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지사 나들이
김 순 길
봄 내음이 온통 대지에 물씬 풍기는 2010년 4월 21일.
겨우내 웅크리고 추위에 지친 가슴을 열고 우리 문예 동호인 16명은 경북 김천 직지사로 나들이를 갔다.
전날만 해도 승용차 몇 대에 나누어 타고 금산 홍도화 축제를 보러 갈 예정이었는데, 생각지 않게 교정에 우리를 싣고 갈 큰 대형버스가 떡 버티고 있어, 출발부터 안심되고 한껏 마음이 가벼워 상쾌했다.
우리는 차안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앉아 10시 쯤 교정을 빠져 나와 유성 인터체인지로 들어섰다.
차 창밖을 보니 날씨도 예비한 듯 산뜻하다. 도로 변에 만발한 벚꽃은 긴 겨울 모진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듬고 매만진 매무새를 한껏 펴 보이듯 야릿하고 정초한 자태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오늘 참 잘 때를 맞춰 오셨군요…….”
“내가 가장 예쁜 미소로 화답하지요?”
여리고 곱다란 여인네가 얼굴에 연분홍 연지곤지로 단장하고 생긋 웃어 보이듯 화사한 미소로 반겼다.
차안에서는 글쟁이들이라 글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L여사, K씨 누구 하나 질세라, 흘러간 노래부터 가곡에 이르기까지 어찌 그리 재주가 많은 지 일일 가수 저 귀퉁이로 밀어내는 실력파들이었다.
더욱이 30대부터 70대까지 연령의 폭이 큰 멤버들 모임인데 …… .
“나이야 가라! 우리는 같은 길을 걷는 동호인이다. 한데 어우러져 마음껏 놀아보자.”
하기야 옛 선인들이 주안상 차려놓고 풍류를 즐기며 시 한수 읊어대고 또 한잔 기울이고 시조창을 불러 됐으니 그 피 받은 후손들, 그 끼가 어디 가겠는가?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을 듯 노래 가락에 만취되어 즐기다 보니 어느새 차는 직지사 공원 앞에 다다랐다.
길가에는 음식점이 즐비하게 있어 주인들은 손님들을 불러댄다.
“우리집으로 퍼떡퍼떡 오이소”.
“안으로 드이소”.
“맛있는거 억수로 많데이”.
공원에 들어서니 보랏빛 얼굴을 띤 할미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고 다소곳이 피어있는 모습은 옛 할머니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처럼 허리 굽은 할머니 모습으로 돌아가려니…….”
군데군데 세워진 조각품은 심오한 내면과 선의 조화를 통해 육중함을 느끼게 했고, 특히, 러시아인인 석 나래자(Suk Na La Za)(Seek Nadezhda)씨의 ‘한국의 여인상’은 우리네 옛 어머니의 모진 세파에 시달리고 험준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사랑으로 품고 관용하는 모습을 정교하게 나타내어 보는 이를 감동케 했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옆 양쪽에 시비가 14개 정도 세워져 있어, 큰소리로 낭송하고 감상하며 메마른 욕기를 흡족히 채웠다.
특히, R여사의 낭랑한 목소리로 천상병의 「귀천」 시 낭송은 평소 내가 좋아하던 시 인지라 더욱 감회가 깊었다.
귀 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나는 어디로? 무엇을 향해가고 있는가? 지금의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순간이었다.
공원 맨 위 자리엔 白水 정완영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수(白水)란 고귀한 기품을 담은 청명한 물이 유유히 흘러내린다는 뜻으로 자연과 아름다운 삶을 노래한 시조 시인 白水 정완영이 깨끗한 물 오염되지 않는 물이 되어 세상을 정화하고자 했던, 그의 고향 김천에 세워진 문학관으로 총 7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시관에는 그에 창작 시집, 대표 시조를 비롯하여 문인과의 교류, 창작 모습, 탁본 체험까지 정교하게 전시되어 있어 정완영 선생님의 생애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가 창가에 자리하고 앉으니, 창문 밖 길가엔 벚꽃이 만개하고 꽃잎은 바람에 휘날려 흐르는 강물을 수놓아 유유히 떠내려간다.
“저 먼 곳으로 떠내려가는 꽃잎아!
하루에도 몇 번씩 눈앞에 아른거리는 님의 모습을 달랠 길 없어 맨발로 성큼 달려가 덥석 품에 안기고 싶어도 허공에 그림자 뿐!
오직 한평생 님만을 사랑했노라고 목이 터져라 하늘 끝에 닿도록 외쳐도 메아리 뿐!
전할 길 없는 이 마음을 고이실어 전해 주렴…….
가도 가도 이 땅 끝까지 가도 없거든 바람타고 하늘로 날아서 님의 가슴에 전해 주렴…….”
한상 가득히 차려진 산채 나물을 단숨에 비우고, 2층 홀을 전부 독차지한 우리 일행은 젓가락 숟가락으로 장단 맞춰 두들기니 없던 흥도 절로 난다.
다소곳이 옆에 앉자있던 OOO는 타령에 맞춰 넘실넘실 춤을 추워대니 묵은 체증 뚫리고 약수가 솟아나와 기운이 절로 난다.
돌아오는 동안도 흥타령은 이어졌고, 오늘의 인솔자인 이 교수는 키도 크고 마음씨 넓기로 유명한 호남인데, 사람 다루는 재주도 뛰어나서 뒤에서 백댄서로 분위기 띄우니, 안 될 것도 없는 오직 하나 된 분위기, 마음과 마음이 더욱 밀착되는 것 같다.
어깨에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모든 족쇄 풀어 제치며, 쪼들린 가슴을 활짝 펴니 세상에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가장 즐거운 나들이였다.
수평선 불빛
강 인 구*
저 멀리 수평선 불빛
누굴 사랑하듯, 또 누굴 시샘하듯
파도처럼 너울거리며 쉴새없이 반짝인다.
서해안 황금빛 저녁노을의 化身인가
난파된 실종어부 혼백의 불빛인가
아래로 아래로만 명멸하는 붉은 낙화의 무리
그것은
장신포 장군석의 코피여
신시도 임씨할머니의 피눈물이요.
내초도 황돼지의 찬란한 금빛이여
장자도 장자할머니의 한 맺힌 불빛이라.
그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통한 서린 불꽃이며
오룡묘 제신당의 신위의 촛불이라
고군산 팔경, 仙境에서 노니는
춤사위요 불꽃놀이라던가
수평선 저 불빛은
모래밭 소년의 희망의 불씨처럼
예나 제나
너울거리는 파도처럼 온밤을 새우며 뒤척이고 있다.
生과 死
김 창 유
살아 나가려고 몸부림치던 낙지가
펄펄 끓는 냄비솥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밭둑에 덩달아 피어났던 잡초들이
부지런한 농부의 낫질에 사정없이 베인다.
졸음운전으로
애마 같은 마이카가 담벼락을 받아
기름피가 낭자하다.
참으로 눈 깜짝할 순간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갈림길이다.
그토록 어렵사리 생겨났건만
돌아갈 적에는 그토록 허망하고
서럽도록 잔인하다.
희망과 가쁨으로 왔다가
아쉬움과 슬픔을 남기고 간다.
그런데도 마치 영원할 듯 속고 사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
술 이야기
김 윤 희
십부능선을 넘나드는 술잔 속의 애물
혹여, 이걸 다 들이마시면 그리던 님이 쳐다는 볼까
툭, 건드려 보고 싶은 유혹
애증을 섞어 만든 투명한 액체를 보며
하나 둘 저물어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
툭, 건드려 보고 싶은 유혹
사랑도 연애도 잔 속에 가둬보지 못한 건
바라보기만 해서 그렇다나
툭, 건드려 보고 싶은 유혹
천사 같은 그녀
강 명 순
2005년 3월. 내가 대학에 입학한 그해 봄에는 매일 매일이 전쟁터처럼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딸아이도 유치원에 입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나는 신학기를 맞아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았고, 또 아들 학교의 임원이 되면서 말 그대로 매일 매일이 전쟁이었다.
아들이 9살, 딸이 6살. 이제 막 유치원에 입학한 딸아이는 한 달 동안은 적응기간이라고 해서 점심도 안 먹고 12시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딸아이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일을 하고도 일은 산더미 같은데 순식간에 12시가 되어버리곤 했다. 딸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매일 매일 폴짝 폴짝 뛰면서 돌아와서는 하루 종일 종알종알 거렸다.
오빠에 비해서 무엇을 하든 즐겁고 행복한 딸아이는 하루 만에 유치원에 적응해 빨리 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너무도 잘 적응하는 딸은 새벽같이 일어나 유치원에 간다고 가방을 둘러메고 서두르는 반면, 오빠는 깨워도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딸아이보다 큰 애 때문에 더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나날이 반복되면서 나도 학교에 적응하랴, 학습관 모임과 스터디에 나가랴 하루가 이틀인 것처럼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딸아이의 유치원 적응기간이 끝나면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2시 30분으로 늦춰졌다. 나도 그 즈음, 학교 출석수업 때문에 하루 종일 수업을 받아야 했는데, 정작 아이들을 맡길 때가 없어서 무척 애를 먹었다. 3일을 꼬박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2시 30분이면 오는 딸과, 3시면 오는 아들을 어디다 맡길까 노심초사 하다가 하루는 친구네에서, 또 하루는 딸 친구네에서, 또 하루는 남매끼리 집에서 보내게 했다. 그렇게 3일을 수업을 다 듣고서는 그저 미안하고 고마움에 아이들을 돌보아 준 친구에게 작은 성의 표시를 하러 가기도 했다.
나도 학교에 적응해 가면서 공부에 신경을 써야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아이들을 챙겨가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아직 제대로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출석시험과 중간고사를 치르고, 기말고사를 준비하면서 수박겉핥기식으로 대충 공부하다보니 점수도 나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바쁘다보니 내내 조급하고 불편한 마음과 아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과락이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며 여름방학을 맞아 홀가분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낸 것도 잠시, 시간은 왜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가는지 방학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2학기 출석수업이 잡혀서 또 다시 시간에 허덕이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다시 아이들을 친구네에 맡기자니 미안하고, 그렇다고 3일씩이나 아이들끼리만 집에 두자니 걱정이 되었다. 큰 아이는 좀 커서 그렇다쳐도 작은 아이까지 큰애가 돌보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어서 출석수업을 들으러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그것이 최대 고민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즈음, 딸아이랑 유치원에 같이 다니는 지연이라는 친구가 옆 아파트에 살았는데, 매일같이 그 친구랑 붙어 놀아서 그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 때였다. 유치원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지연이 집으로 달려가서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는데, 언제인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서 전화를 걸었더니 벌써 지연엄마가 아이들 저녁까지 먹이고 더 놀다가 간다고 하면 그때 전화를 할 테니 데리러 오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렇게 내가 데리러 가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출석수업이 있는 3일간도 어쩌다보니 지연이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출석수업과 시험 때도 그랬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험기간에도 그랬다. 우리 딸과 지연이가 친하게 지내도 막상 지연엄마와는 쉽게 친해지지가 않았는데, 딸아이의 왕래로 내가 그 집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지연엄마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연이 밑에는 4살 된 여동생이 있었는데, 엄마가 둘째에게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하는 시기에 큰아이가 힘들게 할 때면 오히려 우리 딸아이가 와 줘서 큰 아이와 함께 놀아주니 더 고맙다고 했다. 둘이서 너무 잘 놀아서 신경을 안 써도 되니 자연적으로 둘째에게만 신경 쓸 수 있어서 오히려 자기가 더 감사할 때가 많다고 말해주는 지연엄마.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지연엄마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참 미안했다. 내 공부한답시고 내 가족도 아닌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미안함에 정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나도 지연엄마에게 잘 한다고 했지만, 지연엄마가 나를 도와준 것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또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역시나 새 학기도 바빴다. 또 다시 전쟁 아닌 전쟁이 시작되었고, 작년보다 조금 나아진 것이 있다면 내가 1년을 공부해 본 결과 조금의 노하우와 적응력이 생겼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 문제는 과제로 남아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남편이 조금만 일찍 퇴근하고 와서 나를 도와주었더라면 그렇게 친구네와 지연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까지 공부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남편은 뭐가 불만인지 내 공부에 대한 믿음도 없었으며 도움을 전혀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기간만 되면 늦게 들어오고, 시험 보러 가는 토요일이나 일요일마저도 출근을 해 버려서 아이들을 두고 시험을 보러가야 하는 나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었다. 그래서 시험 날, 딸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시험을 보러가기도 했었다. 5살까지만 아이를 받아주는 학교 놀이방에선 딸아이가 크다는 이유로 받아 주지를 않아서 얼마나 진땀을 뺐던지, 시험 볼 시간은 자꾸만 다가오는데 놀이방에 두느냐, 마느냐로 실랑이를 해야 하는 그 자체가 정말 짜증이 났었다. 잠깐의 배려와 편의를 해 주지 않는 학교 측에도 불만이 있었지만, 당장 딸을 어디에 맡겨야하나 싶어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던 그때의 그 난감하고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화가 난다. 그때를 생각하면 남편보다 오히려 친구와 지연엄마,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더 많이 도와 준 셈이었다.
본의 아니게 딸아이가 지연이 집에서 잘 지내다보니 나 또한 편한 마음에 그 시간을 활용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고, 아들은 조금 컸다고 그래도 딸아이보다는 덜 걱정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했기에 죄인 아닌 죄인처럼 그렇게 지연이 엄마를 대하면서 조금씩 공부가 힘겨워질 때 쯤, 지연네는 돌연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까? 참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동안의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괜한 자격지심에 ‘우리 때문에 힘들어서 이사 가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 동안 너무 염치없이 지연이 엄마의 도움만 받고 그 보상도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너무 서운했던 것은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대전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간다고 말은 했지만, 우리 때문에 힘겨우니까 어쩌면 아저씨가 일부러 대전으로 가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한 마음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그제서야 내 마음을 표한답시고 선물을 사 들고 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왜 그리 마음이 불편하던지 나의 이기심에, 그리고 도와주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원망과 멀리 시집와서 그 흔한 형제들도 하나 옆에 없고, 친한 친구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한 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고 한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연엄마가 대전으로 떠나고 난 그때부터 나는 마음에 짐을 지고 살았다. 그때의 고마움을 제대로 표하지도 못하고 내 이기심에 흘려버렸던 시간들이 못내 아쉽고 미안해서 내내 불편한 감정을 안고 살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지연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힘겹고 혼란스러운 그 시기에,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그 천사 같은 마음에 깊이 감사드린다. 아이들 때문에 알게 되어서 그렇게 살갑게 친해지지는 못했어도, 나보다도 한참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씀씀이는 하늘같았던 그녀. 내 미안함에 늘 괜찮다며 미소로 답했던 그녀. 화내는 모습 한번 본적 없고, 웃지 않는 모습 한번 본적 없는 그녀. 그렇게 늘 천사 같고 온화하고 상냥했던 그녀에게 나 오늘에야 마음 터놓고 이야기 해 본다.
"지연엄마, 그때 정말 고마웠어요. 지연엄마 아니었음 제대로 공부도 못하고 졸업도 못했을 텐데, 지연엄마 덕분에 편하게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미안해요. 그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던 거. 그땐 너무 미안해서 늘 고개 숙이고 가슴 졸였던, 그러면서도 내 이기심과 욕심을 저 버리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가 됩니다. 천사보다도 더 천사 같았던 지연엄마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거에요. 고마워요!"
뒤늦게 시작한 공부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내 현실이었다. 공무만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닌 현실의 내 삶은 그만큼 소중했고, 절실했다.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공부를 할 땐 과연 누구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인가? 하고 내 공부에 대한 회의도 느꼈었는데, 뒤돌아보니 지난 모든 시간들이 추억이 되었다.
이제 졸업을 하고 보니, 지난 4년 동안 힘겨웠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내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아이들, 지연엄마, 학교선배, 멀리서 끊임없이 격려를 해 준 친정엄마……. 힘겨울 때마다 내게 힘을 실어준 그들을 생각하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격려와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들의 화이트데이
어제가 화이트데이였다. 유년시절, 특별한 날에 대한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어서인지 나이 사십을 넘기고 나니 생일, 크리스마스, 화이트데이 같은 기념일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그냥 형식일 뿐, 그 날에 대한 기대감이나 설레임, 기쁨이나 행복감도 그리 크지 않았고,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똑같은 일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챙겨주는 특별한 날에 대한 무반응은 예의가 아니며, 또한 그렇게 습관이 들어 버리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게 된다는 혹자의 말에 정말 기다리는 척, 기쁜 척, 행복한 척 가끔은 연기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먼저 신경써서 챙길 것이 많은 엄마와 아내라는 위치 때문에 책무감으로 하기도 했다. 나이의 무게만큼 기쁨과 행복이 반감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무감으로 행동해야 하는 씁쓸함은 그리 반갑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비록, 큰 기쁨과 행복으로 늘 챙기지 못한다고는 해도 항상 잊지 않고 모든 행사를 챙기는 꼼꼼함은 나 스스로도 대견하게 여기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발렌타인데이….남편과 아들에게 초콜릿을 사서 선물을 했던지라, 어쩌면 화이트데이 때 사탕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탕을 안 받고 안 먹어도 상관이 없었다. 초콜릿과 사탕이 모두 살찌는 것이고, 다이어트의 적이다 보니 나에겐 그리 반가운 선물이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이왕 사 줄 거면 사탕보다 초콜릿으로 사 달라고 말했다. 사탕보다 초콜릿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제 날짜에 맞춰서 초콜릿을 사 주었는데, 아들은 저녁 늦어서야 막대사탕을 여러 개 포장해서 사 가지고 왔다. 그런데, 엄마와 동생에게는 막대사탕을 주면서 다른 손에 들려진 선물봉지 속의 알록달록한 예쁜 사탕케이스 두 개는 그대로 들고 있었다. 누구에게 주려고 샀느냐는 물음에 아들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왠지 조금 서운함이 앞섰다. 벌써 이만큼 컸구나. 엄마보다 여자 친구를 먼저 챙기는 아들이 되었구나. 엄마는 늘 곁에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존재로만 인식되어서 좋은 선물을 해 주기에는 돈이 아까운 그런 존재, 조금 서운하긴 해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이성을 더 챙기는 나이로 성장했다는 것이 그저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어제 저녁에 사온 예쁜 사탕을 여자 친구에게 몰래 전해 줘야하는데,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줄 수도 없고, 겨우 생각한 것이 새벽같이 학교에 가서 사물함에 넣어 놓는 것이었다. 평소에 7시 20분에 일어나서 8시에 학교에 가는 녀석이 오늘따라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는 7시가 되기 전에 학교에 간다고 가방을 둘러메고 나섰다. 지각을 할망정 아침은 꼭 먹고 가는 녀석이 오늘따라 배가 아파서 밥을 못 먹겠다며 그 소중한 아침밥도 뒤로하고 새벽같이 학교에 간다니 그 열정과 노력이 참 가상했다. 더욱이 눈꼽도 안 떨어진 나는 밖에 비도 오고 해서 아들을 학교에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먼저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왜 사탕이 두개니? 한 아이한테 주는 것 아냐?"
"몰라요. 엄마는 몰라도 돼요."
"......"
갑자가 머리가 찌끈 찌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몰라도 된단다.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어떻게 전해줄까 고민하다가 잠도 설치고 신경을 써서 배가 아파 밥도 못 먹고 새벽같이 학교에 가는 아들이 안쓰러워 일부러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수고를 하는 엄마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저 빨리 가서 아무도 몰래 전해주는 것밖에 머리 속에 없을 아들이 좀 서운했다.
교문 앞에 내려달라는 것을 아무도 없으니 학교 안에까지 데려다 준다며 중앙문 앞에다 세워주니 "고마워요." 한마디 하고는 부리나케 내린다. 그런데 너무 일찍 와서 그런지, 문이 잠겨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정작 교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는 아들을 보고 어떻게 할거냐고 물으니 "엄마는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가세요. 어서요."라며 빨리 가기를 재촉해서 할 수 없이 뒤돌아 나왔다. 백미러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뒤돌아 나오는 내 마음이 참 씁쓸했다.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 벌써 이렇게 엄마의 존재가치가 줄어드는 것이 조금은 서럽다. 나도 누군가의 귀한 딸이고, 아주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는데,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서글펐다. 조금은 빨리 무거운 마음을 비워가야 할 것 같다. 서운한 감정을 오래 오래 붙들고 있으면 내 마음이 많이 아플 것 같기 때문이다. 가끔 이렇게 서운하게 하고 아들에게 조금은 무시당해도 그래도 나에겐 늘 소중한 아들이고, 예쁜 아들이고, 대견한 아들임에는 틀림없다.
거실 장식장 위에 놓인 액자 속에서 해맑은 모습으로 웃고 있는 백일 된 아들. 그 아들이 너무 예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기 때부터 클래식전집을 사서 틀어주고 책을 읽어 주고, 자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사진에 담기도 아까워 스케치북을 꺼내 아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던 나. 간밤엔 쉽게 잠이 오질 않아 아들이 애기 때 좋아했던 동화책들을 꺼내서 읽었다.
"이 책은 우리 아들이 정말 좋아했던 책인데, 이 책도, 이 책도……“
그러면서 밤이 깊도록 아들의 손때가 묻은 동화책을 보면서 몇 권을 가지고 나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들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어제의 서운함도 잊고 아침을 먹는 아들 앞에 앉아 책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 이 책들 생각나? 이거 네가 애기 때 제일 좋아했던 책이었는데……“
"그래요?"
책 한 권 한 권을 펼쳐서 아들이 제일 좋아했던 대목을 읽으면서 예전에 엄마가 읽어주던 그 억양대로, 아들이 따라 했던 그 억양대로 흉내를 내니,
"아~엄마, 그만하세요." 하면서 웃는다.
그 웃는 모습이 왜 그리 사랑스러운지, 애기 때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기억나지? 이 책, 이 대목. 엄마가 하도 많이 읽어 줘서 네가 좋아하는 대목을 다 외워서는 매일 그 부분을 읽으며 좋아 했었어. 어제 문득, 이 책들을 보면서 우리 아들, 그때의 예쁘고 사랑스럽던 때가 떠오르지 않겠니?"
"그랬어요? 저도 조금씩 생각나요."
"엄마는 그때 생각하면 우리 아들이 지금도 너무 예쁜 거 있지?"
오늘도 난 팔불출에, 해바라기 같은 엄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