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우주인 고산(34·사진)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미국 싱귤래러티 대학(Singularity University, 특이점대학)을 다녀왔다. 싱귤래러티대는 미국 발명가 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이 지난해 세운 학교다. 미 항공우주국(NASA)과 구글이 후원하는 이 학교는 ‘다음 세대 인류가 맞을 중대한 도전에 대비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로 우주와 첨단과학·미래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중앙SUNDAY 2009년 2월 8일자 5면> 고산씨는 지난달 27일까지 10주간 싱귤래러티대의 경험을 중앙SUNDAY에 전해왔다. 그는 “싱귤래러티대에서 첨단 과학의 미래 비전을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 분야에서 기여하고 싶었다”며 소감을 보내왔다.
세계 35개국에서 온 싱귤래러티대 학생 80명 중 한국인은 두 명. 고산(왼쪽)씨와 유엔 우주사무국 출신 유영석씨가 그들이다. 사진 배경은 미 항공우주국(NASA) 에임스 연구센터의 대표적 상징물인 해군 P-3 초계기.
내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한 건 지난 6월 18일이었다. 101번 하이웨이를 따라 남동쪽으로 30분을 달리자 길이 300m가 넘는 초대형 사다리꼴 모양 건물이 나왔다. 1930년대 미 해군 비행선 격납고로 쓰인 ‘행어 원(Hangar One)’이다. 자료에서 본 건물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설레기 시작했다. 행어원은 싱귤래러티대가 있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에임스(Ames) 연구센터 일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10주간의 수업 첫날인 6월 21일(현지시간) 오전 9시. 행어원 바로 앞의 단층짜리 강의동 건물에 들어섰다. 세계 35개국에서 온 학생, 교수진·기업인 등 300여 명이 강당을 빼곡히 메웠다. 설립자인 커즈와일의 환영사에 이어, 올해 37세의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가 나와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이런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축사를 했다. 사회자가 교수진을 소개했다. 커즈와일을 필두로 국제우주대학(ISU)의 설립자 겸 싱귤래러티대 공동 설립자 피터 디아만디스, ‘인터넷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빈트 서프, 2001년까지 우주왕복선을 세 차례 탑승했던 퇴역우주인 댄 배리 박사, 200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조지 스뭇 UC버클리 교수, 선마이크로시스템스사의 창업자 존 게이지….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분야별 최고 전문가들이었다.
고산씨가 연구실에서 에너지팀원들과 열기관 가운데 가장 효율이 높다는 스털링 엔진을 만들어 보고 있다.
학생 소개도 이어졌다. ‘MIT 박사과정 학생이라는 올해 19세의 미국인 데이비드 댈림플, 20대 초반인데도 이미 여러 번 창업에 성공해 백만장자 반열에 오른 영국인 자인 제퍼…’ 학생 소개가 나올 때마다 강당이 술렁거렸다. 나도 ‘한국의 우주인(Korean astronaut)’으로 소개됐다. 학생들의 경력이 교수진 못지않았다. 나에게는 그들이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올해는 1600명의 지원자 중 80명의 학생이 선발됐다. 세계 35개국에서 온 이들은 첨단 과학 분야의 박사과정 학생에서부터 창업가, 사회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제3세계에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NGO) 활동가, 변호사, 철학자까지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 중 한국인은 나와 런던대에서 금융경제학 석사를 마친 뒤 오스트리아 빈의 유엔 우주사무국에서 근무했던 유영석(29)씨 두 명뿐이었다.
올해로 설립 2년째인 싱귤래러티대는 학위를 주는 과정은 아니다. 하지만 수업 일정은 보통 대학원 과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빡빡했다. 학생 전원이 10주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며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의와 토론수업을 했다. 이후에도 수시로 특강이 있고, 팀별로 밤늦게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0주 과정의 첫 4주간은 첨단 학문과 만나는 시간이다. 나노공학과 컴퓨터공학·에너지·우주·인공지능·로봇·바이오테크·미래학·환경학·물리학·에너지 등에 대한 강의가 매 시간마다 쏟아졌다. 이외에도 법·정책·윤리·금융·기업가정신·경제학 강의도 이어졌다. 각 분야별 첨단 과학을 경험하고 미래학을 통해 첨단 기술의 미래를 그려본 뒤, 이런 것들이 개별 기술에 함몰되지 않고 융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수업은 첨단 과학의 원리와 최신 트렌드를 이해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전문지식이 더 필요할 때는 그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학문 간 ‘통섭(統攝)’이나 ‘융합(融合)’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싱귤래러티대는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각각의 분야의 연구결과를 이해하는 융합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5주차부터 3주 동안은 이런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실제 창업을 한 실리콘 밸리의 회사들을 방문했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은 태양광 발전시스템을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솔라시티라는 기업이었다. 개인 주택에 태양광 발전시스템을 임대·설치해 주는 회사인데, 이미 적지 않은 수익을 내고 있었다. 이곳에선 태양광 발전이 미래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였다. 실리콘 밸리 방문은 그동안 개념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던 기술이 실제로 구현되는 현장을 경험하고 그들과 토론하는 기회였다.
학생들은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을 둘러보는 3주 동안 팀을 구성해 팀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표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을 활용해 향후 10년간 10억 명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나는 저개발 국가의 에너지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에너지팀’에 참여했다. 우리 팀은 아르헨티나 국적의 암호 프로그램 전문가 에밀리아노, 이탈리아의 환경운동가 에릭, 두바이의 건축 에너지 전문가 알라딘 등 12명으로 구성됐다. 전기가 거의 공급되지 않는 저개발 국가의 각 가정에 최소한 1㎾의 전력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 목표였다.
10주 과정의 마지막 3주간 집중적인 작업을 통해 완성된 프로젝트는 마지막 날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됐다. 이 자리에는 학생과 교수진 등 학교 관계자뿐 아니라 유명 기업의 CEO와 벤처캐피털도 초청됐다. 사업성이 있는 팀 프로젝트는 자본가가 직접 투자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아직 그 결과가 나오기 이르지만, 지난해에는 40명의 학생이 프로그램에 참가해 이 중 3개의 새로운 회사가 실제로 태어났다.
10주 동안 준비해 새로운 회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 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건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눈을 반짝이며 대화를 나누는 실리콘 밸리의 젊은이들과 우리나라 청년들의 모습이 대비됐다