속에 생 고무줄이 왜 이렇게 많이 들어 있을까?’ 한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계속 잡아당긴다. 공의 탄성을 높여 공을 쳤을 때 잘 튀고 멀리 가도록 가느다란 고무줄을 여러 번 감은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한샘이는 고무줄을 잡아들고 앞 방향으로 100미터를 뛰어가 기둥에 묶어 놓고 아빠와 함께 고무줄을 여러 겹으로 꼬아서 고무 동력기의 동력선을 만든다. 이렇게 하여 만든 동력선은 어느 제품보다도 인장력이 높다. 상품으로 나와 있는 동력선은 인장력이 부족하여 많이 감으면 줄이 끊어지므로 많이 감을 수 없게 되니 고무 동력기의 추진력이 약하여 높이 뜨지 못한다. 고무줄의 인장력을 높여야 추진력이 세어져서 모형비행기가 공중으로 높이 떠올라 오랜 시간 비행할 수 있게 된다. 모형비행기 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할 수 있으려면 동력선의 인장력을 높게 만드는 방법이 관건이 된다. 어떤 사람은 고무줄을 샴프 원액에 담그거나 테레핀을 칠하기도 하지만 한샘이는 창의적으로 골프공 속에 들어있는 질긴 생 고무줄을 꼬아 만든 동력선을 이용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아빠가 관악산 등산로에서 주워온 낡은 골프공 두개를 가지고 놀면서 껍질을 벗기다가 알게 된 것 같다. 어찌 되었든 한샘이의 창의력은 놀랍다.
모형 비행기에는 글라이더와 고무동력기의 두 종류가 있는데 글라이더는 두 사람이, 고무동력기는 한 사람이 날린다. 한샘이는 두 종류를 모두 좋아하지만 웬일인지 요즈음에는 고무동력기에만 집중한다. 어제 밤늦게까지 만든 고무 동력기는 지금껏 만든 동력기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동력기이다. 한샘기라고 이름 지어 양쪽 날개에 빨간 글씨로 ‘한샘’이라고 크게 써 놓았다.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공군 사관학교의 연병장으로 나가 모형비행기 날리는 연습을 한다. 어제 만든 고무 동력기의 프로펠러와 고리에 고무동력선을 고정시키고 최대한 감아 45도의 각도로 고무 동력기를 공중에 띄운다. 고무줄의 탄력을 받아 프로펠러가 돌아가면서 한샘기는 하늘을 향해 날기 시작한다. 한샘이는 기쁜 마음으로 동력기를 따라가고 강아지는 멍멍 짖어댄다. 한샘기는 공군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45도로 40미터를 직진하여 공중으로 오르다가 기류를 만나 친구를 맺어 공중을 빙빙 돈다. 5분 가까이 원을 그리며 세 바퀴 돌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여의도 한강 쪽으로 날아가더니 고도를 올려 하늘 속으로 달려 들어간다. “한샘기야, 이리로 돌아와!”라고 목청껏 외쳤지만 한샘기는 미련 없이 머나먼 하늘나라로 빨려 들어간다. 한샘이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언젠가는 한샘기가 한샘이에게 다시 돌아오리라고 굳게 믿는다. ‘양쪽 날개의 무게가 똑같아 균형이 잘 잡힌 동력기였는데……. 내 넋이 실리도록 온갖 정성을 다 들여서 만든 항공기였는데……. 지금까지 만든 비행기 중에서 가장 멋진 비행기였는데…….’
한샘기가 빨려 들어간 한강 위 하늘에는 구름 한쪽 걸려 있지 않아 허전한 마음이 끝없이 밀려온다.
‘한샘기에 한샘이가 올라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후회하면서 하늘을 뚫을 듯 바라보지만 날아간 비행기는 돌아올 줄 모른다.
서울시 관악구 인헌 초등학교 4학년생인 한샘이는 학교에서 고무 동력기 부문 대표선수로 뽑히어 공군 사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모형비행기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한다. ‘지난번에 만든 한샘기가 출전했더라면 1등을 했을 텐데’하면서 못내 아쉬워한다.
한샘이는 성년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에 만들어 쏘아올린 한샘기가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오르던 모습이 살아 숨쉬어 지금도 한샘이의 가슴속에서 늘 힘차게 날고 있다.
생
최 일 순
나는 오늘도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저녁 식탁을 차린다.
"엄마, 제발 식탁에서 먹자아. 허리 아파 주께써."
딸아이가 애원하지만 그 뜻은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상 피곤한 것이, 식탁으로는 도저히 올라앉고 싶지가 않다.
언제부턴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밥을 먹는 게 편안하다. 그게 언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최근의 일임에는 틀림없다. 주방 앞에는 멀쩡한 식탁이 있고 또 그 아래에는 네모진 사각 탁자가 있는데 나는 그곳 다 마다하고 날마다 방바닥에 신문지를 펴는 것이다. 종일 서서 일한 탓에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고 싶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한참 후에야 지금 내가 서있는 시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늙음으로 가며 사람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흙에 가까이, 더 가까이 다다르고자 하는 성향을 지닌 것 같다. 주말 농장을 일구며 흙을 매만지고 흙의 숨결에 귀 기울이며 흙이 지닌 생산성에 새롭게 탄복하는 것도 생의 정점을 한참 내려간 후의 일이기 일쑤다. 전원 주택지를 물색해 좀 더 안락한 노후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도 자녀들 떠나보낸 후의 일이다.
피부마저 흙빛으로 변해 가는 계절에 이르면 흙에 둘러싸여 살고 싶어지는가 보다. 아파트에 살 경우도 고층을 피하게 되고 주택에서도 편히 땅을 내디딜 수 있는 1층을 선호한다. 식당에서도 엉덩이 바닥에 대고 편히 앉아 먹을 수 있는 방만을 고집하게 된다.
돌연 생의 궤적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나는 지금 내려가고 있는 중이구나. 흙에 가까이, 더 가까이.
갓 태어난 아이는 종일 누워서만 지낸다.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금씩 생의 높이를 높여간다. 눈 높이를 키워간다. 고개 들고 팔을 휘 젖고 힘써 배밀이를 하게 된다. 어느덧 엉금엉금 긴다. 드디어 앉게 되고 아이는 엉덩이를 밀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 한다.
이윽고 엄마 아빠의 축복 속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말썽을 부린다. 엄마 화장품을 파내어 얼굴에, 몸에 온통 문지르기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을 입에 넣어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용을 쓰며 무엇인가를 붙잡고 서고, 그러다가 주저앉고. 또 다시 같은 행위를 수없이 되풀이한다. 위를 보며 날마다 날마다 커간다. 마음을 살찌워 간다. 그러다가 앞을 보고 걷는다. 뒤뚱거리는 발걸음이, 자꾸만 무너지는 몸체가 더 탄탄해지면 드디어 달리게 된다.
제가 있는 영역을 넓혀 이웃으로, 마을로, 사회 속으로 달리고 또 달려간다.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켜 간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는 일에 바빠 누구를 돌아볼 겨를도, 마음 편히 숨쉬고 앉아 있지도 못한 채 그저 달리고 또 달린다. 왜 달리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필사적으로.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아이들은 어느 새 엄마 키를 능가하고 아빠 힘을 능가하고 있다.
비로소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부모님도 이렇게 헉헉대며 생의 언덕을 힘겹게 올라왔음을 인식한다. 그래서 부모가 즐겨 부르던 대부분의 노래에는 짙은 한이 서리어 가슴을 저밈을, 뼈마디 마디를 아프게 들쑤셨음을 깨닫는다.
어쨌거나 내가 뿌린 씨를 거두기 위해 또 걷고 걷다보니 어느 새 가을, 여름 내 커가던 나락도 다시 땅에 묻히기 위해 자신의 열매를 다소곳이 땅에 내려놓을 시간이다.
내가 서있던 자리, 숨 가쁘게 달리던 영역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기 위해 나는 땅으로, 땅으로 낮게 더 낮게 내려앉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아무리 식탁에서 밥을 먹자 애원해도 그 위로는 올라가고 싶어지지 않는 게 아닐까.
청년기에는 밥을 먹어도 책상 위에 앉아 먹으며 책을 읽기도 하고 신문을 들썩이기도 했었다. 밥상이 없어도 절대로 바닥에 나앉고 싶지 않았었다.
아, 정말 멀리 왔구나. 내 그림자 끌고 온 길 되돌아가는 길.
지금은 바닥에 퍼질러 앉음만으로 자족하지만 머지않아 누워지낼 수밖에 없는 북풍의 계절은 다가오리라. 그러며 피부도, 흙빛으로 물들고 몸은 바짝 마른 시래기처럼 여위어 서서히 바스러져 가리라.
좀 더 흙과 친숙해지기 위해, 동화되기 위해 오늘도 나는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식사를 하는 건 아닐까.
어둠이 짙어지고 계절이 울면 드디어는 흙 이불 포근히 덮고 곤히 잠들겠지. 모든 것 받아 안는 대지의 품에 안겨.
목욕
추석이나 설 무렵, 혹은 아버지 제사 때면 나는 엄마를 만나자마자 목욕탕으로 모시고 간다. 방금 먼 곳에서 달려오신지라 힘들다고 떼를 써도, 귀찮다 마다해도 억지로라도 탕 안에 밀어 넣는다.
엄마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난다. 청결하게 씻지 못하는 노인 특유의 냄새다. 옷에는 찝찔한 간장 냄새 같은 게 배어 있기도 하다. 게다가 담배마저 입에 달고 살아,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냄새가 엄마 주변을 휩싸고 돈다. 방금 씻고 왔다 할 때조차도.
친정에 들른지라 부엌일은 나 몰라라 방치하건만 누구도 이런 나를 비난하기는커녕 쌍수 들고 반긴다.
방안에선 어린 조카들의 재롱에 웃음꽃이 피어오르고 음식 냄새가 진동할 터이지만 욕탕에서만큼은 엄마와 나만의 은밀한 시간이 연출된다. 그 누구도 개입해 들어올 수가 없다.
엄마 몸에 비누질을 해드린 후, 욕조에 오랫동안 누워 계시게 한다. 비좁은 그 속에 나도 함께 몸을 담근다. 마주보는 눈빛에 사랑이 담긴다. 평화가 깃든다. 따뜻한 엄마의 양수 속에 나를 담그었을 때도 엄마와 나는 이처럼 평화로웠을까.
넘실거리는 욕조물, 뿌옇게 서린 김이 천장까지 꽉 메우고 있다. 훈훈한 기운이 엄마와 나 사이를 휩싸고 돈다. 벌써부터 몸과 마음이 이완된다. 창 밖이 추울수록 안락감은 더 한다.
엄마는 그 동안 누구한테도 말못하고 산 가슴 속 맺힌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신다. 며느리한테 서운했던 점, 아들녀석의 철없는 소행들을 이것저것 일러바치기도 한다. 때로는 장성한 손자의 철없는 소행에 켜켜이 쌓여있던 외로움이, 아픔이 줄줄이 딸려 나오기도 한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기대 심리가 보상을 받지 못한 때문이다. 엄마는 나이 드신 만큼 작아지셨다. 여려진 마음만큼 상처를 잘 받는다. 지난 시간의 설움과 외로움이 새삼 복 바쳐 오르는 듯, 때로는 눈물을 보이기도 하신다. 맺힌 맘을 풀어놓는 자체만으로도 엄마는 이미 구원받고 있다. 치료받고 있다.
더운 물 속에 한동안 잠겨있던 엄마 몸은 이미 익어있다. 그간 고독과 외로움에 얼었던 마음도 녹아 내렸다.
엄마 몸 구석구석을 씻긴다. 작은 체구에 부성한 머리칼, 짧은 목, 쪼그라든 젖, 볼록한 배, 거웃이 듬성한 아랫도리. 새처럼 가는 다리, 쪼그라든 손톱과 발톱까지.
보글거리는 거품이, 엄마 몸 이곳저곳을 훑고 다닌다. 미끄러져 내리는 내 손길 따라 점점 편안해 하신다.
이리 가까이서 보니 엄마는 어금니가 하나도 없다. 앞 이만 토끼처럼 두어 개 뾰족이 솟아있다. 그것도 새카맣게 다 썩어서. 숱한 아들, 딸 뒷바라지에 치과 한 번 제대로 못 가시고 산 당신의 인생에 몹쓸 말뚝처럼 몇 개만 삐죽이 남으신 어머니의 이.
참 죄스럽다. 내 이었더라도 저렇도록 방치해 두었었을까. 나 또한 몹쓸 자식이다. 아니, 엄마 이가 이 지경인지조차 이제야 알아채다니….
그간 음식은 어떻게 씹으셨을까? 앞니 두어 개로 딴딴한 총각김치를 오독거리셨을 생각에 가슴이 짠하다.
뒤늦게 치과에 모시고 가니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며 치료를 마다하신다. 이를 해 넣으려 했더니 그 과정이 예사롭지가 않다. 단시일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년을 두고, 두고 공사를 해야 한다.
"그, 그역 떨꺼 웁씨 나 그냥 살다 갈란다."
는 당신의 뜻에 모두가 동조하게 되었다. 엄마 등이 유난히 찐득댄다. 기름기가 짙게 배어있는 탓이다.
"지가 닥어달랄 껏두 웁꾸, 나두 닦아 달랄 껏두 웁꾸… 우리 는 그르키 산다."
등에서 유독 내 손길이 오래 머무는 것을 보고 엄마가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총각인 막내랑 함께 하는 삶의 일면이다. 장소를 옮기어 엄마가 큰아들과 함께 살게 되었어도 애로는 마찬가지다. 장성한 자식한테 가까이 가 닿을 수 없는 엄마의 고독이 새삼 읽혀졌다.
나는 뽀득뽀득 엄마 몸을 씻긴다. 그 옛날 우리 엄마가 어린 자식을 이렇게 닦아 줬겠지. 나날이 틈실해져 가는 아이를 씻기며 얼마나 큰 희열을 느꼈었을까. 여자로써 꽃 시절을 사셨을 당신의 낙원이었던 꽃밭. 허나 푸석해진 박토엔 당신 홀로 남아 고독을 양식처럼 반추하고 계시다.
엄마 몸 구석구석을 정성껏 문지른다. 스치는 손길 따라 엄마는 더욱 더 유순해진다. 그 동안 엄마는 따뜻한 인정감에 참으로 목말라 있었던 것을.
다른 부분에 비해 엄마는 허리부터 엉덩이까지는 골격 자체가 넓고 틈실하다. 그 많은 자식을 병원 한 번 안 가시고 무사히 낳아 기른 힘은 바로 이곳에서 나왔을 것이다.
도톰하게 살이 붙기는 했지만 빈약해 뵈는 엄마의 아랫도리다. 신성한 산실이었던 그곳, 자식들을 소중히 품고 있다 세상 밖으로 내보내며 느끼었을 환희와 기쁨, 여자로서의 당당함과 자랑스러움의 근원이 되어 주었을 그곳이다.
이곳은 두 분을 튼실히 묶을 굳건한 실타래가 되어 주었겠지. 운명의 씨줄을 견고히 엮게 했겠지. 두 분의 푸르던 날, 밤늦게 들어오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엄마 다리를 더듬었었다던가. 혹시나 하는 의혹으로. 상대에 대한 집착이 질투가 되어 행해졌을 갖가지의 일들, 그 때 확인하는 믿음은 서로를 더욱 굳건히 묶게 했겠지.
축 늘어져 쪼그라든 저 젖 어디메서 튼실한 아들 넷, 딸 넷을 배불리 먹일 생명의 샘이 끊이지 않고 흘렀었을까. 엄마는 젖 두 개를 중앙으로 모아 쥐고는 서로 맞닿게 한다.
"이르키 해서 젖이 닿으면 남편 복이 있댜야아."
남편의 어름 받던 날들이 그리움으로, 자랑스러움으로 지금도 엄마 가슴을 덥혀 주는가 보다. 아버지 가신 지 16년이 흘렀는데.
엄마 머리를 감긴다. 다 빠져 듬성대는 머리칼은 윤기 잃어 푸석거린다. 이곳 저곳에서 드러나는 맨살, 병을 앓고 계신 것도 아니건만 세월은 엄마한테 마지막 남아있는 윤기마저 거두어 갈 태세다.
바닥에 엄마 몸을 눕히곤
"엎드려."
"옆으로,"
"잘 했어."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매번 다른 자세를 주문하건만 엄마는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신다.
"누가 이르케 나를 씻어 주거써어. 니가 나한티 하는 것 맹큼 만이래두 너두 자식한티 받어야 할 틴디… 서울 가문 니 언니 가 또 이르키 깨깟이 씻어주어."
소중히 보듬어 주는 딸들이 엄마는 참으로 고마운가 보다. 목욕이 끝날 무렵이면 엄마 얼굴은 버얼겋게 열에 뜰떠 뽀송거린다. 한결 말끔해져 있다.
"엄마, 션하지?"
"그러엄, 션하다마다아."
기력을 회복한 엄마는 정말 개운하다는 눈빛이다. 대충 몸을 씻고 밖으로 나오면 엄마는 상큼하게 옷을 갈아입고 말개진 얼굴로 자식들에 둘러싸여 있다.
언젠가 아버지 제사 때 엄마도 절을 하라 일렀더니
"나는 지사 안 할란다."
시며 한 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제사 지내는 모습을 멀그러미 바라보셨다. 그 얼굴에 슬픔이 얹혀 있다. 엄마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울 엄마 목욕 했다구 울아부지가 좋아하시것네."
"야이, 이것아! 지랄 말어."
시무룩하던 얼굴에 금방 생기가 돈다. 엄마와 함께 하는 이런 시간이 새삼 소중하다. 언제 끝날지 모를 시한부 행복이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친정엄마
먼 옛날 하늘나라에서 지상으로 태어날 아기가 있었다. 그 아기는 하나님께 물었다.
"이렇게 작고 무능한 아기로 태어나 험난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라고 그러시는 거 예요?"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를 "너를 위한 천사 한 명을 준비해 두었단다. 그 천사는 너를 돌보아 주고 네가 어떤 위급한 상황이나 어려움에 처해도 목숨을 다해 너를 보살필 거란다. 그 천 사를 너는 ‘엄마'라고 부르게 될 거란다."
신은 자신의 사랑을 대신해 보여줄 사람을 만들었는데 그가 바로 어머니라 한다. 그렇게 우 리는 엄마의 아들 딸로 이 세상에 태어나 보살핌과 양육 속에 자랐다. 그리고 성장하여 결 혼 하였고, 가정을 이루었고, 아이들을 낳아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난 예전의 내가 어릴 적 엄마의 이미지가 아닌 것 같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오로지 자식을 생각하고 희생하며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모든 것을 다 하는 모습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통학하는 자식들을 위해 새벽밥을 지었고 가족들의 뒤 치다꺼리에 허리 펼 시간이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시대가 변한 때문일까, 나뿐 아니라 오늘날의 엄마들은 자식만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비정하게 자식을 팽개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 해도 모정은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한없는 희생과 봉사,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아낌없 는 마음, 그리고 강한 책임감과 보호 본능일 것이다.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가장 먼저 엄마를 부르지 않았던가. 그때 엄마가 반갑게 맞아 주었을 때의 안도와 기쁨, 집에 안 계셔서 불러도 대답 없을 때의 적 막함과 두려움에 대한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엄마는 우리에게 위안이 되 어 주고 울타리 같이 든든하고 고향집처럼 푸근한 존재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 중 가장 위대한 말이 ‘어머니’라 한다. 이 한마디의 말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름다움,성스러움,고결함,따스함,자애로움,순결함, 부드러움, 거룩함, 희생과 봉사, 끝없는 헌신, 참되고 선함 등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또한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했다. 우리네의 어머니들은 어렵던 시절 자신을 돌 보지 않고 오직 가족과 자식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 어머니의 뜻을 우리 자식들이 살아가며 십분의 일이나 헤아릴 수 있을까 .평생을 살아도 갚지 못할 부모에 대한 은혜를 우린 너무나 잊고 사는 것 같다.
엄마 말대로 아이 셋을 낳아야 부모마음을 안다는데 둘만 낳고 말았으니 영영 모르는 채 살 수 밖에…
친정 엄마가 어느새 칠순이다. 오 남매의 맏이였던 나는 엄마가 젊어 좋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특히 할머니가 사십이 넘어 낳은 막내딸이었던 고모는 날 무척 부러워했다. 나 또 한 엄마는 늙지 않을 줄 알았다. 늘 그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가는 세월 막을 수 없고 백발과 더불어 오는 늙음을 피 할 수는 없다. 엄 마도 이젠 예전의 강건하고 활기찬 모습은 아니시다. 언제부터인가 기력도 걸음도 달라졌 다. 하지만 아직은 크게 아프다는 곳 없이 여전히 막내 동생네의 살림을 거의 맡아 하시며 틈틈이 뜨개질로 소일하신다. 잠시도 그냥 앉아 놀기 보다는 늘 무언가 일감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사신다 .엄마는 다행히 건강하셨다. 종가집 장남의 맏며느리로 시집와 집안의 대소사 를 치르며 시부모 모시고 시누이 뒷바라지하며 우리 오남매를 키웠으니 그 고단함이야 말하 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그래도 워낙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분이라 불평하거나 탓하지 않 고 원만하게 잘 사셨다. 덕분에 우리 오남매도 잘 자라 모두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엄마는 할 일을 다 하신 셈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친정 아빠가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엄마 곁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워낙 대범하고 의연하신 분이라 자식들 앞에 외롭다 소리 한번 안 하시고 신앙생활에 의지해 꿋꿋하게 잘 극복하며 사시니 고맙다.
엄마는 아직도 결혼한 지 20년도 넘은 큰딸인 내게 김치를 담가다 주고 밑반찬도 챙겨다 주 신다. 워낙 어려서부터 일을 못하고 또 하려고도 안 했던 날 걱정하는 마음은 여전하시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나 역시 딸을 두었지만 내 엄마가 나한테 한 것처럼은 못 할거란 생각 을 했다. 또한 솜씨가 좋아서 틈만 나면 쉬지 않고 뜨개질을 하시는데 칠순을 앞두고 며느 리와 딸들의 스웨터를 일일이 떠서 하나씩 선물로 주며 훗날 당신이 세상을 떠나도 기억하 면서 입으라고 했다.
엄마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가 보다. 사람이 유한한 인생을 산다고는 하지만 엄마가 벌써 그런 준비를 한다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착잡해졌다. 허긴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죽음이라 면 그렇게 담담하게 준비해 가는 것이 어쩌면 현명한지도 모르겠다. 아무 준비도 대책도 없 이 맞는 죽음처럼 황당한 것도 없을 테니까.
겨울의 초입이라서 바람에 제법 찬 기운이 실려 온다. 곱던 오색의 단풍들도 빛이 바래 잎 을 떨구고 앙상한 나목이 되어 겨울 채비를 한다. 엄마의 칠순을 축하할 겸 모처럼 친정 식구들끼리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남편의 직장을 통해 지리산에 자리한 수련관을 이용할 수 있어 모두 그 곳으로 모이기로 했다. 바쁜 일상을 잠시 미루고 어디론가 떠난다는 건 즐 거움과 설레임을 준다. 떠나며 약간의 과일과 간식거리를 준비해 가자는 내 말과는 달리 엄 마는 일 끝내고 저녁도 못 먹고 올 자식들 생각에 이것 저것 음식 장만을 해 보따리에 꾸려 들고 나섰다. 번거로운 것이 못마땅했지만 엄마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을 누가 말릴 수 있겠 는가. 그것이 엄마의 삶의 방식이고 평생을 당신 손으로 손수 만들어 먹여야 마음이 편하다 는 그 뜻을 누가 거역 할 수 있으랴. 오히려 편리함 만을 추구하며 쉽게 살려는 우리 자신 이 반성해야 옳을 것이다. 덕분에 늦은 저녁이었지만 푸짐한 만찬으로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한방에 여러 식구가 모여 잠을 잤다. 이런 저런 옛 이야기들을 나누며 밤 깊은 줄을 몰랐다. 어렸을 적 오남매가 한 집에 올망졸망 모여 살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결혼해 각자 흩어져 사니까 오 남매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때는 동기간 많은 것이 싫고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야 대부분의 가정이 대여섯은 됐는데도 맏이였던 나는 동생들이 많았던게 싫었던 기억이 난다. 난 맏딸이었지만 대가족이라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들이 있 어 동생들을 보거나 그러지 않았었는데도 동생들에게 따뜻하고 자상한 누나나 언니가 못 되 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할 뿐이다.
이튿날 준비해간 케이크를 놓고 생일 축하를 하고는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주, 손녀 들이 할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모두 절을 했다. 엄마가 많이 좋아하고 행복해 했다. 난 고개 숙여 절을 하는데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지며 울컥 눈물이 났다. 효도는 이 작은 것에 있음에도 난 엄마한테 잘 못한 게 많은 것 같다. 나름대로 한다 해도 부모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게 자식일 수밖에 없다.
아침을 먹고는 시설 안에 있는 볼링장에 가 온 가족이 볼링을 했다. 난생 처음 볼링공을 잡아 보는 엄마에게 순간 강습을 시켜 공을 굴리게 하고는 우리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엄마는 볼링을 치는 게 아니라 호박덩이를 굴리는 자세로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이셨 다. 잘 하는 게 뭐 중요하겠는가. 가족이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 자체로도 즐겁 고 신이 났다. 배드민턴도 치고 탁구도 치며 오전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노고단을 올랐다. 모두들 노고단 정상까지 올라가 지리산의 정기를 흠뻑 마시고는 내려왔다. 다행히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적어 아이들까지 다 올라 갈 수 있었다. 돌아오며 휴게소에 들러 간단한 식사를 하고 대전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다. 모두들 바빠 비록 1박 2일의 짧은 여정으로 다녀오긴 했지만 좋은 휴식과 단합의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 종종 이런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이 모두의 바람이고 희망사항이지만 바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린 내년엔 거제로 놀러 갈 것을 약속했다. 무엇보다 노년의 엄마에게 화목한 자식 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았고, 우리 또한 엄마의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행복이란 크고 거창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우리의 일상 안에 있음을 실감했다. 우리 오남매의 바람은 엄마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만큼의 건강을 유지하며 오래 오래 우리 곁에 계시길 원한다. 엄마는 우리를 비춰주는 햇빛이요, 울타리요, 안식처요, 언제나 돌아 가 기댈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존재이다. 엄마가 계신다는 게 얼마나 든든하고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했다. 살아계시는 동안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며 엄 마를 편하게 해주는 딸이 되도록 해야겠다. 받기만 하고 살아온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무언 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엄마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믿음의 힘
"자신이 원하는 것, 되고 싶어 하는 것을 확실하게 그려라. 그리고 그것이 실현된다고 확신 하라. 그러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 이 말은 유학을 간 아들에게 내가 늘 해 주었던 말 이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나쁜 결과를 상상하지 말고 성공한 모습 원하는 결과를 상상하고 실제 이미지로 영상화 하는 것 이것이 신념의 힘, 믿음의 힘이다. 사람은 어떤 생각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성공은 생각의 크기에 달려있다. 살아가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과연 제대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주관을 가지길 원한다. 비록 그것이 올바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관성 있게 지켜 가다보면 잘 잘못을 깨닫게 되고 자신에 맞는 적절한 진로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들 녀석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지 삼 년째다. 어려서부터 여행을 많이 했던 덕에 스스 로 유학을 선택했고 나 또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녀석에게 공부를 기대하기 보다는 견 문을 넓혀 자신의 인생을 보다 폭넓게 개척해 보라는 의미로 보냈다.
아들의 꿈은 호텔리어, 더 크게 말하면 호텔 경영인이 되는 거였다. 남편은 보수적인 고정 관념 때문에 그 꿈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달랐다. 지금의 우리 시각과 관점에서 아 이들의 미래를 가늠할 순 없는 것이다. 앞으로 십년 후 아니 그 후엔 지금의 직업 중 대부 분이 도태되고 새로운 직종의 일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예전의 성공의 기준 과 지금의 가치 기준은 분명 다르다고 본다. 이제 출세지향이나 입신양명보다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즐겁고 신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 일을 할 때 진정한 성 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 일에서도 자신의 잠재능력을 마음껏 발휘 할 수 있고 성 과도 높을 것이다. 녀석이 유학을 떠날 때 난 분명히 말했었다. 공부를 하고 안하고는 너의 선택이며 이제부터 네 인생은 네 책임 하에 스스로 개척해 가는 것임을 명심하라고.
고등학교까지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1년의 어학연수를 끝내고 전문대학의 일한 통역사 과정에 입학했다. 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외국어는 능통해야 할 것 같아 그 과 정을 선택했던 것이다. 학교를 다니며 주변의 선배와 유학생들을 통해 생각이 바뀌고 시야가 넓어진 녀석은 자신의 꿈인 호텔경영인이 되려면 경영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 면서 야무진 포부를 세워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와세다 대학 경영학부를 목표로. 내게 자신 의 생각을 말했을 때 내심으론 동의하기 힘들었다. 한국에서 녀석의 실력은 반 40명 중 뒤에 서 두 세 번째 정도였고 본인 스스로 공부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아 전혀 하지 않았었다. 나 또한 어차피 공부로 인생의 승부수를 두지 않을 거라면 안 해도 좋다고 말했기 때문에 녀 석은 고 3시절 다른 아이들은 수능공부에 여념이 없을 때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태 평한 고3을 보낸 전력이 있다. 그런 녀석이 공부에 도전을 하겠다며 그것도 서울대보다 어려 운 와세다 대학을 목표로 한다니 믿어지겠는가. 하지만 난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공부를 시작해 9개월 동안 녀석의 말로 죽기 살기로 했단다. 내가 말한 성공한 미래의 자 신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이겨냈다 한다. 내가 통화를 하며 녀 석에게 해준 말은 넌 할 수 있어, 넌 공부를 못 했던 게 아니라 안했기 때문에 결과가 나쁜 것뿐이었다는 말과 엄마는 널 믿는다는 말이었다. 아들 녀석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정신 이 번쩍 나며 절대 포기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단다. 한국의 수능처럼 일본도 본고사 전에 치르는 시험이 있는데 그건 제법 잘 봐서 상위 5% 내에 들어 장학금을 탈 수 있게 되었 다고 했다. 기특하고 대견했다. 헌데 본시험을 보고는 다소 풀이 죽어 전화가 와서는 잘 못 본거 같다며 상심했다. 거의가 논문형식이어서 끝까지 열심히 쓰긴 했는데 자신이 없다며 실 망의 빛이 역력했다. 난 녀석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공부하지 않던 네가 더구나 언어도 다른 외국에서 단번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다는 건 무리고 한 번의 경험을 토대로 다시 도전한다면 그 다음 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거라 했다. 녀석은 와세다를 목표로 여러 군데를 볼 생각으로 응시 서류를 준비해 보내 달라 했었기 때문에 만일 안 되면 차선의 학교를 선택해 다시 공부 를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도 마음을 비웠다. 무엇보다 부모형제도 없는 낯선 땅에서 혼 자 좌절을 맞보며 힘들어 할 녀석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 괜히 무모한 도전을 하라 한건 아 닌가 자책을 하기도 했다. 발표까지는 여유가 있던 가을 일요일, 우리 부부는 집 근처 가까 운 산으로 등산을 갔다. 친구부부와 함께 산을 오르는데 남편의 전화로 아들의 격앙된 목소리 가 들렸다. 뭐라구 반문하는 남편의 목소리도 떨렸다. 난 무슨 일이 생겼을까 순간 불안했다. 합격했다구? 네가 와세다 대학에? 남편은 전화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아들 녀석이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마 나 합격했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 말이야. 참 장하구나, 수고했다, 가문의 영광이다.” 그 순간 정말 우리부부는 전류에 감전된 듯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함께 간 친구 부부도 덩달아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전화를 끊 고 오르던 산을 마져 오르며 자식 잘 되는 것이 내가 잘 된 것보다 몇 배나 더 기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유학을 보내긴 했지만 사실 유학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아는 터였다. 언어의 장벽도 극복해야 하거니와 향수병, 문화적 충돌에서 오는 갈등, 부모와 떨어져 있음으로 한 정서적 공황 등 여러 문제 요인을 스스로 극복하며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의지가 약할 경우 도중 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녀석이 한없이 대견하고 믿음직하고 대단 하단 생각이 들었다.
공부는 왜 하는거냐며 난 공부 안 해도 잘 살 수 있다던 녀석이 대학원까지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인생에 도전장을 낸 용기와 뱃장이 멋지다. 사실 유학을 보낼 때 남편의 반 신반의를 외면하고 보내며 내심 녀석이 뭔가를 보여주길 기대 하기도 했었는데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녀석이 고맙다.
이제 시작이고 인생에서 앞으로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이 많음을 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녀석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제 어떤 상황에 부딪혀도 스스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 해 나가리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믿음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람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은 성공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자신감을 주기 때문이고 실패한 사람은 실패 의 경험으로 인해 자신감을 상실해 다시 실패를 반복한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하기 위 해서는 아주 작은 것부터 성공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긍정의 힘'이란 책 이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다 한다. 이 책에서 시사하는 바 역시 매사를 긍정적이고 적극 적인 마인드로 대할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비전을 키우고 건전한 자아 상을 가꾸며 생각과 말의 힘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믿는 것 이것이 인생의 승자가 되는 길임 을 강조한다.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임을 역설한다. 막연히 열심히 살면 가장 잘 사는 것이라 생 각하기 쉽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무미건조한 삶이 되기 쉽다.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목표 의식이 분명 할 때 의욕도 생기고 성과도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 한 것은 자기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내가 나를 믿어주고 인정할 때 나의 잠재 능력은 무한 히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 어찌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믿어 주겠는가? 내 스스 로 자신을 사랑하고 늘 칭찬하며 잘 할 수 있을 거라 격려해 주자. 우리의 뇌는 아주 영민 하고 섬세한 기관이라서 주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민감함 반응을 보인다. 긍정적인 생 각, 좋은 생각은 우주의 좋은 기운을 모아 행운을 불러들인다. 세상은 믿는 만큼 이루어진 다 .믿음이 곧 자신감이요 성공이다. 나를 믿고, 자식을 믿고, 남편을 믿고, 사회를 믿고, 세상을 믿을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충남 공주 출생, 90년 ≪현대문학≫에 수필 천료, 농촌농민문학상, 대전문학상 수상, 수필집 지워질 발자국이라도, 시인의 눈, 폐달을 밟으며, 마음에 뜰 하나 들여 놓으며 등, illsoonchio@hanmail.net
백합처럼
김 혜 경
은행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같은 건물 귀퉁이에서 꽃집을 발견했다. 발견했다기보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오늘에야 눈으로 확인한 셈이다. 윈도우 너머로 한 무리의 백합 봉우리가 꼭 다문 새침한 입술 같이 예뻐서 망설임 없이 꽃집 문을 밀었다. 화려한 포장을 마다하며 다섯 대를 사 가지고 나왔다. 윤기 흐르는 초록 잎새 위로 건실한 줄기 한 대에 꽃송이가 두 개씩도 달리고, 하나씩도 달려서 모두 여덟 송이다. 모두 만개하면 흰색 영혼의 저린 향기가 가슴 깊이까지 녹아들겠다.
백합꽃 한 다발을 들었을 뿐인데도 몸짓과 걸음까지 이내 꽃향기로 차 올라 호흡에서 백합향기가 났다. 서둘러 오는 길이 작은 설레임과 충만함으로 마음 한 구석에서부터 기쁨이 고여 나왔다. 둥근 도자기 화병에 손질하지 않고 꽂았는데 방금 보니 한 송이가 조심스레 입술을 열고 있다. 하얀 꽃잎 속에 감추어진 정갈하고 고아한 자태를 내보이며 아마도 내일 아침이면 백색의 향기에 온 집안이 젖어들겠다.
난 유난히 흰색, 흰 꽃을 좋아한다. 백합은 물론이고, 흰색이면 다 좋다. 꽃뿐 아니라 자주 입는 옷도 그래서인지 흰색이 많다. 하얀색에 대한 유난스런 애정은 잘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무언가 묻게 되면 쉽게 티가 나는 것도 흰색이고, 매우 조심스럽지 않으면 금방 더러워지는 것도 흰색이다. 때문에 항상 몸을 사려야 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고, 잘 지켜야 하는 것도 그 색깔이다. 그래서 그렇게 흰색처럼 산다면 내가 더 신중해지거나, 아니면 영혼의 맑고 깊은 순결함을 잘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내가 좋아하는 색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정해놓은 뒤로 늘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랐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 빛깔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고시절 순수함에 관한 소녀적 환상을 가졌을 때부터였던 것도 같고, 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할 무렵이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 땐 지금처럼 내 삶을 이끌어 갈 좌우명처럼 나를 지켜주는 빛깔이 되리라 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떤 이는 흰색을 ‘무(無)’의 색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흰색은 모든 가능성을 가진 무한한 창조의 색이다. 어떤 빛깔을 섞어도 다양하게 융화할 수 있는 색, 탁해진 삶으로부터 희석시킬 수 있는 색이며, 동시에 더럽혀진 구석이나 잘못된 실수의 흔적들을 덧칠할 수 있는 지움의 색이다.
또한 나에게 흰색은 영혼과 영혼의 관계의 색이며, 시작의 색이다. 살아오면서 인생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면, 서슴없이 덜어줄 수 있던 것이 그 색이었다.
한 가지 색깔로 살아 내기엔 세상이 몹시도 거칠고 혼탁하다. 그러나 나는 변함없는 흰색으로, 그 마음 깊은 영혼의 순결함을 사랑하며 지향한다. 흰색처럼 투명한 맑음, 깨끗함을 잃지 않고 살아지길 소망한다. 때때로 뒤엉켜진 시간들과 혼란스런 일상의 관계 속에서 하얀 색깔은 내가 살아가는 희망이며 소중함이다.
내가 나를 다스리고 더렵혀지지 않으려 애쓰는 날들, 어둡고 무거운 세상에 백합의 하얀 향기가 집안을 은은히 울리는 것처럼 나도 향기를 가진 흰색으로 살고 싶다. 저 백합처럼 살고 싶다.
그리움 그 큰 사랑
나는 한 번도 아버지 꿈을 꾼 적이 없다. 두 남동생들은 가끔 아버지를 꿈속에서 뵙는다는 데 내겐 어쩐 일인지 단 한 번도 나타나 주시질 않는다. 어느 땐 너무도 뵙고 싶어 온 종일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다가 잠들어봤지만 늘 소용이 없었다. 그저 서운함과 그리움만 커갈 뿐.
아버지는 삼 년 전 사월, 봄꽃이 절정에 달하던 따스한 밤에 무심히 떠나셨다. 임종을 앞두고 며칠간의 고통에 힘겨워 하셨지만 그런 대로 평안하고 조용하게 생을 끝내셨다. 살아 생전 당신이 원하시던 삶의 모습처럼, 마지막 가시면서도 남을 위해 장기와 혈관들을 의료연구용으로 기증하면서, 무언으로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이던 분이셨다.
내가 잊지 못하는 아버지, 아니 잊을 수 없는 내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나를 향한 그분의 큰사랑이다. 집안을 털어 유일한 여식인 나를 참으로 금이야 옥이야 키우셨던 분.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아버지와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눈물을 삼켜야 하는 지금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그 분이 그립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니는 일을 무척이나 즐겨 하셨다. 큰댁에 일이 생겨 가시거나, 문중에 크고 작은 대소사가 있을 때, 뉘 집 결혼식에나, 장이 서는 날은 물론이고, 당신이 가실 수 있는 곳이면 마다 않고 내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서시던 분. 한 번은 집안 어른 회갑연이 있었는데, 꼬박 사흘을 경상도 안동까지 데리고 다녀오신 적도 있었고, 또 한 번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가시는 서울 나들이까지 동행시킨 적도 있었다.
함께 다녔던 것 말고도 아버지가 보여 주신 사랑은 가히 대단한 것이 많았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일은 아홉 살 초여름 무렵 심하게 홍역을 앓았는데, 아버지께서는 자전거 짐을 싣는 판 위에 큰 나무상자를 동여매어 떨어지지 않게 고정시키고는 그 안에 담요를 깔아 나를 눕히고 이십 리 길을 정신없이 달려 읍내병원에 데려가셨다. 그때 아버지의 땀 젖은 등과 애절한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외가로 조기유학을 떠났을 때는 한 달을 말없이 술만 드시다가 결국 다시 나를 집으로 데려오신 적도 있었다. 시집을 보낸 후엔 딸이 보고 싶어 신혼집이 있었던 대구까지 오셔서 얼굴만 보고 가신 적도 있었다. 그 특별한 사랑을 지금의 내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늘 내 마음의 큰 기둥이셨다. 내가 성장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의식 깊은 곳까지 영향을 받았던 많은 삶의 기준들, 그 가치를 감히 열거하기 어렵다. 아버지의 당부 중에 특히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결혼하기 전날 밤 하신 말씀이다.
“100점짜리 남자가 50점짜리 여자를 만나면 나중에 그 남자는 50점짜리가 될 것이고, 50점짜리 남자라도 100점짜리 여자와 살게 되면 나중에 그는 100점짜리 남자가 될 것이다.”
딸과의 헤어짐 서운함을 감추시며 정 깊은 눈으로 하셨던, 그 내조의 방향과 중요성에 관한 아버지의 뜻을 나는 돌아가신 지금, 결혼 17년째인 이제서야 겨우 이해한다.
또 하나는 절제에 관한 말씀이셨는데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누군가로부터 받는 외면적 고통이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절제하는 것이란다. 자신과 싸우는 것,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그 말씀의 본질도 나는 이제껏 머리로만 이해했지 가슴으로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아버지의 모습과 사랑은 지금 내가 살아가면서 수시로 기억되고, 시시때때로 그분의 삶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하며 느끼곤 한다. 내게 무엇을 남기려 하셨는지, 내게 어떤 인생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셨는지, 돌아가신 후 삼 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겨우 하나씩 알아 가고 있다. 아버지가 원하던 모습으로 내가 살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내게 주신 그 사랑의 힘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그 분께 보여드리고 싶다.
단 한 번만 꿈에라도 그리운 아버지를 뵐 수 있다면…
* 서울 출생, 2003년 ≪문학공간≫으로 등단, 한밭대 강의전담 교수, lucia0359@hanmail.net
상추쌈
신 강 남
나는 식성이 별로 까다롭지 않아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편이다. 한식은 물론 양식, 일식, 중식 중 어떠한 메뉴도 사양치 않을 뿐더러 외국사람들이 혐오하는 보신탕과 만세탕까지도 거뜬히 소화시킨다. 그러나 어느 한 음식에만 집착하지는 않으나 젊은 시절에는 육류를 즐기는 편이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채식과 소식으로 기울러지는 것 같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여서 육류는 거의 최 상류층에서나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먹거리였다. 서민들과 친숙한 먹거리는 역시 소채였는데 오래 먹을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 발효식품으로서의 김치가 대표적인 것 같고 즉석에서 먹는 날채소 중 으뜸은 상추가 아닌가 싶다. 옛적에도 우리나라의 상추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중국에서는 고려사신(使臣)이 가져온 상추씨앗은 천금을 주어야 구할 수 있다하여 천금채(千金菜)로 불려졌다는 기록이 있다한다.
또한 우리 조상님들은 서양 사람들과는 달리 좁은 공간에 사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접고, 개고, 말고, 싸고, 포개는 재주를 발전시켰다. 밤에 자고난 이불을 아침에는 개어서 보관하고, 큰상이나 병풍은 사용 후 접어서 부피를 줄였으며, 멍석을 쓰고 나면 말아서 시렁에 매달아 보관하였다. 제기(祭器)와 같은 그릇들과 방석은 포개버림으로써 부피를 줄이는 지혜를 보이셨다.
조리방법도 다양하게 개발하셔서 끓여 먹고, 지져 먹고, 데쳐 먹고, 말아 먹고, 비벼먹고, 구어 먹고, 삭여 먹고, 졸여 먹고, 싸서 먹는 방법 등 다양하다. 싸서 먹는 재료의 대표적인 것이 상추로서 지금과 같이 아파트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어느 집에나 손바닥만한 텃밭이 있으면 상추, 쑥갓, 풋고추를 키워서 여름 한철 맛있게 먹곤 하였다. 근자에는 비행기 안에서도 비빔밥에 이어 상추쌈밥을 국제선 기내식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니 큰 재산은 물려받지 못하였으나 맛있고 영양가가 두드러진 음식솜씨를 전승시켜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이 상추쌈이라는 음식이 맛도 있지만 남들이 먹는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입맛을 돋게 하기도 한다. 아무리 지엄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상추쌈을 맛있게 먹으려면 우선 상추 몇 잎을 집어 들고 물기를 탈탈 털어내고, 손바닥 위에 겹겹이 쌓은 후 밥을 큰 술로 가득 올리고, 풋고추에 된장, 마늘, 쑥갓은 기본이고 밴댕이나 전어구이를 올려놓고 쌈을 싸면 크기가 어른 주먹 내지는 어린 아이 머리통만 해 진다. 상추쌈은 일단 싸버리면 크거나 작다고 재 포장할 수 없고 크면 큰대로 입에 넣고 다 먹을 때까지 손을 떼지 말고 먹어야 하니 입은 입대로 크게 벌려야하고 양 볼따구는 알밴 붕어배때기같이 불룩해지고 눈알은 튀어 나올 듯이 부라려지니 점잖은 좌석에서는 먹을 음식이 못되는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는 양반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사소절(士小節)에서는 어른 앞에서 상추쌈을 먹을 때는 고개를 돌림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부라려지는 눈알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상추쌈을 먹을 때는 손을 사용치 않고 젓가락으로 상추를 집은 후 밥뚜껑에 옮겨 놓고 밥을 싸서 젓가락으로 재주껏 먹어야했다니 양반노릇하기도 무척 힘들었겠다.
또한 우리나라 최고 명문가(名門家)로 대우받았던 경주최씨 종가에서는 종부(宗婦)감으로 혼담이 오가면 특별 과외를 시키기도 했다. 상추쌈은 눈을 부라리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싸고, 치마저고리는 육선(肉線)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푼푼해야 하며, 밤늦게 방에서 일할 일이 있으면 문을 이불보로 가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함으로써 고된 종들을 고달프게 하지 말게 해야 한다는 것까지 가르쳤다 한다.
상추쌈 먹는 모양을 가장 멋있게 묘사한 문학작품으로는 광해군 때 살았던 유몽인의 수필집 『어우야담』에 실린 글이라고 여겨져서 발췌하여 본다.
“삼사월 경에 밭을 갈아서 거름을 흡족히 주면 이슬을 머금고 비를 맞아 잎이 파초처럼 너푼 너푼 자라서 연하고 싱그러운 모양이라니. 그걸 바구니에 넘치도록 따 담는단 말씀야. 봄볕이 따뜻한 날 양지 바른 곳에 장독을 두고 장을 담그면 달기가 벌꿀이요, 색깔이 말피라. 인천(仁川), 안산(案山)바다에서 그물로 잡은 밴댕이가 장에 나오면 그놈을 사다가 석쇠에 구울 제 기름간장을 바르면 냄새가 코를 진동하것다. 그러면 대나무 소쿠리에 담겨진 상추를 물기를 탈탈 털어 손바닥 위에 벌여 놓고 기름이 흐르는 올벼 쌀밥 한 숟갈을 뚝 떠서 달고 고소한 된장을 얹은 위에 노릿 노릿 구운 밴댕이를 올려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면 새벽종소리에 남대문 열리듯 입이 벌어지고 혜임령(惠任嶺) 봇짐장수 넘어 가듯 상추쌈 목구멍을 넘어 간다 ”
입에 군침이 도는 문장이 아닌가. 상추와 관련된 야릇한 이야기도 전하여 지고 있다. 서방님이 상추쌈을 걸지게, 푸지게 싸서 맛나게 먹으면 곁에서 보는 마누라가 제일 흐뭇해하였다는데 왜 흐뭇하였을까요? 상추를 속설(俗說)로써 민간에서는“은군초(隱君草)”라고도 불려 졌는데, 예전의 토종 상추대를 자르면 하이얀 유액(乳液)이 흘렀고 그 유액이 정액(精液)같다 하여 같은 것끼리는 같은 효과를 낸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로 인하여 서방님의 상추쌈 먹는 모습을 보고 그날의‘뜨거운 밤’을 연상(聯想)하면서 흐ant해하지 않았을까.
하여, 옛 여인네들이 상추를 많이 갈거나 동네 샘에서 남편 상에 올릴 상추를 소복이 올리는 모습을 음욕(淫慾)의 노출이라 하여 금기시하였다 한다. 상추 중에서도 고추밭 이랑에서 은밀히 키운 상추를 제일 좋은 것으로 쳤다는 속설이 있는바, 아마도‘고추+상추=뜨거운 밤’을 같은 선상에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까지 내가 상추쌈에 대하여 중언부언한 것은 상추쌈예찬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얼마 전 신문에 상추쌈이 국제여객선 기내식으로 등장하였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혈기 방장한 청춘시절에 예뿐 여학생과의 치기어린 유희(?)가 생각나서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이성 간 또는 상사나 부모들에게도 자기의사를 전혀 주저함이 없이 당당히 밝히고 자기주장이 옳다고 판단되면 끝까지 관철시키는 용맹성을 보이고 있으나 우리와 같은 60-70학번 출신들은 윗분들에게 자기주장을 과감히 개진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리고 마음에 둔 이성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척 가슴 떨리는 일로써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나는 서먹한 분위기를 단 시간 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호전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상추쌈 백반 먹기를 시도하였는데, 아무리 새침때기 정숙한 여학생도 상추쌈을 먹은 후의 분위기 반전은 영화보기, 경양식집, 음악 감상실 순방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겸하여 손목 잡아보는 시간도 단축되었고…
영자씨, 미안해요.
상추쌈도 여러 번 같이 먹었고 손목도 여러 번 잡았지만 인연이 안 되어 지금은 어느 곳에 사는지도 모르는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상추쌈을 반 강제로 먹인 내 죄가 크다는 것을 처절히 반성하면서 그대의 어여쁜 잔영을 기억 속에서 지우려 하오. 영자씨 안녕 !
눈물 흘리는 총리
재작년 늦봄(2003. 5),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SARS : 중증급성 호흡기 증후군)로 인하여 중국은 물론 인근 국가들까지 전염 확산방지를 위해 안간힘을 쏟은 적이 있다. 당시 국내 모일간지에는 원자바오(溫家寶. 63) 중국 총리가 사스 진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과 언동을 사진과 함께 크게 게재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기사와 사진을 읽고 보면서 우리도 저분과 같은 국가지도자를 모셔 봤으면 하고 무척 부럽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는 주변의 지인들에게“요 며칠 새,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사스 걱정으로 눈물이 흐른다. 나는 강인한 사람이고 사스가 일과성 사건임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이 너무 무겁다”고 토로하였다하며 총리취임 2개월밖에 안되어 맞닥뜨린 사스라는 괴물을 잡기 위해 베이징 시내 61개 유치원과 101개의 중 ․ 고교, 베이징대 등 학교를 순회하면서 상황을 직접 청취하였다 한다.
또한 사스의 중국진원지인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로 날아가 학교, 주택지, 공사장, 병원들을 방문, 위로하는 강행군에 주위 참모들이 사스 감염을 우려하자“내가 겁내면서 인민들을 어떻게 안심시킬 수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한다.
이렇게 헌신적으로 사스 진압에 앞장서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감동한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총리에게 위로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한다.
“TV에서 당신과 후진타오 주석이 병원과 공사장, 주택지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당신들이 현장사람들과 나누는 소박한 대화와 따뜻한 악수는 우리 마음 속의 두려움까지 몰아냈다”고 감사해 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단다.
“휴식을 취하시고 건강에 주의하시길 충심으로 바랍니다.”라고.
또 한 가지 부럽고 본받고 싶은 것은 중국지도자들의 청렴과 자기절제에 투철한 모습들이다. 모택동, 화국봉, 등소평, 장쩌민, 후진타오 등 모든 지도자들이 개인치부를 위하여 돈에 접근한 사실이 없고 자신은 물론 처자와 고향사람들에게까지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데 어떻게 국민들이 존경치 않을 수 있고 따르지 않겠는가.
시선을 안으로 돌려보자. 얼마 전 강원도 양양 일원을 태워버린 대형산불로 인해 천년고찰 낙산사(落山寺)는 물론 민초들의 가옥까지 산불에 전소되었을 때 우리의 총리께선 어디에 계셨던가? 강릉 등 영동 일원이 집중호우로 민초들의 집안가구들이 물에 둥둥 떠다닐 때 우리의 총리는 어디에 계셨던가?
서해상에서 적들과 해상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들들의 장례식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 부동산 투기하는 놈 잡겠다며 옥상옥의 특별법까지 만든 우리의 총리는 대부도(大富島)라는 경치 좋은 섬에 위장전입을 하여 포도밭을 사 놓고는 농사지으려고 사두었다고 오리발 내밀고, 국회에서는 싸움닭으로 돌변하여 어리벙벙한 야당 의원과 말싸움잔치나 벌이고 있으니 언제 민초들의 살림살이를 살펴볼 수 있겠는가 ?
더욱 한심하고 분통터지는 것은 청와대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는 주인들의 행패다. 기성 정치인들과는 달리 참신한 모습으로 나라의 살림살이를 야무지게 할줄 알았더니 안방차지하자마자“못해 먹겠다”는 소리만 연발하지를 않나, 집안에만 있으려니 갑갑하다고 해서 외국이나 나가 며칠간 머리 식히라고 했더니 나가면서 고작 한다는 인사가“내가 없는 열흘 동안 집구석이 조용할거요”하고 약을 올리지 않나. 혼자 단독살림하기 어렵다고 징징 울면서
이웃집 한나라당 처녀를 안방에다 꼬셔놓고 연정인지 연애인지 한번 해보자고 얼마 전 예쁘게 수술한 짝짝이 쌍꺼풀눈으로 연신 윙크를 보냈으나 전투복으로 차려입고 무장한 박처녀의 뒷발질에 자존심만 무참히 깨져버렸으니 그 모습을 보고 어느 국민이 동정과 연민을 보내겠는가. 제발 그런 모습을 보고 사는 우리의 비참함도 헤아려주기 바랍니다.
카터 미국 전대통령을 봅시다. 대통령 재임 시에는 별로 국민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퇴임하자마자 고향의 땅콩농부로 변신하더니 민간외교관으로 세계의 분쟁지역을 순방하며 세계평화구현에 이바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헤비타트 운동(Habitat For Humanity: 가난한 자를 위한 집 고쳐주기 운동)’을 주도하면서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청바지차림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 고쳐주기 운동에 참여하여 손수 망치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 얼마나 신선한 변신인가? 또한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
중국의 원자바오 현 총리 직전에 5년(1998-2003) 동안 총리직을 수행하면서“중국의 철혈재상”으로 불렸던 주룽지(朱鎔基. 78) 전 총리는 퇴임 후 종적을 감추어 버려“중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풍문까지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의 결혼식(2005.10.20 )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일반 하객들과 함께 대형버스에 같이 타고 결혼식장에 도착하여 평소처럼 검소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민들을 감동시켰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전임 총리는 생존자들이 너무 많아 몇 명이나 생존하였는지 헤아려보기 어려우니 셈하지 말고 대통령을 지낸 인사들만 헤아려보자. 얼추 손가락을 꼽아보아도 다섯이나 된다. 그런데 이들 중 과연 경호원 없이 밤길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5명 중 2명은 독직사건으로 감옥살이까지 하여 국제적 수치를 당하였는데 몇 천억 원을 삼키고도 재산이 26만원밖에 없다고 오리발, 개발을 내미는 배짱과 몰염치에는 국민들도 치죄할 명분을 상실하고 만다.
아! 불쌍한 국민들이여. 저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한동안 모셨다니…
그러나 그대들이 꼭 유념해야할 것이 있으니 우리 같은 평범한 필부들이야 국민의 일원으로서 세금 잘 내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면 그 뿐이지만 그대들과 같이 지도자로 잠시 군림하였다면 그대들의 행적은 사초(史草)에 올려져 이 나라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것임을 명심하라.
오 ! 神이시여, 이 민족을 사랑하신다면 국민들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지도자를 한 분만 더 보내 주소서.
불쌍한‘커밀라(Camilla)’
커밀라? 커밀라가 뭐예요? 캬라멜은 아닌것같고, 신품종 애완견이름인가요? 솔직히 커밀라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우리 마누라의 반응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임에 틀림없다. 하기야 신문을 두종류나 매일 정독하는 나도 최근에야 알았으니까.....
커밀라! 그녀의 공식이름은 대영제국 챨스 왕세자의 배우자로써 “커밀라 콘월 공작부인”이시다. 쉽게 말해서 지금의 영국 엘리자베스여왕께서 돌아가시면 남편은 영국왕으로 등극하고 커밀라는 왕비가 되어 영국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으실 귀한 분이시다. 신품종 애완견이름이라니, 떽!
이렇게 귀하신 분이 지엄하신 영국의 왕자남편과 함께 지난 11월 1일에서 11월 8일까지 미국을 공식 방문하였는데, 미국에 머무는 동안 극성스럽기로 유명한 미국의 언론들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에 대하여 혹평에 혹평을 가하며 극렬히 물고 늘어져 커밀라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남의 흉을 듣거나 보는 것만도 보통사람들의 살아가는 재미중 하나인데 그것도 대영제국 버킹검궁의 차기 안방마님을 모독에 가깝게 몰아치다니… 그 내용 재미있겠다.
뉴욕과 위싱톤의 언론들은
․ 이빨이 왜 저래, 보톡스도 안 맞았나, 헤어스타일이 왜 저래 등등
․ 로라 여사(부시대통령부인)는 신부, 커밀라 공작부인은 들러리
․“커밀라패션은 악몽”이라고 하면서 촌스럽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썼다.
․ 돋보이는 옷은 한 벌도 없었다. 요란한 모자를 안 쓴 것이 그나마 잘한 것.
․ 그 나이(58)에 잘 맞게 입었다. 등등으로 모욕에 가까운 기사를 썼단다.
영국왕실에서는 이들 귀하신 부부가 미국으로 가기 전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한다. 가져간 드레스도 총 1천 여벌 중에서 엄선하여 50여 벌을 가져갔고 헤어디자이너 겸 염색전문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수행하였으며 영국에서는 미국에서 갑자기 걸려올 비상전화를 받기 위해 스타일 전문가 3명이 24시간 대기하였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언론들이 앞다투어 혹평을 하였을까? 나의 좁은 소견이지만 나이 많은 커밀라의 얼굴 뒤에는 1997년 8월에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다이애나 전황태자비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 환영(幻影)으로 나타났고 그 모습을 지워버리는 커밀라가 미웠던 것이다. 그러면 재미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남의 집 내실을 들여다보는 호기심으로 바람둥이 챨스 황태자의 연애사(戀愛史)를 개관(槪觀)해 보자.
․ 때는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70년 어느 날 챨스와 커밀라는 버킹검궁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져 챨스가 해군에 입대할 때까지 교제하였고 커밀라는 챨스가 군에 입대하자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 버렸다.
․ 챨스 또한 군복무후 왕실에서 물색한 미모의 다이애나와 1981년 7월 쎄인트 폴 대성당에서“세기의 결혼식”이라 불렸던 초호화판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런던시민 60만이 참관했고 세계의 7억 5천만 명이 TV로 시청하였다.
․ 슬하에 아들 2명을 두었으나 챨스의 바람둥이 기질이 되살아나 유부녀인 커밀라와 은밀히 밀애를 즐기기 시작했고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도 “네가 하는데 나라고 못하냐”는 오기가 뻗쳐 다른 남자와 연애를 시작.
․ 이들은 결국 1996.8 이혼하였고 1년 후 다이애나는 아랍출신 백만장자 아들 도디 파예드와 파리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
․ 챨스는 은밀히 즐기던 커밀러와의 밀애를 공식화하고 2005.4.8 윈저궁에서 결혼하였으나 커밀라는 영국왕실 역사상 처녀로써 결혼하였다면 자동 취득 되는 왕세자비라는 존칭이 박탈되고 “콘월 공작부인”으로 만족해야했고 챨스가 왕이 되어도 여왕이라는 칭호대신 격이 한 단계 낮은“프린세스 오브 콘서트(Princess of Consort)(왕의 배우자)”로 불리게 된다한다. 그런데 죽은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간택되자마자 미모와 재색으로 영국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었고 그녀가 입고 쓰고 신는 모든 것들은 유행을 선도하였다. 그렇게 사랑을 받던 다이애너가 챨스와 이혼한 다음해 어이없게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이번에도 전 세계인들이 슬퍼하고 그녀의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눈물지으며 다이애너를 이혼과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으로 커밀라를 지목하게 된다. 지금은 많이 비난이 누그러졌지만 다이애너가 사망한 직후 영국국민들에게 커밀라는 “마녀”, “가정 파괴범”으로 불려지며 미움을 받았으니 그녀가 입는 옷차림과 언행이 곱게 보이겠는가. 무엇을 해도 미워보일 수 밖에…
그러나 영국언론인들 별수 있나? 아무리 미워도 자기네 나라 왕실서열 2위의 여성이 된 커밀라를 계속 폄하할 수는 없어 요사이는 “겸손하고 소탈하며 사람만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라고 미화하면서 “내성적이고 다소 우유부단한 챨스 왕세자에게는 최고의 배우자가 될 것”이라고 평가한다나, 어쩐다나. 글 제목에서와 같이 내가 커밀라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이애나가 이혼과 더불어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 진짜 원인제공자는 커밀라가 아니고
바람둥이 챨스라고 생각하는데 챨스가 차기 국왕후보 1순위자이다보니 미움의 화살이 챨스에서 커밀라에게로 옯겨져 버렸다는 것이 나의 좁은 소견인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오! 불쌍한 커밀라.
그래서 다시 우리 마누라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권양숙이라는 사람이 누구게? 권양숙?, 권양숙?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같기는 한데, 맞아! 대통령 마누라아냐? 맞지?, 왜 그 여자가 사고 쳤어? 부동산투기 했어?
떽! 마누라라니, 부동산투기라니, 사고 치다니. 감히 우리나라 대통령영부인님을…
그러나 불행히도 대통령영부인에 대한 작금의 시중여론이 아닌가 합니다. 취임 초에는 학력이 어떠니 저떠니하며 미장원과 불가마싸우나에서 입질에 올리더니만 얼마 전 외국순방차 남편을 따라나섰을 때는 한복을 50벌이나 갖고 나갔다는 둥, 출국 때 전용비행기트랩에서 대통령보다 손을 더 많이 흔들었다는 둥 말도 많이 만들어 괜시리 질투와 시기를 하며 미워하는 분위기였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의 심정은 권양숙영부인의 모든 면이 무던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김새도 그리 예쁜 것도 밉지도 않지요, 청와대에서 약간의 성형수술도 한것 같지만. 몸매도 연령에 맞게 적당히 풍만하지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남편 출세시켰지요, 아들. 딸낳아 노씨가문 혈통을 튼튼히 하였지요, 흠잡을 때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대도 인기지수는 안 오르거든요, 왜 그럴까요, 여기서도 원인제공자는 인기도(人氣度)가 20%밖에 안되는 남편때문이라 생각되요. 어느 나라나 남편들이 말썽꾸러기 같아요.
오! 불쌍한 권양숙 영부인님.
그러나 조금만 참으세요. 2년만 지나면 본가(本家)로 귀가하셔야 되고 그곳에는 여사전용 주방과 안방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여사가 끓인 된장찌개가 짜다고 시비 거는 놈 없고 김치가 시어 터졌다고 툴툴거리는 놈도 없는 곳, 평범한 삶이 있는 곳, 그곳으로 가시면 모든 것이 편안해지실 거예요. 그때까지 꾹 참으세요.
눈부처 친구
양 원 준
이삿짐을 싸다가 문득 창틀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선인장 화분이 눈에 띄었다. 바로 지난 2001년, 경기도 용인에 있는 ‘요한의 집’이란 장애우 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여자친구가 선물해준 화분이었다.
채 10cm도 되지 않는 그 조그마한 화분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화분에 걸맞게 귀여우면서도 제멋 멋있는 선인장이 심어져 있었다.
선인장의 특성상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될 테니 그리 오래 손길을 묶어두는 일은 없었으려니와 이제는 헤어진 친구의 손때가 묻어있던 것이라 그런지 참 오래 전부터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화분이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복지시설에서 장애우들의 말벗이 되어주거나 일주일동안 쏟아진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기저귀 빨랫감을 세탁하느라 이마에 송송 구슬땀이 맺히는 줄도 모른 채 정신없이 일요일을 보내고 있을 친구를 생각하면 참 묘한 감정도 꿈틀거리게만 하는 선인장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쨌든 이삿짐을 거의 다 나르게 되자 잠시 망설여졌다. 언뜻 듣기로는 선인장도 꽃이 핀다고 하던데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꽃이 피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혹 죽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쩌다 하얀 옷을 입은 가시가 돋아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아직은 그 친구의 봄볕 같은 마음이 바람에 흩날리지는 않았다는 느낌도 들어서 방안 가득 쌓여있는 쓰레기더미에 미련 없이 선뜻 버릴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그 친구를 무척 좋아했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만날 때마다 해맑은 웃음을 건네주었고 언제나 내 편에서 생각해주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사려 깊은 마음도 분명 호감으로 다가서기에는 충분했었다. 무엇보다 학교마저 졸업한 마당에 누가 강요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장애우 복지시설을 찾아 허리를 낮추고 마음등(燈)을 환히 켜면서 세상을 엮어 가려는 그녀를 떠올리다 보면은 언제나 가식으로 일관된 채 세상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둥지둥 살고 있는 나에게 천천히 그리고 함께 사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듯싶기도 했다.
그녀는 세상에 대해 그리 큰 욕심도 없는 듯싶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면 그저 당연히 걸어야한다는 생각 뿐, 왜 그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에게 원망 섞인 눈길 한번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은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세상을 싱그럽게 물들이고 싶어 하는 그녀 나름대로의 생활철학을 내가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가릴 입장도 아니었었다. 다만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싶어 하던 그녀의 그 욕심 아닌 욕심 또한 내 마음을 적지 않게 흔들어놓았던 것만은 분명한 듯싶다.
이제야 이립(而立)의 나이에 접어들었으니 그리 오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친구의 밝은 걸음걸음을 그리다 보면 맑고 투영된 눈동자 가득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런 작은 만남들이 주는 의미가 너무나 분명하게 기억의 틀 한 쪽에 각인된 채 가지런히 새겨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런 작은 만남들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으로 간직될 테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특히 그 누군가를 통해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때 자신이 꼭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고 그로 인해 더 큰 기쁨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아직은 어린 내 판단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는 분명 오래오래 간직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같은 일을 할지라도 목적성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그 방향은 180도 틀려지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즐거움이 짜증으로, 때로는 굳은 얼굴을 해맑은 반달 모양의 미소로 번지게 하는 힘으로 기억되고도 남을 테니 말이다.
그 친구와 만나는 것이 즐거웠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지금껏 이성의 손목이라고는 단 한 차례 밖에 잡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내성적인 내게 있어 그 친구는 단순히 이성친구의 의미를 넘어서 때로는 선생님으로, 때로는 나의 배경이 되어줄 그림자로 그렇게 각인되어 갔던 것이다.
지금도 향수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그 때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나중에 혹 기회가 된다면 사회복지학도 공부해서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도, 나이로만 보면 15살 사춘기 소녀지만 지능은 겨우 3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이와 함께 손을 맞잡고 개울가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행복이란 그리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란 것도 느낄 수 있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시공을 넘어서 바로 귓가 너머에서부터 들리는 듯 여겨지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 때문이다.
하지만 정호승 님의 ‘눈부처’라는 시를 언급하며 심안으로 이웃을 바라보았으면 한다는 그녀의 마음을 다 채워주기에는 내 욕심 또한 적지 않았었나 보다. 역시나 지역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요일에는 자원봉사를 하는 그 친구와 당시 학생 신분으로 일요일밖에는 시간을 낼 수 없었던 내가 만날 틈은 그리 흔하지 않았고 따라서 처음의 그 설레는 감정을 지속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녀와의 거리는 차츰 멀어져만 갔고 그렇게 처음 그녀를 만나게 되었을 때의 어색함처럼 다시금 어색한 관계로 변해갔던 것이다.
이제 그녀와의 연락이 끊어진 지도 참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그녀가 처음 내게 선물해준 그 선인장 화분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남들은 헤어진 연인에 대한 추억은 빨리 지우면 지울수록 좋다고들 하지만 그리 깊게 사귀지는 못했을지라도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그 친구에 대한 아련한 추억의 끈이 쉽사리 놓아지지는 않을 듯 싶기만 하다.
조심스럽게 선인장 화분을 빈 화장품 상자에 담아 책상 서랍에 넣고 이삿짐 트럭에 몸을 실었다.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 비친 자신의 형상’이라는 뜻의 눈부처가 아닌 ‘눈처럼 부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처녀’였던 그 친구의 순수한 마음을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윤 형
하 전*
어느 의사는 사람의 성격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첫째는 무엇을 이루지 못하면 잠을 자지 못하고 식식거리며 안달을 하는 다혈질형, 둘째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사태평형, 셋째는 무엇을 이루지 못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속으로 끙끙 앓는 내성적인 형이라 했다. 첫째 형은 심장마비나 풍으로 쓰러지기가 쉽고 셋째는 암을 유발하기가 쉬우며, 둘째는 무병장수하는 형이라 한다.
윤형, 그는 둘째 유형 성격의 소유자다. 나이는 나보다 십여 년 연상이고 내가 공무원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ㅊ시청 건축계 계장이었다. 그 자리는 건축 기술직이 업무를 보아야 하지만 그 무렵에는 건축 기술직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어서 행정직이 업무를 수행하던 때였다. 그는 업무 능력보다는 무골호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직장에서 5~6㎞ 떨어진 시 변두리에서 농사도 지으며 윤택하게 사는 전형적인 지방 공무원이었다. 가족은 부인과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둘,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어머니 때문에 외박을 잘 안 하는 효자였다.
우리 계는 시의 건축행정을 다루는 곳이라 직원의 잘못이 없어도 민원이 많아 부시장이나 시장실에 불려가 자주 야단을 맞았다. 직원의 잘못을 대신해서 야단을 맞고 나와서도 “이 사람아 잘해!” 하는 말 한 마디면 끝이고, 어쩔 수 없는 일에 야단을 맞고 나오면 나 보고 “어쩌란 말여!” 한마디만 하면 속상한 것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덕인이었다.
그는 군사혁명 정부에서 입게 했던 밤색 골덴 재건복을 즐겨 입었다. 비만 체질에 목이 굵어 후크는 잠기지도 않을 정도의 비만형이라 김일성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술을 좋아해 퇴근길에는 혼자라도 대포집에 들러 막걸리 한 잔을 하고 간다고 한다. 뻘겋게 상기된 얼굴에 육중한 체구가 자전거를 타고 상체를 뒤로 제키고 천천히 가는 모습은 영락없이 나귀를 타고 가는 것 같았다.
그는 ㅊ사범을 다닐 때 6․25 동란이 터져 열아홉 살에 장교로 입대했다고 한다. 그만하면 사석에서 으레 군 생활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한데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다가도 가끔 동란 때 군 주변에 몸을 팔러 온 여자들의 참상을 이야기할 때는 눈시울이 젖고는 했다.
유머가 풍부하고 매사에 긍정적인 그는 항상 즐거웠다. 그러다보니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한 번은 퇴근할 무렵 자기 집에 가서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했다. 나만 초대하는 것이 좀 의아했지만 하숙을 할 때라 따라 갔다.
우리는 안방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윗방에는 그의 식구들과 동네 부인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부인은 우리 저녁 시중을 들며 윗방으로 가면서 미닫이문을 반쯤 열어 놓았다. 윗방에서는 누군가 나의 저녁 먹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그날 저녁 일을 물었더니 옆집에 참한 규수가 있어 중매를 했더니 규수 어머니가 보고는 신랑감이 약하다고 퇴짜를 놓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옆에 동료가 기분 나쁘게 멀쩡한 총각 데려다 딱지나 맞힌 것은 개인 문제가 아니고 우리 계의 체면 문제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항의하자, 그는 나보고, 그런 낌새가 보이면 이것들이 무엇 하는 짓들이냐고 큰소리를 쳐야지 그런 용기가 없어 딱지를 맞았다며 껄껄 웃었다. 우리 계는 사적인 얘기를 가지고도 즐거워할 만큼 상하의 분위기가 좋았다.
우리 계는 저녁 술자리가 잦은 편이었다. 퇴근 시간 무렵 누가 저녁이라도 산다고 전화가 오면 “이 사람아 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나, 수도청 건축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자리이네, 한 달 전에 부탁해도 될까 말까 한데 오늘하자고? 어림없는 소리지만 자네의 특별한 부탁이라 다른 약속은 다 취소할테니 만나세.” 하지만 이번 한 번 뿐이라며 짐짓 생색을 낸다.
술좌석에서 “계장님” 하고 술잔을 권하면 “이 사람아 술맛 떨어지게 계장이 무언가 윤형이라고 불러 윤형이라고.” 이렇게 시작한 분위기는 참으로 좋았다. 그때만 해도 큰 식당에서는 으레 술 시중 드는 아가씨가 하나씩 옆자리에 앉게 마련이었지만 같이 술이나 권하고 먹었지 봉사료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는 옆에 앉은 아가씨를 누이동생 대하듯 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니 단골집 같으면 서로 옆에 앉으려고 했다.
술이 거나 해져서 노래라도 부르게 되면 그는 들국화라는 유행가를 불렀다. 눈을 지그시 감고 “누가 만든 길이냐 나만이 가야 하는 슬픈 길이냐” 하면서 애절하게 부를 때 보면 눈이 젖는 것 같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무슨 사연이 그리 깊으냐.”고 다그쳐도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는 낭만주의자고 휴머니스트였다.
단조로운 오후에 다른 사무실 여직원이 우리 사무실에 와 일을 보고 가려고 하면 옆으로 불러 세우곤, 손을 잡으며 “미쓰 ㅇ은 보면 볼수록 예뻐, 까만 눈 오뚝한 코” 하며 그 여직원의 예쁜 곳을 말하며 “나의 구원의 여성이여, 내 나이 십년만 젊었어도 목숨을 걸었어.” 그러면서 “우리 뽀뽀 한 번 할까!” 하고 앉는 시늉을 하면 여직원은 기겁을 하며 손을 빼고 도망을 가곤 했지만, 그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여직원은 없었다. 한 날은 내가 먼저 앵무새처럼 똑같이 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나는 안 된다고 한다. 왜 안 되느냐고 했더니 총각이 그러면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나?
내가 다른 기관으로 전출 갈 때 송별회 자리에서였다. 내 손에 금반지를 끼워주면서 회자정리라 어쩔 수 없지만 어디 가든지 금처럼 귀하신 몸 금처럼 귀하게 사시라고 정표로 준다고 했다. 나는 지금 여유롭게 사는 것이 윤형의 그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가끔 생각한다.
그 후 나는 서울에 살게 되어 ㅊ시는 잊고 지내던 어느 날 ㅊ시청 동료가 찾아왔다. 그곳 소식을 묻던 중 윤형의 안부를 물었더니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만큼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살면 스트레스도 없었을 것 같은데, 그것이 의사들의 말도 비껴가는 하늘의 뜻이라면 하늘이 야속할 따름이다. 윤형, 저 세상에서도 그 성품대로 편하게 사시길 빕니다.
* 하 전
충북 옥천 출생, 본명 조성호, 1996년 ≪수필공원≫ 가을호 「겨울산사에서」로 추천,
한국문인협회 회원, (주)샤인 시스템 고문
도망간 엄마
임 정 란
일요일 저녁.
한 아이와 엄마가 있다. 엄마와 아이가 이별을 할 시간이 되었다. 아이가 떼를 쓰며 울까봐 가슴이 아픈 엄마는 아이와의 이별을 너무 힘들어한다. 이 애처로운 이별을 돕기 위해 나는 아이를 방으로 데리고 가 컴퓨터에서 나오는 재미있는 동요를 틀어주며 아이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엄마는 아이 몰래 살짝 집에서 빠져 나간다. 오늘도 나는 아이를 엄마에게서 떼어내는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아이가 한참을 놀다 지겨워졌는지 엄마를 찾는다. 엄마는 가고 없는데 말이다.
드라마에서 본 듯한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 집에선 매주 반복되고 있다.
“엄마 !”
나는 엄마를 부르며 문을 열고 나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 가며 엄마가 없음을 인식시켜 주고는 아이의 반응이 궁금한 나머지 아이에게 질문을 던진다.
“효정아! 엄마 어디 갔지?”
“도오망......”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아 두세 마디의 짧은 단어로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는 두 살 난 어린 조카에게 엄마를 물으니 도망이라고 말을 한다. “도망”이라는 단어를 아이가 어떻게 안 것일까?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아이가 대답한 말이 신기하기만 해서 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주말에만 잠시 왔다가 다시 사라져 버리는 엄마가 조카의 눈엔 도망간 엄마로 기억되는가 보다. ‘도오망...도망’을 몇 번 되뇌이는 아이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 엄마의 품에서 크지 못하는 조카. 그런 조카의 얼굴을 보면 내 마음도 쓸쓸해져, 조카를 꼬옥 안아주며 따뜻한 엄마의 품을 느끼게 해 준다. 나의 품이 엄마의 품처럼 크고 넓지는 못하지만…
요즘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육아문제가 맞벌이 부부들의 가장 큰 골치거리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게 골치거리가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의 사회 현실은 육아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기에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대부분의 직장여성들은 아이를 친정 혹은 시댁에 맡기고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하는데, 이같이 가족한테 아이를 맡기는 경우는 축복받은 케이스이다.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탁아시설도 많지 않는데다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긴다는 건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고민 끝에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게 된다. 한 설문조사에서 여성의 45%가 사회생활의 걸림돌로 육아문제를 꼽은 것은 이러한 사회현실을 반영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저 수준의 낮은 출산율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낮은 출산율은 사회의 열악한 시스템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렸다. 아이는 낳는 게 문제가 아니라 키우는 게 문제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는 직장여성들의 외침에 정부가 귀를 기울여 보육비 지원 등의 각종 정책을 내 놓고는 있지만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불충분한 것 같다. 육아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한 여성들은 아기를 낳는 일을 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저출산으로 인한 급속한 노령화는 생산력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경제발전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래를 책임질 일꾼이 없다는 현실은 생각만 해도 암울하다.
나는 도망간 엄마라고 말하는 아이가 너무 불쌍해 보여, 엄마는 도망간 것이 아니고 회사에 간 것임을 알려주려고 몇 번씩 아이에게 연습을 시켰다. 참 고맙게도 아이는 내가 가르쳐준 단어를 기억하고 있었다.
“효정아! 엄마 어디 갔지?”
“회사!”
“그래, 엄마는 효정이에게 맛있는 “까까”와 “우유”를 사주려고 돈벌러 회사에 갔단다.”
“아이고 예뻐라. 우리 효정이 너무너무 똑똑해”
아이가 단어의 의미를 알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고 말하는 것인지 아리송했지만, 일단은 도망간 엄마가 아닌 회사에 간 엄마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망간 엄마”란 단어가 왠지 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육아문제를 꼬집는 아이의 외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도 아프고 안타깝기만 한데,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맞벌이 엄마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지금 당장 어떠한 해결방안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아직은 미혼인 나에게, 그리고 사회생활을 계속 하고픈 내게 육아문제는 벌써부터 머리를 아프게 한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을 때에는 도망간 엄마의 모습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뿐이다.
김장하기 힘드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집집마다 치뤄야 하는 큰 일 중에 하나가 김장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옛날에는 김장 하는 일이 동네의 큰 행사처럼 여겨져 이웃 아주머니들과 서로의 집을 오가며 김장 하는 일을 함께 했었다. 요즘처럼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이 많지 않아 집 앞마당에 땅을 파고 장독대를 묻는 일도 김장철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요즘도 김치는 땅에 묻어야 제 맛이 난다며 한참 인기를 얻는 김치냉장고 대신 직접 장독대를 땅에 파묻고 김치를 담그는 집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저장을 해 두어야 김치 맛이 좋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김치를 좋아하는 내게 김장 하는 날은 특별한 날임에 틀림없다.
올 해도 변함없이, 김장 하는 특별한 행사를 시작하였다. 다른 집들이 다 김장을 끝난 후에 시작한 우리 집의 행사는 조금 늦게 시작된 편이었다. 배추 가격이 폭등하여 한포기에 무려 이천오백원이나 주고 배추를 구입하였다. 배추도 이것저것 살펴보니까 가격이 조금 싸다 싶은 것은 무게가 가볍다거나 속이 덜 찬 느낌에 그냥 바닥에 내려놓게 된다. 몇 군데를 돌아보고 산 우리 집의 배추는 속이 꽉 찬 것이, 묵직하고 단단해 보였다.
“그래...배추는 이런 걸로 사야 김치 맛도 좋은 거구나…”
배추를 사고, 김장할 때 넣을 각종 야채를 산 후 집으로 돌아와 배추에 살짝 칼집을 내어 네 쪽으로 나누었다. 나중에 썰어 먹기 좋게 하기 위해 나누는 것이란다. 김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추를 절이는 것이라는 엄마의 말씀에 배추를 절이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도 안 되고, 또 너무 오랜 시간을 두면 배추가 푹 절여져 사각거리는 맛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어느 정도를 절여야 적당히 절이는 것인지, 또 소금의 양은 얼만큼 넣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런 것 때문에 김장 하는 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후쯤 절인 배추는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김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절여진 모습을 드러내었다.
배추 속에 집어넣을 양념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았다. 찹쌀을 끓여 찹쌀 풀을 만들고, 각종 야채를 썰고, 마늘과 생강을 찧은 후 고춧가루와 소금 등 여러 가지 양념을 함께 넣어 간을 맞추었다. 나는 옆에서 마늘을 찧는 걸 도와주다 팔이 아파 믹서기로 마늘을 갈아서 넣으면 편한데 왜 이렇게 직접 힘을 들여 마늘을 찧느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믹서기로 갈면 마늘의 매운맛이 날아가서 직접 찧어야 좋다며 마늘대에 찧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셨다.
절여진 배추에 물기를 쫙 뺀 후 만들어 놓은 양념을 가져다 배추 속에 양념을 넣기 시작했다.
“엄마, 잘 했나 한번 봐 주세요”
엄마는 내가 넣은 배추 속을 보다가 군데군데 양념이 빠진 것을 보고는, 배추 속에 양념을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넣어야 간이 잘 배어 맛있다고 지적해 주셨다. 나는 얼른 비어있던 배추 속에 양념을 더 넣고는 맛있어 보이는 배추 한 잎을 떼어 맛을 보았다.
“아, 이 맛이야, 배추가 사각거리는 것이 너무 맛있다”
몇 잎을 떼어 먹으니 입안이 얼얼해져 먹는 것을 중지하고 다른 배추를 가져다가 본격적으로 김치를 완성해 나갔다. 김치 통에 하나씩 담아 김치냉장고 안에 가득 채워 넣었다. 엄마는 이제 걱정이 없으시다며 좋아하셨다. 엄마한테는 그동안 김장을 안 담근 것이 꽤나 신경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추위에 떨며 밖에서 김장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따뜻한 거실에서도 김장하는 걸 직접 체험해 보니 왜 이리 팔 다리가 쑤시고 아프던지. 김장을 다 마치고 나니 저절로 “.아우, 김장하기 힘드네!”라는 소리가 나온다.
* 대전 출생, 충남대 경제학 석사, 한밭대 경제학과 조교, Jungran@hanbat.ac.kr
가을에 보내는 마음
하창순*
매년 자연이 화려한 단장을 할 때가 되면, 나는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젖어든다. 그러면서 가슴 한 곳에 물안개 피어오르듯 알 수 없는 마음의 흔들림과 아픔이 함께 찾아온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지나간 추억이 그리워서일까?’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다 보면 어렴풋이 가슴 저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곤 한다. 그 소리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명료해진다. “지난날 가슴가득 채워주었던 스쳐간 수많은 마음들에게 못 다한 보답 때문일 것이라고.” 내 마음은 그럴수록 점점 선명하게 다가오는 하나의 추억에 멈추곤 한다. 그것은 바보 같은 한 친구의 보석 같은 마음을 여태껏 보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긴 여운을 남겨준 마음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해 가을, 예상치 않게 3개월 동안이나 긴 병상에 누워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상태에서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관심도 없었고 지루하기만 한 나날을 보낼 때였다. 그저 몇 권의 책을 읽는 것 외에는 모든 것에 무감각했다. 어느 누구와 대화를 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문득 병실 창가의 화병에 꽂힌 들국화 몇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 이전에도 꽃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도 그 다음날도 꽃이 바뀌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화병 속의 꽃을 새로 단장하고 있는 간호사에게 “병원에서 누가 저 들국화를 매일 꺾어 오나요?”라고 물었다. 그때 간호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병원에서 꽃을 꺾어 준비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누가….”
“며칠 전부터 어느 친구 분이 부탁을 하셨어요.”
환자가 묻지 않으면 굳이 말하지 말고, 그냥 꽂아만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회복 상태를 묻고는 말없이 돌아가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가 들국화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한 달이 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국화 몇 송이를 아무런 전언도 남기지 않고 간호사 편에 전달해주고 만나지도 못하는 면회를 매일 다녀갔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기에 상채 쪽 침대부분만을 약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매일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침대 윗부분을 올릴 수 있는 만큼은 다 올려서 그 친구가 올 무렵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하루의 소중한 일과이자 희망이었다. 그럴 때마다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에 젖어 그의 모습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멀리 돌아가는 뒷모습만 물끄러미 볼 따름이었다.
말없이 와서 들국화 몇 송이 전해주고 조용히 되돌아가는 그 마음의 여운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적셔 주었고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희망으로 이끌어 주었다. 또한 오늘을 살아 갈 수 있게끔 해주는 내 마음의 영양분이 되었다.
그 후에 퇴원을 하고 그 친구를 찾았지만 이미 유학을 떠난 뒤였다. 나는 가슴 깊이 간직했던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를 하지도 못한 채 만날 수조차 없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그 마음이 왜 이렇게 그리운지 모르겠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에 잠기다 보면 오고는 하는 가을이었다.
그리움의 마음과 그때 다하지 못한 고마움의 말을 지금 늦었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친구야 비록 조촐한 들꽃이었지만 그 꽃 속에 담긴 너의 마음은 너무도 크고 밝았지. 간절한 마음에 진한 여운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아. 그때 그렇게 따뜻한 마음이 헛되지 않고 이렇게 영글어 있단다. 그 들꽃 한 잎 한 잎에 담겨진 그 마음이 사랑의 여운 되어 흩날리고 있다.”고.
이렇게 이 지면을 빌어서 내 마음을 가을의 향기에 실어 보낸다.
요즘같이 화려한 선물을 주고받는 풍요로운 문화의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그때 그 들국화 몇 송이만큼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 없어서인지, 그 꽃송이 송이에 담겨진 친구의 간절한 마음이 너무나 커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도 이렇게 가슴이 아파온다. 나는 지금도 가을이 오면 그 친구를 기억하며 가을을 맞이하고, 가을을 만들어 가고 가을을 떠나보내는 추억의 되새김을 변함없이 연중행사로 치루고 있다.
* 하창순
경남 남해 출생. 건양대 심리상담치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