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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필 】
노래는 시에 날개를 달고
김 명 녕*
무르익은 봄 햇살이 온 세상을 쓰다듬고 어르니까 이곳저곳에서 달콤한 노래잔치가 벌어진다. 살랑살랑 부는 실바람에 풀잎이 나울나울 나부끼고 연초록 나뭇잎이 사르르 일렁인다. 잔잔한 파도에 출렁이는 돛단배처럼 보드랍게 흔들리는 푸나무의 리듬에 맞춰 어릴 때 부르던 동요가 콧노래로 흘러나온다. 짙은 아카시아 꽃향기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 홀려 바람결을 타고 콧속으로 쪼르르 달려온다.
아카시아 향내에는 입술이 새파랗게 물들도록 따먹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스미어 있다. 새참이라도 에울 양으로 몇 줌씩 따서 꾸역꾸역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까르르 웃던 소꿉동무들이 그리운 참에 그 때처럼 멀리서 뻐꾸기노래마저 은은히 들려오니 가슴이 촉촉이 젖어든다.
울타리를 휘감은 장미덩굴에는 새색시시절에 아내가 “저런 집에서 오순도순 살아갈 행운이 우리 앞에도 닿을까요?”라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울타리를 지나면서 가만가만 소곤거리던 말이 아늑하게 서려 있다. 그 집에서 그 때 흘러나오던 ‘바위고개’ 노래만 없을 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울타리에는 붉은 장미꽃이 해마다 소담스럽게 핀다. 장미꽃 울타리가 쳐진 집을 동경하던 아내의 소박한 순정은 세월에 몽땅 떠내려가고, 각시의 꿈과 티가 어린 고운소리만 방금 들은 말처럼 내 귀에 생생하게 살아서 숨 쉰다.
아치형을 이루며 울타리를 뒤덮은 초록 장미넝쿨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아름답다. 여러 해 뒤엉켜서 얼키설키 배배꼬였지만 이상야릇하게도 짜임새는 매우 조화롭다. 우거진 덤불을 헤치고 붉은 꽃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쏙 내밀고 올몽졸몽 피기 시작한다. 꽃말처럼 빨간 봉오리에는 순수한 사랑이 뭉쳐 있고, 활짝 핀 꽃에는 열정과 기쁨이 넘쳐 보인다. 방긋방긋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탐스럽게 핀 꽃들이 금세라도 ‘장 폴 마르티니’가 작곡한 이태리 가곡 ‘사랑의 기쁨’을 합창할 기세다.
대학에서는 곰비임비1) 쌓인 온갖 행사가 5월에 많이 벌어지므로 숨 돌릴 짬도 없이 하루가 세차게 여울져 흐르기 일쑤다. 내가 현재 운영을 책임진 평생교육원에서 몇 개 과정이 잇달아 현장견학, 전시회, 발표회 등을 벌이는 날은 온종일 분주히 쏘다니게 마련이다. 거기에다 밤이 이슥하도록 담당교과강의까지 겹치면 그날 밤은 긴 병을 앓은 겅더리된2) 몸이나 진배없이 요에 닿은 등짝이 쪼개져나간다. 그렇게 바쁜 생활도 성이 차지 않아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나는 오늘 ‘노래는 시에 날개를 달고’라는 옴니버스강좌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노래한다. 한 달 전에 한국가곡과 이태리가곡을 한 곡씩 연주해 달라는 프로그램 담당교수의 제안을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선뜻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학예회를 앞두면 며칠 전부터 왠지 조바심이 났고, 연습이 끝나면 같은 또래들과 괜스레 좋아서 앙감질3)로 달려가며 날뛰었다. 들썽거리는 마음으로 날짜를 손꼽아 헤아리던 동심은 세월 속에 곰삭아서 온데간데없고 요즘은 발표가 닥칠수록 긴장의 거품만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오늘 노래마당 손님은 낯이 익든 설든, 우리대학 재학생과 교직원뿐이므로 마음이 푹 놓인다. 그렇지만 첫 출연자인 내가 뚝배기 깨지는 소리로 무대를 열어 분위기가 엉망진창 되면 도파니4) 내 탓이므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팔짱 낄 일만도 아니다. 그래서 자못 몸과 마음을 다스릴 요량으로 열흘 전부터 이따금 마시던 술도 뚝 끊고 즐거운 마음으로 틈틈이 악보와 씨름하며 지내왔다.
출연자마다 바빠서 공연을 앞두고 예비 연습한 적도 없고, 합창곡인 ‘사공의 그리움’마저 시연(試演)한 적이 없다. 이제부터 두 시간 전에 함께 리허설을 갖는 것이 고작이다. 나를 제외한 출연자들은 이태리 또는 러시아에서 유학하고, 국제 성악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하고, 큰 무대를 좁은 뜰처럼 숱하게 휩쓴 성악분야의 대가들이다. 리허설하면서 들어보니 지레 주눅이 들만큼 소리세계에 조예가 깊은 성악가답게 각자 소리빛깔도 곱고, 무대에서의 몸놀림도 매우 자연스럽다. 개교기념행사라 마지막에 출연자가 모두 제창하는 교가나마 돋보이게 잘 부르면 좋은데 그마저도 혼자 차지할 몫이 아니다. 자주 부르는 나 못지않게 그들도 잘 부른다. 이제 믿을 구석이라곤 알량한 솜씨지만 나만의 독특한 소리빛깔로 연주하는 길밖에 없다.
리허설이 끝나고 연주회가 시작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나볏한5) 몸가짐에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무대로 나선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앞서 몸을 풀 듯 한국가곡을 먼저 부른다. 전주곡이 흐르는 동안 몸을 가볍게 흔들며 즐거운 표정으로 총장님을 비롯하여 동료 교직원과 재학생들로 가득한 관중석을 살펴보면서 인사한다. 프로그램제목과 단오가 며칠 남지 않은 절기에 어울리게 ‘그네’를 골라 그네 타는 모습을 바라보거나 발판을 힘껏 구르는 기분을 살려서 노래한다. 연주가 끝나자 손님 중에 내가 가르치는 전자공학과 학생들이 많으므로 박수소리도 크고 여기저기서 “브라보!”하고 불쑥불쑥 외치는 소리도 많다. 해설을 맡은 교수가 그네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공명이 잘 이뤄진 훌륭한 연주라고 아낌없이 칭찬한다.
출연자들이 한국가곡을 한 곡씩 뽑으면서 관중들이 차츰 예사스럽지 않은 노랫소리와 몸놀림에 빠져든다. 이어지는 외국가곡에서도 내가 가장 먼저 출연하여 이태리 칸초네를 부른다. 공과대학 교수답지 않은 노래솜씨에 관중이 사로잡혀서 반응이 뜨겁다. 이태리에서 공부한 성악가와 조금도 다름없는 발음에, 훌륭한 발성이 놀랍다는 담당교수의 해설에 또다시 박수갈채가 터진다. 연주프로그램이 모두 끝난 뒤 사회자가 출연자 중 유일한 본교 재직교수로서 관중에게 소감을 말하라고 요청한다. “음악과가 없는 대학에서 수준 높은 음악회가 열리는 감격, 짬짬이 익힌 발성으로 세계적인 훌륭한 성악가와 나란히 노래하는 환희, 관중의 반응이 매우 좋은 감동이 어우러져 가슴에서 눈물이 흐릅니다.”라고 느낀 대로 말한다.
시는 글 또는 낭송이나 낭독을 통해서도 옮겨가지만, 노래로 날개를 달면 훨씬 더 넓은 세상을 오랫동안 나풀나풀 날아다니면서 뭇사람의 가슴을 파고든다. 온 세상이 즐겁게 노래하는 가운데 오늘 벌어진 노래잔치가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곱게 수놓아지기를 바라며 캠퍼스의 뒷동산에 오른다.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나지막한 고갯길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트레킹(trekking)코스다. 푸나무 사이로 뚫린 고즈넉한 길에는 늘 지성인들의 향내가 감돌면서 찾는 이를 사색하도록 이끈다.
덤부렁듬쑥한 숲에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무대조명으로 여기고 까투리를 불러 모으는 장끼의 아리아연주가 멀리 울려 퍼진다. 몇 마리가 번갈아 한가락씩 뽑는 아리아 중에 유난히 둔탁한 덜께기6)소리도 섞여 있다. 조금 전 무대에서 부른 내 노래야말로 영락없는 덜께기솜씨로 여겨져서 혼자 쑥스러워 웃는다. 그러나 닦은 재주를 죄 부리고 공연이 끝났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한 마음에 커다란 날개가 돋아 휘파람새의 노래를 부르며 저녁노을이 곱게 물든 하늘 높이 시원스레 훨훨 날아간다.
* 어휘해석
1) 곰비임비 :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겹치는 모양.
2) 겅더리되다 : (몹시 앓거나 심한 고통을 겪어서) 몸이 매우 파리하고 엉성하게 되다.
3) 앙감질 : 한 발은 들고 한 발로만 뛰어 걷는 짓.
4) 도파니 : 이러니저러니 여러 말 할 것 없이 죄다 몰아서
5) 나볏하다 : (됨됨이나 태도가) 반듯하고 어엿하다.
6) 덜께기 : 늙은 장끼(수꿩).
* 충주 출생, 공학박사, 한밭대 교수, 수필집 『달리면서 만나는 세상』, 『달릴수록 넓어지는 세상』, 인터넷 문학상(문학사랑),
한국농촌문학상 대상(농림부장관) 수상, mnkim@hanbat.ac.kr
며느리의 혼수
손 중 하*
아들이 혼기가 차서 장가를 보내고자하니 여기저기서 혼처가 들어왔다. 어떤 며느리가 들어올지 걱정이었다.
신혼 여행길에 돌아오며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신혼부부도 있다고들 하고 사소한일로 다투다가 이혼을 하기도하고, 과거의 경력 때문에 이혼을 하기도 하며 어떤 며느리는 시댁식구 보기 싫어 시금치도 먹지 않는다는데…….
이웃의 한 친구는 며느리들 사이가 좋지 않아 우의가 좋던 형제간의 사이마저 벌어지게 하여 아예 며느리들 얼굴도 보기 싫다니 나도 그런 며느리들을 맞을까 걱정이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혼수가 적어서 이혼을 당하기도 하고 선남선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랑 측 부모의 지나친 혼수의 요구로 파혼을 했다는 기사를 보고 참으로 놀란 적이 있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판검사 또는 의사의 아들을 둔 사람은 열쇠가 세 개라느니, 시어머니 혼수품으로 몇 천이나 되는 보석함이나 밍크코트가 어떠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땐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하기야 판검사 아들을 두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아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여보, 당신은 며느리에게 혼수로 무엇을 받고 싶지?”
행여 밍크코트라도 받고 싶다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웠는데 아내의 대답은 의외였다. 받고 싶은 것이 손거울이란다. 이유를 물으니 거울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읽고 헤아려 주었으면 좋을 텐데 마음을 볼 수 있는 거울이 없어서란다. 아내의 소원대로 신부가 가져오는 혼수의 손거울은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거울이었음 좋겠다.
어느 날, 자식 녀석이 스물여덟이 되어 결혼을 할 얼굴이 예쁘장한 규수하나를 데리고 집에 왔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새 식구를 맞는 기쁨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 내외는 자식이 선택한 배우자라면 그가 어떤 모습이던 간에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사위를 맞이하건, 며느리를 맞이하건 서로의 욕심이 왜 없겠는가. 학식도 인물도 품위도 갖춘 규수라면 더더욱 좋겠지만 그런 것은 시집와서 갖추어 나가도 시간은 늦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그가 긍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조건도 수락할 마음이었다.
양가의 상견례가 끝나자 며느리 될 규수는 우리와 더욱 가까워졌고 우리는 아들 때문에 딸 하나를 덤으로 얻은 기분이었다.
어느 날 며느리 감이 혼수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넌지시 물어왔다. 조금은 당돌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요즘 아이답게 직설적이고 감출 것 없이 그저 솔직한 모습에 호감이 갔다.
며느리 감이 입을 연다.
“아버님, 어머님, 혼수로 무엇이 좋을까요?”
드디어 우리에게도 혼수라는 말이 귀에 익어 들어왔다.
그 혼수라는 말이 참 재미있고도 조금은 무어라고 표현 못할 양쪽집안의 부담스런 단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 네 생각은 무엇을 혼수로 가져오고 싶은데?”
며느리 감에게 되물으니 더욱 난감한 표정이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 혼수를 해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다시 물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혼수를 해 올 수 있니?”
예비 며느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너무 비싼 것은 어려운대요.”
“세상에서 가장 비쌀지도 모르는데….”
며느리 감은 더욱 난감한 표정이다.
“이왕이면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해 오거라.”
“아버님, 저희 집 형편이 좀….”
“집 형편이 어려워도 꼭 해 와야 하는데…….”
며느리 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조금 더 두면 그 고운 얼굴에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다.
“지금부터 네가 해올 혼수를 말 해 줄 테니 가능하면 해 오거라. 첫째, 사랑을, 둘째 서로에게 줄 배려를, 셋째, 네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오너라. 특히 네 이름을 잘 포장해서 가져오너라. 그 외에 너그러움도 덤으로 가져오면 더욱 좋고.”
그렇다. 이름이야말로 그가 태어나면서 부모가 소중히 지어준 이름이다. 그 이름을 늘 소중히 기억하고 산다면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 믿어서 이름은 더욱 잘 포장해서 혼수로 요구 했던 것이다.
주회암치가요결(朱晦菴治家要訣)에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어진 사위만 가릴 것이고 많은 폐백은 찾지 말 것이며, 며느리를 구할 때에는 숙녀만 구하고 많은 혼수를 꾀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내 혼수 요구도 너무 값진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 며느리들이 시집와서 4~8년씩이나 되었다. 나는 며느리들이 해온 혼수를 지금 하나씩 꺼내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가 해온 혼수라고 내 마음대로 꺼내볼 수는 없는 일이다. 며느리가 마음을 열 때 들여다볼 뿐이다. 그가 언제쯤 빗장을 걸어 마음을 닫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늘 열려 있기를 바라며 그 안에 덤으로 가져온 혼수가 많기를 조용히 기도 해 본다.
* 충남 금산 출생, (전) 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2006년 ‘ 한국농촌문학상’ 수상, jhson1971@hanmail.net
콘도 같은 인생
김 기 태
나이가 40세를 넘으면 不惑이라고 한다. 그 말은 살아온 경험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있고 자기 가치관에 따라 바르게 행동하라는 교훈적인 의미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무렵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50세도 안 되었으니 “10년도 안 남은 삶에서 무슨 큰 욕심을 가지고 살아야하는가?”라는 자조 섞인 말로 들리기도 한다.
지금은 식생활이 개선되고 의학이 발달해서인지, 아니면 자동차처럼 주행거리가 적으면 출고된 시기가 오래되어도 탈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생활환경이 기계화되어 과중한 육체노동에서 해방되어 일어나는 현상인지 모르지만, 불과 100년 전과 비교해 봐도 사람들은 오래 사는 편이다. 이제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70을 넘어 80으로 가고 있다. 회갑잔치가 없어진지 오래되었고 칠순도 건너뛴다. 주변에서는 팔순잔치를 해야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은 인간의 평균수명과 무관하지 않은 세상 풍습이다.
지금의 40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많은 일을 해야 되고, 욕심껏 돈을 벌어야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도 있고, 쓰고 남은 돈 절약해서 노후자금을 마련해야 안심도 된다. 사람이 재물 앞에서 바르게 설 수 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므로 40세를 不惑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15세가 넘으면 瓜年한 딸을 두었다고 옛날 부모들은 결혼시킬 걱정을 했는데, 지금은 30세를 넘어도 결혼할 생각을 안 한다. 건강이 좋아져 50세가 넘어서도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는 시대가 되었다. 60세를 지난 사람이 평생교육원에 등록하여 자신의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이런 사회적 흐름에서 불혹의 나이는 70세쯤은 넘어야 맞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일을 찾아, 열정 하나로 30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다, 이제는 퇴직하고 자유인으로 지내보니, 산다는 일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직장에 다닐 때는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았고, 삶의 경쟁에서 우위를 지키기 위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며 겁 없이 살아오기도 했다.
“당신만 믿어!”라는 사장님 말씀에 “예, 사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평생 충성을 맹세하면서 삶의 희열을 느꼈고, 때로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선택받은 삶을 사는 것으로 알았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룬 승리로 즐기는 기쁨이 나에게 주어지는 삶의 보너스로 여기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것은 모양새 있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었으며 우리 가정을 지키는 가장의 위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세상을 보니 “참 별거 아닌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그 목표가 삶의 전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이루고 나면 그것도 별거 아니다. 재물도 가져보기 전에는 돈은 하느님의 마음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어느 정도 손에 넣어보면 속 썩이는 일이 또 생긴다. 명예를 얻는다며, 할 짓 안 할 짓 다 하면서 자리 보존을 위해 양심을 뛰어넘어 윗사람에게 과잉충성하다, 오랏줄에 묶여 TV 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게 된다. 자식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인간으로 힘들게 닦아놓은 길이 하루아침에 인생의 끝자락으로 추락하는 현장이다.
나이가 드니, 이런 일들이 한 켠으로 비켜서서 보면 별 의미 없는 일로 보인다. 사는 문제는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욕심 부리지 말고 맞춰 살면 되는 것이다. 돈이나 명예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달래는 과자부스러기로 생각하는 나이가 되면, 그런 것도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부질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잡다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우고 살다보면, 제일 먼저 내 몸이 느끼는 것은 해우소에서의 편안함이다. 오늘 내 건강함이 가장 큰 행복으로 느끼는 순간인 것이다.
사장이면 어떻고 전무면 무엇하리, 모두가 죽으면 顯考學生府君인데...
하던 일에서 손을 털고 물러서는 나이가 오면 모두가 아저씨다. 과거의 직함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알아주는 이도 없지만 구태여 알릴 필요도 없다. 때로는 세상인심에 서운함이 밀려 올 때도 있다. 마음을 다스리며 평온을 찾아보지만 가끔 울컥하고 올라오는 울분도 있다. 그런 때는 다혈질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혈기 왕성하고 성질 급한 분이 대통령으로 국가를 통치하다 가장 친한 40년지기 친구에게 그 자리를 인계하니, "백담사는 안 돼!"라고 한번쯤 말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 친구 첩첩산중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만 들리는 백담사로 보내면서 자기는 청와대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으니 “인간적으로 얼마나 많은 울분을 삼키며 고함을 질렀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분도 현실에 잘 적응하며 건강하게 오래 사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인생은 콘도 같은 것이다. 예약하고 찾아간 건물에는 편히 쉴 수 있는 방이 있고 음식을 만들어 즐겁게 먹을 수 있는 시설이 있어, 함께 찾아간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다. 그저 먹을 재료만 가지고 가서 콧노래 부르며 함께 해먹고 예약된 시간이 되면 다음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치워주고 미련 없이 좋은 추억만 보듬고 떠나야 하는 콘도처럼 사는 것이 인생이다. 콘도는 내가 주인이 아니다. 다만 예약된 기간 동안 사용료를 지불하고 잘 지내고 떠나는 것뿐이다.
한평생 모은 재산이 등기부에 기재된 소유주가 나로 되어 있고, 예금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실명제가 되어 그것이 내가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살면서 잠시 관리하는 것 뿐이다.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누군가에게 명의변경이 되어 다른 주인이 나타나 또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는데 죽는 날까지 조금이라도 더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생활하다 써보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우를 범하게 된다.
장성한 자식들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니,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그 자리에 사랑을 담아 이웃을 보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 이용하고 즐긴 모든 것들을 제 자리로 돌려놓고, 그동안 열심히 살게 해준 사회에 감사하며 보람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어릴 적 3월 溫洞풍경
60여 년 전, 내가 태어난 溫洞은 순하고 착한 사람들이 포도송이처럼 붙어 정겹게 살아가는 충청도 서해안 끝자락에 자리한 산골마을이었다.
굴뚝에선 한가롭게 연기를 뿜어내는 초가집의 맞배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마당에는 겨우내 배불렀던 소가 몸을 풀어 얻은 송아지와 함께 햇빛사냥을 하곤 했다. 개울가에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버들강아지는 악동들의 손에 의해 피리가 되어 봄을 알리는 전령사이기도 했다. 3월에는 시골 처녀의 가슴에 울렁증만 불어넣고 溫洞 굴을 빠져나온 기차가 숨 가쁘게 서울을 향해 달려가고, 뱃골 저수지를 가득 채운 물은 겨울 내내 숨을 죽이고 아랫녘 신검과 장구지 들판에 모내기를 위한 물줄기를 열기 위해 고른 숨을 쉬었다.
툰드라 지방에서 몰려온 칼바람이 深洞과 月峰의 장구봉, 고라당을 지나 온 동네를 휘저어 사람들을 사랑방에 꽁꽁 묶어두면 마을사람들은 땅 속에 묻어둔 김치 독에서 동치미를 꺼내 가마솥에서 갓 삶아낸 속노란 고구마와 함께 찢어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따스한 온돌방에서는 끝도 없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서해바다를 숨 가쁘게 달려온 습기 먹은 구름이 마을 곳곳에 많은 눈을 쏟아 붓고 지나갔다.
눈 덮인 산야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노루는 허기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시래기에 유혹되어 사람들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려들곤 했다. 애기 울음 같은 노루의 울부짖음이 들려올 때쯤 동네부엌에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고구마를 넣고 불을 지펴 엿을 만들고 엿 고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지면 동네 바둑이들은 자기 세상 만난 듯 뛰어다녔다.
날씨가 풀려 초가집 위에 있던 눈이 녹아 궂지락 물이 떨어지면 처마 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冬安居에 들어갔던 고향마을에 봄이 다가옴을 예고하였다.
뱃골 저수지를 타고 훈훈한 봄바람이 올라오면 마늘밭에 겨우내 덮어 두었던 짚을 걷어내고 소가 깔고 자던 곰삭은 두엄을 덮으면서 농사일이 시작되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가수 박재란 씨의 ‘산 넘어 남쪽에는 누가 살길래’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연속극 ‘부모’가 많은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던 시절이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라디오와 채널이 고정되어 KBS 방송만이 케이블을 타고 각 동네로 들어오는 유선방송이 전부였던 시절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십리 밖 바닷가 눈들 장구지에서 나무하러 올라온 사람들이 하루 종일 마련한 나무를 지게에 가득지고 4~50여 명이 일렬종대로 내려가는 모습이 줄어들면 겨울이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꾸미와 도다리가 담겨있는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산간 우리 동네까지 팔러와 쌀과 콩으로 바꿔 돌아가는 구수메 아주머니가 보이면 그 날 저녁에는 봄 도다리가 식탁에서 봄소식을 전했다.
황갈색의 소들에게 겨울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등허리에 덕석을 입고 비좁은 외양간에 기거하며 짚과 건초에 겨를 넣은 쇠죽으로 근력을 보강하는 계절이었다. 그러던 소가 밖으로 나와 “움~메” 하며 새끼를 찾는 소리를 내면 불어오는 봄바람과 어울려 겨울잠에 취해 있는 새 싹들의 잠을 깨웠었다. 한겨울 먹고 싼 배설물이 소의 궁둥이에 달라붙어 볼품없는 몸이 되었지만 봄이 오면 털 가리를 하고 그동안 보강된 근력으로 무장한 3월의 소는 어깨가 뭉치고 궁둥이가 까지도록 주인을 위해 일할 준비를 했다.
집 주변에서는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대나무 숲을 “휘-잇! 휙” 하고 날쌔게 들락거리고, 겨울동안 논에 넣은 두엄에서는 소똥과 짚이 썩으면서 열이 발생하여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러면 어디서 언제 왔는지, 겨우내 먹을 것이 부족하여 배가 고팠던 우렁이들이 모여들어 즐거운 만찬장으로 변했다.
설날부터 가지고 놀던 방패연을 액메기로 날려 보내고 심심해진 악동들은 눈 녹은 냇가를 따라 몽우리지어 물이 오른 버들강아지를 꺾어 톡톡 두들겨 껍데기를 쭉 볏겨 끝을 직각으로 잘라내고 피리를 만들었다. ‘호떼기’ 라고 불리던 버들피리는 악동들을 들판으로 나오도록 유혹했으며 때로는 손을 호호 불며 개구리 알을 떠서 검정고무신에 담아 누가 많이 잡았는가를 내기도 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곡갱이로 칡뿌리를 캐려 다니다 보면 얼었던 땅이 녹아 고무신 주변에 황토 흙이 달라붙고 냇가에 앉아 찬 물에 빨래하던 어머니의 꾸지람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봄바람에 신이 나는 것은 동네 꼬마들이었다.
제일 먼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기차 길을 따라 학교를 다니고 쇠가 열을 받으면 늘어난다는 선생님 말씀을 철로 레일에서 확인하며 돌아와서는 논둑에 있는 새앙도 꺾어 먹고 쑥과 냉이를 캐서 집으로 가져오면 쑥국에 개떡으로 저녁 식단에 봄맛을 알렸다.
울 엄니 한 겨울 밤잠을 설치며 왼손에 모시를 머리 틀듯 말아 입으로 째고 짼 모시를 쩐지대에 걸어 한 올씩 뽑아 무릎위에다 열심히 비벼 삼았다. 쩐지대를 떠난 모시가 광주리로 옮겨져 하나는 베틀로 올려지는 날줄로, 또 하나는 씨줄인 꾸리로 모습이 변한다. 날 줄로 탄생하는 모시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마당에 왕겨로 된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시를 하나하나 대나무로 가늘게 만든 바디의 좁은 사이를 통해 도투마리 끝자락에 고정시키고 모닥불이 피어있는 위로 통과하면 할! 鍛 어머니는 서로 마주보며 아주 숙달된 교관과 조교처럼 모시에다 솔로 콩가루로 만든 짓가루를 묻혀 연신 발라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시는 베틀에 감아지고 한 올 한 올 북 안에 들어있는 꾸리에서 나오는 씨줄로 베틀 위에서 3일 동안 엄니의 솜씨를 발휘하면 할아버지도 손 못 대는 울 엄니 비상금이 생기는 38척의 모시 한필이 탄생하였다.
이때 모시를 짜는 房안이 건조하기 때문에 방 한 켠에 자리를 걷고 흙을 부은 후 밭으로 옮겨 심을 고구마쫑을 박아 싹을 튀웠다. 그리고 고구마쫑에 새순이 잘 자라도록 주기적으로 물을 주기 때문에 방안에 습도가 올라가서 모시 짜는데도 수월해진다.
설을 보내고 집안에 군것질 할 것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어머니 모르게 고구마쫑 박았던 것을 캐 먹다 들켜 혼나던 일도 있었는데…
이제는 소 대신 기계화된 농기계가 일을 하고 시커먼 연기를 품어대는 경운기 소리만이 들녘에 울려 퍼진다. 젊은 사람은 모두 대박을 꿈꾸며 도시로 떠난 지 오래 되었고 허리 굽은 노인들만 동네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비탈진 산길 사이로 나무 짐을 지고 내려오며 노래 부르는 나무꾼도 볼 수가 없고 베틀 위에서 모시 짜며 부르는 어머니의 콧노래도 들을 수가 없다. 시골에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긴지 오래되어 호떼기 부는 꼬마들의 버들피리소리도 고구마쫑 캐먹다 혼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때는 살기가 힘들어도 사람 사는 정은 있었는데…
한평생 일을 찾아 전국을 돌며 고향을 잊고 살았지만 이제 고향 근처에 둥지를 틀고 살다보니 3월이 되면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간다. 그곳에는 항상 울 엄니가 계신다.
* 고향 사투리
1. 고라당 : 골짜기
2. 궂지락 물 : 지붕 위에 눈이 녹아 떨어지는 낙수물
3. 유선방송 : 새마을 사업이 일기 전 라디오 보급이 안된 시절에 면소재지에서 방송시설을 해놓고 전선을 동네까지 연결하여 집집에 스피커를 달아 청취하게 한 시설로 한 달에 방송중계료를 받았으며 채널 선택을 불가하고 소리 조정만 가능한 시설.
4. 덕석 : 겨울에 소를 보온하기 위해 짚으로 만든 소 외투.
5. 액메기 : 액막이.
6. 호떼기 : 버들피리.
7. 곡갱이 : 단단한 땅을 파는 농기구.
8. 새앙 : 봄에 논두렁에서 자라는 식물로 단맛이 있음.
9. 모시를 째고 : 모시를 가늘게 쪼개고
10. 쩐지대 : 넘어지지 않도록 나무 받침에 대나무 기둥을 박고 위 끝부분을 새 입처럼 만들고 그곳에 쪼갠 모시를 걸어 한 올 한 올씩 빼내 연결하기 위한 도구.
11. 비벼 심다 : 침을 묻혀 무릎 위에 모시 가닥을 놓고 비비서 연결한다.
12. 베틀 : 날 줄로 된 모시를 베를 짜기 위해 도투마리에 연결하고 씨줄로 베를 짜기 위한 도구.
13. 꾸리 : 모시를 누에고치형태로 만들어 쉽게 나오도록 한 씨줄.
14. 바디 :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그 사이로 모시를 통과하게 만든 기구.
15. 도투마리 : 날 줄을 감는 드럼.
16. 짓가루 : 모시에 풀을 입힐 때 사용. 재료는 콩가루와 물을 혼합해서 만듬.
17. 북 : 꾸리를 담은 케이스.
18. 고구마쫑 : 고구마를 심기 위해서는 순을 키워 그 순을 잘라 밭아 꺽 고지로 심는데 이때 순을 키우기 위해 심는 고구마 종자.
* 溫洞, 대전 둔산 3동 거주, 글지이, 부름새, 달림이. 刻장이, 토장이, 온동마을 촌장, blog.daum.net/ondong.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다니는 재즈의 도시 뉴올리안즈
강 명 수*
미국 북부의 끝에서 남부의 끝 도시까지의 종단은 횡단 못지않게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참으로 광대한 땅을 가진 나라다.
북부 미시간 렌신에서 네 구간에 걸쳐 자동차로 이동해 오하이오주 콜롬버스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 여를 걸려 루이지나주의 뉴올리안즈시에 도착하였다. 북부의 을씨년스럽고 쌀쌀한 날씨와는 달리 남부지방의 날씨는 화창했고 4월말이라 햇살이 따끈할 정도였다.
관광 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다지 크지 않은 공항은 한산하였고 재즈 도시답게 트럼펫의 선율이 부드럽게 들려온다.
택시를 타고 관광의 중심지인 프랜치 쿼터지역의 버본 스트리트로 향했다. 조그마한 여관에 여장을 풀고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앞 골목을 돌아보았다. 레스토랑과 선물가게가 즐비한 버본 스트리트는 자동차로 통제하는 6m 정도의 도로인데 우리나라에서 60년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1, 2층 구식 슬라브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어 초라하고 낡은 변두리 슬럼가 골목 같은 전경이었다. 이곳이 밤이 되면 그 유명한 재즈의 선율이 흐르는 유명 관광지라는데 명소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고객들을 유치하려는 듯 스피커에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식당이나 가게건물들은 흑인이나 가난한 부두노동자들이 살았던 온통 오래되고 칙칙한 것들로 오히려 이런 것들이 부유한 미국에서 보기 드문 명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재즈라는 흑인들의 애환이 담긴 음악은 이렇게 가난한 남부의 변두리에서 들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인지…
아무튼 전통 건축물들은 전혀 아니지만 일본 교토의 ‘기온 거리’처럼 낮에는 인적이 드문 작은 골목길이 어딘가 쓸쓸하고 황량한 것이 닮은 꼴 이었다.
기온거리에서도 전문 사진사들이 골목길을 찍는 모습을 간혹 보았는데 이곳에서도 작품사진을 담아내려는 몇몇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도심에서 이렇게 황량한 골목길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 거리가 밤이 되면 날이 새도록 재즈 선율이 흐르는 공간으로 바뀐다니 길모퉁이의 버본이라는 작은 철간판에서도 충분히 이색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거리를 걷다보니 “이런 것이 바로 빈티지의 매력이라는 것이었구나!” 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미시시피강이 뉴올리안즈를 끼고 돌아 바다가재나 큰 새우가 많이 잡혀 이것이 인기 있는 음식이라 한다. 식당에서 맛본 음식은 담백했고 가격은 높은 편이었다. 오후 3~4시경이라 식당이 한가해 나이가 꽤 들은 흑인 종업원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난 본토박이답게 지나가는 허름한 모습의 사람들과 손짓을 하며 인사를 한다. 그의 말투나 태도 같은 것이 북부의 흑인들과는 무언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옛 남부지방의 목화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일생을 보낸 ‘엉클 샘’ 같은 흑인 노동자의 후예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어딘가 기계적인 친절한 자세이면서도 손님인 나에게도 전혀 건성인 듯하며 대하는 마치 세상을 허공 쳐다보듯 하는 쓴맛을 달관한 노예의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식당 앞 좁은 골목길에서 관광객을 마차에 태운 백인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하며 지나간다. 그는 졸고 있는 듯하더니 말발굽소리에 하품을 하며 지나가는 마차를 무심히 쳐다본다. 그 눈은 “너희들이 이 지역을 얼마나 알겠느냐. 너희들이 재즈를 얼마나 알겠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고 다운타운의 전차정류소에서 연초록색의 낡은 전차가 운행되는 것을 보았다.
한 중년 흑인 여성에게 빨간색전차가 혹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라고 짧은 대답을 한다.
그러면 빨간색은 아닐지언정 전차의 이름이 ‘욕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차들’ 이겠다는 말을 건네니 그것은 “네 마음대로 생각하라!” 하며 어떤 이름을 붙이던 아무 관계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소설 속에서 ‘블랑세’는 주위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정원에서 칵테일파티나 함직한 흰 자킷과 진주목걸이를 한 차림으로 빨간 전차를 탔다. 그녀는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다시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타고, 여섯 정거장 째인 극락이라는 곳에 내리었다.
5월의 어느 초저녁, 동생 스텔라의 집에 간 그녀는 더럽고 퇴색한 동네에 산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스텔라는 뉴올리안즈는 살아보면 다른 도시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고 말하며 블랑세가 신경적인 불안정을 보이는 것을 느낀다. 블랑세가 타고 온 빨간 전차의 이름인 욕망과 허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정신 상태는 과거 베르레브라는 농장에 혼자 남아 발버둥치며 살아야 했던 생활에서 얻은 병든 것임을 보여준다. 그 농장에서 부모의 장례 때나 집에 온 동생에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꽃이 있는 장례와는 달리 거친 숨소리와 가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가족들의 처참한 죽음들을 목격했던 자신의 어려웠던 처지를 말한다.
오후 햇살이 유별나게 눈이 부신 뉴올리안즈의 다운타운에서 미시시피강 하류에 있는 프랜치쿼터로 가는 국방색 전차를 탔다. 그 전차는 근처 프랜치 쿼터에서 한 10여 분간 대기하길래 전차 안에서 그대로 앉았다가 뉴올리안즈 시내를 지나 변두리까지 발길 닿는 대로 가보았다. 예전에는 전철 노선이 몇몇 있었겠지만 지금은 단수 노선으로 일부 관광객(프랜치 쿼터까지 타는 것)과 남루한 옷차림의 흑인과 아시아계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 같았다.
소설 속에서 스텔라의 남편인 건장한 체격의 스탠리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노름과 술로 저녁시간을 보내는 동물적 환희를 인생의 중심으로부터 파생시키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가난한 백인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그곳은 유달리 남자들이 툭 터놓는 음담패설과 폭력적 생활감정이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었다.
얼마간을 타고 가다 소설 속 블랑세의 동생 스텔라집의 배경이 되는 듯이 보이는 어느 낮선 허름한 동네에서 내렸다. 그 동네는 아직도 카트리나 태풍으로 재난을 당한 피해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엉성한 목조 주택들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잔디도 많이 자라 폐허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블랑세가 내렸던 곳처럼 길 모퉁이를 바로 돌아서면 멀지않은 곳에서 흑인들이 흥을 돋우는 양철소리 흡사한 피아노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술집 악사의 음악이 어울리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다시 전차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 전차를 오랫동안 기다려도 영 소식이 없다. 해가 지기 전의 낮 시간인데도 동네 골목길에는 인적이 없고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텅 빈 도로를 보니 영 기분이 써늘한 감이 들어 오랜 만에 지나가는 택시를 간신히 잡았다.
다운 타운에 있는 ‘루이 암스트롱 공원’에 들렸다. 이어서 작년 태풍 때 천정이 날아갔으며 많은 수해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다던 ‘루이지애나 슈퍼볼 돔’에 갔다. 이 지역 사람들의 희망이었던 이곳에서의 수퍼볼 게임도 취소되는 등 불운을 겪었던 뉴올리안즈 풋볼팀은 이듬해 눈물의 역투를 벌이며 준결승까지 올랐으나 기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뉴올리안즈 시민들은 카트리나 피해보도로 퓰리처상을 받던 날 편집실에서 모든 기자들이 흐느끼던 뉴올리안즈 지방 신문사와 풋볼팀에 대해 연민과 사랑을 보여주었다.
저녁이 되자 버번 스트리트는 엉뚱하고 야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각 술집마다 라이브로 공연이 시작되면서 관광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술집들은 호객꾼들을 두고 손님들을 유혹하지만 음악을 제대로 하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재즈연주로 명성이 알려진 필립 스트리트에 있는 ‘프리저베인션’에 찾아 갔다. 낮에 돌아다니며 프랜치 쿠터 지역의 허름한 빈티지의 매력에 푹 빠졌는지 이곳도 외벽이 철로 되어 녹이 슬어있는 창고 같은 인상에 과연 뉴올리안즈의 최고의 ‘재즈바’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줄을 길게 늘어서 입장하려고 장사진을 친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이라 휴관이란다. 마침 그곳 뮤지션들이 연습을 하고 나오기에 당신네처럼 실력 있는 곳을 소개해달라고 이야기를 건넸다.
재즈의 고향이라는 뉴올리안즈의 흥에 취해보려는 마음이 드니 낮에 방뇨의 냄새가 났던 이곳 구닥다리 좁은 골목들이 은근히 멋이 있어 보여서 그런지 범생이 같은 백인관광객들도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걸어간다. 이러한 이색적인 환경에 한 번 빠지면 이내 적응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 것 같다. 밖에서 라이브 공연을 보려고 이 술집 저 술집을 기웃거리며 좁은 길거리에 술 한 병씩 들고 밤이 깊어가도록 이 거리의 분위기를 즐기는 그들은 재즈의 거인 ‘루이 암스트롱’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곳저곳의 술집들을 잠깐씩 들려보았더니 소올, 록음악 등을 연주하는 도심에 있는 일반 나이트클럽에 불과한 마치 관광객들의 하룻밤 객기만을 풀게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곳 거리에는 재즈는 없고 취객의 주머니만 노리는 백인 연주자들의 잡탕식 음악 무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마치 동숭동 대학로가 연극무대를 빙자해 음주와 가무나 하는 술집으로 한몫 보려는 꼴과 비슷하였다. 색스유곽도 몇 집에 하나 꼴로 있었다. 반 나체로 가게 입구에서 유혹하는 여성들과 학회와 세미나 차 온 듯한 화려한 넥타이를 매고 잘 차려 입은 점잖은 관광객들이 눈을 마주치며 몇 마디 나누고 들어간다.
소설 속에서 블랑세는 동생에게 폭력을 일삼는 스탠리를 두고 남녀 간에 일어나는 짐승의 욕망이나 가진 작자라며, 오래된 좁은 골목을 ‘왔다 갔다’ 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낡아빠진 전차 같은 것이라고 경멸적인 비난을 한다. 한편 블랑세와 스텔라가 어릴 때 살던 베르레브 농장의 서류를 빼앗으려는 스탠리는 농장은 이미 파산했고 모든 것은 압류되었으며 블랑세의 가방 속에는 낡은 서류뭉치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후, 욕정에 사로잡힌 스탠리는 복잡했던 블랑세의 타락한 과거를 들춰내고 심하게 경멸하면서도 그녀의 육체를 강제로 능멸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가장 슬픔이 뚝뚝 묻어 나는 사건을 만든 것이다. 스탠리에게 강제로 능욕을 당한 블랑세는 이 집은 ‘덫’ 이라며 빠져나가야 한다고 절규한다. 찰싹 붙은 공단 로브를 입은 그녀는 분명 미쳐가고 있었고 마지막 장면에 엠블런스로 정신병동으로 끌려가는 그 모습에는 안타깝도록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서려있었다.
이곳 버번의 거리의 수많은 인파 중 스탠리같이 폴란드 종자라는 열등의식에 빠진 동물적인 본성을 가진 종마 같은 인간도 있을 것이다. 블랑세 같이 음욕과 허영에 빠져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여자도 있을 것이다. 낮에 이곳 본토박이인 식당 종업원이 거리를 무심한 듯이 바라보는 눈빛이 생각났다. 이 거리에 재즈가 벌써 떠났다는 것을 알기나 하느냐고 말하는 듯한…
어찌되었든 이곳은 카트리나 탓인지 재즈가 소멸된 대신, 외로운 여행자에게는 욕망을 발산시키는 유혹의 거리이기도 하였다. 얼마간을 걸어 다니다 보니 한 모퉁이에 과거 이 지역에서 클라리넷과 트럼펫으로 이름을 날리던 명인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이 동네가 “무엇이 있긴 있었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대낮부터 밤이 늦어지도록 돌아다녀 심신이 지친 탓인지 이제 그들 대가들의 흉내라도 내는 술집을 찾아 편히 앉아 재즈 몇 곡을 들으며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명색이 재즈거리인데 무엇이 없겠나 싶어 열심히 십 여 곳을 살피고 들락거리다가 흑인 주자가 트럼펫을 연주하는 작은 술집을 찾았다. 그곳은 피아노, 클라리넷, 콘트라베이스, 드럼 등으로 구성된 유일한 정통 재즈 음악을 연주하였다. 실력을 평가할만한 귀를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연주를 마칠 때마다 괴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혼신을 다해 나팔을 불었고 건반과 북과 현을 뜯고 두드렸다. CD를 구입하며 무대에서 트럼펫 연주자에게 루이 암스트롱의 ‘원더풀 월드’를 신청했다. 암스트롱 같은 매력적인 허스키는 아니었지만 트럼펫 연주자가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 세상은 그야말로 ‘원더풀’이었다.
밖에 나와 길을 걸어가는데 2층 술집난간에서 관광객들이 이곳 거리의 상징인 아름다운 구슬목거리를 던져준다. 모르는 사람끼리 그날 밤 이곳에 찾아온 행운을 나누는 것이 내가 오늘밤 어디에 와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바로 이곳이 ‘뉴올리안즈’라는 것을…
그렇게 버번 스트리트의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에 일어나 어젯밤 거리를 나가 보았다. 어지럽혀진 거리를 흑인 청소부 몇몇이 열심히 치우고 있었다. 나는 건너편 길가에 쭉 이어진 갤러리와 앤티크 가게 윈도우의 그림을 보았다. 창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어제 밤 나름대로 어떤 문화적 향수를 받았는지 그림 한 편이 눈 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흑백의 그림 속에 안개 낀 새벽, 앙상한 나뭇가지를 헤집고 희끄무레한 미등을 켠 전철이 보인다. 전차가 떠나는 곳이 소설 속에 나오는 루이즈빌과 네슈빌 간의 철길과 강 사이의 달리 무언가 퇴폐적인 매력이 있는 그 거리일지도 모른다. 그림 속에는 동이 트기 전 비치빛의 푸른색이 아직 남은 새벽녘의 부드러운 여명 속에 전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있었다. 블루피아노곡이 멈춘 하층민이 사는 이 거리에서 한낮의 깊은 바다를 향해 블랑세, 그 욕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를 싣고 전차는 서서히 출발하고 있었다.
* 대전 출생, <충청신문> 논설위원, kms19522001@yahoo.co.kr
만원짜리 여행
김 현 종
지리산 바래봉에 갔었다.
1만원짜리 여행!
어떻게 지리산까지 갔다 오는데 만원에 될 수 있느냐고 하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낸들 아나? 신문 광고지에 그렇게 나왔거든. 만원이면 다 된다고. 신문에 끼워져 온 전단광고에 보니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이거 묻지마 관광 아냐?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일단 한번 가 보기로 하자.
우리 일행은 친구와 친구의 처, 나와 나의 처 도합 4명이다.
출발지로 안내된 장소를 찾아갔더니 차는 이미 와 있다. 45인승 버스로 15명 정도밖에 타지 않았는데 출발 시간이 되자 출발.
이동 중에 중년 안내양 아줌마의 멘트 요지.
“인원이 적어서 낭패다. 비가 온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예약을 취소했다. 사실은 업체의 협조를 받아서 가는 거라 만원이다. 많이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알아서 기기 바란다.”
건강식품 파는데 데려갈 것 같은 예감.
안 사면 그만이지 하는 독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지갑이 든 안주머니를 꼭 누르고 있었다.
추부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어느 이름 모를 녹용농장에 도착, 종업원과 사장, 운전수, 안내양의 집중 포화를 맞고 그만 2명의 일행 할머니가 거금 33만 원씩을 그들에게 쥐어주고 나자빠졌다. 그 덕에 나머지는 그들의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첫 전투를 무사히 마쳤다.
이어서 다음 격전지로 간 곳은 인삼가공공장. 여기서도 여종업원, 이사라는 자의 맹공에 우리는 순식간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아무도 산다는 사람이 없자 그들은 작전을 변경, 사장의 조카라고 자기 신분을 밝힌, 인물이 훤칠한, 전직 극장식 나이트클럽 엠시 정도로 보이는 전무라는 사람이 나타나 조명을 어두컴컴하게 하여 분위기를 잡은 후 원래는 30만 원짜린데 여기에 15만원 상당의 상품을 더 얹어 주겠다고 꼬드겼다. 결국 극장식 나이트클럽 깨나 가 봤을 한 아저씨가 그만 30만 원짜리 총알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이쯤에서 전투가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전투는 적들의 번득이는 전의로 장기전에 돌입하였고 우리에게도 마구 총알이 날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의 반격도 집요했다.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구매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강력하게 어필하면서 항전에 항전을 거듭했다. 이러기를 근 10여 분. 그러나 결국 우리는 값을 현저히 깎아주겠다는 적들의 협상안에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또 누구인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대차게 요구했다. 어차피 두 집에서 왔으니 2개를 살 테니까 절반 값에 달라고 했다. 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가당치도 않는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완강함을 보였다. 그러나 우리 역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싫으면 관둬라. 가겠다!
결국 그들은 우리의 배수지진 전법에 말려 2개를 1개 값에 팔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협박을 하고 난 후에야 매매를 종결했다. 이런 판매 내역을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말 것. 특히 먼저 산 그 아저씨에게 발설했다가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의 구매 내역을 적에게 말하지 말라?” 이순신 장군의 유언을 이런 상황에서 재현해 내다니!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결국 우리는 1만 원짜리 여행을 15만 원짜리로 업그레이드시켜 본격적인 지리산 등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로 물건을 사라는 소리는 없었다. 차는 그제서야 지리산을 향해 쌩쌩 달리기 시작했다. 이박사의 템포 빠른 차내음악 말고는 불편한 것이 없었다. 한식뷔페로 점심을 얻어먹고 바래봉으로 직행, 와아 그런데 웬 차가 이리 많지? 전국에서 모여든 관광버스가 100여 대는 족히 넘을 듯.
바래봉은 철쭉으로 유명한 산이다. 산 아래는 물론이고 중턱 이상에도 연붉은 철쭉이 온 산을 뒤덮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사람들이 교목 숲 사이를 밀치고 들어가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날이 좀 흐려 멀리까지 조망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3시간의 산행. 여자들은 절반도 못 오르고 기권. 나는 친구의 앞선 체력을 부러워하며 그래도 낙오하지 않고 정상까지 올라갔다. 오는 길엔 비가 제법 왔다. 우산을 가져가길 천만다행.
여행이란 모름지기 어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랑 가느냐가 중요하다. 마음 편하고 죽이 잘 맞고 타박 안하는 사람하고 떠나는 여행이 나는 좋다. 그리고 조금은 불편하고 좀 고생스럽기도 하고 모자라고 아쉬운 것이 더러더러 있는 여행이 오히려 좋다.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어 편안하고 안락하게 아무런 탈 없이 가는 여행은 맛이 없다.
좀 청승맞기는 해도 목적지나 기간 정도나 대강 정해놓고 정처없이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가보는 여행,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다.
* 대전 출생,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수필집 코똥도 안뀌는 놈(2009), kimkim7007@hanmail.net
도서관과 고서점
김 현 주*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아침부터 등줄기를 흥건히 적신다.
무얼 하려는 의욕보다는 무더위에 굴하지 않고 하루를 잘 견디기 위한 즐거운 일을 찾아본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정작 가을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과 싱그러운 바람의 유혹에 이끌려 다소곳이 책장을 넘기며 독서를 하기엔 무리인 듯하다.
오히려 요즘처럼 무덥고 후텁지근한 날씨에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고 짜증이 날 때면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이나 좋아하는 책 두어 권을 챙겨들고 도서관에 가 종일 책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인 듯하다. 더위도 잊고, 시간도 잘 가고, 마음의 양식도 두둑 해지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누구나 살아가며 가끔은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한다. 홀로 여행을 해보고 싶기도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곳에서 일상의 무서운 짐을 벗고 평화로운 휴식의 시간을 갖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매일 정해진 리듬에 따라 생각 없이 살아가다보면 그러한 일탈이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일상 탈출이 도서관에 가거나 고서점에 들르는 일이다. 도서관 열람실에 몸을 묻고 하루 종일 책을 읽노라면 난 어느새 여고시절 여름방학에 학교 지하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책을 읽곤 하던 꽃띠소녀로 돌아간다. 꿈 많고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이룰 것 같던 그 학창시절, 재미없는 공부를 하다가 서가에 꽂힌 고전이나 명작을 읽으며 꿈을 키우던 단발머리 소녀의 내가 거기에 있다.
이제 오십을 지나 인생의 황혼기를 향하는 지금, 그래도 삶을 지탱해주고 힘들고 어려울 때 좌절하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으로 재무장해 다시 살아 갈 수 있는 의지와 자신감을 갖게 한건 독서의 힘이었던 것 같다. 책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보다 먼저 살다간 수많은 인생의 선배들이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느끼고 체득한 지혜와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독서를 통해 그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배우며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고 축복이다. 나는 책을 통한 저자와의 만남으로 우리가 살아가며 일상에서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많은 지식과 정보와 생생한 경험담을 늘 접하다보니 친구가 별로 없는데도 외롭지 않다. 그저, 만나서 밥이나 먹고 카페나 커피숍에 앉아 수다를 떨다 헤어지는 공허한 만남 보다는 유익하고 선택적이며 스트레스 받지 않는 저자와의 만남이 내겐 훨씬 편안하고 뿌듯하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하면서 요즘 새삼스럽게 공부하는 재미가 생겨 다시 학교를 다녀 볼까하는 생각마져 든다.
책 속에는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많은 산 경험이나 인생의 교훈이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누구나 독서를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교양과 정보와 상식을 넓혀 가장 인간답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각자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가 다른 인간이 천편일률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 획일화된 지식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개인적인 비극이고 국가적으로도 의미 없는 낭비일 뿐이다.
나는 이 나라가 보다 성숙하고 잘사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부터 솔선하여 독서를 하고 문화의 가치를 높이 추구하며, 인성을 으뜸으로 여기며 존중하는 풍토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올바른 인성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게 어떤 것인지는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공식 행사 전에 모두가 공감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 한편을 낭송하고 시작하는 멋진 미래를 상상해 보는 건 나의 지나친 과대망상일까?
며칠 전, 필요한 책이 있어 고서점에 들렀다. 이제는 사양길인 헌책방이 거의 문을 닫고 몇몇 점포만이 그간의 명맥을 유지하며 쓸쓸이 거리에 남아 있었다. 전집 중에 누군가가 빌려가서 되돌려 주지 않아 빠진 책들을 찾아 채우거나 출간된 지 오래되어 서점에서 구입하기 힘든 책이 필요할 때면 나는 원동의 고서점을 들른다.
천정까지 빼곡히 쌓여 빈틈이라고는 거의 없이 온통 책으로 뒤덮인 헌책방이 나는 좋다.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고르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책 속에 묻혀 있게 된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누군가에게서 선물로 받은 정성어린 글이 담긴 책조차도 헌책방으로 도는 것이 있다. 그럴 때면 난 그 책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사람은 살면서 각자 소중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겠지만 난 무엇보다 책을 아낀다. 그래서 내가 산 책에는 반드시 나만의 이니셜을 꼭 표시해두고 읽고 나선 보관해 둔다. 두고두고 간직하며 내 손때 묻은 책과 함께 늙어가고 싶은 게 나의 작은 소망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친구나 연인이나 아님, 특별한 기념으로 선물 받은 책을 헌 책방에 내다 판 사람은 나만큼 책을 좋아하거나 아끼지 않는 사람일까? 아니면, 자신은 다 읽었으니까 누군가가 돌려 보라는 넓은 아량으로 내보낸 것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한참을 책을 만지다보면 손이 까맣게 먼지가 묻는다. 오랜 동안 주인을 기다리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인고의 세월을 보낸 흔적이 역력하다. 한 권 한 권 만지작거리다 보면 새 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감과 애처로움 같은 게 느껴진다.
새 책이야 반질반질한 표지에 화려한 양장본으로 서점의 시원한 서가에 꽂혀 손님을 기다리지만 헌책방의 책들은 왠지 주눅 들어 기죽은 모습으로 비좁은 틈에 간신히 놓여 있다.
그래서 한 보따리 골라 사들고 집에 와 보면 책장에 있는 책들을 또 사온 경우도 있다. 친구와 포도주는 오랠수록 좋듯이 책 또한 손때 묻고 조금은 빛바랜 낡은 책이 더욱 정이가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게다가 내가 즐겨 읽으면서 밑줄 긋고 메모한 책들은 그 무엇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애착이 가고 내 분신처럼 아끼게 된다.
요즘 모두는 명품이라는 미명하에 백화점의 고가품을 자신의 표상인양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한다. 그 명품 때문에 사기도 치고 도둑질도 한다는데 그 보다는 내면의 가치를 찾아 자신을 가꾸며 함께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 각박한 세상이 좀 더 살만하지 않을까?
난 오늘도 가방에 책 몇 권을 넣어 도서관으로 향하며 행복한 내일을 꿈꾼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손주의 손을 잡고 여전히 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서...
* 대전 출생, 수필가, hl3evs@hanmir.com
네 마리 열대어의 일생
송 영 현*
아내와 함께 시내의 백화점에 들렀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와 남자가 함께 쇼핑을 할 경우 그 시간이 49분을 넘지 않도록 하란다. 대개 문제는 남자 쪽에 있기 마련인데 쇼핑 시간이 49분을 넘게 되면 남자는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신경질을 부리게 되며 급기야 사소한 일로 다툼이 일어 즐거운 쇼핑은 언감생심이 되기 때문이라는 거다. 내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30분, 40분이 지나 45분이 다 될 무렵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얼굴 표정이 바로 전만 같지 못하게 되니 아내가 금방 눈치를 챈다. 해서 따로 돌아보다 30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렇다고 딱히 살 것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서점이나 들려볼 요량으로 층을 달리하여 가던 중 “열대어를 나눠 드립니다”는 문구가 쓰여진 곳이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젊은 점원 두 명이 아주 작은 물고기를 물이 든 비닐봉지 째 나눠주고 있었는데, 거의 아이와 함께 온 어머니들이 받아 가는 모양새다. 슬쩍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아무 것도 안 사도 주나요?”
“그럼요. 드릴까요?”
“…….”
“물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갈아주시고, 밥은 하루에 한 번 조금만 주시면 돼요.”
“밥은 어떻게?”
“수족관 아무 데서나 팔아요.”
그렇게 해서 그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모두 네 마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안에서 동물을 길러본 적이 없었다. 잡종견 한 마리도 키워본 적 없었고, 조롱 속의 새 한 마리와도 친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잘 좀 키워 보시지!” 라며 눈웃음을 짓고….
막상 들고는 왔는데 풀어줄 곳이 마땅치 않다. 아무리 집안을 둘러보아도 변변한 그릇(어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이 없어 결국 꽃병을 찾아냈다. 그것은 세로길이가 가로길이보다 세 배는 길고 밑둥이 넓은 유리병이었는데 어째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그들의 임시 거주지로는 무난한 듯 보였다. 풀어놓자마자 얼마나 신이 났는지, 위아래로 종횡무진 헤엄치며 즐겁게 논다. 하기야 노는 건지, 허둥대는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갑갑한 비닐봉지 안을 벗어났으니 당장은 신날 법도 할 것이다. 내게는 한 뼘 반 정도의 높이에서 수직 강하하는 그들이 마냥 신기하게 다가오는데, 아내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가 더 신기한가 보다.
이튿날 수족관에 나가 물고기 밥을 샀다. 사실, 밥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통의 그것에는 ‘소형 열대어 색상강화 전용먹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 어느 정도 그들의 처지를 짐작케 한다.
“아마, 저기 제브라 다니오 같은데요, 사료는 1일 1회 2분이나 3분 정도 먹을 분량만 주시면 되고요, 물갈이는 1주일에 1회를 하시되 어항의 3분의 1 정도만 바꿔주세요. 수돗물은 하루 정도쯤 받아 놓으신 다음에 쓰시면 돼요.”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듯하다.
“수초는 안 사세요?”
거실의 텔레비전 옆에서 잘도 논다. 조금도 쉬지를 않는다. 밤이나 낮이나 똑 같다. 먹이라도 줄라치면 아주 더 좋아하며 난리다. 아무튼 그것은 아직 내 생각일 뿐이다.
첫 번째 사단은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일어났다. 드디어 물갈이를 해줄 때가 되었는데, 그렇게 쉽게만 생각했던 물갈이가 이거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작은 세숫대야를 밑에 받쳐놓고 그 위에 잘 씻은 컵 라면의 빈 용기를 올려놓은 다음 그들을 거기에 옮긴 후에 물갈이를 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이 워낙 길쭉해서 조금만 기울여도 본능인 냥 이것들이 바닥 쪽으로만 내려가니 좀처럼 쏟아 내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 정도의 물을 흘리고 나서야 겨우 두 마리를 옮겨 놓았다. 어항의 물은 3분의 1 정도만 갈아주라고 했으니 그만하면 됐겠다 싶어 어제부터 미리 받아 놓았던 수돗물을 붓고, 다음에는 이쪽으로 옮겨 온 두 마리를 다시 원상회복 시켜야 하는데 이게 또 원래의 자기들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하다하다 물을 다 흘려버리고 마니 밑바닥에서 퍼덕퍼덕거리는 그 두 마리가 안쓰럽고. 장시간의 실랑이 끝에 두 마리를 나머지 다른 두 마리와 합세시키고 나서야 첫 번째 물갈이가 끝났다. 물갈이 기념으로 밥도 여느 날보다 좀 넉넉히 주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새벽, 제일 먼저 그들의 동태를 살피러 그들 세상으로 다가섰는데, 이걸 어쩐다, 한 마리가 배를 위로 한 채 물 위에 떠 있는 게 아닌가! 그 충격이라니. 달랑 일주일 만에 한 마리가 그들의 세상을 버린 것이다. 비록 짧은 시간동안 이었지만 그렇게 애지중지했건만.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저 얼른 그 녀석을 그 곳에서 꺼내 줄 생각뿐이었다.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켜 그 작고 앙증맞은 몸체를 종이에 싸서 화단에다 묻어주었다. 왜 그리도 정신이 없는지, 그제야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결국, 내 편한 생각이겠지만 그들은 물 속에서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 그 와중에 제일 작고 약했던 그가 희생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고 보면 지난 일주일 동안 그들도 생존을 위해 서로 참기 어려운 신경전을 벌였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허약했던 그가 지고 만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너무 소홀하게 살핀 것은 아니었는지 마음이 여간 심란한 게 아니다. 머리가 무겁다.
그렇게 한 마리가 일생을 마쳤다.
나머지 세 녀석들은 제 친구 하나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들도 나도 빨리 잊는 게 스스로를 위해서도 상책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또 물갈이를 해 주어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일주일이 흐른 것이다. 어항 - 그들 세상이라고 불리는 저 꽃병- 과 수초에는 제법 많은 이끼와 때가 끼어 있어서 청소도 할 겸 지난 번 방법과는 달리 일단 세 마리 모두를 빈 컵라면 용기로 옮기기로 했다.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서투른 솜씨지만 살금살금 국자를 이용해 그들을 옮겨놓는데 성공했다. 마침,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자리를 떴는데, 통화를 끝내고 돌아와서야 두 번째 사단이 난 것을 알았다.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작은 수챗구멍으로 눈길이 간다. 아무래도 거기밖에 없다. 그럼 저리로 사라졌단 말인가! 생각을 추스르고, 어항과 수초를 정신없이 닦은 후에 나머지 두 마리를 그들 세상에 풀어놓은 다음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니, 지 놈이 높이뛰기 선수도 아니고, 그 컵 라면 용기를 도대체 무슨 수로 뛰어 넘었단 말인가? 지난 이주일 동안 물 속에서 높이뛰기 연습만 했나? 아,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번에도 내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닌가? 나를 보고 있던 아내가 말한다.
“또 한 마리, 그럼 그렇지!”
“아마도 자유가 그리웠던 게 분명해. 자유를 향해 제 몸을 던진 거야. 그동안 축적해 놓은 힘을 한 순간에 쏟아 낼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게 분명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탈출을 감행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밖에는 없어. 답답했던 거야. 답답했던 거야. 제 집이.”
그렇게 또 한 마리의 일생이 내 눈앞에서 지워졌다.
남은 두 마리가 이리저리 잘도 헤엄친다. 제 놈들이 가용할 공간이 훨씬 더 넓어졌겠다, 물도 깨끗해 졌고, 집 청소도 되어있으니 그랬을까. 그제서야 저들의 시간은 또 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 탈 없이 일주일이 지났다. 그것도 경험이라고 수월찮게 물갈이도 끝내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하다못해 집안의 작은 물건에도 정이 가는데, 하물며 살아있는 저것들임에랴. 내가 좀 열성이었는가 보다. 아내도 덩달아 관심을 갖는다. 그러고 보니 처음 왔을 때보다 살도 좀 찌고, 키도 좀 크고, 개운치는 않지만 ‘색상도 강화’된 것 같았다.
그렇게 삼 주 가량이 지나고, 남은 두 마리 중 하나가 구월의 그믐날, 첫 번째 그 놈처럼 배를 위로 한 채 물위로 떠올랐다.
힘이 부쳤던가 보다. 핏기도 보인다. 저 놈은 또 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까닭을 대기도 어려웠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는데, 밥도 제 때에 주고, 물도 잘 갈아주고,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준 것도 아닌데, 아, 스트레스. 그래 스트레스다. 둘이 남아서 사이좋게 잘 지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심하게 싸운 것은 아니었는지. 셋이 하나를 왕따 시키더니만, 이제 남은 둘이 진검승부를 벌여 결국 저렇게 승부가 났단 말인가?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저건 분명히 자진을 한 거야. 싸움이 싫었던 거야. 그 스트레스를 참을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저 투명한 유리벽에 머리를 찧어….
생각이 이쯤에 미치자 이제는 내가 완전히 돌아 버릴 지경이다. 묘한 기분까지 든다. 애초에 들여놓는 게 아니었는데, 공연한 짓을 했어. 괜히 나 때문에 애꿎은 녀석들만, 아, 참! 이제 한 마리만 남았다. 저 것을 예뻐해야 하는가, 미워해야 하는가! 처음 넷이 셋이 되고, 다시 둘이 되고, 이제 하나가 되었다. 그래, 네가 나와 제일 질긴 인연을 맺었는가 보다. 네 편한 대로 살거라.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잘 버티며 산다.
닷새 후, 마지막 남은 그도 앞의 두 녀석처럼 배를 위로 한 채 조용히 물 위로 떠올랐다. 무슨 보람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들이 있어 헤엄치는 소리도 들리고 그리 적요치는 않았는데 이렇게 막이 내리는구나. 결국 끝까지 남아 세상을 독차지했건만, 그 녀석은 외로웠던 거다. 지독히도 외로웠던 거다. 움직일 줄도 모르는 수초 한 덩어리가 그 녀석의 친구가 될 수는 없었던 거다.
등신 같이, 하루 만 더 있었으면 물갈이라도 하면서 고민을 들어봤을 텐데. 장자와 혜시가 나누었다는 대화가 떠오른다. 내가 저 물고기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데 지금 저들이 즐기는지 다투는지 어찌 알거나!
슬프다.
비록 한 달 남짓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그냥 허송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그들을 추억하며 글을 쓰고 있으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물끄러미 남은 그들의 어항은 지금 때늦은 국화 몇 송이를 보듬고 있어 완벽한 꽃병으로 행세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들의 세상이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2月
2월은 일 년 열두 달 중 외로이 떠있는 섬에 유배된 서러운 달이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하는 달도 2월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다가와 소리 없이 지나가는 달도 2월이다.
2월은 날이 흐리면 비가 올 수도 눈이 올 수도 있는 달이다. 때로는 파아란 하늘이 비단결같이 고와 구름이 그려낸 가지런한 무늬를 수놓아 숨 좋은 이불을 만들어 버리기도 싶고, 또 때로는 연방 터져 나오는 꽃망울이 신기해 시오리길을 줄달음쳐 한 걸음 속에 가두어 버리기도 싶은 달이 2월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1월의 다음 달로 여느 달과는 다르게 30일에도 훨씬 못 미치는 28일밖에 없는 달이고 겨우 4년에 한 번씩 하루를 덤으로 받아 제몫을 채울 수 있는 작은 힘밖에 가지지 못한 달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봄의 문턱에 서서 혼자만의 꿈을 꿀 수 있는 달이라는 것뿐이다.
2월은 1월과 3월의 중간에 서서 아직 한 달밖에 가지 않았다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는 달이고, 아직도 열 달이나 남았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달이다. 아무리 삭이고 삭여도 아직도 더 많은 꿈이 남아 조금도 아프지 않은 위안의 달이다.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기다려 줄 것 같은 마음속의 연인과도 같은 달이 2월이다. 작년의 2월과 내년의 2월이 올 해의 2월과 똑 같을 것이라는 희망이 2월을 2월처럼 만드는 것이다.
치유하기 어려운 오래된 편두통이거나 남몰래 만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픈 또 하나의 연인 같은 2월은 그래서 서러운 달이다.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숙제를 떠안고 차가운 밤바람에 스치는 별과의 대화를 진지하게 나눌 수 있는 2월은 포근한 봄바람이나 무디디 무딘 여름바람이나 매서운 겨울바람과는 다른 그만의 내음과 감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2월의 바람은 옴니암니에 밝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해이던가, 그토록 사무치게 봄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유난히도 길었던 겨울이 너무 싫어서 매일 매일을 먼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들릴 듯 말 듯한 봄소식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보내고만 있었다. 바람이 분다고 봄이 올 리 만무하건만 왜 그다지도 바람의 온기에 가슴 설레며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지를 몰랐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그렇게 봄이 왔다. 기다리던 봄이 왔다. 2월이라는 긴 터널을 빠져 나와 맞이하는 봄이라니! 그렇게 긴 2월이었지만, 2월은 어찌 보면 희망의 동구밖에 기대어 서있는 한 그루의 고목일는지도 모른다.
‘바람과 파도가 울어 그 가락을 짚는 빗줄기 너머로 세월에 기대인’ 고목 한 그루의 전설을 아련한 기억 저편에 올려놓고는 아무 말 없이 뒤 돌아서서 새로운 길을 나서야 하는 2월의 슬픔은 그래서 더욱 빛나는 것이다.
바짝 곁에 다가와 갈아입은 옷을 자랑하던 겨울 산은 이제 이름이 바뀌었다고 야단이다. 칙칙하고 음산했던 옷을 벗어버리고 연초록 고운 옷감에 땅 속 깊숙이 숨겨 놓았던 진분홍 색실을 꺼내다가 오래오래 잘 익힌 솜씨로 꽃무늬를 넣어 지은 옷이니 그럴 만도 했다. 누가 보아도 저절로 마음이 화사해질 법하다. 모질게 불어 닥쳤던 눈보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몇 자 적는다.
바람과 파도가 울어
그 가락을 짚는 빗줄기 너머로
세월에 기대인 세연정
그가 바라보았던 땅 끝을
오늘 내가 바라본다.
한소운, 「유배지에서의 편지」 부분
그가 바라보았던 땅 끝을 물끄러미 보았다. 매화나무 가지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난 다발다발 흰 꽃들이며, 세상을 온통 하얀 물감으로 뒤덮어 만든 궁륭 사이로 다정한 연인들이 흘리는 수줍은 웃음소리가 살포시 다가 올 그 봄의 정경일 터인데 왠지 나는 2월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 결국 그 시간이란 또 다른 시간에 의하여 잊혀지는 기억의 편린이 아니던가!
삶의 무늬에 새겨 넣을 또 하나의 2월은 오래된 그림처럼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그려질 것이다.
다 식은 차를 앞에 두고 있다. 장식 없는 책상 위에 놓여 주인의 입술만 응시하는 모양새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다. 저 먼 눈길의 끝에서 이름 모를 나무의 우듬지 위로 찢어지다 만 구름 한 점이 저녁놀에 붉게 물들며 숨을 고르고 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몇 자 적는다.
* 대전 출생, 1995년 <월간에세이>로 작품 활동 시작. 2001년 <정신과 표현> 신인상, 2004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당신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임 정 란*
“당신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가끔씩 사람들에게 뜬금없이 질문을 한다. 인생의 목표를 정해놓은 삶과 그렇지 않는 삶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현재 자신이 인생의 목표에 충실한 삶을 사는지,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지 돌이켜 보았으면 하는 의미에서이다.
이 질문을 많은 사람들에게 던져보면 두말할 것 없이 ‘행복’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추상적인 질문에 추상적인 대답이 당연한 것일까. 그래서 좀 더 구체적인 목표를 얘기해 달라고 조르면 쓸데없이 귀찮게 한다고 하면서도 진지한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대답하는 말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 부자가 되어 마음껏 인생을 즐기는 것, 세계일주를 하는 것, 원하는 꿈을 이루는 것 등등 각각 나름의 인생의 목표를 이야기 한다.
그러면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라고 물어보면 다들 말 수가 줄어들면서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이 얼마나 모순된 삶인가?
혼기가 꽉 찬 사람이 얼른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이성을 만나는데 적극적이지 않는 것,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하면서 저축은 하지 않고 과소비를 일삼는 것,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은 하지 않고 현실을 탓하는 것 등은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나 역시도 이런 삶을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예전의 나는 달랐었다. 무엇을 하든 열정이 있었고, 열심히 했으며,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또 꿈을 이루기 위해 남들보다 일찍 일어났고 늦게 잠들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도 하였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 중 하나가 ‘젊음’때문이기도 했지만,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목표를 한번 세우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는 유형이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은 山과 같다”라는 말을 하였다. 험난한 산을 한번쯤 등반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절실히 느낄 것이다.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첫 출발은 순탄해 보이지만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갈수록 길도 좁아지고 울퉁불퉁 곳곳에는 돌들이 박혀 있어 발걸음을 뗄 때마다 조심스러워 지고, 어느 골짜기는 낭떠러지가 바로 앞에 있어 자칫 실수를 하다가는 큰일을 당할 정도로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 때도 있다. 또한 경사가 심한 곳은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이 차오른다. 이렇게 힘들게 발걸음을 하여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정상에서의 기쁨도 잠시, 또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인생에도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산과 다른 점은 산은 정해진 길을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지만 인생의 길은 자신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물주가 인간에게 선사한 축복 중의 축복이다.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대상은 사람만이 유일하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얼마나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는 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 축복은 인생의 목표를 정해놓은 사람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목표를 정해놓고 먼저 경주를 하는 사람과 아무런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은 그 출발선이 어른과 아이의 발걸음과 같다. 어른은 목적지를 정해놓으면 한 걸음에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지만 아이는 걸음걸이가 서툴러 목표한 곳에 도착하기도 힘들뿐더러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많은 유혹을 뿌리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자. 나는 현재 어른처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아이처럼 살고 있는가를.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고 한다면 구체적인 목표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를 세우라고 하면 굉장히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인생의 목표를 세워서는 산 정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맛볼 수가 없다. 구체적인 목표는 기간을 정해놓고 세워야 한다. 하루의 목표, 일주일에 목표, 일년 후의 목표, 10년 후의 목표, 20년 후의 목표 등 장․단기 목표를 세워 구체적으로 인생의 길을 만들어 간다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삶이 무기력해지고 활기가 없어질 때, 다시 인생의 목표를 점검해 보면 어떨까?
* 대전 출생, 충남대 경제학 석사, 수필가, Jungran@hanba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