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규(호적명, 정기대, 1906~1949, 44세 졸) 기산할배(택호)에 대하여(호칭은 영자 항렬 나를 기준함)~
정기규는 우리 조부되시는 정임규(1880~1951, 72세 졸)의 사촌 동생이다.
정임규의 숙부되시는 정연류가 딸 넷(김해김씨 1명, 은진송씨 3명)으로 아들이 없어 정연일의 4형제(의규, 상규, 정규, 임규) 중에서 막내되시는 정임규 조부가 숙부되시는 정연류에 양자로 들어갔다.
숙부 정연류(1848~1909)가 62세로 돌아가시기 이전, 김해김씨 딸1명, 은진송씨 딸3명일 때, 양자로 입적되었다.
정임규가 30세 때 숙부 정연류가 돌아가셨으니, 양자 입적 시기는 20세 전후로 추정된다.
옛날의 양자는 입적되면 숙부라도 부모와 같이 모셨다. 그런데, 딸 셋에 아들이 없던 은진송씨로 부터 양증조부가 59세 때 늦둥이 아들을 보았는데 그가 정기규(기산할배)다. 정기규가 4살이 들면서(1909)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정기규는 정임규 조부보다 26살이 적은 사촌동생이다. 조카되시는 정현락(1912~1995, 84세 졸) 아버지보다 6살 위다.
정기규의 자녀되는 정현팔을 비롯한 6남2녀는 유은 아버지와 혈통상으로는 6촌(재종)이고 양자관계로는 4촌(종형, 종제)이 된다.
옛날에는 양자를 족보나 호적에 바로 입적하면 원위치 시키지 못하는 시대였고, 게다가 정기대 할배는 정임규조부보다 26세 연하지만 26세 위의 농파 정임규형님(1951 졸) 보다 2년 먼저(1949 졸) 44세로 일찍 돌아가셨다.
정기규의 배위는 순흥안씨 안동희로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기동에서 태어나 정씨집안에 시집 오셨다. 기동과 대산면을 한자 씩 따서 택호가 기산댁(띠기)이 되었다.
자녀는 6남2녀를 두었는데 정기규가 44세로 조졸(일찍 돌아가심)하여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열거하면, 호적부 기준으로(옛호적부 출생신고 1~2년 지연으로 실제와는 오차가 있음)는 정현팔(1931년 생), 현률(1932년 생), 현석(1934), 현섭(1938), 순덕(1940), 현관(1942), 현조(1946), 순점(1948)이다.
정현팔은 6.25전쟁 통에 가는골에서 정무영의 숙부 정현렬과 홍순태 밭 언덕 대추를 따다 아랫덕재에서 가는골로 넘어오는 고갯길로 작전중인 미군의 사격(북한 인인군 정탐병으로 오인)으로 2분이 저격 당하여 현팔은 즉사하였고, 현렬은 마을까지 기어왔으나 중상으로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현렬은 지난해 설 아래에 결혼한 신혼으로 자식이 없어 배우자는 그 후 개가하였다 한다.(당시 나이가 어렸던 삼영, 갑영형님의 6.25전쟁 피난사 증언, 옛날에는 TV 라디오가 없던 시절로 겨울의 긴밤에는 6.25전쟁 피난사, 전방 군대생활 체험담이 주 소재였다. 흥미로 열심히 물으면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정현섭은 인천에서 선원을 하다 사망하였다. 정현조도 조졸하였다. 후손으로는 정현률(우암댁)의 연안김씨 우암아지매가 생존해 있고, 자녀로 정성자 정두영 남매가 있고, 정현식의 딸로서 군북면 장지리 정순이가 있고, 정현관의 자녀는 정성효, 정수홍(조졸), 정낙곤과 청송심씨 화천아지매가 있다.
상기에서 언급했듯이 정기규가 44세로 일찍 떠나다 보니 6남2녀를 두었지만 42세로 과부가 된 순흥안씨 안동희로서는 6남2녀의 자식들에 대한 뒷바라지가 안되어 집안이 그렇게 쇠락하였다.
정현팔에서 부터 막내 정순점에 이르기 까지 연령대가 우리 형제 8남매와 유사하다.
내가 이번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우리 속담, '부모의 그늘이 천리를 뻗친다' 말을 새겨 볼 일이다.
젊은 과부 기산할머니는 자식들을 공구기(뒷바리지) 위하여 생선장사를 하기도 했다. 대산면 기동의 순흥안씨의 장녀로 태어나 미혼전에 아래 여러 동생들을 엎어 키웠다 한다. 그 중 한 남동생이 일본 재일사업가로 대성 1980년대 초에 마산의 성안백화점을 개점하여 명성을 날렸다.
현재는 신세계백화점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안동희 할매가 돌아가시고 없는데도 생질들이 빈한하다고 큰누님을 생각하며 유현리 선돌뺑이에 상토(옥답) 6마지기(1,200평)을 사 주기도 했다.
우암띠기와 화천띠기가 3마지기(600평) 씩을 나눠 가졌는데, 이번 하천 개량 확장 공사에 편입된 아랫쪽의 200여평을 보상받아 화천띠기가 수령했다고 한다.
정현관 외삼촌의 그늘이 정현관의 아들 정성효에 까지 뻗치고 있었다. 새누리당 당대표를 지내고 창원시장이 된 안상수도 대산면 기동 출신이라 촌수를 따져보면 가까운 친척으로 보이는데 후손들이 툭 뛰어나지 못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현률, 현식, 순덕, 현관, 순점이의 결혼에는 양4촌(실제는 6촌) 형님되시는 유은아버지가 집안의 어른으로 공덕이 엄청 컸음을 우리는 누누이 지켜보아 잘 안다.
옛날에 장가 시집을 갈 때는 유은아버지가 상각으로 가는데 정기규할배가 없다보니, 양사촌 형님 되시는 유은 아버지가 꼭 상각(혼주)을 대행했다.
유은 아버지는 유전 작은집 정현중(호적명, 정정식,1914~1967, 54세 졸)의 큰누님인 정영남과 점영형님을 빼곤(당시 숙부 생존), 아래로 진영, 덕영, 상영, 수연도 성혼시에는 상각으로 뒷바라지 하신 어른이다.
6.25전쟁 시에는 미군의 낙동강 방어선 소개작전의 일환으로 집이 전소되어 피난 후 새로 지은 집이 현 '농파정사' 촌집(1950)이다. 관동형수집(1955), 계림형수집(1962), 부산 수정동의 산비탈의 옛집(1953, 24세 장남 정영조 자립 건축 증언 확인으로 제외함) 경충재(1976) 등, 목재가 귀하던 시절 무려 4곳의 집을 지으셨다.
현재의 콘크리트 철골 슬라브 가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공비(건축비)와 노력, 화폐가치로 환산시 요즘의 콘크리트 슬라브 양옥 한채와 맞 먹는다 할 수 있다.
후손들은 유은 아버지의 집안에 기여한 정자나무 그늘 공덕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6.25전쟁 후 농파정사 촌집은 목재가 귀하여 의령 자굴산에서 목재를 벌목 남강 돈대산 나루터 배를 경유 등짐으로 평촌까지 날났다 한다.
30리(12km)가 넘는 거리다. 그것도 지게로 운반했다니, 요즈음 생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관동형수 촌집은 달성서씨 서두이(정순이) 고모부집과 집터를 사서 새목재(골짝산의 새카래 투입)로 보충 개축하였다.
계림형수 촌집은 봉산마을 뒤 대밭에서 큰소나무를 베어 윗덕재 뒤로 해서 가는골로 운반했다.
당시 집을 지은 목수는 부천아재 정현하(정영철 부)다. 정현하는 아버지 정형규에 이어 2대에 걸친 목수 집안이다.
나는 당시 중학 2년생으로 당시 벌목장에 계속 따라다니며 연장을 집어주거나 중참시 막걸리 주전자를 나르는 잔심부름 등을 해서 잘 안다.
당시 현률이 아재가 힘이 제일 좋아 기둥은 그 아재만이 질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옛 이야기를 상고할 수 있는 분도 서서히 떠나고 있어, 돌아가신 유은 아버지와 영조, 삼영, 갑영, 창영 형님으로 부터 듣거나 목격한 바를 두서없이 민초유사 기록으로 남긴다.
6.25전쟁 이후 옛날 분들이 살아온 모습을 돌이켜 보니, 고단한 환경을 극복한 삶의 현장이 한편의 영화 이상으로 펼쳐졌다.
※상기의 기록에서 연대표 등 오류와 미비점은 추가로 보완할 것임.
※본문 사진은 정기대 후손 관련 사진은 9번째로 등재한 정현관아재 사진 1장 뿐이라서 나머지는 참고로 우리쪽의 다른 사진을 등재하였다.
사진 1, 2는 어머니 조복희, 외숙모 안순남(광주안씨, 현, 93세 생존, 남편 조종규), 큰이모 조경희(작고, 남편 박기오), 내가 30여년 모셨던 이모 조은박(큰형수와 갑장, 남편 이명호), 작은 이모 조순희(83세 생존, 남편 공임술), 범철 모 황복련의 초청으로 진해관광을 한 사진이다.
사진 3, 4, 5, 6, 7, 8, 6장은 부모님의 결혼 60주년 회혼례(1986년) 사진이다. 당시 함안군수가 축하차 참석하여 정구룡의 녹권을 펼쳐보며 담소, 통영 고급 자개상을 축하 물품으로 수여했다. 큰형님과 해동형수가 보인다.
사진 9는 부모님, 큰형님, 계림형수, 현관아재, 태영, 병권이가 나온다.
사진 10은 '농파정사' 현판이다. 농파는 조부 정임규(호적명, 정도익)의 아호다. 유은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돈들여서 현판을 제작하여 사랑채에 걸었다. 현재 것은 아래쪽 날개 2개가 잘려져서 원형 그대로가 아니다.
'정사'란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을 말한다. 정신을 수양하는 곳을 뜻하기도 한다. 유은 아버지의 효심이 나타나는 귀한 현판이다.
첫댓글 상기 본문은 (양)종조부 정기대의 후손이 쇠락 연약하여 기족사를 기록할 자가 없어, 내가 나서서 민초나라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정기대의 배위 안동희는 순흥안씨로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기동) 709번지에서 부 안승호와 모 박송동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1931년 23세로 정기대와 결혼 6남2녀를 두었다. 후손은 정현률(호적상, 정현석)과 정현석ᆞ정순덕(임용수)ᆞ정현관ᆞ정순점(고일랑)에 자손이 있다. 안동희의 남동생은 1980년대에 마산의 성안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을 설립한 재일동포 사업가다.
정기규 (양)종조부는 6남2녀를 두었지만 44세로 일찍 작고하여 슬하의 자녀들도 우리형제처럼 교육을 받지 못했다. 현재 여형제 정순덕과 정순점이가 생존해 있고, 6형제 중에서 겨우 하나 남았던 정현관아재(창영형님과 동갑) 사진이 내 앨범 25여권 속에 한장이 발견되어 정기규 양종조부의 혈육이기에 등재한다. 우리 촌집 대청 마루 가운데에 앉아 있다. 반가운 얼굴이다. 귀한 사진이다.
창원시장 안상수의 고향이 대산면 기동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2014년10월2일 노인의날(?)로 기억된다. 창원성산노인복지회관을 12시30분경 회관 계단을 오르니 어느 귀부인이 주변분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하는 것을 잠시 서서 기다렸다가 오르려니, 촬영으로 막아서서 미안했는지, 내게 공손히 기품있는 인사를 건네기에 악수를 하면서 누구신가 의아(?)해 하니, 옆의 수행원들이 '안상수 시장님 사모님입니다'라고 소개하더군. 그 멘트에 반가워서 '아~ 그렇습니까?' 하면서 즉석 질문을 던졌다. '함안 대산면이 고향이시라 들었는데 어디십니까?' 대답으로 '기동'을 알게되었다.
'시장님의 부친 고향이 기동으로 마산에서 성장했다'는 부연 설명도 들었다. 내가 주변 분 수행원들을 웃기려고 웃으면서 또 한마디, '인물로 보아 초년에 연애 결혼으로 만났겠습니다?!' 인물 과찬으로 간파했는지 겸양으로, '중매로 만났습니다'라고 대답, 지켜보던 주변분들이 모두 웃음으로~!! 그래서 내가 덕담으로 마무리, '중앙 정계의 중량감 있는 분이 낙향하여 시장을 맡으셔서 창원의 큰발전이 기대됩니다!' 로 함안출신에 응원을 보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연거퍼 내게 목례, 겸양이 몸에 배여 있었다. 마음속으로 '아~ 유명 정치인의 내조는 좀 다르구나!!' 그날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1966년도(49년 전) 사진을 등재한다. 오래된 사진이다. 삼영형님과 임용수 양고모부(정순덕의 남편)의 제의로 군북의 하나 뿐인 사진관에서 촬영했다. 정기규 양종조부 후손 관련 3명이 들어간 사진이다.
앞줄 좌로 부터 정순영(영철 누나)ᆞ정귀연(병우 누나)ᆞ정병술(무영 누나)ᆞ홍순래(홍순태 여동생),
뒷줄 좌로 부터, 임용수(정순덕 아지매 남편)ᆞ정무영ᆞ정순점 아지매(당시 미혼)ᆞ정봉영(고 2년)ᆞ정현관아재(당시 미혼)ᆞ정삼영형님이다.
스마트 카메라가 자동으로 돌면서 어떨 때는 세로로 찍히고, 어떨 때는 가로로 촬영된다. 가로 사진을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